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28. 06:10

굴뚝일보

이 겨울에 두 사람이 굴뚝에 올라가 있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뭐라도 해보자고 만든 굴뚝일보. 


짧은 글귀 하나 보탰다.



굴뚝일보_3호.pdf



https://www.facebook.com/gultukilbo


2014. 12. 22. 14:02

미생, 일베, 그리고 능력주의라는 쇠우리

<미생>은 ‘고졸’ 계약직 사원 장그래가 종합상사에서 샐러리맨으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주인공 장그래의 모습은 비정규직 천만 시대 청년들의 현실과 겹쳐 더 많은 공감을 얻었다. 웹툰도 그랬지만 드라마 버전을 보며 새삼 눈에 들어온 건 작품 속에서 개인의 능력은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묘사되고 일중독은 바람직한 것으로 그려진다는 점이었다.  (다소 관점이 다르긴 하지만 웹툰 <미생>에 관한 글은 3년 전에 하나 쓴 적이 있다. http://xenga.tistory.com/207 )


<미생>의 에피소드를 보면 주인공 장그래 이상으로 많은 이들의 호감을 얻는 오상식 차장이 계약직 사원들을 호출해 주말 내내 호텔에서 업무를 하게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갑자기 쓰러진 동료의 일을 나누자는 '좋은 취지'였지만 그것이 초과근로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을 왜 계약직이 떠안아야 하는 건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저 훈훈한 미담이요, '미생에서 완생으로 가는' 과정의 하나로 취급될 뿐. 


<미생>이라는 작품에는 상사의 폭언과 강압, 부당노동행위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진다.초과근로 따위 애교로 보일 정도. 하지만 노동자들이 단결해 저항하거나 노동조합이 나서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부당한 현실에 대한 대처는 전부 개인의 몫이며 그 해결도 개인들의 호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그래서 더 리얼해 보이는 것일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작품 전반에 깔려있는 능력주의다. 능력주의란 쉽게 말해 인간의 능력은 측정가능하며, 그에 따라 차등대우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몇 년 전 방송된 드라마 <직장의 신>도 이런 능력주의 신화를 전제하고 있었다. 알려졌다시피 <직장의 신>은 일본 드라마 <파견의 품격>의 리메이크작이다. 거기서 주인공인 파견직 여성은 거의 모든 업무에서 달인의 경지에 오른 만능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설정은 당연하게도 '무능한 대다수 정규직'과의 대비를 극대화할 수 밖에 없고, 이는 곧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사회모순을 풍자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물론 비정규직이라해서 무능한 게 아니며 정규직이라해서 유능한 게 아니라는 지적은 그 자체로 올바르다. 하지만 그런 당연한 지적이 발딛고 있는 토대는 생각보다 훨씬 모호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능력에 대한 선망, 그리고 무능력에 대한 은밀하거나 노골적인 혐오를 정당화하는 문제는 그리 무자르듯 간단치 않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능력'이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객관적"으로 평가되고 판단되는가라는 물음, 그것은 이데올로기 분석을 수반하는 발본적 질문이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자본주의, 소비자주의, 반생태적 생산력 중심주의를 내면화하면 할수록 극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지는, 일종의 인식론적 쇠우리다. 즉,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능력주의자인 것이다. 


뜬금없지만 일베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로 하자. 이들의 심층적 동기는 그들을 “사회 낙오자 집단” 또는 “불가해한 괴물”로 규정하는 나태한 진보인사들에게 결코 포착되지 않는다. 젊은 여성, 이주노동자, 정치적·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이들의 혐오는 자신들이 부당하게 피해를 입고 있다는 피해자 의식에 기인한다. 누구로부터의 피해인가? 바로 ‘자격과 능력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다. 즉 남자의 등골을 빨아먹는 “김치녀”, 한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외국인 노동자, 민주화운동 경력을 훈장삼아 호의호식하는 진보진영이다. 이런 자들이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애국시민”들의 몫을 빼앗아가고 있다는 감각, 일종의 정의감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그 감각의 뿌리를 더듬어가다 보면 극단화된 능력주의가 놓여있다. 이 능력주의는 능력에 따른 차등대우를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무능력자에 대한 배제와 증오를 정당화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소수자와 약자를 2등 국민화하는 인종주의와 연결된다.


일베의 능력주의는 미생의 능력주의와 그리 멀지 않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근대 이후에 겨우 형성된 평등에 대한 감각이 유례없이 희미해진 오늘날에 와서는 더욱 그렇다. 미생과 일베는 같은 층위에서 논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지만 청년세대의 두 측면을 부각시키는 키워드이다. 동시에 그 둘은 한국사회에 내면화된 능력주의의 두 가지 판본을 보여주는 절묘한 텍스트다.



2014. 12. 15. 15:10

<음모론의 시대>라는 책

전상진 선생님의 책 <음모론의 시대>가 출간되었나보다. 아직 읽지 않았지만 과거 논문이나 강의를 통해 미뤄 짐작하건대, 음모론에 대해 쓴 한국어 텍스트 중 가장 정교한 논의를 담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주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시길. 





2014. 11. 24. 14:21

4년 관심사의 일단락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가 조금씩 반향을 일으키나보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다. 어마어마한 판매량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이 읽어줬으면 하는 마음은 누구나 비슷할 것 같다. 


한국의 극우주의 연구, 내 스스로 '네오 라이트 연구'라고 이름붙인 이 과제는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엔 일베는커녕 넷우익이라는 말조차 생경했던 시절이다. 대학원 수업의 텀 페이퍼로 나는 '한국 반이주노동자 커뮤니티의 담론분석'을 제출했고 제법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점수가 아니라 연구주제의 발굴이라는 면에서 말이다. 


그때 처음 사용한 말이 바로 '네오 라이트 Neo-Right'였다. 그것은 과거의 친일/친미 성향의 기득권 우파들(old-right), 관변세력화한 지식인 중심의 뉴라이트(new-right)와 전혀 다른 우파의 등장을 가리키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었다. 무엇보다 극우주의라는 이슈는 내 30대 중반기를 지배해온 '사회적 적대의 재구성'이라는 더 큰 문제의식의 하위 주제였다.


이후 일베가 등장하면서 마치 새로운 넷우익이자 넷우익의 유일한 대표격으로 사람들이 인식하게 됐지만 일베를 욕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일베를 혐오물질 또는 괴물로 생각했기에 사유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물론 일베에 대한 분석으로 나온 글과 책이 간혹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사회현상의 분석이라 보기엔 민망한 수준의, 전혀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이었다. 


사회현상의 특이성에 매몰되어 오히려 그 현상이 가지는 의미가 제대로 이해되고 해석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일베가 처음 등장했을 때, 나는 즉각 반이주노동자 커뮤니티를 떠올렸고, 이후에 일본의 재특회를 주요한 참조대상으로 끌어왔다. 비슷하면서 전혀 다른 그 각각의 극우주의들을 교직하고 대조하는 과정에서 일베의 특이성은 내가 미처 예측하지 못한 지점에서 출현했고, 나는 그에 대한 대답을 네트워크 주체론에서 찾았다. 물론 다른 이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있었을 게다.


2010년 반이주노동자 커뮤니티 분석에서 시작된 개인적인 프로젝트는 2012년 <우파의 불만>(공저)이라는 책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2013년 얼개를 완성했던 일베 담론분석은 2014년 11월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공저)로 출간됐다. 이로써 한국의 주요 넷우익에 관한 담론분석은 대충 일단락되었다. 다시 밀린 숙제들을 하러 가야겠다... 


덧.


<미디어스> 한윤형 기자, 그리고 <한겨레> 최원형 기자가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서평을 잘 써주셨다. 링크를 걸어둔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477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65481.html



2014. 11. 6. 17:21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출간


공저한 책이 한 권 나온다. 다음주 쯤엔 매대에 깔리지 않을까 싶다. 일베가 과잉대표된 탓에 일베에 대한 몇 안되는 저술들 역시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기존 진보에 대한 젊은 세대의 불만 내지 인정욕구 정도로 협애화하는 관점이 대표적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일베의 스펙터클 자체에 매몰되거나 최근의 현상인 촛불시위 같은 것만 봐서는 일베라는 사건을 제대로 의미화할 수 없다. 일베 이전의 넷우익들, 극우정치와 극우종교가 널리 뿌리내린 사회적 배경, 미디어환경의 변동, 외환위기 이후 사회경제적 변화 등의 맥락을 고려해야만 일베 현상에 대해서도 입체적인 접근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일베는 '뿌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극우주의-극단주의라는 거대한 조류의 잔물결 중 하나일 뿐이다. 이 책은 그런 고민의 중간결산이라 할 수 있다. 

2014. 1. 11. 17:56

'기레기'들에 관한 쓸데없는 잡감

유사언론, 유사보도라는 표현이 유행이다. 지상파는 거의 전두환 시절로 돌아갔다. 내가 전두환 시절을 살아봐서 안다. '거의' 돌아갔다. 더 나빠진 면도 있다. 기자들이 광고 걱정하며 기사를 쓰는 풍경 말이다. 물론 예전에도 그런 일은 있었다. 그러나 수치스럽다는 감각이 존재했다.  '내지르는' 후배에 대한 선배들의 애정이나 지지도 실은 그런 감각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지금은 기자가 광고를 따러 다니는 풍경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옛날이 좋았다'는 식의 미화는 물론 아니다. 난 언론사나 기자들이 과거에 비해 내부관행이나 개인의 역량이란 측면에서 훨씬 진보했다고 생각한다. 


