'메뉴판'에 해당되는 글 204건
- 2008.09.09 La Strada 5
- 2008.09.04 주대환 아저씨, 그런데서 주무시면 얼어 죽어요 12
- 2008.09.03 77막장 3
- 2008.08.31 <엘리트 스쿼드(2007)> 6
- 2008.08.27 근대문학, 추리소설, 대체역사 4
- 2008.08.22 치유로서의 인터뷰 [시사IN 49호] 1
- 2008.08.20 [펌] 가디언의 지젝 인터뷰 5
- 2008.08.17 요즘 듣고 싶은 노래 9
- 2008.08.14 <수박(2003)> 4
- 2008.08.09 멍청하거나 뻔뻔하거나 11
- 2008.08.08 다크 나이트 4
- 2008.08.07 일본어 공부 2
- 2008.08.07 움베르토 에코 1
- 2008.07.31 교육감 선거 13
- 2008.07.29 군산여행 13
- 2008.07.24 끔찍하다, 그 솔직함 [시사IN 45호] 5
- 2008.07.23 새롭기 위한 고통 3
- 2008.07.18 보나파르트
- 2008.07.11 왜 일케 웃기냐 2
- 2008.07.10 자전거 값이 진짜 문제야? 10
- 2008.07.08 [메모] 시장국가, 민족국가
- 2008.07.07 3654일 등등 14
- 2008.07.07 <촌놈들의 제국주의>, 이중국가, 내부식민지론
- 2008.07.04 엑스 머시나 -_- 2
- 2008.07.02 사건사고 7
- 2008.06.30 살다보니 이런 날이 3
- 2008.06.24 국가의 귀환 [시사IN 41호] 7
- 2008.06.22 내가 하면 현실주의 2
- 2008.06.19 [펌] 지금은 계속 운동이다 1
- 2008.06.15 세 줄 요약 3
▲메타세콰이어 가로숫길.
지인들과 1박2일의 자전거여행을 다녀왔다. 고속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광주로, 광주에서부터는 자전거를 타고 담양으로 갔다. 소쇄원 부근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은 내내 자전거를 타고 담양투어를 했다. 이번 여행은 자전거여행에 방점이 있었지만 본격 남도 한정식을 맛본다는 야심찬 '맛집기행'이기도 했다. 허나, 결국은 동행한 추천인의 굴욕으로 마무리.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으나, 한 마디로 '돈지랄'이었다. 가슴 미어지는 이야기라 자세한 코멘트는 생략.
속도감을 한껏 즐기기엔 여의치않은 상황이었지만, 자전거를 즐기기엔 충분했다. 모든 생물을 절멸시키며 점과 점을 직선으로 잇는 고속국도 대신에, 우리가 택한 길은 한적하다못해 적막한 지방도로였다. 아마 20년 전엔 이 길이 옆 동네 김씨가 야반도주했던 신작로였으리라. 그러나 이젠 더이상 자동차를 위한 길이 아니다. 야만적 근대화조차 아련한 추억으로 만드는 세월의 힘, 그리고 자본의 속도에 문득 소스라친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피어있고, 아직은 파릇한 논들이 시원하게 눈을 씻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람, 그 시원한 바람.
자전거를 타본 사람들은 알 게다. 고통의 오르막 뒤엔 반드시 쾌락의 내리막이 있다는 것을. 세찬 바람의 화살에 세포 하나하나를 관통당하는 그 느낌은, 비록 단 한번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육체에 각인되고 만다. 자전거여행은, 그것을 육체 뿐만 아니라 영혼 깊숙이 새겨넣는다. 땀투성이에, 때로 짜증이 솟구치지만, 사람들이 자전거여행을 끊임없이 떠나는 이유는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이번 여행에서 딱 하나 아쉬운 점은 카메라를 가져가지 못했다는 것. 위의 사진도 폰카로 찍은 거라 참 거시기하다. 다음 번에는 카메라 하나만큼은 꼭 챙겨야겠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9/01/2008090101462.html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0842
<조선일보> 류근일이 글 하나를 통째로 할애해 어떤 정치인을 칭찬하는 건 보기 드문 일이다. 그 대상이 진보정당의 전 정책위 의장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류근일이 진짜 겨냥한 건 친북좌파들이며 주대환은 단지 같은 레퍼토리의 반복을 위한 하나의 새로운 소재였을 뿐이라 할지라도 이 사건의 예외적 성격은 달라지지 않는다.
뉴라이트 혹은 전향 주사파들의 매체인 <시대정신>에 글을 실은 것이 치열한 논쟁을 끌어내기 위한 전략적 고려인지, 아니면 정말로 (주대환이 말하는) "뉴레프트"와 건강한 경쟁을 해야할 상대로 뉴라이트를 인정해서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사실은, 그 어느 쪽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겠다.
생산적 논쟁을 끌어내기엔 주대환의 주장은 너무 뭉툭하다. 늘 하던, 사민주의의 당위성에 대한 지겨운 반복이다. 뉴라이트를 경쟁 파트너로 인정해서라면, 그가 주장하는 사민주의가 반북-반김정일이라는 가치에서 뉴라이트와 일맥상통한다는 점을 주장할 게 아니라 국가의 발전전략에 있어 '뉴레프트'는 '뉴라이트'와 어떻게 다른지에 더 집중했어야 했다. 자본주의 국가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꾀한다는 점에서 사민주의와 뉴라이트는 대전제에서 일치하고 있으니 남은 건 누구의 전략이 더 설득력이 있는가일 뿐이다. 더구나 '세계의 화약고'인 동북아의 휴전국이 상대국을 절대악으로 규정하고서 사민주의를 한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다. 북을 그렇게 규정하고 '사고정지'해버리는 교조적 사회주의자들에 맞서야하는 게 바로 이 땅의 사민주의자의 운명이 아닌가.
그런데 주대환의 글에서 그런 고민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그저 NL과 PD의 시대착오성을 고발하는데 숨이 가쁘다. 주대환의 사민주의에 대한 장광설을 류근일같은 이는 어떻게 파악하는가.
"대한민국은 독립운동 시절부터의 광범한 합의라 할 수 있는 토지개혁을 실천하여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평등한 사회경제적 토대 위에 건국된 위대한 나라이며, 결코 세계사에서 뒤떨어졌다고 볼 수 없이 보통선거권을 실시한 현대 민주주의 국가였다."
류근일에게는 바로 이 부분을 제외하고 주대환의 글은 백지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나같은 사람은 물론 촛불집회 일정 고지했다고 사람을 잡아넣는 국가의 정통성 따위 인정하지 않는다. 당연히 북조선에도 정통성 따윈 없다. 반식민투쟁의 정통성? 웃기지 마시라. 식민지 시절에도 지금 북조선처럼 사람이 굶어죽진 않았다. 만약 어떤 사회에 정통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발생론적인 게 아니라, 그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로 판가름 나는 것일게다.
주대환이 진짜 사민주의자라면 국가의 정통성을 토지개혁이나 보통선거권과 같은 정태적-학적 개념에서 찾아선 안된다. 이건 뉴라이트의 프레임에 말려드는 거다. 사민주의는 국가의 정통성을 출발점이 아니라 목표의 하나로 삼아야 한다. 그렇게 '논증하기보다 실천하는' 것이 바로 서구에서 만들어낸 사민주의의 장점이었고, 아직까지 생명력을 갖고 있는 이유다.
한 마디로 잘못된 장소에 잘못된 글이 배달됐다. 이럴 때 보통 희극이 발생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목이 메인다. 주대환 아저씨가 여기저기서 왕따당하고 힘든 거 나도 조금은 알고 있다. 하지만 아저씨, 그렇다고 그런데서 주무시면 얼어죽어요.
*주대환이 변절 테크트리 타기 시작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켜보면 알 터, 미리부터 멍석 까는 건 온당치 않다. 욕한다고 변절할 인간이 변절 안하는 것은 아닌데, 욕 너무 먹으면 변절 안할 인간도 변절할 수 있다.
http://media.daum.net/entertain/broadcast/view.html?cateid=1032&newsid=20080903110316923&p=SpoChosun&RIGHT_ENTER=R1
"미국 하버드대 출신 국회의원인 한나라당 홍정욱 의원이 출연한 아침 방송에 네티즌들의 큰 관심이 이어졌다. 3일 오전 KBS의 한 오전 방송에 출연한 홍정욱 의원은 왕년의 유명 배우 남궁원의 아들 답게 재치있는 말솜씨로 화제가 됐다.
MC 남희석이 "얼마전 모 신문 보도에 9개국 여성과 데이트했다는 말이 있던데 사실이냐?"라고 묻자 홍 의원은 "즐기기 위해 데이트를 한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대표선수라는 생각으로 한국 남성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만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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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쳐서 벌금형도 받았던데, 막장행각 77개 다 보여주려면 아직 멀은 거지?
