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토코: 저는 34살까지 해두어야할 것들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츠코 교수: 사람에게 나이 같은 건 없어. 에두프스퀘어를 통과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을 뿐이에요. 당신은 오늘 에두프스퀘어를 통과하기 위해 발을 뗀 거예요. 아닌가요?
모토코: 그건 독립한다는 의미인가요?
나츠코 교수: ...아무튼 축하해요.
*에두프 스퀘어는 이집트의 호루스 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호루스는 매의 신이자, 현세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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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토코: 저는 바바짱이 되고 싶어요.
형사: 그녀는 범죄자예요.
모토코: 하지만 나도 도망가고 싶어. 부모로부터, 일로부터, 이런 나 자신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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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금고 직원으로 16년 동안 착실하게 출근하고 있는 하야카와 모토코. 34세에 아직 미혼인 그녀는 아직도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내의 유일한 말동무였던 '바바짱'이 공금 3억엔을 가지고 잠적하는 대사건이 벌어진다. 갑자기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진 모토코는 충동적으로 '출가'를 결심하고, 여자들만 사는 숙식제공 하숙집 '해피네스 산챠'의 새로운 입주자가 된다. 그 하숙집에는 인기 없는 만화가 키즈나와 대학의 인류학 교수인 나츠코가 살고 있다. 하숙집 주인인 유카(20세)는 스리랑카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대신 해피네스 산챠의 주인이 된 아가씨다. 이 네 명의 여성이 한 집에 모이면서 드라마가 시작된다.
<수박>은 신드롬을 일으킬 만한 드라마가 아니다. 일본 방영 당시에도 그리 높은 시청율을 기록하진 못했고, 한국에서도 '누구나 베스트로 꼽는 일드'에 들어가진 못한다. 11부 내내 드라마틱한 사건 따윈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작은 소동과 짧은 회한들이 소품처럼 배치되었다는 점에서, 차라리 일본의 그저그런 사소설(私小說)에 가깝다. 꽤나 취향을 타는 드라마란 얘기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서 결국 성패를 결정하는 건 캐릭터다. <수박>은 무심한 듯 그려낸 네 명의 여자와 기묘한 주변인물들이 한여름의 아포가또처럼 감칠맛을 내며 섞여들었다. 뜨거운 에스프레소와 차가운 바닐라 아이스크림.
흔히 여성들이 집단주연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는 재능있는 여자들이 닥치는대로, 혹은 입맛대로 남자를 갈아치우는 하렘물(난 하렘물의 최고봉으로 <섹스 앤 더 시티>를 꼽겠다)이거나, 아니면 피도 눈물도 없는 비겁한 남성들과 대결하며 동질감을 확인하는 것(성대결물)이기 쉽다. 후자의 경우는 너무나 안이한 방식으로 연대의식이나 자매애로 치장된다. 남성과의 대결을 위해 종종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하렘물과 성대결물의 혼합형도 많은데, 그런 경우 남성과의 대결은 훗날의 연애를 위한 떡밥일 뿐이다. 정작 여자들은 어떨지 몰라도, 남자가 보기엔 정말 구질구질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수박>은 이 모든 함정들을 뛰어넘는다. 어깨에서 힘을 빼면서도 지나치게 나른해지지 않으며 장면마다 개그가 폭발하지만 캐릭터의 힘이 그것을 페이소스의 차원으로 밀어올린다. 드라마 속 독신여성들은 연애에 그리 신경쓰진 않지만 그렇다고 글로리아 스타이넘처럼 "남자 없는 여자는 자전거 없는 물고기와 같다"며 호기를 부리지도 않는다. (그 말을 진짜로 믿는 여자들이 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수박>에서의 연애는, 우리 대부분에게 그러하듯 그저 접촉사고같은 것이다.
"여자는 재능 아니면 가슴!"이라 단언하는 엄마에게 모토코는 아무런 항변을 할 수 없었다. 어느 쪽도 자신의 무기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단독비행'을 위해 앞으로 한 발 나아간다. 실은 엄마도 알고 있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앞으로 내딛는 한 발, 그 작은 용기야말로 딸에게 가장 필요한 재능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단지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