정보통신기술, 미디어환경의 변화는 분명 중대한 변수다. 그러나 무엇보다 언론이 이런 쓰레기장이 되어버린 것은 현실권력, 대중, 언론 삼자가 서로를 핑계로 자신의 질적 하락에 조금씩 너그러워지고 또 조금씩 용서해버렸던 역사가 상호작용하고 축적된 결과다. 


여전히 보석 같은 기사들, 출중한 기자들이 즐비한 언론이 존재한다. 하지만 대중은 외면하고 권력은 탄압한다. 팩트 체크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칼럼 모음들, '찌라시'에 돌아다닐 법한 음모론을 모아다 '신내린 예언'으로 과장하는 팟캐스트들이 '대안언론'을 표방한다. 가장 저열한 기사, 가장 저질인 기자들이 "기레기"란 이름으로 조롱거리가 되며 미디어 전체를 대표하고 있다. 


미디어란 모순적인 공공재다. 미디어는 철저하게 민영화되어야 비로소 공공재가 될 수 있다. 여기서 민영화는 사유화와 다르다.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인민이 공동소유하고 운영하는 본래적 의미의 민영화다. 미디어는 최종심급이 되면 절대적으로 타락한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서로를 감시할 머리가 셋 달린 켈베로스의 개가 되어야 한다. 자고로 '영물'을 만드는 데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자본이 필요하고 인민의 의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둘 중 하나라도 있는가? 아니 그 이전에, 우리에게 '제대로 된 언론'에 대한 합의라는 게 애초에 존재했던가? 


어떤 이들은 '이제 개인이 미디어가 되는 시대'라며 낡은 형식의 언론 모델이 종언을 고했다고, 혹은 종말에 가까워졌다고 선언한다. 기성언론 모델이 너무 낡았고 비용이 많이 든다는 데 전면적으로 동의한다.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 동감이다. 나 또한 창발적 개인들이 기존 미디어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다 생각한다. 충분할 정도로 많은, 충분할 정도로 교육받은 사람들이 충분할 정도의 여가를 확보한다는 전제만 충족된다면 말이다.  

2012. 3. 26. 17:08

<88만원 세대> 절판 관련해 공동저자로서 입장을 밝혀둡니다

오늘 새벽 <88만원 세대>의 공동저자 우석훈 씨가 이 책을 절판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다른 공저자 및 출판사와 사전협의는 없었다. 낮에 언론사의 취재전화를 받고 우석훈 씨 블로그에서 관련 내용을 보게 되었다. 이미 몇몇 매체를 통해 해당내용이 보도가 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오늘 오후 출판사로부터 공식적인 연락을 받았다. 출판사 역시 우석훈 씨의 새벽 '절판선언' 이후에 그에게서 전화를 받았다고 나에게 밝혔다. 우석훈 씨의 일방적인 결정이 유감스럽다. 그가 블로그에 남긴 글도 그리 납득이 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이건 또 무슨 이벤트이고 마케팅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이 모든 과정에 동의할 수 없지만 그러나 절판이라는 결론에는 동의한다. 살다보면, 동기는 달라도 결과물이 같은 때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간략하게 입장을 정리해 둔다.


1. 공동저자 중 1인으로서 <88만원 세대>의 절판에 동의한다.


2. 그러나 우석훈씨가 내세운 절판의 이유에 동의하지 않는다.


3. <88만원세대>라는 책의 한계는 우석훈씨가 말한 것처럼 '청년들에게 싸우지 않을 핑계를 제공해서'가 아니다. '책을 읽고도 청년들이 싸우지 않는다. 실망했다'는 식의 주장은 이 책에 대한 과대평가다.


4. <88만원세대>의 한계는 일차적으로 그 책의 내용에, 즉 저자들에게 있다. 그 한계를 청년세대에게 모두 전가해선 안된다.


5. 내가 절판에 동의하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밝혀온 것처럼  <88만원 세대>라는 책의 시대적 역할과 한계를 공히 절감해왔기 때문이다. 


6. 이 책의 한 구절이라도 보았을 모든 독자들께 마음을 다해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한다.

2011. 7. 13. 13:45

출산율, 부르주아 감별의 최종심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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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병기 그녀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5071417051&code=940702

2007년 원자료는 못찾았고, 2006년 자료를 구글로 찾아보니까 PDF파일이 있다. 2006년 조사에서는 한국이 조사대상에서 빠져있었다. 아무튼 2006년 랭킹 30위권에서 40위권 국가들을 보니까 카자흐스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아르메니아, 온두라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엘살바도르, 몽골, 에콰도르 등이다. 대한민국은 대충 요런 수준이라고 보면 되겠다.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여성이라면 한국에서 절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을 것 같다.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남성이라면 절대 이런 나라에서 아내에게 "아이를 가지자"라고 말 못한다.

총파업이 '개그'가 될 정도로 막장에 몰린 한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남은 최후의 무기는 여성들에게 쥐어져 있다. 남성동지들이 주둥아리로만 혁명을 외치고 있을 때, 이미 우리의 여성동지들은 사전 회합 한 번 없이도, '이심전심의 연대투쟁'을 진행하고 있었다. 지도부도 선도투도 없는 기묘한 파업, 바로 출산파업이다. 절대다수가 비정규직 노동자인 그녀들은 소름끼치도록 조용히, 그리고 치명적으로 한국 자본주의를 내파하는 중이다. 이것은 공장을 멈추는 것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자본주의의 재생산 메커니즘 자체를 정지시키겠다는 위협이다. 그야말로 '최종병기 그녀들'.

☆ # by 쟁가 | 2007/05/07 18:34 | 공중부양 다이어리 | 트랙백(2) | 핑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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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트윗에서
@windburial 님하가  출산율 관련해 내 글을 언급하셔서 '잉? 예전에 내가 그런 글을 썼던가'하며 찾아봤더니, 있었다! 이글루스 블로그 시절인 무려 4년 전에. 또 2008년 촛불집회 다음날 써서 시사인 지면에 발표한 글에도 '언니들의 출산파업연대'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http://xenga.tistory.com/19
장담하는데 앞으로 4년이 더 지나도 한국 부르주아는 출산파업 저지 못할 거다. 개도국 단계이후의 출산율은 각 사회 부르주아의 수준을 감별하는 최종심급, 가장 정확한 평가지표 중 하나이기 때문.

2011. 4. 20. 12:14

<당신과 나의 전쟁> DVD 발매



드디어 나왔네요. <당신과 나의 전쟁> DVD입니다. 판매는 한국독립영화협회가 맡았습니다. 가격은 2만원입니다. 판매 수익금은  해고 노동자에게 전달된다고 합니다.

http://shop.kifv.org/
2011. 4. 1. 13:45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서평

교육공동체 <벗> 창간준비호에 실렸던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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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수업’에 담긴 20대의 진짜 목소리
엄기호(2010),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푸른숲


이 책의 ‘들어가는 글’을 3분의 1 정도 읽었을 때 직감했다. 내가 쓰고 싶었지만 쓰지 못했던, 바로 그 이야기라는 것을. ‘내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말하기 위해서는 <88만원 세대>에서부터 출발해야할 듯싶다. 나의 첫 월급을 모티브로 만든 신조어 “88만원 세대”가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면서, 또한 본래 의도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비되는 걸 지켜보면서 참 많은 고민을 했다. 우파적 프레임에 전유된 세대론, 사회문제를 세대의 특성으로 환원시키는 경향에 대해 단호하게 선을 긋고 싸우기도 했다. 심지어 같이 책을 쓴 우석훈의 행보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을 정도로 말이다(2009년 초 <조선일보>가 열심히 띄우고 있던 소위 ‘실크로드 세대론’을 그가 <한겨레> 지면을 통해 공식 지지했던 게 발단이었다).

나는 왜 그렇게 까칠했어야 했나. <88만원 세대>라는 책의 장점과 한계를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어서다. 많은 이들이 올바르게 짚었듯이, 이 책의 장점은 1997년 이후 10여 년 간의 사회경제적 격변을, ‘세대’라는 틀을 통해 직관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계도 명확했다. 그 한계란 몇몇 교조적 좌파들이 비난하듯 계급 문제를 세대 문제로 환원시켰다는 점은 아니다. <88만원 세대>는 한국사회의 모순이 세대 모순의 형태로 ‘표현’된다고 주장하는 책이지, 세대문제 그 자체라 단언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했듯 그런 식의 ‘세대환원론’에 대해 나는 누구보다 격렬하게 저항해왔다. 내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88만원 세대>의 한계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애초 내 집필동기였던 ‘불안정노동’이라는 의제가 너무 미진하게 다루어졌다는 점. 둘째, 88만원 세대 자신의 목소리가 없다는 점.