어제 밤에 KBS에서 <엘리트 스쿼드>를 방영했다. 브라질 영화이고, 베를린 영화제에서 금곰상을 탔다. 이택광 선생님과 만난 자리에서 내용을 조금 주워들었는데, 공중파에서 방영해줄줄은 몰랐다. 아무튼 땡큐지 머.
영화는 BOPE 라 불리는, 브라질 경찰특공대의 모습을 그린다. 영화에 나오는 브라질 경찰은 두 부류다. 문드러질 정도로 썩은 부패경찰, 그리고 부패하진 않았지만 합법적인 살인기계들의 조직인 엘리트 스쿼드. 빈민가 마약갱단의 폭력을 그보다 훨씬 더한 폭력으로 응징하는 공권력이다. 경찰을 전혀 무서워하진 않는 갱단도, 특공대를 건드리면 조직이 몰살당한다며 두려움에 떨 정도다.
경찰특공대장은 아이가 생기자, 신입 특공대원 중에서 자신의 후임을 고르는 일에 몰두하고, 그의 나레이션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그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강하지만, 동시에 현장이라는 생지옥에서 버티기 위해 약물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러나 그가 발을 빼면, 그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와야 한다. 신입특공대원이자 친구 사이인 네토와 마티어스는 혹독한 훈련을 거치며 대장의 신임을 얻어간다. 마티어스는 사실 경찰보다 변호사가 되고 싶었던 착실한 청년이다. 특공대장을 맡기엔 지나치게 유순했다. 그러나 갱단에 의해 네토가 살해당하자, 광기에 사로잡히고 특공대장은 그의 분노를 더욱 부추기며 믿음직한 후임으로 성장시켜간다.
감독은 단검처럼 카메라를 짓쳐 들어가고, 유혈낭자한 총격전은 차리리 쾌락에 가깝다. 선임에서 후임으로 이어지는 폭력의 수직적 대물림, 그리고 갱단에서 특공대로 돌아가는 피의 수평적 순환이 격자처럼 짜여서 지상의 도시에 하나의 완벽한 지옥을 옮겨놓았다. 그 지옥은 철저히 계급적이기도 하다. 마티어스의 대학친구들은 낮에는 빈민가에서 자원봉사 NGO활동을 하고 밤에는 마약에 취해 있다. 그들 대다수가 상류계급 출신이다. 그래서 마티어스는 친구 네토가 죽자 대학생들에게 "너희들은 부자들이 죽으면 시위를 하지만 경찰이 죽으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라고 절규한다.
공권력의 폭력성을 이정도로 철저하게 그려내면, 그것은 이미 어떤 계몽의 기능을 상실해버린다. 즉, 공권력이 제어되어야 한다든가, 다른 방향의 마약대책이 필요하다든가 하는 이야기조차도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역-소격효과다. 이제 영화는 감독이 의도했든 아니든 헤게모니가 부재한 사회에 대한 일급의 풍자가 된다. 구체적으로는 "행복해지길 두려워하지 말라"던 룰라에 대한 조롱이다.
시스템을 둘러싼 격렬한 계급투쟁을 두려워해서 회피할 경우, 그 엔트로피는 고스란히 내려와 상대적 약자, 인민의 구체적 터전에서 선혈낭자한 형태로 폭발할 수밖에 없다. 브라질의 계급타협은 그렇게 피를 뒤집어쓴 가난한 청년들의 시체 위에 쌓아올린 성채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이중국가'라고 부르는 사회의 진짜 모습이다. 한국 역시 이 지옥행 급행열차를 탄지 꽤 오래되었다. 마약과 총격전이 없다고 지옥이 아닌 것은 아니다.
직선적인 인과관계의 연쇄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열망은 중세적 사유의 핵심 중 하나다. 물론 모든 인과관계의 시작에 신이 있다. 그런데 중세 이후, 그러니까 신이 죽은 세계에서도 이 강박은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강렬해졌다. 창조론이 진화론으로, 연금술이 화학으로 급격히 대체될수록 기계론-인과론적 사유가 더욱 긴요해졌기 때문이다. 그것을 공공연한 엔터테인먼트로 만든 것이 바로 추리소설이다. 반면 그것에 저항한 것이 근대문학이었다. 요사이 한국에서 범람하는 대체역사물은 추리소설의 외양을 갖춘 경우가 많지만 실은 단 하나의 필연세계를 질서정연하게 설명하는 추리소설과는 완전히 다르다. 요즘 한국사람들은 가공인물이 현실적 세계에서 일어날 법한 사건을 해결하는 것보다 '혜원 신윤복이 실은 여자였다'는 설정에 흥미를 드러낸다. 단 하나의 필연세계를 질서정연하게 설명하기를 포기하면 자연히 패러렐월드(평행세계)가 등장하는 법이다. 근대문학이 '세계와의 대결'이었다면, 추리소설은 '세계의 장악'이다. 그리고 대체역사물은 '세계로부터의 탈주'다. 한국은 근대문학이 두터운 저변을 형성한 것과 달리 추리소설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다. 일본이 한국정도의 경제력일 때의 추리소설 소비양상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차이가 난다. 즉, 한국은 '세계와의 대결'에서 곧장 '세계로부터의 탈주'로 점프했다는 이야기다.
요즘 가장 즐겨보는 TV프로그램은 ‘인터뷰게임’이다. 흔히 인터뷰라고 하면, 기자가 유명인을 만나서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는 걸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의 인터뷰는 다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건네주고 그들의 주변 사람들을 인터뷰하게 만든다. 어색한 멘트와 어정쩡한 자세가 절로 웃음을 자아내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진지하다. 남들이 보기에 참으로 시시콜콜한 개인사적 사건들이 인터뷰의 주제다.
내가 이 프로그램을 처음 봤을 때 등장한 사람은 “아내가 자신도 모르게 큰 빚을 졌는데 그에 대해 속 시원히 답해주지 않아서 이혼을 신청했다”는 아저씨였다. 아내는 이불을 빨아 장에 넣고 집안정리를 말끔히 한 다음, 냉장고 반찬통에 일일이 메모까지 써놓고 집을 나갔다.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았던 남편은 아내를 잘 아는 주변인물을 인터뷰하기 시작한다. 먼저 자신의 친누나를 찾아갔다. 하지만 아내를 극구 두둔하는 누나. 괜히 자기만 욕을 먹고 본전도 못 찾는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인터뷰해가는 동안 ‘사건의 전모’가 서서히 드러난다. 빚을 지게 된 이유는 자녀의 교육비였다. 의심이 유달리 많았던 남편은 교육비로 돈이 필요하다는 아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설득에 지친 아내는 오랜 기간 남편 몰래 돈을 융통해왔고 어느새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버린 것이다.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남편은 아내를 어렵게 만나 재결합을 요청하지만,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거절한다. “내가 노력할 때 당신 마음이 닫혀있었고, 이제 내 마음도 닫혀버렸어.”
프로그램이 회를 더하면서 너무 자극적인 소재만 등장한다는 비판이 많았다. 분명 소재선정이나 편집에서 선정적인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인터뷰게임’의 핵심은 소재가 아니라 형식에 있다.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자기라는 존재의 퍼즐을 맞추는 그 형식이, 새로운 감동과 재미를 낳는다. 그걸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나의 재발견’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무리 일기장에다 자신의 속내를 가감 없이 털어놓는다 해도, 그것이 나의 객관적인 모습일 수는 없다. 인간은 본래 ‘합리화하는 동물’이며, 그 에너지의 99%는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다. 그렇다면 ‘객관적인 나의 모습’은 어디 있는가. 바로 타인에게 있다. 나란 인간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결국 내 주변 사람들이다. 엠티나 야유회에서 흔히 하는 ‘롤링페이퍼 놀이’가 여전히 인기 있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묘사한 몇 마디 말이 의외로 ‘발견의 쾌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롤링페이퍼가 일방적으로 나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인터뷰는 인터랙티브, 즉 쌍방향이라서 그때그때 자신이 개입할 수 있다. 게다가 인터뷰는 본래 저널리즘에서 탄생한 것인 만큼 ‘공식성’을 띤다. 흔히 사람들은 사적인 자리에서 솔직하고, 공적인 자리에서 가식적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의외로 사람들은 공식석상에서 깜짝 놀랄 정도로 정직한 반면 일상생활에서는 그저 습관적인 반응만 보이기 쉽다. 마이크와 녹음기를 들이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사래를 치다가도 계속 부탁하면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인터뷰에 응해준다. 그리고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파란 것을 파르스름하다 정도로 순화해서 말할지언정 빨갛다고 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건 글자그대로 우리 주변의 ‘보통 사람들’ 얘기다. 정치인들처럼 고도로 단련된 인간은 인터뷰에서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새빨간 거짓말을 쏟아낸다.)