‘20대 담론’의 구조적 제약을 깬 현장성

첫 번째 한계에 대해서는 틈날 때마다 이런저런 글이나 강연을 통해 보강하거나 강조했으므로 변명의 여지라도 있다. 그런데 두 번째 한계는 아예 공백상태나 마찬가지였다. <88만원 세대> 이후 “20대 필자를 발굴하자”는 공감대 혹은 유행 같은 게 생겨나서, 몇몇 20대가 책을 내기도 했지만 완성도를 떠나서 과연 이게 우리 시대 청춘들의 생각과 현실을 보여주는 것인지 의문스러웠던 게 사실이었다. 몇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일단 대표성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88만원 세대’의 대표주자로 부각된 청춘들이 너무 ‘엄친아’들인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IN 서울’의 내로라하는 명문대 출신의, 소위 ‘예비 먹물’들이었다. 그들은 기성세대나 기성언론들이 자신들에게 원하는 어떤 속성들, 예컨대 “발칙”“재기발랄” 같은 것들에 대해 혐오와 반감을 드러내면서도 정작 생산된 말과 글을 보면 기성세대가 원하는 형태가 되기 일쑤였다.

물론 이건 20대의 잘못이 아니다. ‘결과물’을 통제하는 건 결국 기성세대요 매체이니까 일종의 구조적 제약에 가깝다. 이런 상황은 그 자체로, 세대담론이 기성세대에게 어떤 식으로 ‘선택’되고 ‘배제’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기성세대가 원하는 것은 한 마디로 ‘싱그러운 청춘들의 고난극복기’다. 그래서 명문대 다니는 20대는 필연적으로 자기 처지보다 과한 ‘찌질함’을 연출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그게 지나쳐서 중간계급 부모를 둔 명문대생이 정말로 자신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불행한 청춘이라 믿어버리는 ‘웃지 못할 과잉’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88만원 세대’라 할, 대다수 20대들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는가? 이른바 ‘기타대학’ 또는 ‘지잡대’에 다니는 20대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는가? 엄기호의 이 책,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는 바로 그런 20대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그러나 그 하나하나에 사회적 의미를 엮어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본문에 나온 대학생들의 말글은 깜짝 놀랄 정도로 명석할 뿐 아니라 풍부한 감성과 예리한 직관을 거침없이 뿜어냈다. 과연 어떤 매체가, 어떤 저자가 청춘들의 지적 성장을 이 정도로 깊이 있고 생기 있게 담아낼 수 있었을까. 나는 이런 성취가 가능했던 결정적 이유 중 하나가, 담론이 아니라 현장에 철저히 집중한 접근방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세대담론이 아니라 페다고지였기에 비로소, 우리 시대 청춘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김진경과 조한혜정

엄기호의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돌아다닌 두 권의 책이 있었다. 김진경의 <스스로를 비둘기라 믿는 까치에게>, 그리고 조한혜정의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가 그것이다. 나에게 “페다고지”하면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파울로 프레이리가 아니라 김진경과 조한혜정일 정도로, 의미가 참 각별하다. <스비까>는 참된 스승에 대한 사춘기 시절의 갈망을 상징하는 책이었고, <글 읽기 삶 읽기>는 내가 발 디딘 현실에서 사유가 출발해야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계기가 된 책이다. 사실 두 책은 내용이나 감수성이 무척이나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육현장에서의 경험에 기반한 생생하고 구체적 사례들이 넘쳐나는 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내가 보기에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는 김진경과 조한혜정의 각각의 책이 지닌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는 것 같다. 엄기호가 “우리의 수업은 선포된 ‘진리’에 맞서는 일”이라고 말할 때, 쉬운 길을 알면서도 굳이 그런 효율성을 거부하는 교육자의 진정성이라는 측면에서 김진경과 참 많이 닮았다. 한편으로 엄기호는 학생들의 분절된 경험들을 다양한 개념과 이론으로 언어화시키도록 하고, 그런 자기 삶의 살아있는 해석이 얼마나 매혹적인 경험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조한혜정과도 닮았다. 조한혜정에게서 직접 배운 엄기호가 스승을 닮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 있겠지만, 스승의 좋은 점을 닮을 수 있는 제자가 사실 몇이나 되겠는가.

어쨌든 그 결과, 이 페다고지는 뭐라 명확히 정의하기 난처한 다층적인 텍스트가 되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20대가 세상을 읽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한 지식인이 20대를, 그리고 세상을 읽는 방식을 보여주는 텍스트이다. 또한 각각의 특정한 이슈들에 대해 같은 세대라 해도 얼마나 다르게 볼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의견들이 충돌하고 뒤섞이는지를 볼 수 있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에 대해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고 전달받는다는 식의 관점을 갖고 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텍스트다. ‘무지한 스승’ 조제프 자코토의 사례를 통해 스승과 제자의 지적/지능적 평등을 자명한 공리로 전제하자고 주장하는 랑시에르처럼, 엄기호는 자기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지적 능력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학생들은 자신의 삶을 더없이 지적인 언어로 해명하고 있다. 여기에 논술식 모범답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은 “20대의 문제는 이것이다” “20대의 삶은 이런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분류하고, 정의하는 것 보다 20대와 함께 현실을 사유하고 토론하는 것이 20대의 삶과 사유를 더 풍부하게 보여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청춘의 노동’에도 페다고지가 필요하다

이 책의 뛰어난 성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20대 담론에는 공백이 남아있다. ‘청춘의 노동’, 특히  대학중퇴자, 고졸 이하 학력의 20대 저임금-블루컬러 노동자들 말이다. 이들이 수적으로 다수는 아닐지 몰라도 이들 역시 ‘청춘’임에 틀림없다. 산업임금구조의 가장 밑바닥을 전전하는 이들 젊은 육체노동자들은 ‘청춘’인지 아닌지를 묻기 전에 ‘인간’의 조건을 먼저 물어야할 정도로 비참한 처지에 놓여있다.

88만원 세대가 대학교와 고시원에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88만원 세대 중의 88만원 세대’는 동희오토에서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있다. 그들은 세대 내부 경쟁과 세대 간 경쟁 뿐 아니라 ‘인종 간 경쟁상황’에 놓여있다. 동희오토 노동자의 20%는 외국인 노동자다. 이 사실은, 88만원 세대가 ‘삼중경쟁’의 톱니바퀴에 끼여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들 대다수는, 당연한 말이지만 <88만원 세대>라는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 모른다. 정지훈 씨와 같은 젊은이가 스스로 입을 열어 그 고통과 분노와 불안을 전하지 않는다면, 아마 대다수의 시민들 역시 그들 존재를 알지 못할 것이다. 광화문에서 촛불이 타오를 때 122km 떨어진 서산에서도 촛불이 타올랐다. 그러나 그 사이엔 물리적 거리보다 더 아득한 심연이 존재한다.   
-박권일(2008), ‘동희오토, 미래를 교살하는 공장’,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321797.html

젊은이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꿈이나 사랑, 열정 따위의 단어는 자주 입에 올리면서도 알바 계약서를 어떻게 써야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입에 올리기를 거북해한다. 부당하게 해고를 당해도 ‘억울하면 사장해야지’라고 생각하지 노동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려는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나는 불안정노동 등의 노동담론을 세대 담론으로 만들자고 주장하는 게 결코 아니다. 반대로 젊은이들의 일상 속에 노동담론을 적극적으로, 그러나 자연스러운 형태로 담아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청춘들의 삶이 불안정노동으로 꾸려진다는 점을 떠올릴 때, 기존의 딱딱한, 게다가 정규직 노조 중심의 노동담론으로는 이 문제를 사실상 풀어내기 어렵다. 요컨대 ‘청춘의 노동’에도 역시 이 책처럼 탁월한 페다고지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가 앞으로 ‘청춘의 노동’ 담론의 출발점이 되었으면 좋겠다.

2010. 6. 18. 09:20

카본 로드바이크로 할 수 있는 것들



2010. 4. 28. 17:04

[추천사] "이것이 우리시대의 리얼리즘이다"



<한겨레21>에 연재됐던 '노동OTL'이 제목을 바꿔 책으로 묶여나왔다. 하종강 선생님과 내가 추천사를 썼다. 굳이 2009년 한국기자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노동OTL'은 그야말로 2009년 최고의 기획기사 중 하나였다. 웬만해선 이런 얘기 안하는데, 정말 강추다. 아래는 내가 쓴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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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우리 시대의 리얼리즘이다!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을 치열하게 그려내는 것이 당대 예술의 정수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누구도 예술에게 그런 주제넘은 요구를 하지 않는다. 문학에도, 영화에도, 음악에도. 그러나 2010년이라는 시점에 만약 아직도 그런 감수성을 위해 비워둔 자리가 있다면 그곳에 <4천원 인생>이 꽂혀야 한다. 이 책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리얼리즘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점심 식사 후에 4200원짜리 카푸치노를 마시며 아이폰으로 트위터 하는 노동자는 나오지 않는다. 수백 명 씩 모여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른 채 일사불란 팔뚝질을 하는 노동자도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마트에서, 갈빗집에서, 닭공장에서, 주유소에서 하루 종일 일해 1백만 원 남짓한 돈을 손에 쥐는 노동자들이 나온다. 그/녀들은 가난하며 늘 어딘가 아프고, 그/녀들의 가족도 가난하며 늘 아프다, 그/녀들은 너무 마르거나 너무 뚱뚱하며, 10년 동안 휴일 없이 일하다가 자궁에 종양이 생겨서야 휴가를 얻는, 그런 노동자다. “군대 있을 때 빼면 투표한 적이 한번도 없다”고 말하는 영호 씨와 “한 달에 2백만 벌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는 영희 씨는 근로계약서를 썼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용역업체 사장을 “인간적으로 믿는다”고 말한다. 그/녀들에게 ‘노동조합’은 ‘청와대’만큼이나 현실감이 없는 단어다.

그/녀들은 서비스업종에 종사하는, 그래서 대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저임금․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순간 외에는 ‘투명인간’ 취급받기 일쑤다. 하지만 사람들은 변기에 앉아있다 문 아래로 쑥 들어오는 대걸레에 매번 까무러치게 놀라며 화를 벌컥 내면서도 이 아주머니들이 얼마를 받고 어떤 환경에서 일하는지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 사람들은 피로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들을 스쳐지나간다. 마치 어떤 물건 하나가 거기 놓여있다는 듯이. 그런 살풍경을 어느 마트 노동자는 이렇게 썼다. “삶의 피로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어린 아이들만 시선을 허락한다. 그들은 모자 쓰고 앞치마 두른 나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5m 매대 앞을 오가는 진자 운동을 하루 종일 하다가, 나는 문득 사람의 눈길이 그리워졌다.”

2000년대 이후 한국에서 노동문제의 ‘현장‘은 많이 바뀌었다. 과거의 핵심 ‘현장’이 울산과 같은 지역의 대공장이었다면 지금은 수도권의 중소 규모 작업장들, 대형마트, 골프장, 초․중․고․대학교, IT업체, 프랜차이즈 음식점과 같은 서비스 영업장이다. 물론 서산의 동희오토처럼 큰 제조업 공장이 이슈로 떠오르는 경우도 있지만, ‘비정규직’이 워낙 급속히, 그리고 무차별적으로 확산되다보니 ‘현장’이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사실상 사회 전체가 노동문제의 현장이 되어버렸다. <4천원 인생>은 ‘한집 걸러 비정규직’이 아니라, ‘비정규직  없는 집이 없는’ 2010년 한국의 현실을 생생히 업데이트해 보여주고 있다. 책을 읽으며 과거 기자시절을 내내 반추할 수밖에 없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기자생활의 절반을 ‘불안노동(precarious labor)’의 현장에 있었던 까닭이다. 그 현장은 벼랑으로 내몰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회사 용역들과 피 흘리며 싸우는 현장이기도 하지만, 정규직 노조가 회사와 한편이 되어 비정규 노동자를 잘라내는 현장이기도 했다. 또한 말쑥하게 차려입은 자들이 가장 힘없는 사람들에게 경제위기의 책임을 전가할 법과 제도를 궁리하는 현장이기도 했다.

내가 ‘비정규노동’이라 하지 않고 굳이 ‘불안노동’이라 부르는 이유가 있다. 첫째, 정규직/비정규직이라는 구분만으로는 만성적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오늘날의 노동자들의 처지를 총체적으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 불안노동의 전면화를 상징하는 신조어 ‘프리캐리어트(precarious+proletariat 불안노동자)’가 유럽을 넘어 세계적으로 널리 통용되는데서 알 수 있듯이 비정규노동이라는 용어보다 불안노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한국의 현실을 다른 사회에도 보다 간명하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불안노동’이라는 말이 물질적 처지 뿐 아니라 실존적 불안에 늘 시달리며 점점 황폐해지는 영혼의 상태까지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세계적 문제라고 해도 OECD 국가 중 한국만큼 이 문제가 심각한 국가는, 단언컨대 없다. “비정규직”이 시대적 화두가 된지도 10년이 넘었지만, 성찰과 개선은커녕 갈수록 악화일로다. 특히 생애 첫 취업을 앞둔 20대, 고졸 이하 노동자, 여성, 장애인 등 가장 약한 집단이 일방적으로 희생당해왔고 여전히 희생당하고 있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한국은 OECD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고 그중에서도 청년세대의 자살률이 유독 높은 나라가 됐다. 출산율 또한 세계최저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지난 개혁정권 10년과 이명박 정부 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국가적 차원에서의 ‘희생양 만들기’였다.

그러나 이 책에 이런 식의 어렵고 추상적인 이야기는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희생양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담담히 들려줄 뿐이다. 불안노동의 현장은 그야말로 사연의 바다, 그것도 기막히고 황당한 사연들의 거대한 바다다. 그 사연들을 통해 우리는 ‘희생양들’이 그저 어딘가에서 고생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객관화하다가도 때로 희화화하고, 때로 주체적으로 저항하지만 주류질서에 쉽게 굴복하기도 하는, 모순적이지만 뜨겁게 살아 숨 쉬는 인간임을 새삼스레 발견한다. 그리하여 책을 덮을 때에는 알게 될 테다. 노동의 막장에 내몰린 그/녀들만이 아니라 재벌과 가진 자들의 정부 앞에서 실은 우리 모두가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단지 상품을 구매하는 딱 그 순간에만 겨우 인간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4천원 인생>은 노동자라면, 아니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야한다. 하지만 읽고 끝내버려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노동’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경험을 공유하고, 문제점을 지적하고, 불평불만을 시끄럽게 늘어놓으시라. 현실을 바꾸는 건 거기서부터다.

2010. 4. 14. 14:05

우왕ㅋ 굳

(제일 앞이 칸첼라라. 바로 뒤엔 꽃미남 부넨)

Prais-Roubaix 2010을 생중계로 보다가 팬이 되어버렸다. 거의 한 시간 동안 압도적인 독주로 우승해버린 Fabian Cancelara. 1981년생. 스위스 국적의 이 선수는 TT(time trial) 경기의 최강자로 군림해온 선수로 워낙 유명한데, 올해 분위기가 심상찮다. 투르 드 프랑스보다 유서 깊은 자전거 경기, 원데이 클래식 중의 클래식이라 할 Prais-Roubaix에서 우승했을 뿐 아니라 바로 전에 열린 Tour of Flanders까지 먹었다.

(파리-루베 경기의 '평소' 모습. 일단 길바닥부터가 사이클 타라고 만든 도로가 아니다.-_- 연쇄충돌과 크고 작은 부상은 몇 분에 한 번씩 일어나고, 최고수준의 내구도를 자랑하는 부품들조차 가혹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작살이 난다.) 


랜스 암스트롱의 경우 암투병 경력에다 투르 드 프랑스 7연패를 했어도 나에겐 별 감흥이 없는 선수(아마 10연패를 했어도 마찬가지일 듯). 하지만 故 마르코 판타니, 알레산드로 발란(2008년 세계선수권에서의 전설적인 브레이크 어웨이), 그리고 이 파비앵 칸첼라라의 경우 단 한경기만으로도 빨려들어가듯 매료된다. 어느 분야나 객관적인 성적을 능가하는 '매력', '심장의 떨림' 뭐 이런 감흥을 주는 선수들이 실재한다. 롯데 자이언츠 경기를 보면서 "병신같지만 왠지 멋있어"라고 하던 어느 후배녀석이 떠오른다.ㅎㅎ 물론 칸첼라라는 롯데와 전혀 달리 우승을 밥 먹듯 함..

요렇게 보니 이 횽아 은근 귀엽다능..
2010. 3. 26. 14:24

트위터 시작

요즘 트윗 안하면 어디가서 잉여라 명함도 못내민다며...ㅋㅋ
그저께부터 시작했는데 사람들 면면을 보아하니 역시 그 나물에 그 밥.

http://twitter.com/fatboyredux
2010. 3. 23. 10:34

무상급식 반대의 몇 가지 논리


무상급식이 다가온 선거 최대의 이슈로 점화했다. 무상급식하면 당장 나라가 엎어질 것처럼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는 부자정당-극우언론들을 보니, 확실히 아프긴 아팠나보다.  하긴 "애들 굶는데 무슨 선진일류국가냐"라는 무상급식의 윤리는, 흡사 "인민이 굶는데 무슨 사회주의냐"라는 말처럼 통렬한 데가 있다. 무상급식 반대론은 현재까지 나온 것들만 놓고 보면 크게 세 종류로 나눠볼 수 있는 것 같다.

1. "무상급식? 요런 씹어먹을 빨갱이 놈들!"
2. "부유층 자녀 공짜점심은 형평에 어긋나고 돈 낭비니까 절대 안돼!"
3. "복지정책 '몸통' 놔두고 지엽말단적인 무상급식만 주장하는 건 유치빵꾸똥꾸!"

1번은 아무리 잘 봐줘도 논리라고 할 수는 없는 수준이다.  짐승이 긴장하면 털과 꼬리를 바짝 세우듯, 그저 동물적 반응일 따름이다. 슬픈 건, 한국의 보수라는 사람들이 대부분 요 수준이라는 점이다. 그나마 논의해볼만한 게 2번과 3번이다. 2번부터 보자. 부유층 자녀에게 공짜점심 주는게 형평에 어긋나니까 안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모럴해저드"라고 주장하는 자들까지 있다. '고양이 쥐 생각해준다'는 말은 요럴 때 쓰라고 있는가보다. 세금을 왕창 걷을 필요도 없이, 한국이 지금 가진 여윳돈만으로도 우리 아이들에게 질 좋은 급식을 평등하게 먹일 수 있다. 우리 비록 동북아 변방의 소국이지만 이제 그 정도 능력은 되는 사회다. 만에 하나 돈이 조금 모자라도 걱정없다. '걱정도 팔자'인 부유층이 제 자식 위한다 생각하고 세금을 더 내면 될 게 아닌가. 만일 부유층 자녀에게도, 빈곤층 자녀에게도, 중산층 자녀에게도 학교에서 똑같은 점심밥을 제공하는 것이 정말로 국가가 저지르는 부정의(不正義))라고 생각한다면 이들은 입으로 떠들 게 아니라 위헌소송을 하면 된다. 대한민국이 아무리 후진 사회라지만 그 정도의 근대적 구제수단 정도는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헌법을 글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아마 학교 무상급식만큼 헌법정신에 부합하는 정책이 드물다는 걸 깨닫게 될 터이다.