TV 앞에서 ‘인터뷰게임’을 멍하니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의 가족들과 저렇게 이야기해본 게 언제더라? 가족이란, 정말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아는 사이인 걸까? 그럴 리 없다. 그저 가족이란 핑계로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주고, 한 인간으로서의 서로에게 무관심했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마이크와 디지털 카메라를 준비하자. 없다면 ‘숟가락 마이크’도 좋다. TV에 나올 리 없으니 부담도 없다. 나는 지금 하나의 놀이를 제안하고 있다. 치유로서의 인터뷰를.
로쟈님의 블로그(http://blog.aladdin.co.kr/mramor)에서 긁어왔다. 실은 어제 이택광 선생님이 맥주를 마시는 자리에서 지젝의 가디언 인터뷰 얘기를 했었더랬다. 좌중은 그야말로 폭소의 도가니.^^ 다시 글로 읽어도 미치도록 웃기다. 특히 마지막은 압권.
"비밀 하나만 말해달라"
"공산주의는 승리한다"! ㅋㅋㅋㅋ
슬라보예 지젝, 모든 결점을 압도하는 수퍼 러블리 섹시 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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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9일자 가디언지에 소개된 지젝의 인터뷰(Q&A)를 옮겨놓는다(http://www.guardian.co.uk/lifeandstyle/2008/aug/09/slavoj.zizek). 인터뷰어는 로잔나 그린스트리트(Rosanna Greenstreet)이며, 우리말 번역은 다음카페 비평고원(http://cafe.daum.net/9876/39Cq/879)에서 가져왔다.
Slavoj Zizek, 59, was born in Ljubljana, Slovenia.
He is a professor at the European Graduate School, international director of the Birkbeck Institute for Humanities in London and a senior researcher at the University of Ljubljana's institute of sociology. He has written more than 30 books on subjects as diverse as Hitchcock, Lenin and 9/11, and also presented the TV series The Pervert's Guide To Cinema.
가장 했복했던 때는?
어떤 행복한 순간을 기대했던 혹은 기억했던 몇 번 - 그것이 발생하고 있었던 때는 결코 아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 이후에 깨어나는 것 - 그래서 나는 곧바로 화장되기를 원한다.
가장 어릴 적의 기억은?
어머니가 벌거벗고 있던 기억. 역겨웠다.
가장 존경하는 생존 인물은, 그리고 이유는?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아이티의 두 번 파직된 대통령.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서조차 인민을 위해 무엇이 행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모델이다.
당신 자신에게서 당신이 가장 개탄하는 특성은?
타인들의 곤경에 대한 무관심.
타인들에게서 당신이 가장 개탄하는 특성은?
내가 필요로 하거나 원하지 않을 때 나에게 기꺼이 도움을 주겠다고 하는 그들의 얄팍한 심성.
가장 당혹스러웠던 순간은?
사랑을 나누기 전에 한 여자 앞에 벌거벗은 채 서 있었을 때.
자산을 별도로 하고, 당신이 구입했던 가장 값비싼 것은?
새로운 헤겔 선집 독일어판.
가장 소중한 소유물은?
앞의 답을 볼 것.
당신을 침울하게 만드는 것은?
우둔한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것을 보는 일.
당신의 외모에서 가장 싫은 것은?
나를 나의 실제 모습으로 보이게 한다는 점.
가장 매력 없는 습관은?
말하는 동안 내 손의 우스꽝스럽게 과도한 틱.
가장무도회의 의상을 고른다면?
내 얼굴에 나 자신의 마스크를 써서, 사람들이 나를 나 자신이 아니라 나인 척하려는 누군가로 생각하게 하고 싶다.
가장 죄책감이 드는 쾌락은?
<사운드 오브 뮤직> 같은 당혹스럽도록 애처로운 영화를 보는 것.
부모에게 빚진 것은?
아무것도 없기를. 나는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데 일 분도 소비하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가장 말하고 싶은 사람은, 그리고 이유는?
나의 아들들. 충분히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해서.
사랑의 느낌은?
거대한 불운, 기괴한 기생물, 일체의 소소한 쾌락들을 망쳐놓는 항구적인 비상상태.
일생의 사랑은 무엇 혹은 누구인가?
철학. 비밀이지만, 나는 현실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사색할 수 있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냄새는?
썩은 나무 같이, 부패된 자연.
그런 뜻이 아니면서 "널 사랑해"라고 말해본 적이 있는가?
언제나. 정말로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나는 단지 공격적이고도 고약한 언급들을 함으로써 그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가장 경멸하는 생존 인물은, 그리고 이유는?
고문을 돕는 의사들.
당신의 최악의 직업은?
가르치기. 나는 학생들을 증오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대개 우둔하고 따분하다.
가장 큰 실망은?
알랭 바디우가 20세기의 "모호한 재앙"이라고 부르는 것. 즉 공산주의의 파국적 실패.
당신의 과거를 편집할 수 있다면 무엇을 바꾸겠는가?
나의 탄생. 나는 소포클레스에게 동의한다. 즉 가장 큰 행운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농담에도 있듯이, 이에 성공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어디로 가겠는가?
19세기 초 독일로, 헤겔의 대학 강의를 들으러.
어떻게 쉬는가?
바그너를 반복해서 들으면서.
얼마나 자주 섹스를 하는가?
섹스의 의미에 달려있다. 살아 있는 파트너와의 통상적 자위라면, 나는 전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갔던 때는?
가벼운 심장 발작이 있었던 때. 나는 나의 신체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에게 맹목적으로 봉사할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를 거부했다.
당신의 삶의 질을 향상해줄 단 하나가 있다면?
노인성 치매를 피하는 것.
당신의 최대 업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헤겔에 대한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전개하는 챕터들.
삶이 당신에게 가르쳐준 가장 중요한 교훈은?
삶은 당신에게 가르쳐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어리석고 무의미한 것이라는 것.
우리에게 비밀을 하나 말해달라.
공산주의는 승리할 것이다.
아래는 인터뷰 원문이다.
When were you happiest?
A few times when I looked forward to a happy moment or remembered it - never when it was happening.
What is your greatest fear?
To awaken after death - that's why I want to be burned immediately.
What is your earliest memory?
My mother naked. Disgusting.
Which living person do you most admire, and why?
Jean-Bertrand Aristide, the twice-deposed president of Haiti. He is a model of what can be done for the people even in a desperate situation.
What is the trait you most deplore in yourself?
Indifference to the plights of others.
What is the trait you most deplore in others?
Their sleazy readiness to offer me help when I don't need or want it.
What was your most embarrassing moment?
Standing naked in front of a woman before making love.
Aside from a property, what's the most expensive thing you've bought?
The new German edition of the collected works of Hegel.
What is your most treasured possession?
See the previous answer.
What makes you depressed?
Seeing stupid people happy.
What do you most dislike about your appearance?
That it makes me appear the way I really am.
What is your most unappealing habit?
The ridiculously excessive tics of my hands while I talk.
What would be your fancy dress costume of choice?
A mask of myself on my face, so people would think I am not myself but someone pretending to be me.
What is your guiltiest pleasure?
Watching embarrassingly pathetic movies such as The Sound Of Music.
What do you owe your parents?
Nothing, I hope. I didn't spend a minute bemoaning their death.
To whom would you most like to say sorry, and why?
To my sons, for not being a good enough father.
What does love feel like?
Like a great misfortune, a monstrous parasite, a permanent state of emergency that ruins all small pleasures.
What or who is the love of your life?
Philosophy. I secretly think reality exists so we can speculate about it.
What is your favourite smell?
Nature in decay, like rotten trees.
Have you ever said 'I love you' and not meant it?
All the time. When I really love someone, I can only show it by making aggressive and bad-taste remarks.
Which living person do you most despise, and why?
Medical doctors who assist torturers.
What is the worst job you've done?
Teaching. I hate students, they are (as all people) mostly stupid and boring.
What has been your biggest disappointment?
What Alain Badiou calls the 'obscure disaster' of the 20th century: the catastrophic failure of communism.
If you could edit your past, what would you change?
My birth. I agree with Sophocles: the greatest luck is not to have been born - but, as the joke goes on, very few people succeed in it.
If you could go back in time, where would you go?
To Germany in the early 19th century, to follow a university course by Hegel.
How do you relax?
Listening again and again to Wagner.
How often do you have sex?
It depends what one means by sex. If it's the usual masturbation with a living partner, I try not to have it at all.
What is the closest you've come to death?
When I had a mild heart attack. I started to hate my body: it refused to do its duty to serve me blindly.
What single thing would improve the quality of your life?
To avoid senility.
What do you consider your greatest achievement?
The chapters where I develop what I think is a good interpretation of Hegel.
What is the most important lesson life has taught you?
That life is a stupid, meaningless thing that has nothing to teach you.
Tell us a secret.
Communism will win.
08. 08. 19.