이건 순전히 내 추측이지만 '부유층 자녀 공짜점심이 형평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부유층들'의 속내엔 이런 생각도 포함돼있는 게 아닐까? "'개나소나' 먹는 학교급식을 내 아이에게 먹이긴 싫다!" "못사는 애들만 대충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이면 되잖아?" 정상국가에서라면야 이런 의심은 과도하게 악의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내 새끼만 특별하게 키우려는 욕망이 유달리 강한 한국사회이기에, 노블리스 오블리쥬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조차 외면하는 부유층이 절대다수인 낙후한 사회이기에, 이런 의심은 필연적일 정도로 자연스럽다. 한편으로 이들이 이런 군색한 논리까지 동원해 무상급식을 반대하고 있는 건 무상급식 의제의 '통로효과'를 두려워해서일 수도 있다. 다른 복지정책들이 줄줄이 밀려올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진보정당과 시민단체가 디자인한 무상급식 체계를 보면 교육, 환경, 건강과 같은 중대하고 절박한 사회적 가치들 뿐만이 아니라, 국가재원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하는지에 대한 철학과 입장의 문제까지 얽혀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본다면 이런 사실 때문에 무상급식 문제가 보기보다 훨씬 치열하고 첨예한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번 논변은 <중앙일보> 송호근 칼럼에서 처음 목격된 새로운(?) 유형의 무상급식 비판이다. "무상급식=빨갱이"론보다야 나은 수준이지만, 논리의 '변태성'이라는 면에서는 단연 독보적이다. 요컨대 '통크고 과격한 복지개혁을 하지않고 쩨쩨하게 무상급식 따위에 목숨걸고 있냐'는 것이다. '국립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다운 대인배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http://news.joins.com/article/aid/2010/03/22/3661603.html?cloc=olink|article|default 

무상급식이 마치 민주당이 급조해낸 의제인것처럼 몰아가는 것부터가 오류이지만 그보다 더 주목해야하는 건 "유럽국가들의 근사한 사회보장"을 부러운듯 언급하다 뒤에 가서 무상급식을 "비겁"하고 "유치"하다며 비난하는 정신분열적 행태다.  이제 걸음마 시작한 아이를 우사인 볼트와 비교해놓고, 이 아이는 왜 비겁하게 올림픽 출전 안하냐고 투정하는 격이다. 대체 누가 비겁한 건지 모르겠다. 친구의 심근경색과, 건강보험의 재정 문제와, 일본의 관상동맥 수술기술과, 4대보험개혁과, 유럽복지국가 이야기를 거쳐서 결국 내뱉는 이야기는 딱 하나다. '민주당 너네들 얍삽해서 시러!' 물론 이런 논리의 배후엔 '공짜 좋아하는 한국인들'의 민도를 경멸하는 송호근 특유의 '국민성 환원주의'가 깔려 있다(예전에 그가 한국사회의 수많은 병폐들을 국민의 평등주의 탓으로 환원해 설명했던 걸 상기해보라). 이걸 반대논변이라고 언급해야하는 현실이 비참하지만, 아무튼 한국-우파-언론-지식인의 수준을 보여주는 좋은 샘플 중 하나로 기록해두기로 한다.

현재 무상급식을 둘러싼 논의의 논리나 명분 어느 쪽을 봐도 무상급식 찬성파 쪽이 압도적으로 우월하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부자정당-극우언론의 이념공세를 분쇄하는 게 아니라 무상급식의 체계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고 실행하는 것이다. 특히 무상급식의 '질'이라는 문제는 향후 가장 첨예하게 불거질 문제이므로(단순히 품질을 높이는 것 뿐 아니라 급식에 우리농산물 사용시 FTA조항과 충돌 등과 같은 실무적 문제까지 포함하여) 단계별 로드맵+상황별 시뮬레이션의 형태로 세밀하게 정책을 다듬을 필요가 있다. 몇몇 정치인들과 진보적 씽크탱크에게 이런 작업을 맡겨두기만 해선 안된다. 특히 지금 선관위에서 무상급식 서명운동을 금지하는 과잉대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보다 많은 시민들이 논의에 참여할 수 있게끔 다양한 방식들이 고민되어야할 시점이다.

2010. 3. 12. 21:14

자퇴선언? 인간선언!



어떤 대학생이 붙인 대자보 하나에 파문이 일었다. "기업의 하청업체"가 된 대학교육을 거부한다는 자퇴선언이었다. 고려대 경영학과에 다녔던 이 학생이 자퇴를 하고 어떤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사회운동에 뛰어들지, 과거 견결했던 선배들처럼 공장에 취업할지, 아니면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다른 일을 찾게 될지, 그도 아니면 방황하다 지쳐 몇년 후 다시 복학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이 선언이 88만원 세대를 질식시키고 있는 어떤 질긴 피막을 날카롭게 찢고 올라온 실존적 외침이라는 사실이다. 현란한 논리보다 훨씬 소중하며 희귀한 재능은 부끄러움을 직시하는 감수성이다. 김예슬의 '인간선언'을 온 마음으로 지지한다.
2010. 3. 9. 04:47

노회찬 대표의 해명, 그리고 '우리 안의 조선일보'


<조선일보> 창간 90주년 기념식에 진보정당 대표로는 유일하게 참석한 노회찬 대표 때문에 이런저런 말들이 많다. 극우언론의 행사에 진보정당 인사가 참석한 것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들이 적지 않았고, 과거 노회찬 대표가 <조선일보> 직원들 상대로 한 강연에서 "조선일보의 질이 높다"는 식의 발언을 해서 곤욕을 치른 에피소드까지 다시 끄집어내 비판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노 대표는 자신의 블로그(http://chanblog.kr/) 글 '감사와 함께 사과드립니다'에서 마은혁 판사 건을 들며 해명에 나섰고, '우리 안의 조선일보'가 있다는 취지로 자기를 때리는 '우리편 언론'에 대한 불만을 에둘러 토로했다.

노 대표의 해명에 따르면, 이번에 그가 <조선일보> 행사에 참석한 것은 "마은혁 판사 사건 보도태도에 대한 항의 표시"였다고 한다. 마은혁 판사가 민주노동당 보좌관 국회농성 건에 대해 공소기각 판결을 내린 데 대해 <조선일보> 등은 '민주노동당 출신인 노회찬 대표의 행사에 참석한 것이 마 판사의 정치성향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것이 판결에 영향을 끼쳤다'는 식의 논리로 여론몰이를 시작했다. 마 판사는 "문상답례 차원의 의례적 참석일 뿐"이라 해명했지만 결국 극우언론의 공격에 굴복한 법원에 의해 전보발령 조치되고 말았다. 

요컨대 노회찬 대표가 <조선일보> 행사에 참석한 것은 마 판사가 노회찬 대표의 행사에 의례적으로 참석한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실제로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이다. 글을 읽어보니 섭섭함이 묻어난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노회찬이라는 정치인은 <조선일보>를 지지하기는커녕 <조선일보>를 통해 한 올의 정치적 이득도 취할 사람이 아니며, 실제로 이득을 취할 수도 없다. 아마 그의 해명은 진심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노회찬 대표의 <조선일보> 행사 참여와 해명이 그리 신중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선거를 앞둔 민감한 시기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첫째, 리스크에 비해 효과는 극히 미미한 항의방식이었다. 만일 노대표가 마은혁 판사 사건에 대해 항의하려는 목적의식이 그렇게 강했다면 <조선일보> 창간 기념식에 참석하는 방식은 피했어야 했다. 대중들에게 그 목적이 잘 전달될지 의문이고 따라서 효과가 매우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논란이 될 가능성이 컸고 논란이 되지 않더라도 그저 <조선일보> 창간 기념식에 노회찬이 참석했다는 작은 팩트 하나만 남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노회찬 대표가 마이크를 독점한 채 자신이 이곳에 참석한 이유와 마은혁 판사 사건에 대해 연설을 한 것도 아니었다(사실 공당의 대표가 남의 잔칫날 초대받아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도 예의있는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 대표가 <조선일보>의 창립기념식에 참가한 것 자체만으로는 마은혁 판사 사건을 떠올리지 못했다는 사실, 그리고 나중에 노 대표의 블로그에서 본인이 쓴 글를 보고서야 사람들이 비로소 이번 사건과 마은혁 판사 사건의 관련성을 인지했다는 사실을 보면 노회찬 대표의 의도는 전혀 관철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목표와 결과물을 놓고 보면, 하중하(下中下)의 전략이었던 셈이다.