아래는 제목을 듣는 순간 떠올라버린 가사.(이상한 모자님의 위대한 노래와는 무관하니 곡해금지)
(이펙트, 페이드아웃 처리) "껄껄껄~"
너는 용감한 사자
너는 냉정한 독수리
이런 젠장 너무 멋져 미칠듯한 그대포쓰
북극의 사자 잠수하는 독수리
난 개량주의자일까
나는 개량주의자일까
나는 개량주의자일까
너는 나의 로두스
너는 나의 장미
내 심장은 오소독스 머릿속은 스트레스
널 위해 뛰진 않아 널 위한 춤은 싫어
난 개량주의자일까
나는 개량주의자일까
나는 개량주의자일까(반복)
(클로징) "이 존만 색히들 전부 일렬로 서서 대가리 박아~"
*진교수 성대모사여야 함
모토코: 저는 34살까지 해두어야할 것들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츠코 교수: 사람에게 나이 같은 건 없어. 에두프스퀘어를 통과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을 뿐이에요. 당신은 오늘 에두프스퀘어를 통과하기 위해 발을 뗀 거예요. 아닌가요?
모토코: 그건 독립한다는 의미인가요?
나츠코 교수: ...아무튼 축하해요.
*에두프 스퀘어는 이집트의 호루스 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호루스는 매의 신이자, 현세의 신.
..............
모토코: 저는 바바짱이 되고 싶어요.
형사: 그녀는 범죄자예요.
모토코: 하지만 나도 도망가고 싶어. 부모로부터, 일로부터, 이런 나 자신으로부터.
..............
신용금고 직원으로 16년 동안 착실하게 출근하고 있는 하야카와 모토코. 34세에 아직 미혼인 그녀는 아직도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내의 유일한 말동무였던 '바바짱'이 공금 3억엔을 가지고 잠적하는 대사건이 벌어진다. 갑자기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진 모토코는 충동적으로 '출가'를 결심하고, 여자들만 사는 숙식제공 하숙집 '해피네스 산챠'의 새로운 입주자가 된다. 그 하숙집에는 인기 없는 만화가 키즈나와 대학의 인류학 교수인 나츠코가 살고 있다. 하숙집 주인인 유카(20세)는 스리랑카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대신 해피네스 산챠의 주인이 된 아가씨다. 이 네 명의 여성이 한 집에 모이면서 드라마가 시작된다.
<수박>은 신드롬을 일으킬 만한 드라마가 아니다. 일본 방영 당시에도 그리 높은 시청율을 기록하진 못했고, 한국에서도 '누구나 베스트로 꼽는 일드'에 들어가진 못한다. 11부 내내 드라마틱한 사건 따윈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작은 소동과 짧은 회한들이 소품처럼 배치되었다는 점에서, 차라리 일본의 그저그런 사소설(私小說)에 가깝다. 꽤나 취향을 타는 드라마란 얘기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서 결국 성패를 결정하는 건 캐릭터다. <수박>은 무심한 듯 그려낸 네 명의 여자와 기묘한 주변인물들이 한여름의 아포가또처럼 감칠맛을 내며 섞여들었다. 뜨거운 에스프레소와 차가운 바닐라 아이스크림.
흔히 여성들이 집단주연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는 재능있는 여자들이 닥치는대로, 혹은 입맛대로 남자를 갈아치우는 하렘물(난 하렘물의 최고봉으로 <섹스 앤 더 시티>를 꼽겠다)이거나, 아니면 피도 눈물도 없는 비겁한 남성들과 대결하며 동질감을 확인하는 것(성대결물)이기 쉽다. 후자의 경우는 너무나 안이한 방식으로 연대의식이나 자매애로 치장된다. 남성과의 대결을 위해 종종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하렘물과 성대결물의 혼합형도 많은데, 그런 경우 남성과의 대결은 훗날의 연애를 위한 떡밥일 뿐이다. 정작 여자들은 어떨지 몰라도, 남자가 보기엔 정말 구질구질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수박>은 이 모든 함정들을 뛰어넘는다. 어깨에서 힘을 빼면서도 지나치게 나른해지지 않으며 장면마다 개그가 폭발하지만 캐릭터의 힘이 그것을 페이소스의 차원으로 밀어올린다. 드라마 속 독신여성들은 연애에 그리 신경쓰진 않지만 그렇다고 글로리아 스타이넘처럼 "남자 없는 여자는 자전거 없는 물고기와 같다"며 호기를 부리지도 않는다. (그 말을 진짜로 믿는 여자들이 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수박>에서의 연애는, 우리 대부분에게 그러하듯 그저 접촉사고같은 것이다.
"여자는 재능 아니면 가슴!"이라 단언하는 엄마에게 모토코는 아무런 항변을 할 수 없었다. 어느 쪽도 자신의 무기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단독비행'을 위해 앞으로 한 발 나아간다. 실은 엄마도 알고 있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앞으로 내딛는 한 발, 그 작은 용기야말로 딸에게 가장 필요한 재능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단지 그것이다.
난 극장의 번잡함을 싫어해서 개봉영화를 잘 보지 않는다. 근데 오늘 개봉 첫주에 영화를 봤다. 3년에 한번 있을까말까한 일이 벌어진거다. 소문이 짜한 그 영화, <배트맨: 다크 나이트>. "걸작"이라며 다들 난리들이라서, 대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 나왔길래 저럴까 너무나 궁금했다. 워낙에 내가 '신기한 탈 것'들을 좋아하기도 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대에 비해선 좀 실망스러웠다. 물론 그간 배트맨 시리즈가 보여준 허접함(팀 버튼조차도!)에 비한다면 군계일학이다. 잘 만들었다. 하지만 그건 배트맨 시리즈가 워낙 구리고 재미없어서 상대적으로 나아보이는 거지, 이 영화가 다른 블록버스터들보다 월등히 뛰어나서가 아니다. 히스 레저의 연기는 빼어났지만, 조커의 '도덕감성론' 강의는 지루했다. 특히 '궁지에 몰리면 모든 인간은 악에 물든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조커의 사회 실험 대목에선 폭소를 참을 수 없었다. 요새 미국 애들은 어렸을 때 <파리대왕>이나 <암흑의 핵심> 같은 소설도 안 읽나? 투페이스의 영락은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급소였는데 복선을 너무 남용하는 바람에 김이 다 빠져버렸고 개연성과 극적 효과도 부족했다.
그나저나 한국 영화평론가들과 블로거들은 원시유교 시대의 선악론만도 못한 걸 가지고, 왜 그리 심오한 철학인 양 포장했던 걸까. 아무리 잘봐줘도 이 영화는 포스트 9.11 시대 미국사회의 회의주의에 대한 우화일 뿐인데 말이다. 즉, 이건 오히려 철학적 텍스트가 아니라 정치적 텍스트에 가깝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최고의 배트맨 무비",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찬사가 된다. 그러니 님들아, 오바자제효.
p.s ) <로아나...>는 에코의 저작 중 가장 뛰어나진 않지만, 가장 사랑스럽다.
군산은 일테면 한때 번성했던 지방도시의 전형이다. 사람들의 표정은 의외로 무척 밝았다. 이 지역 사람들만 특별히 낙천적인 게 아니라면, 뭔가 이유가 있을 테다. 택시기사들과의 얘길 나누다보니, 중규모 이상 공장들이 많은데다 새만금 개발에 대한 거대한 기대심리가 존재하고 있다. 인근의 고만고만한 중소도시들 찍어누르겠다는 자신만만함이 느껴진다. 씁쓸했다. 우리가 반대하고 싸웠던 새만금은 그렇게 '지역민의 희망'이었다. 연안의 시궁창같은 물 위에는 많은 갈매기들이 날개가 퇴화한 듯 떼지어 내려앉아 수면을 뒤적이고 있었다.
서울과 비서울의 기형적 위계구조는 중소도시들 사이의 약탈적 경쟁으로 축소재생산된다. 서해안 개발광풍의 한가운데에 있는 군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사상최대의 조선업 호황으로 흥청대는 거제시의 와인 소비량이 서울 강남을 앞질렀다는 소식을 들은 게 벌써 작년이다. 거제와 울산 같은 도시들에 대한 다른 도시들의 선망은 거의 종교와 같다. 무엇으로 그 벽에 균열을 낼 것인가. 아득하기만 하다.
군산의 맛집은 훌륭했다. 군산횟집이라는 이른바 전국구 점포가 있는데, 이번 여행에선 제외했다. 서울사람들이 군산에 가면 꼭 들러야 하는 횟집이라고 여러 매체에서 침이 마르게 띄워줬던 곳이다. 그런데 가격대 성능비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게 '선수'들의 중평이다. 특히 서울 강남에 있는 군산횟집 분점은 회 좀 먹어본 사람들에게는 아주 악명 높다. 어렸을 적부터 3일에 한번 꼴로 자연산 회만 먹었던 나는 회맛에 까다롭다. 비싼 돈 내고 실망하고 싶진 않다. 군산 시내는 의외로 회를 먹을만한 데가 없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그래서 회는 군산서 배를 타고 한시간 정도 나가야하는 선유도에서 먹기로 결정했다. 거기서 자연산 광어회를 먹었는데, 광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같은 남해안 출신도 빠져들 수밖에 없는 육질이었다. 입천장에 쫀득하게 달라붙는 광어회, 정말 오랜만이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한적한 해변에서 가볍게 태닝도 해주었다.
군산에 도착해서 처음 들른 식당에서 먹은 '전북식 아귀찜'도 훌륭했지만, 저녁에 먹은 양념소갈비는 더욱 압권이었다. 환상적인 고기색깔이 그대로 드러나는 투명한 양념의 갈비다. 소갈비의 양념은, 달지만 들척지근하지 않고 고기 자체의 맛을 살려내는 양념이어야 한다. (물론 최상위 등급의 갈비는 양념갈비로 만들지 않는다.) 얼마 전 영덕 인근에서도 비슷한 느낌의 갈비를 먹은 적이 있다. 당시에 정말 최고라고 생각했지만 이번 것은 최소한 필적하거나 능가하는 맛이었다. 양념과 고기의 등급이 비슷하다면, 갈비를 펼쳐내는 칼솜씨와 숯, 이 두 가지가 맛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영덕에서 먹었던 갈비와 다른 점이 거기에 있는 듯 했다. 육식깨나 즐기시는 여친사마께서 아주 환장을 하셨다. 마지막으로 갔던 간장게장집은 상당히 유명한 곳이었는데, 교통이 불편해서 만만찮은 택시비를 지불해야했다. 맛은 명불허전. 게장은 말할 것도 없고 곁반찬들도 서울의 초일류 한정식 집 뺨을 칠만큼 정갈한 맛이었다.
어쨌든 이번 여행도 '먹기 위해 걸었던' 여정이었다. 운전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극도의 불편을 주는 나라가 한국이고, 군산 역시 그랬다. 하지만 새로운 길을 따라 즐겁게 걷고, 맛있게 먹고, 설레며 자는 것. 그게 바로 여행이다.
‘솔까말’이란 은어가 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의 준말이다. 용례는 다음과 같다. “솔까말, 원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섹스 아니니?” “솔까말, 지잡대와 SKY는 하늘과 땅 차이지(*지잡대: 지방에 있는 대학교를 비하하는 속어).” 이 때 한껏 냉소적인 표정을 짓는 게 포인트다.
솔직함은 분명 미덕이다. 거짓과 위선을 폭로하는 통쾌함을 안겨준다. 겉으로는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면서도 속으로 딴 생각을 하는 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TV 버라이어티 쇼에서는 예전에 엄두도 못 낼 수위의 ‘솔직한’ 대화들이 오고간다. 권위주의 시대에 비한다면, 지난 10년 간 우리는 분명 솔직해졌다.
일본사람의 특성을 묘사할 때 흔히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표현을 쓴다. 혼네(本音)는 속마음, 다테마에(建前)는 표정이다. 본심은 따로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다르다는 의미다. 한국사람들은 이를 두고 “겉 다르고 속 다른 일본”이라며 그들의 속물성을 비난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예의와 체면 따지기 좋아하는 중국과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구사회 역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적으로 유사한 면이 있다. 이건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고유한 속성이다. 인간은 욕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욕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물은 타자(他者)가 있든 없든 먹고, 싸고, 잔다. 다시 말해서 욕구는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욕망은 타자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나의 욕망은 언제나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친 욕망이며 그 거울이 깨지는 순간 나는 그저 한 마리 동물이 된다. ‘다테마에’는 단순히 ‘혼네’를 감추는 가면이 아니라, 타자를 적극적으로 의식해서 욕망이 온전히 욕망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안전핀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동물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의 솔직함이 그녀를 죽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점점 ‘솔직’해지는 건, 이제 더 이상 ‘혼네’를 감출 필요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솔직함은 닳고 또 닳아버려서 자신의 노골성을 뻔뻔하게 드러내는 상투적 형식이 됐다. 달리 표현하면, ‘혼네’가 ‘다테마에’의 자리를 강탈했다. 서점에 넘쳐나는 이른바 실용처세서들을 보라. 온통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다. “가난한 아빠라니, 솔직히 쪽팔리지 않아? 부자아빠가 되라구!” “30대에 모은 돈이 고작 5천만 원? 까놓고 말해 당신, ‘루저’야!” 즉, 이 모든 ‘솔까말’ 뒤에 생략된 말은 ‘돈 밖에 없지, 안 그래?’다. 그렇게 ‘동물’들은 냉소주의자 흉내를 낸다.
지난 7월 5일 한 일간지에 여고생이 투신자살했다는 소식이 실렸다. 그녀의 부모는 청와대와 교육청에 진정서를 냈다. 진정서에 따르면 “담임교사가 기초생활수급자를 조사한다며 해당학생을 교실에서 일어나라고 했고 딸이 가만히 있자 공개적으로 명단을 불러 모욕감을 줬다”고 한다. 기사가 인용한 익명의 제보자가 말하길, 그 교사는 평소에도 그런 행동을 많이 했던 사람이었고 죽은 소녀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생활 내내 유무형의 멸시에 시달렸다. 1급 지체장애인인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노점상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오고 있었다.
진정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담임교사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과연 교사 개인의 소양 탓으로만 돌릴 일일까. 이 비극은 단지 예외적인 사건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1시간 더 공부하면 마누라 얼굴이 바뀐다’라는 급훈을 ‘명언’ 취급하는 한국사회야말로, 지금 이 시각 건물 옥상에 선 어느 가난한 소녀의 등을 떠밀고 있기 때문이다. 끔찍하다, ‘한국판 자본주의 정신’의 저 투명한 솔직함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지만, 그것이 '새롭기 위한 고통'을 폄훼하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고통에 바치는 찬사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고통은 물론, 내가 새롭다고 생각했던 것이 누군가에 의해 오래 전에 만들어졌음을 깨달은 순간의 허탈과 망연자실을 포함한다.
<88만원 세대>를 쓰던 무렵, '88만원 세대'라는 제목은 물론이고 '다안성'과 같은 개념들, '희망고문'과 같은 비유 하나하나조차 쉽게 떠오른 것은 결코 아니다. 사타구니 습진, 편두통, 과민성대장증후군 등등에 괴로워하며 고민을 거듭하다 어느 순간, 이를테면 사타구니를 벅벅 긁는다든지, 괄약근을 오므리며 화장실로 달려간다든지, 펜잘을 입에 털어넣는 순간 문득 하나의 착상이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반면 책상 앞에서는 언제나 시행착오 뿐이다. 그렇게 결과물은 언제나 수많은 좌절의 화학반응이다.
나는 대가에게도 애송이에게도 공평한, '등가교환의 법칙'이 있다고 믿는 편이다. 대가는 대가의 레벨에서, 애송이는 애송이의 레벨에서 스스로의 기대치를 만족시키기 위한 노력의 양은 일정하다는 의미다. 새롭기 위한 고통은 언제나 괜찮은 결과를 보장한다. 단, 자신의 레벨을 착각하지만 않는다면.
"..국민국가와 정복정책의 내적 모순은 나폴레옹의 장대한 꿈의 좌절로 백일하에 드러났다."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270~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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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렴(국민통합)과 발산(동북아중심국가)을 동시에 이루겠다는 야심을 공공연히 표명한 최초의 대통령은 노무현이었고, 그 사실만으로도 그는 보나파르트주의자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노무현은 그 목표를 위해 모든 계급을 대표하겠다고 했다. 물론 그것은 언제나 실패할 운명이다. 나폴레옹도 못했는데 루이 보나파르트 따위가 할 수 있을 리 없다. 반면 이명박은 어떤 계급도 대표하지 않겠다는 제스쳐를 끊임없이 보여주었다. 그럴 수 있는 자는 딱 두 부류다. 그 자신이 초월적 표상으로 존재하는 절대군주이거나 아니면 인지능력 결핍자, 다시말해 단순한 멍청이다.
노무현, "난 한우 소고기 먹었지롱"
냉정하게 말해 내용이 그리 코믹한 건 아닌데, 눈물까지 흘려가며 웃었다. 왤케 웃기냐 이거. 요새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하는 짓마다 MB 염장을 지르는 듯. 청와대가 문서기록 관련해서 봉하마을측에 계속 시비거는 것도 진지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실은 그냥 빈정이 상해서가 아닐까. 게다가 이제 먹는 거 가지고 약을 올리고. 청와대 인간들도 요즘 한우가 쵸낸 먹고 싶을텐데 말이다.
아래는 관련사진. 출처는 노무현 홈피. 옆에 앉아계신 권양숙 여사에도 주목. ("고만 쫌 묵어라 이 잉간아"라고 하는 듯한 표정. 카메라를 피해 남편 궁둥이를 꼬집고 있는지도...)