둘째, 단지 한 명의 정치인이 아닌 진보를 표상하는 공인의 한 명으로서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 노회찬 대표의 <조선일보> 창간 기념식 참가는 노회찬 개인의 정치적 변절을 암시하거나 진보신당의 명예를 더럽혀서 문제인 게 아니다. 어차피 진성 빨갱이들, 반골들은 <조선일보>와 친해지려야 친해질 수가 없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우파, 중도우파, 좌파를 아우른 '안티조선'이라는 거대한 유산-물론 한계도 분명했지만-, 21세기 최초의 시민사회적 합의가 보다 높은 차원으로 지양되는 게 아니라 이런 돌출적 행동과 발언들이 반복되면서 '청산'되고 '무화'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극우언론의 떡고물을 받아먹을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는 '사이비 진보' 인사들에게 '진짜 진보' 노회찬의 논리 -"이것은 정치적 지지가 아니라 의례적 참석입니다"-는 얼마나 좋은 알리바이인가. 그리고 그것은 언제든 "이것은 정치적 지지가 아니라 의례적 '기고'입니다"로 바뀔 수 있다.

최소한 1990년대 이후 <조선일보>의 전략이 진보에 대한 극단적 배제인 적은  없었다. 그들은 늘, 언제나 진보인사를 포섭하려 했다. 그것도 아주 예의바른 미소와 관용의 포즈로. 진보가 자신들의 중립성과 보편성을 돋보이게 만드는 데코레이션으로 기능하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상태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줌도 안되는 , 허약한 진보세력으로서는 당장 이 구도를 바꿀 수 없다. 노회찬 대표의 생각과 달리, 현실에서 진보정당의 대표가 <조선일보>의 창간기념식에 참석하는 건 단순한 '의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노회찬 대표가 조선일보의 창간 기념식에 참석하는 것이 글자그대로 '의례'가 되는 경우의 수는 딱 하나, 노회찬과 진보신당이 정권을 잡았거나 집권세력의 일부로 참여하게 됐을 때다.

나는 노회찬 대표가 말한 '우리 안의 조선일보'에 대해 절절하게 공감한다. 소위 개혁적, 진보적이라는 신문, 인터넷뉴스, 방송이 <조선일보> 뺨칠 정도로 야비한 기사를 쓰고, 취재를 명목으로 약자의 인권을 유린하고, 혹여 거대자본-광고주의 심기를 건드릴세라 알아서 굴종하고, 작은 진보언론의 특종을 제 것인양 가로채 매명하는 꼴을 취재현장에서 질리도록, 정말이지 신물이 날 정도로 보아왔기 때문이다. 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행태는 본질적으로 <조선일보>와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아니, 위선적으로 보여 더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우리 안의 조선일보'를 성찰하는 것은 말 몇 마디 가지고 되는 게 아니다. 그 성찰이 '우리 밖의 조선일보'와 싸우지 않는 이의 핑계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오히려 '우리 밖의 조선일보'와 치열하게 싸워야 '우리 안의 조선일보'도 맑은 눈으로 직시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한번 따져보자. 우리가 언제 제대로 싸운 적이 있었던가? 

소위 개혁세력이 정권을 잡았을 때 그들은 사사건건 <조선일보>와 대립하는 듯 보였지만 인민의 삶을 좌우하는 사회경제적 의제 앞에서 <조선일보>와 대부분 한통속이었다. 진보세력은 제 몸 건사하기도 힘들어하며 개혁세력과 <조선일보>의 이런 기묘한 '적대적 공생'에 순발력 있게 대응하지 못했다. 반면 <조선일보>는 여전히 '1등신문'임을 자부하며 90주년 창간 기념식을 성대히 치렀을 뿐 아니라, 방송까지 포괄하는 초거대 미디어그룹으로 도약하기 직전이다. 즉, <조선일보>와의 싸움은 여전히 우리 앞에 시급한 숙제로 남겨져 있다. 이번에 노회찬에 대한 '내부비판'이 예상보다 훨씬 거셌다는 사실이야말로 '숙제'가 여전히 막중하다는 걸 시사한다. 저들을 끝장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변하기 위해서, 다시 무뎌진 날을 세워야 한다.
2010. 2. 27. 22:50

김용철

한윤형님의 블로그에서 인용한 구절. 김용철 강연회에서 그가 한 얘기란다.

"저더러 정치를 하라구요? 몸 버린 김에 죽으라는 얘기로밖에 안 들립니다. 국회의사당이요? 거기 담벼락 하나 돌리고 몇 명 꺼내면 교도솝니다. (심상정을 쳐다보면서) 노회찬 의원과 심상정 의원만 꺼내면..." (청중박수) 

그의 이런 발언은 상당히 재미있다. 대한민국의 최상층부를 경험한 '자타공인 엘리트'와 시장바닥에서 굴러먹는 장삼이사 모두가 실은 완벽히 똑같은 인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건 대부분의 한국인이 중3 정도 되면 체득하게 되는 정치혐오증의 아주 전형적인 표현형태다. 삼성을 뒤흔들면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다. 정치혐오 위로 켜켜이 쌓아올린 경제지상주의의 성채이며 언론의 기사로, 법원의 판결로 우리 앞에 드러나는 실체다. 제도정치를 바라보는 저 나이브한 냉소주의, 딱 그 수준의 사회의식이야말로 삼성이, 이건희가 아직도 위세를 자랑하는 이유인 거다.



2010. 2. 14. 12:22

계급을 배반한 투표, 투표를 배반한 계급


손낙구의 역작 <대한민국 정치사회지도>가 향후 선거담론에 끼칠 영향은 아주 클 수밖에 없다. 책을 끝까지 읽어봐야 알겠지만 몇몇 매체에 실린 북리뷰만 본다면 잘 살든 못 살든 계급투표 현상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준 이 책 이후로는 기존의 계급배반투표이론, 즉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일수록 보수정당을 지지한다"는 이야기를 더이상 할 수 없게 된 것 같다. 설령 하더라도 최소한 몇 가지 전제나 배경설명을 깔아야 가능하게 됐다. 아무튼 계급배반투표이론은 설득력이 떨어지며, 가난한 사람일수록 투표를 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사실이 실증적으로 밝혀졌다고 한다(물론 이 '실증'에 대한 '검증'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로서, 수도권에 한정된 조사라는 점과 극우/보수정당 지지자의 상당수가 자신의 지지를 숨기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 등 여러 요소들이 공정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관련해 박상훈은 "수도권 하층의 불안정한 주거현실이 정치의식 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된 요인"이라는 주장을 한다(<한겨레21> 798호). 일리 있는 얘기이며,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몇해 전에 내가 속한 당의 지역 활동을 왜 나는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을까, 아니 열심히 할 생각이 들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는데 개인적인 이유는 '지역정치에 대한 마인드가 후진데다 게을러서'이고, 사회적인 이유는 '언제 이사갈지 몰라서'였다. '지역에 뿌리내리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은, 대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서울생활 십여년 동안 지속되어온 불변조건이다. 정치공동체 형성의 조건이 일정기간의 정주라면, 나는 언제나 정치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던 셈이다.

이 책이 도드라지는 지점은, 현행 선거제도나 이를 떠받치는 의사대표원리가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계급배반투표 가설 자체를 논파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선거관련 담론들이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는 어떤 명제, 즉 '각 계급의 투표율이 대체로 비슷할 것'이라는 명제에 균열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계급을 배반한 투표'가 아니라 '투표를 배반한 계급'이다. 과거의 정치가 적대를 드러내고, 조직화하고, 승리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면 현대의 정치가 직면한 문제는 정치적 적대 자체가 증발해버리는(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 문제는 정치적 적대의 존재 자체를 증명하는 과제와 정치적 적대에서 승리하는 과제, 요컨대 이중의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각각의 과제는 공히 계급적 관점에서 계급구조의 역동적 현실-flow를 명확히 파악하고 빠르게 업데이트하는 것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데, <대한민국 정치사회지도>는 그런 논의의 드물고도 중요한 정초가 될 수 있는 책이다. 또 계속 보완되고 축적되어야 하는 책이라는 점도 물론이다.

사실 책의 내용은 민주당이나 진보정당들의 기존전략과 크게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어쨌든 투표율이 높은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걸 경험칙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계급배반이론에 따른 몇 가지 전략적 고려들을 좀더 줄이고 투표율 제고에 좀더 집중하게 될 수는 있겠다.

가난한 사람들은 투표라는 행위 하나를 하는 데도 부유한 사람들보다 더한 심리적, 경제적 자원을 소모하게 된다. 불평등은 이 지점에서부터 '이미' 발생한다. 돈 많은 정치공동체와 가난한 비-정치공동체들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개별시민의 정치적 대표성을 논하는 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이명박 찍은 국민들이 개새끼"라고 욕하고 자기 블로그 대문에다 "나는 찍지 않았'읍'니다"라고 써놓는 등의 짓거리가 무의미한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투표를 하지 않는 것도 정치적 의사표현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투표율의 저하가 계급과 거주지역으로 표현된다면 그것은 보장되어야할 정치적 의사표현이 아니라 반드시 개선해야할 사회문제가 된다. 정치적 의사표현의 '향방'보다  더욱 민감하고 어쩌면 중요할 정치적 이슈는 바로 정치적 의사표현의 '유무'이기 때문이다.