유인촌 장관이 '자출'하는 것 가지고 말이 많다. "서민은 엄두도 못낼 고가의 자전거"라고 해서 대체 뭔 자전거길래 저 난린가해서 사진을 봤더니, 코나에서 나온 2001년형 쿨라 모델이다. -_-;; 판매당시 소비자가 169만원, 요새 중고로는 한 50만원 하려나. 물론 조중동 구독하면 끼워주는 저질 자전거만 보던 사람들한테는 무지무지 비싸겠지. 유인촌이 탄 자전거는, 이를테면 이건희가 탄 마티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오피스텔을 질러주셨다는 어느 아줌마에 비하면 남산골 딸각발이라 불러도 될 정도다. 비싼 자전거라는 것은, 김훈이 타는 자전거처럼 1천만 원이 훌쩍 넘어가는 물건이다.
제발 타격을 해도 제대로 하자. 쑈하고 있다고 욕해봐야 쑈하는 게 숙명인 정치인한테 씨알도 안먹힌다. 자전거 타고 출근하겠다고 하면 일단 칭찬부터 해줘야 한다. 그게 영 배알이 꼴리면 언제까지 계속하나 지켜보겠다고 압박멘트 한번 날려주면 될 일이다.
아무리 쇼라고 해도, 자전거를 타는 것은 자동차를 타는 것보다는 무조건 '진보'다. 우리가 요구해야 하는 것은 정치인의 일회성 쇼를 인민의 지속가능한 현실로 만드는 일이다. 9급 공무원이나 일반 회사원들도 자전거를 타고 큰 위험과 불편 없이 출퇴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각종 문화체육시설에 자전거를 타고 쉽게 접근가능하도록 제도와 환경을 바꾸어내는 것이다. 우리가 입에 달고 사는 '선진국'이란 바로 그런 일을 잘하는 나라다. 지금처럼 모든 사안을 선악대결로 몰아가는 것은, '모든 사안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MB와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자본에 길들여진 주체인 소비자-시민은 시장주의에 양가적 감정을 갖고 있다. 무한경쟁에서 "나만은 승리할 수 있다"는 덧없는 희망과 함께, "언제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막막한 불안이 늘 공존한다. 이런 사회를 코제브 식으로 신랄하게 표현하자면 '동물국가'일테지만 이 표헌은 소비자의 측면만 강조되므로 적절하진 않은 것 같다. 소비자-시민 주체는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기묘한 결합이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결합임에도 그 결합이 현실에서 역동적으로 기능하는 것은, 그걸 가능케하는 사회적 조건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것'을 탐구해야 한다.
디지털 네트워크의 도래와 그에 따른 정보의 병렬화/변형은 또 하나의 실마리가 되어줄 것이다. 인터넷은 새로운 혁명의 도구가 아니라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킨 매트릭스일지 모른다. "자본주의는 그 자신이 국가와 일치할 때만 승리한다"는 브로델의 명제는 여전히 교훈적이다.
1.
1998년 7월 7일부터니까, 3654일이다. 오늘은 여친사마와의 10년 기념일. 그녀는 나의 대학동기인데, 작고 마른 몸과 달리 매년 농활에서 농기계 급 능력을 보여주던 괴력소녀였다. 그야말로 '건강함'의 화신이었고, 지금도 여전하다. 웃음 많고 눈물 많고 감수성 풍부하지만, 그만큼 밥도 무섭게 많이 먹는다. 요즘 뿔테안경을 쓰니 정말 <닥터 슬럼프>의 인조인간 괴력소녀 아라레짱같다. 10년을 어떻게 사귀냐고 사람들이 묻지만, 정작 우리도 믿기지 않는다. 벌써 그렇게나 됐나, 하고 놀란다. 아무튼, 앞으로도 잘 부탁해.^^
2.
손목을 다치니까 뽐뿌가 밀려온다. 이나영이 손가락에 침을 묻혀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아이스커피, 아이스커피~" 하는 광고가 있는데, 요즘은 광고 볼때 아이스커피 대신 잔차 이름의 환청이...-_-; 큰 바퀴도 많지만, 난 이상하게 작은 바퀴만 끌린다. 전생에 호빗이나 드워프였던걸까(지금은 아니라는 거냐!). 스캔듐이던가 하는 프레임에 무게가 7kg 남짓이라는데, 고놈 참 잘나가게 생겼다.
저자서문에도 밝혀놓았듯이 처음에 이 책의 큰 프레임을 기획한 것은 나였다. 하지만 집필기간 중에 신상의 변화가 생겨서 우석훈 선배와의 공동작업은 기존에 나온 <88만원 세대>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로 일단락되었다.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다. 당시 내가 몸담았던 직장에서도 꽤 공력이 필요한 책을 급히 써야했기 때문에 불가항력이었다. 출간을 연기하면 어찌어찌 내가 글을 쓸 여유가 생겼을 테지만 "출간일정을 미룰 수 없다'는 얘기에 깨끗하게 마음 접었다. 앞으로도 우 선배와의 공동작업은 없을 것이다. 결국 두 권의 책을 우 선배와 같이 한 셈인데, <88만원 세대>와 달리, <샌드위치 위기론..>의 경우에는 내가 약간의 브레인스토밍에 참여한 것 말고는 내가 직접 집필한 부분이 별로 없는 책이다. 그래서 인세도 10원짜리 한 개 받지 않았다. 이번에 <샌드위치..> 개정판을 낸다는데 이름을 아예 빼달라고 요구할 작정이다.
시리즈 3권, 즉,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내가 오랫동안 고민해온 문제인 북한 내부식민지화와 이중국가(dual state)론을 전면에 배치하려 했던 책이다. 내가 쓸 부분의 세부 목차와 주요개념을 이미 오래 전에 우 선배에게 보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을 보니 상당 부분 반영이 되어 있었다. 이중국가나 내부식민지를 언급하긴 하는데, 잠깐 언급하는 수준이라 제대로 논의를 전개했다고 보기 어렵다. 게다가 이중국가를 말하는 대목에서는 서울/지방의 문제 즉, 지나치게 공간경제학적인 측면에 치중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중국가론은 이중경제(dual economy)라는 기존의 개념을 활용해서 내가 만들어본 조어인데, 경제학적 측면 뿐 아니라 정치/문화적 측면까지 포괄할 수 있는 큰 개념이다. 때문에 자칫 조악해질 수 있지만, 현재 한국상황을 조망해볼 수 있는, 그리고 한국사회의 새로운 주체형성에 긴밀하게 관련된, 하나의 쓸모있는 도구라는 생각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좀더 정교화해볼 작정이다. 근데 이렇게 게을러서 원...
북한 내부식민지론은 2002년 초반부터 내가 고민해온 문제였는데, 작년 연말에 폐기했다. 남한의 제국주의 에너지가 아무리 커지더라도 북한을 남한(자본)의 내부식민지로 만드는 것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깨달음 때문이다. 업데이트된 양질의 관련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덕분이다. 물론 내부식민지론은 '통일의 낭만화'를 경계한다는 면에서는 여전히 의의가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동북아의 국가간 역학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해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게 되었다. 쉽게 말해서, 남한 자본이 아무리 용을 써봐야 북한을 내부식민화하기 어렵다는 거다. 또한 남한 자본의 북한 내부식민화 과정이 남한 정권의 이념적 속성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는다는 점도 약점이다.
내부식민지라는 개념은 사실상 안토니오 그람시에 의해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탈리아 남북간 격차에 대한 탁월한 논문 <남북문제에 대한 몇 가지 측면>이 내부식민지론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주요 참고서적으로는 MIchael Hechter 의 <Internal Colonialism: The Celtic Fringe in British National Development, 1536-1966 >이 있고 John M. Merriman의 <The Red City : Limoges and the French Nineteenth Century>등이 있다. 국내 자료로는 '김대중주의'로 한때 끗발 날렸던 황태연 교수가 오래 전에 전라도의 지역차별을 내부식민지론을 통해 살펴본 논문이 있고, 지자체 연구자들이 가볍게 내부식민지론을 언급한 논문들이 몇 개 있다. 그러나 그람시가 내부식민지론을 이탈리아 문제에 한정했듯이, 이것은 지나치게 확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개념이다. 좌파가 남북한 문제를 바라보는 이론적 틀이 너무 미흡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현재 한국의 이중국가화는 '한국형 제국주의'의 동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질곡이다. 그리 간단한 인과관계는 아니다. 동력인 측면과 질곡인 측면을 나누어 논하는 작업은 날달걀의 노른자와 흰자를 다루듯 섬세하고 미시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이중국가화가 제국주의의 동력으로 작용한다고 해서 동북아의 평화균형이 급작스럽게 깨지는 것은 아니며, 질곡으로 작용한다고 해서 한국이, 혹은 동북아가 곧장 평화체제에 다가서는 것은 아니다. 양자의 매개가 되는 변수들이 존재하며, 그것을 치밀하게 골라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볼륨이 너무 작다. 어쨌든 쓰기로 해놓고 못쓴 내 잘못이 크다. 가능한 많이 팔려서 이 책을 계기로 논의가 활성화된다면 좋겠다.