2010. 1. 15. 16:52

<추노>


<다모>가 대단한 건, 패러다임을 바꿨기 때문이다. 패러다임 쉬프팅의 첫째는 비주얼이고, 둘째는 소재였다. 그리고 '청출어람'이라 할만한 물건이 얼마전에 방영을 시작했다. <추노>다.  첫회부터 몰입도가 장난이 아니었는데 무엇보다 경악한 건 조명이다. '빛'의 사용이 여태껏 봤던 어떤 사극과도 차별화된다. 궁궐도, 여염집도, 종놈집도 스튜디오처럼 휘영청 밝은 기존 사극들의 조명과는 그야말로 레벨이 다르다(반면 과한 색대비와 슬로우모션의 남발은 거슬린다). 저잣거리의 대화들은 해학과 기지가 넘친다. 헐벗고 나온 남자배우들의 복근과 액션씬보다 더 쫄깃한 건 글자그대로 '상것들의 오랄액션'이다. 새끼꼬던 노비들이 양반들 모가지 따버릴 궁리를 하던 씬은, 황석영의 <장길산>을 방불한다. 4회까지 나왔는데 지금까진 거의 결점이 보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최근 몇년간 방영된 사극 중 최악이었던 건 <선덕여왕>이었다. 드라마가 시작하자마자 등장인물들이 어설픈 정치철학을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하는데, 그게 점점 심해지다가 막판에 가선 거의 대사만으로 정치적 사건을 '설명'하고 '해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자의식을 노출하느니 차라리 작가가 직접 마이크들고 해설하는게 낫지 않을까하고 생각했을 정도다. 사극 뿐이랴. 모든 창작자들이 경계해야할 일이겠다.
2010. 1. 6. 13:16

선거의 계절


홍세화에게서 유시민의 냄새 가 풀풀 나는 걸 보니 선거가 다가오긴 했다. 소주도 아니고 뭘 흔들어서 기포를 내고 자시고 복잡하게 가는거임? 한나라당 독주구도 막는 것이 그렇게나 중요하면 앗쌀하게 진보신당 등등은 발전적 해체 이후 민주당 집단 입당하면 됨.
2009. 12. 31. 09:57

잡감 20091231

1. 이명박이 이건희 단 한명을, 그것도 올림픽 핑계를 대며 사면시켰다. 이 사건은 한국인의 냉소주의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번 건이 조금 더 뻔뻔해서 그렇지 정권마다 이런 '9회말 투아웃 역전 만루홈런' 같은 사면은 예외가 없었다. 이런 일이 태연하게 벌어지기 때문에 윤리니 정의 같은 가치들은 그저 조롱의 대상이지 실천의 대상이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건희가 감옥간다고 해서 당신 삶이 나아지냐고, 국민들한테 득될 게 뭐가 있냐고, 중앙일보 등의 족벌신문들이 적반하장 따져 묻는다. 자신을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일수록 이 질문에 반박하기가 어려워진다. 자기가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좌파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왜? 사회정의나 법치를 실현하는 것과 개인의 경제적 득실을 굳이 연관시키고 계산하려는 강박 자체가 문제의 진짜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는 한 영원히 저들의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2. 오늘날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되는 대부분이 실은, 경영학이다. 그런데 "경영학"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되는 대부분이 실은, 신앙이나 미신에 가깝다. 반면에 정작 신에 관해 고민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그리고 최후의 철학자들처럼 보인다.

3. 2009년의 나는 이택광 선생님 말마따나 "나무늘보"처럼 지냈다. 특별히 '올해의 영화' '올해의 책' 이라며 호들갑 떨며 꼽을만한 건 없었다. 그저 읽고, 보고, 듣고, 아주 조금씩 썼다. 사랑하는 이와 요리를 하고 여행을 가고 온갖 주제에 대해 수다를 떨며 술을 마셨다. 아, '끊은' 것도 있다! 담배. 그리고 몇몇 인간들에 대한 기대와 유대. 그래서 2009년은 제법 즐거웠다. 2010년엔 뭔가 바뀔까?  아무쪼록 나쁜 것들만 바뀌기를. 무엇보다도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모두, 추하게 늙어가지 않기를.
2009. 12. 23. 15:46

"디카페인 커피, 무알콜 맥주, 다이어트 펩시"


그리고 '낫 스마트 스마트폰'? (특별출연: 슬라보예 지젝)

마침 전화기가 고장나서 지른 폰인데, 뭔가 쓰기가 복잡하다...
2009. 12. 21. 17:57

다시, 자기계발하는 주체

한윤형님이 아래 내 짧은 메모에 상당히 긴 트랙백을 걸었다. 왜 그러셨쎄여..흑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로 다시 끄적..-_-;;


"80년대 투쟁의 결과물이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이었다"라는 명제와, "80년대 투쟁의 주체가 자기계발하는 주체와 다르지 않다"는 명제를 구별해야할 것 같다. 요컨대 전자는 인과성의 문제이고 후자는 동일성의 문제다. '80년대 투쟁의 결과'라는 것은 단지 주체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정치적 구조와 경제의 발전단계,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우발성까지 포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보기와 달리 투쟁하는 주체와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관계를 나타내거나 80년대에 대한 반성을 암시하는 의미심장한 주장이 아니다. 큰 의미없이 시대의 흐름을 정당하게 기술하는 것일 따름이다.

90년대 서동진이라는 아이콘은 두말할 나위없이 80년대의 전형적인 투쟁하는 주체-그러나 이들 또한 어떤 부분에선 그들의 적 못지않게 억압적이던 주체-에 대한 안티테제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 마치 현상학자처럼 자기계발하는 주체에 대해 면밀히 기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90년대를 쓰디쓰게 반성하고 한편으론 투쟁하는 주체에 관한 것은 다른 문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그는 다른 자리에서 2008년 촛불시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을 취합하면,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않든 사실상 한개의 입장으로 압축되어버린다. 80년대적 주체로의 '복귀' 말이다. 물론 형식논리적으로는 다른 가능성이 존재한다. "나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투쟁하는 주체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면, 꽤 멋있는 말로 들릴 뿐 아니라 논리적 일관성을 해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설득력 없는 대답이다. 그 순간 미륵신앙과 구별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까놓고 말해서 내가 서동진 선생의 이번 책을 읽다 답답해진 건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훅, 더 나갈 수도 있는데 너무 안전한 지점에서 멈춰섰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해방되어야할 주체들이 해방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오히려 스스로를 규율하고 계발하며 자발적으로 자본에 봉사하는 모습을 보일 때, 좌파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고 기술하는 것은 오직 이 난처한 질문에 대한 답을 치열하게 모색할 때에만 의미있는 것이 된다. 예컨대 제국으로 간 식민지 주체들의 내면에서 자기계발의 욕망과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심(혹은 모국의 근대화에 대한 갈망)을 분리추출하는 것은 가능한가. 촛불시위에 새벽까지 참석하고도 '깜박이영어'를 들으며 출근하는 그/녀들은 투쟁하는 주체인가 자기계발하는 주체인가. 아니, 애시당초 그 두 가지 주체는 다른 것인가.

어쨌든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서툴고 조악할지라도' 나름의 답을 제시해야 반발짝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주체의 양태를 묘사하고 규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주체가 단속적이며 모순적이고 또한 동시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더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논리정합성과 일관성이라는 방패를 상당부분 포기하고 약점을 스스로 노출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꽤 위험천만한 일이다. 푸코가 '주체의 해석학'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것이 '모순'을 다루는 작업임을 감지하였기 때문일 게다. 그에 더해 나는 주체가 변화무쌍하게 변화했지만 실은 굉장히 반복적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문제를 조금 더 역사화하고 또한 서사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2009. 12. 20. 10:15

투쟁하는 주체?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1218194250&section=04


풍문만 무성하던 이 책, 서점에 깔리자마자 사서 읽었다. 내 관심사 중 하나와 정확히 닿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안읽혔다(실은 아직도 다 읽지 못하고 있다). 분명 흥미로운 주제이고, 중요하며 적실한 이야기인데, 책을 읽다보면 갑갑해질 뿐이다. 결국 내 방의 책더미 속으로 사라졌다. 오늘 프레시안에 실린 인터뷰를 읽어보니 왜 그랬는지 좀더 명확히 알겠다. "우리의 민주화가 자유화였다" "자유가 평등의 가치 안으로 복속될 때 약자의 것이 될 수 있다" "투쟁하는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것은 (지배당하는 사람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라는 서동진 선생의 언급에 결코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가? 자본이 '민주주의'와 '자유'의 이름으로(이것은 결코 '허울'이나 '껍데기'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실질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자유를 의미한다) 급진적 저항과 잠재력마저도 포획한다는 명제는 굳이 볼탄스키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좌파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랑시에르와 버틀러가 '그 이후'의 진도를 빼기 시작한지도 까마득한데 말이다. 그리고 서동진 선생 자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1990년대의 그 '소란들'이 지금에 와서 사르트르와 맑스를 다시 읽으며 그저 조용히 반성해야 하는 그런 추문일 뿐이던가? (솔직히 나는 "1980년대는 뜨거웠지만 1990년대는 환멸의 시대였다"고 단칼에 정리해 버리는 386 지식인 치고 제대로 사유하는 인간을 별로 본 적이 없다). 투쟁하는 주체의 문제는 정말 지배당하는 주체의 문제와는 다른 것일까? 혹시 여기서 말하는 '투쟁'이라는 건 이제까지의 관성만으로 규정된 무엇은 아닌가?

나에게 '자기계발하는 주체'는 '투쟁하는 주체'와 다른 게 아니다. 그것을 무자르듯 구분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순수하게 추상화한 '영속적 주체'를 가정하는 것이 되며, 구좌파가 직면한 패러독스에 곧장 빠지게된다. 따라서 내 생각은 이렇다. 자기계발하는 주체와 투쟁하는 주체의 동일성을 증명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  
2009. 12. 3. 16:39

담론전략에 관한 메모


http://capcold.net/blog/5063

*댓글참고.