시로 마사무네 원작의 <애플시드>가 3D 영화로 개봉되는데 한국판 제목이 이뭐병이다. 무려 엑스 "머시나". 라틴어인 machina를 어메뤼칸 스따일로 조져버린 센스에 무릎을 꿇는다. (물론, 미쿡에서도 machina는 마키나지 머시나가 아님.) 이걸 보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기계장치의 신)"를 전국에 유행시킨 진중권 사마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근데 왜 '엑스'는 가만 놔뒀나. 아쌀하게 된장경숙 스타일로 '익스 머쉬나'로 하든가. 이게 뭐니, 이게. 고백하자면, 처음에 이 포스터를 얼핏 보고 '애플시드: 섹스 머시마'로 읽었다.
여러 블로그에서 이걸 가지고 실컷 비웃고들 있는데, 댓글 와중에 영화 '가을의 전설' 번역 문제도 나왔다. 원제대로 하면 몰락(the fall)의 전설인데, 가을남자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는 슬픈 이야기. 그랬던 거야? 몰랐어!! ㅜ.ㅜ
2. "우리를 지도하지 말라"며 쌩난리를 치던 사람들이 종교인에게'지도받는 것'을 기꺼이 허용하는 걸 보니 재미있다. 이를 통해 하나의 사실이 다시 확인되었다. 사람들은 주체적이거나 창발적이어서 지도받길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잘난 척 나서는 놈들이 싫은 거다. 종교는, 그런 뒤틀린 심성에 훌륭한 면죄부와 마음의 안식을 제공한다. 확실히 중간계급은, 예전에 내가 언급한 대로, 이 대결구도를 "선악의 아마겟돈"으로 바라보고 있다. 다시 싸움은 지구전 양상이 됐고, 시간은 무조건 MB편이다. 종교가 나서는 것은 물론 국면전환에 도움은 됐지만, 별로 좋지 못한 징조다. 우리가 만들어내야 할 '정치'의 진짜 위기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국민투표 말고는 답이 없다. 명백한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쇠고기 문제에 한정한 국민투표로 일점돌파하는 것이다. 그러지 못하고 이대로 전투력을 서서히 상실하면 이 싸움은 필패다.
3. 이 와중에 진보신당 사무실은 테러를 당했다고 한다. 이상한 모자님은 하루빨리 종합격투기를 배워야 한다.
허리 사이즈가 많이 줄어든 것 같다. 바지가 자꾸 흘러내린다. 흐벅진 뱃살이 허리띠를 꿀꺽 삼켰던 게 불과 한달 전인데, 이제 허리띠에 구멍을 하나 더 뚫어야 쓰겠다. 10일만에 6kg이나 빠져서 요요현상이 있을 줄 알았는데, 다시 급격히 찌거나 하진 않았다. 술을 조금 줄이긴 했지만 고기를 줄이진 않았다. 이를테면 선배들이랑 배터지게 먹었던 고깃집에 바로 다음날 또가서 죽어라 먹는 짓을 저지르는 등 식습관 자체는 평소 그대로다. (여친에게 "특별히 땡기는 것도 없는데 고기나 먹지 뭐"라는 말을 태연히 지껄이며 고깃집에 들어가던 기억이 난다.)
몸은 정직하다. 지방이 많았던 부위는 흐물흐물하게 변하고, 그 밖의 부위는 단단해졌다. 아마 이정도가 나의 적정 체중인 듯 하다.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네 정말. 다 좋은데 단점이 있다. 몸의 부피가 작아지니 머리가 더 커보인다(눈물). 며칠 전에 '쿵푸팬더'라는 영화를 봤는데 느낀 바가 컸다. 팬더가 쿵푸 하면 용이 되고, 곰이 자전거 타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거.
2008년 6월 중순 현재, 대의민주제의 핵심인 정당정치가 실종된 상황을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 대한민국이 ‘이중권력(dual power)' 상태라고 말한다. 정부 권력과 시민 권력이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다는 거다.
내가 알기로 이중권력이라는 말의 용례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일본 쇼군-천황 체제의 기묘한 권력분점을 묘사하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꽤 유서 깊다. 약 90년 전에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란 가명으로 활동하던 러시아의 대머리 아저씨가 최초로 이 말을 사용했다. 우리의 맥락은 전자와는 무관하므로 후자라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혁명전야? 에이, 설마! 대다수 ‘빨갱이’들조차 지금이 혁명전야라고 진심으로 믿진 않을 것이다. 오늘날 OECD 가입국에서 ‘혁명’이란 단어는 광고문구 또는 비유적 과장일 뿐이다. 체 게바라의 여전한 인기는 혁명의 절박한 요구 때문이 아니라 티셔츠로 소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뉴욕타임스>는 이번 사태를 두고 “한국 민족주의 정서의 표출”이라 주장한다. 북조선에 알 수 없는 친근감을 가진 일부 운동권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물론 대한민국은 동북아시아의 마지막 분단국이고, 오랜 세월 외세에 시달려온 나라다. 그러나 북조선의 쇠락과 함께, 단일민족국가에 대한 한국인의 판타지는 상당 부분 사라졌다. 월드컵, 한류, 황우석 사태, ‘디워’ 논란 등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 것은 ‘강한 국가’에 대한 열망이지 과거와 같은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한국인에게 민족 혹은 통일은 여전히 중요한 가치이지만 더 이상 그 자체가 목적이 되기 어렵다. 이제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한 국가를 위한 수단으로서만 존재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그러므로 민족주의니 민족정서를 언급하는 것은 최근 10년간 대한민국에 얼마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는지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 변화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중국가(dual state)’다. 이것은 위기에 처한 중산층과 ‘막장’에 몰린 빈곤층이 90%를 이루고, 금융위기 이후 압도적 부를 축적한 10%로 구성된 사회다. 그리고 매일 천 원 김밥을 먹는 사람과 만 오천 원 브런치를 먹는 사람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그런 사회다. 이중권력이 아니라 실은, 이중국가가 문제인 것이다.
단순히 ‘10대90의 사회’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계화라는 미명 하에 벌어진 급격한 사회경제적 충격이, 국가의 역할에 대한 한국사회의 합의를 걷잡을 수 없이 붕괴시켰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적 욕망만이 소용돌이치던 혼란의 와중에서 사회가 지켜내야 할 공공성은 무참히 찢겨나갔다. 그 빈자리에 자리 잡은 게 바로 강한 국가, 일류국가에 대한 달뜬 기대였다. ‘국가의 후퇴’가 ‘강한 국가의 열망’으로 나타나는 것은 초국적 자본이 판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동북아 중심국가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정부는 이런 국민의 열망을 잘 감지했지만, 시장주의와 국가주의 사이에서 분열병적으로 오락가락하다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해괴한 농담을 만들어냈고, 급기야 한미 FTA까지 밀어붙였다. 5년 내내 혼란스러워하던 중산층은 정권이 바뀌고서야 자신이 사는 나라의 실체를 깨달은 듯 이렇게 외친다. “이게 뭥미?”
거리집회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구호는 쇠고기 재협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물 민영화, 의료 민영화 등 수십 가지에 이른다. 거칠게 묶으면 모두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포기하지 말고 제대로 하라는 얘기다. 가히 국가의 귀환이라 할 만 하다. 그러나 여기엔 중요한 질문이 빠졌다. 대체 우리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직접민주주의의 '직' 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자들이 많다. 의회제를 폐지하자는 것도 아니고, '닥치고 쪽수'를 외치는 것도 아닌데(직접민주주의를 이렇게 이해한 사람이라면 답이 없다) 왜 저러나. 니들은 현실주의이지만, 니들보다 더 현실적이라 주장하면 냉소주의이고, 니들보다 오버한다 싶으면 낭만주의냐?
주민소환제라도 제대로 경험해보고 낭만주의 운운하면 내가 말도 안한다. 책 한권 읽은 인간이 제일 무섭다더니, 후마니타스에서 나온 책 몇 권 읽어보고선 좌파들 공격해대는 꼬락서니를 보니 어처구니가 없다. 현실주의라는 이름의 순치기계가 얼마나 인간을 체제내화시키는지 다시 한번 느끼는 나날들이다.
역시 이재영이다. 결국,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정당은 현실에 투신하는 것 밖에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활동가의 미덕일 테다. 이제 강단과 진보신당의 입장은 둘 다 설득력 있는 형태로 제출되었다.
그러나 촛불의 다른 측면은 여전히 은폐되어 있다. 국민소환제, 직접민주주의가 "초딩 수준의 정치 이해"(박상훈)이거나 "양날의 검"(조국) 또는 "지식인의 관념의 넋두리"(이재영)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그렇게 찍어눌러버려도 괜찮을 정도로 단지 무지에 따른 것일까? 유럽의 선진국에서 정당정치가 그렇게 잘 작동한다면, 왜 정당정치가 날이 갈수록 불신받는가? 왜 대의민주제는 신자유주의 앞에서 그렇게나 무기력한가? 정말로 정당정치가 잘 작동하지 않는 것, 보수독점의 정치구조가 온존하고 있는 것이 이 문제의 '최종원인'인가? 어쩌면 우리의 문제는 그보다 더 깊숙한 차원에 놓여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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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계속 운동이다”
[최장집 비판] 진보정당이 거리에 남아야 하는 다섯 가지 이유
이재영 www.redian.org
16일 시국토론회에서 최장집 교수가 발표한 세 쪽 반짜리 글 「촛불집회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촛불집회에 대한 진단 뿐 아니라, 1987년 이래의 민주주의를 평가하고 미래 한국 사회를 여는 데 귀중한 가르침이다.