몇 가지 더 메모해둘 게 있다. 담론전략의 중요성을 깨닫고 적절한 담론을 만들어 내려는 태도와, 어떤 사안의 성공과 실패를 담론전략의 성공과 실패로 환원시키는 태도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후자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개별 사안에 마주칠 때마다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사회적-이념적 실천들 중에서 담론전략이 어느 정도의 위치와 비중을 차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중-단기적 이슈에 한해, 다음의 규칙들이 적용되는 듯 하다.

1. 담론전략의 적확한 활용이 엄청난 효과를 불러오는 분야(field)가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분야가 있고 유리한 담론 자체를 생산하기 어려운 분야도 존재할 수 있다. 즉, 우리는 담론전략을 일반이론화하려는 욕망을 가급적 자제해야 한다.

2. 또 한가지 명심해야 하는 건, 새로운 담론전략보다 '새로운 팩트의 출현'이 대체로 더 크리티컬한 요소라는 점이다. 과거 사례를 살펴보더라도 어떤 사회적 사건에서 국면이 크게 반전된 건 새로운 팩트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지 새로운 담론전략이 출현해서가 아니다.

3. '담론전략'과 '새로운 팩트'보다 더 크리티컬한 것은 물론 '물질적 이해관계'다.  그러나 이것은 추상적 이해관계, 즉 계급적 이해관계와는 다른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눈에 보이고 손에 당장 잡히는 이해관계, 직접적 이해관계다. 물론 아주 오랜 기간 관찰하면 계급적 이해관계로 차츰 수렴되는 경향을 보일 수 있겠지만, 중단기적으로는 계급 이해를 배반하는 선택이 계급 이해에 따른 선택을 압도하는 상황이 훨씬 더 흔하게 벌어진다.

4. 직접적 이해관계에 필적할 정도로, 아니 때로 그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감성을 직접 공략하는 이미지들이다. 인물의 예를 들자면 적당한 신파가 섞인 성공담,  빼어난 외모, 지적인 분위기, 서민적인 친근감 같은 것들이다(ceteris paribus).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미지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다."  또한 그런 강력한 이미지들이 담론의 프레임을 구성한다.
2009. 12. 2. 12:58

대통령의 파업도 지지합니다


대체로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 파업은 비록 절차적으로 약간 문제가 있더라도 노동자들이 직접 결정한 일이라면 대부분 사회적으로 그 정당성이 용인된다. 왜냐하면 파업권이야말로 노동기본권 중의 핵심이며 그 사회의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최우선 척도이기 때문이다. 또한 타인의 기본권이 지켜져야 자신의 권리도 지켜질 수 있다는 소박하되 당연한 사실을 그들은 어릴 때부터 교육받고 체험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번 철도노조의 파업은 법적으로 꼬투리 잡을 게 전혀 없을 정도로 절차적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파업 이후,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은 연일 점입가경이다.

"일자리 보장받고도 파업이라니.."
"청년실업률 8%인데 파업이라니.."
"세계 경제가 어렵고, 겨우 회복하려는 순간에 거대한 국책기관인 철도노조가 파업을 했다는 것은 세계 모든 나라가 우리를 보면서 아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될 것"

솔직히 말해서, 쪽팔려 죽겠다. 대통령이라는 이가 이런 '불법적 발언'을 대놓고 하는 꼴을 보면서, 진짜로 "세계 모든 나라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게다. 소위 '철밥통'의 파업은 반드시 용인되어야 한다. 그들이 예뻐서가 아니다. '철밥통' 노동자의 파업이 용인되지 않으면 대다수 '유리밥통' 노동자들의 파업은 더더욱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제 깨달을 때도 되었다. 개도국은 빌딩의 고도를 높이지만 선진국은 인간의 권리를 높인다는 사실을.

나는 법적으로 노동자의 지위라고 하기 어려운 이명박 대통령도 파업할 수 있다고 본다. 직무 수행하다 시민으로서의 기본권이 침해당하거나 삶의 존엄이 무너지고 있다고 느꼈다면, 주저하지 말고 파업하시라. 괜히 책임감 때문에 힘든데도 내색 안하고 그러다가 병 난다. 서울 불광동 사는 백수 박모씨(33세)는 그런 대통령의 파업도 기쁘게 지지할 용의가 있다.
2009. 11. 25. 12:07

잡감 20091125


1. 지난 5월 기준 전체 취업자는 1년 전에 비해 21만 9천 명 감소했다. 그런데 그 중 여성이 21만 1천명이다. 수치가 너무 경악스러워서 KDI 보고서 요약본까지 찾아봤는데 정말 사실이었다. 새삼스런 말이지만, 기회만 생기면 한국을 뜨고 싶어하는 여성들이 그토록 많은 데엔 다 이유가 있는 거다.

2. 데이비드 하비는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사실 부를 창출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부를 재분배하는 데 있다'고 통찰력 있게 지적한 바 있다. 신자유주의자의 주장과는 달리 여러 실증적 근거들은 신자유주의 혁명이 생산혁명이 아니라 분배혁명이라는 점을 웅변한다. 재분배의 강도와 효과, 규모는 거의 러시아혁명만큼이나 강력한 것이었다. 좌파들이 혁명을 패션화할 때 우파들은 묵묵히 혁명을 수행했다.

3. 오늘날의 반지성주의의 양상을 좀더 섬세하게 묘사할 필요가 있다. 과거 반지성주의자들의 멘탈리티는 "잘난 척하기는! 그런 현학적인 지식 없이도 내 몸으로 익힌 지혜로 잘 살아왔어"였다. 오늘날 반지성주의의 멘탈리티는 그것과 사뭇 다르다. 이를테면 "나는 너만큼이나 혹은 너보다 더 계몽된 주체다"이다. 즉, 나도 배울만큼 배웠으니 깝치지 말라는 거다. 이런 멘탈리티는 냉소주의와 곧장 연결되며 또한 도착증적으로 '탈계몽'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탈계몽된다는 것은 요컨대 자신이 계몽된대로, 알고있는 지식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게 잘못된 것인줄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한다. 일부러 계몽이 강요하는 룰을 위반하는 것이다. 계몽이 부과한 룰만을 골라 위반함으로써 자신이 계몽된 주체임을 과시적으로 증명하는 셈이다. 어떤 이가 온당하게 그것을 지적하면 반성하거나 성찰하기는 커녕 파시스트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라도 된 양 격렬한 반발심과 공격성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이들 냉소적-반지성주의적 주체에게 이것은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쾌락의 문제이며 그것을 지적당하는 것은 마치 자기가 선호하는 체위의 부적절함을 지적당하는 것 같은 불쾌감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주체의 문제는, 예전보다 훨씬 더 윤리의 영역에서 미학의 영역으로 옮겨온 듯 하다.
2009. 11. 22. 05:11

추천사



텍스트에서 나오는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시리즈에 어쩌다보니 지인들이 계속 연루(?)되는 것 같다. 11월 20일이 공식출간일인데 책이 깔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이 책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의 저자는 훈련소에 입소했다. 책도 나왔는데, 낼모레면 서른살인데, 게다가 어여쁜 딸도 있는데, 훈련병이라니...(눈물).

어쨌든 나는 (그럴 깜냥이 못됨에도) 추천사를 단숨에 써서 보내주었다. 저자가 직접 전화를 해 부탁했고 나는 "영광스럽"다며 수락했더랬다. 요전에 책을 낸 한윤형과 이번에 책을 낸 김민하는, 내가 만난 20대 중 가장 명석한 이들은 아니다. 그러나 가장 흥미진진한 20대들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특히 김민하의 경우 글쟁이로서 뿐 아니라 '진보정치의 새로운 세대'로 기대하고 있다. 첫번째 책을 출간한 김민하에게 뜨거운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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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조선 좌파의 누벨바그

김민하는 내가 만났던 20대 중에서 가장 빛나는 센스를 지닌 인간이다. 그야말로 독보적인 유희감각을 타고났다. 나는 그래서 늘, 그가 어째서 혼자 잘 먹고 잘살 궁리를 하지 않고 무시무시한 운동권 틈에서 월급쟁이 노릇을 하고 있는지 의아했다. 김민하의 인생은 어디서부터 꼬였던 걸까? 책을 읽어 보니 알겠다. 재미난 것을 보면 하고 싶어 참질 못하고, 부조리한 것을 보면 배알이 뒤틀려 참질 못한다. 한번 몰두하면 엔딩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오타쿠’ 근성도 다분하다. 김민하는, 그 존재 자체로 ‘조선 좌파의 누벨바그(Nouvelle Vague)’다. 조심하라. 이 책에 담긴 어느 청년의 기구한 인생역정이 스펙 쌓기에 찌든 당신의 딱딱한 뇌를 새하얗게 녹여 버릴지도 모르니까.



2009. 11. 4. 10:52

레비스트로스 타계

구조주의의 개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타계했다. 향년 100세.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양반이 당연히 돌아가셨을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서 그는 마르셀 모스와 비슷한 레전드급이라, 설마 생존해 있으리라는 생각을 못했던 게다. 거의 20년을 조용히 자택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대학 1학년 때 친구들이랑 구조주의 세미나하던 생각도 나고, 어느 교수님께 내가 붙여준 별명, '슬픈 복대'(...)도 생각이 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