“이번 촛불집회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시민들이 민주화라는 큰 얘기가 아니라, 그들의 실생활과 직결된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정책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라는 최 교수의 진단은 지금까지 나온 학자들의 촛불 인식 중 가장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운동이 자율적 결사체를 통해 시민사회를 활성화하는 데 몰두하는 반면, 제도정치 내에서 정당을 강화하는 데 무관심했던 결과 … 우를 범할 수도 있는 것이다”는 최 교수의 주장은 한국 진보정치의 발전 과정에서 경험적으로 확인된 진실로서, 반정치적 역량 소진에 몰두해온 가두분자들과 조합주의자들이 경청해야 한다.
“삶의 조건을 반영하는 이익과 요구는 정당을 중심으로 한 자율적 결사체들을 통해 최대한 광범하게 정책과정에 투입되어야 한다”는 그의 지론은 촛불집회 이전이든 이후든 올바른 정치관일 것이다.
촛불을 대의정치가 받아 안을 수 있는가?
그런데 최 교수의 올바른 정치관이 촛불집회의 향방을 논하는 특정한 정국에도 그대로 적용돼야 할까? 지금 그런 주장은 어떤 의미일까?
최장집 교수는 “무엇보다도 현대민주주의는 대의제민주주의라는 점이 다시 강조될 필요가 있다”며 ‘제도’에 대립되는 ‘운동’의 한계를 다섯 가지나 제기한다. 운동의 다섯 한계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하나의 정책이슈를 운동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할 때, 쇠고기수입협상 문제가 끝나면, 민영화, 교육 등 이슈가 출현할 때마다 시민들은 거리에 나설 수밖에 없고, 이명박 정부 임기 내내 한국의 민주주의는 국가와 운동 간의 충돌로 일관하게 된다.”
이슈 때마다 거리로 나오는 것은 참 괴로운 노릇이다. 하지만 민영화나 교육 이슈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지 않을 방법도 없고, 나오라거나 나오지 말라거나 사람들은 거리로 나올 것이 너무도 뻔하다.
위 인용문의 핵심은 “이명박 정부 임기 내내 한국의 민주주의는 국가와 운동 간의 충돌” 부분으로 읽히는데, 글의 전체 맥락에서 유추하자면 최 교수는 ‘국가’ 또는 ‘대의제도’인 이명박 정부와 거리운동이 계속 충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그런데 촛불이 꺼지든 말든 이명박 정부의 위기는 계속될 것 같다. 조금 더 학구적으로 표현해보자면, 이명박의 임기 5년은 ‘항시적 위기 체제’쯤 되겠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의 안정화를 기하자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 최장집 교수의 목소리는 운동의 제약으로써만 실천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최장집 교수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의 새삼스러운 ‘제도정치’ 강조는 어떻게 에두르든 “슬슬 정리되고 있는 거 아닌가? 이제 정치권이 받아 안도록 하자”는 메시지로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진다. 진의가 무엇이든 그런 해석이나 수용이, 공적 장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커뮤니케이션의 상례다.
진보정당이 촛불운동의 대안인가?
지금 제도정치를 강조하는 진보학자들은 대개 진보정당을 촛불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진보정당 강화론에는 ‘누가, 언제, 어떻게’와 같은 구체성이 결여돼 있다. 나는 아래 다섯 가지 이유로, 현 정국에서 운동에 반정립되는 진보정당을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첫째, 어떤 제도, 누구의 대의정치인가? 이명박 대통령이라는 제도와 한나라당, 민주당의 대의정치임이 너무도 명약관화하고 전혀 불변임에도 그리로 가자고 제안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게는 돌아갈 대의정치 같은 게 아예 없지 않은가?
지금 진보정치세력은 그들의 고향이었던 거리에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국회가 아니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거리에 국민의 눈길이 모이고 있다. 이 상황에서 ‘대의정치’는 유리한 싸움터를 버리고 불리한 싸움터로 들어서는 어리석은 짓이다.
둘째, 결국 제도정치로 다시 수렴된다 할지라도 왜 하필 지금인가? 6월 10일 이후 촛불집회가 교착이나 하강에 접어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진보정당이 조직적 수습에 들어갈 만한 시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거리로 나서게 한 원인들, 거리운동의 동인이 의연히 남아 있으므로 언제 더 큰 불길로 치솟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제도정치에서의 일탈이 10년이나 20년마다 주기적으로 반복된다는 평론가들의 분석은 나름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런 사후적 정리는 일주일이나 한 분기를 주기로 정세를 예측하고 개입해야 하는 실천가들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다.
진보정치세력의 관점에서 보자면 촛불집회와 같은 현상은 예측할 수 없는 부정기적 일탈이다. 지난 40여 일을 꿈도 꾸지 못했던, 우매한 진보정치세력에게는 늦게까지 남는 것이 가장 일찍 나오는 것일 수 있다.
셋째, 촛불집회와 같은 대규모의 사회운동이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론이나 분위기가 아니라, 작더라도 만질 수 있는 구체화된 성취가 있어야 군중은 낙담하지 않는다. 이 측면에서 지금은 진보정치세력의 몇 되지 않는 장기인 용의주도함, 집중력과 촛불집회의 결합이 더욱 필요한 시기이다.
넷째, 진보정치세력의 성장을 위해서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촛불집회에 가장 많은 그리고 진보정치세력에게 개방적인 사람들이 있다. 이런 기회를 빌어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지만, 사실은 진보정치세력이 촛불시위자들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동안 진보정치세력은 스스로가 쳐둔 울타리 안에서 안주했고, 그런 고립이 최근의 무기력으로 귀결된 것이다. 촛불집회는 진보정당에게 진정으로 부족한 것이 의석 이전의 문제, 촛불시위자들이 가지고 있는 판단력과 용기라는 것을 보여줬다.
다섯째, 늦게 들어간 사람이 늦게 나오는 게 세상 사는 도리다. 이리 재고 저리 살피느라 선두 역할을 못한 진보정치세력은 이제라도 끝까지 남아 후방을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최 교수의 말마따나 촛불집회가 그리고 진보정당이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면, 진보정당이 촛불을 지키는 것 역시 의미 있는 공적 과업이다.
시대에 편승하라
정당들은 언제나 혼란을 두려워한다. 조직적 이성이고자 하는 정당은 당연하게도 논리적으로 해명되지 않는 문제, 자신이 계획하거나 주도하지 않는 상황을 꺼려한다. 그래서 사회주의 정치세력조차도 1848년 유럽 섬유노동자들의 파업, 파리꼼뮨, 20세기 초 러시아의 혁명들에 소극적이거나 적대적이었다.
그런데 모든 혁명은 준비되고 추진되는 것일 뿐 아니라, 동시에 아노미다. 촛불집회 역시 생활과 문화에서 연성 혁명이면서, 동시에 정치에서의 연성 아노미다.
풋내기 진보정당인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이 촛불집회를 ‘지도’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지도능력이 없다면 1848년과 1871년에 지혜로운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민에게 편승하면 된다.
촛불의 내일에 노심초사하지 말자. 가라앉는 것을 두려워 말자. 떠오른 무엇이든 가라앉을 운명이 물질세계 철의 법칙이다.
이기지 못해 안달하지도 말자. 당장 이길 힘이 없으면 상대를 흔들어 놓는 것도 훌륭한 방책이다. 모든 것을 가진 이명박 정부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진보정당이 충돌했을 때, 잃는 쪽은 언제나 이명박일 수밖에 없다.
대통령 퇴진을 외치는 정치 시위를 ‘직접민주주의’라고 아전인수로 평하는 것은 지식인 관념의 넋두리이고, 이번 기회에 현재의 민주주의를 넘는 어떤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모든 정국에 강령을 갖다붙이는 운동권의 버릇이다. 한편, ‘제도정치가 중요하다.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는 주장의 단순 반복은 구체적 정세와 현실 주체를 묻어버린 일반론일 뿐이다.
현실에서 ‘제도’와 ‘운동’이 다른 영역에서 현상하므로 양자를 나누는 패러다임을 쓰는 것은 일면 타당하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제도는 운동의 귀착이거나 중간점이고, 운동은 제도의 생산자이며 동시에 파괴자이다. 정치는 제도를 지향하는 운동이고, 운동하는 제도이다.
나는 으레껏 거의 폭력적으로 진보정당을 되뇌어 왔다. 그리고 여전히 ‘결론은 정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진보정치의 제도화를 위한 ‘계속 운동’을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