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판'에 해당되는 글 204건
- 2009.07.21 롤플레잉 동물원 11
- 2009.07.14 마지막 단락 14
- 2009.07.05 Dancing The Pain Away 4
- 2009.07.03 잡감 0703 10
- 2009.07.01 잡감 0701 3
- 2009.06.26 [메모]진보의 경제성장전략 10
- 2009.06.15 20대 개새끼론 21
- 2009.06.12 반MB의 이유 8
- 2009.06.05 쾌락과 글쓰기 14
- 2009.05.29 애도를 시작하기 위하여 23
- 2009.05.24 뒤샹의 경제 16
- 2009.05.23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4
- 2009.05.18 참여해주세요 2
- 2009.05.14 촛불의 매트릭스: 한국형 평등주의 보론 22
- 2009.05.12 스타트렉 번역크리 9
- 2009.05.08 잡감 0508 5
- 2009.04.30 조승수 당선 3
- 2009.04.29 아시발 눈물나 8
- 2009.04.28 강남에 왜 김밥천국이 많을까 15
- 2009.04.27 '캠퍼스 컴뱃 가이드' 13
- 2009.04.25 안티조선의 '옥동자' <키보드 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 7
- 2009.04.24 십시일반
- 2009.04.20 메이데이, 그리고 현장 10
- 2009.04.13 박연차 로비사건: 민주화운동세력의 도덕성에 관하여 7
- 2009.04.09 블로그라는 이름의 자살도구 22
- 2009.04.09 [펌]"예술가도 노동자다, 비정규직 철폐하라!" 4
- 2009.04.09 연애능숙도 테스트-_-;; 13
- 2009.04.08 싸움의 방식 2 : 형식주의와 원칙주의 10
- 2009.04.07 이 노래 부르면 왕따될까요 9
- 2009.04.06 서울모터쇼 2
요즘 Mnet의 '2NE1 TV'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케이블 치고는 시청률이 놀랄 정도로 높다고 한다. 이제 우리들은, 무명의 소녀(혹은 소년)들이 어떻게 살벌한 자기수련과 찌질한 연습생 시절을 거쳐 동아시아 쇼비즈니스의 거물로 성장해가는지를 낱낱이 보고 듣게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들의 시련에 가슴아파하고, 그들의 성공에 기뻐하고, 그들에게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수많은 익명의 팬-페이트런들은 인터넷을 통해 이합집산한다. 단순한 수용이나 일방적 소비가 아니라 롤플레잉 게임에서 캐릭터를 키우듯, 팬들은 실시간으로 그들의 스타-다마고치를 키우고 있다. 키워지는 쪽 역시 실시간으로 팬-페이트런의 반응을 체크하고 있다. 그 성장의 과정은 양쪽 모두에게 쾌락적이다. 프로야구에서도, 스타리그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정치 쪽도 예외가 아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 첫번째 케이스였다. 촛불집회에서 칼라TV팀과 함께 종횡무진했던 진중권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자신이 롤플레잉 캐릭터였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해명했던 첫번째 캐릭터다. 이 모든 현상들은 동물원과 트루먼쇼 사이에, 아니 그 너머에 있는 것이다. 보는 존재와 보여지는 존재 사이에 존재하는 건 쇠우리가 아니라 디지털 미디어다. 이제 조련사와 구경꾼의 구별은 한없이 희미해진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위계, 권력담론은 낡은 것으로 치부된다. 보여지는 존재에게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나 억압적 상황에 대한 분노는 없다. 이들은 스스로의 의지와 재능과 노력으로 트루먼 혹은 동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일한 관건은, 성공을 향해 무한질주할 수 있는가다. 이를 위해 필요한 건 경쟁의 압력을 정신적으로 견뎌내고 몸을 망가뜨리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자기에 대한 배려'다. 푸코가 말한 '실존의 미학'은 이렇게 기이한 형태로 출몰한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이 행복한 수행적(performative) 공간 속에 비평적 공간은 없다. 따라서 비평이 의미를 획득하려면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자-보여주는 자를 드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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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는 젊은 세대에 대한 사회적 응급조치를 통해 이러한 빈곤의 연쇄를 끊어야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사회의 붕괴를 막기 위한 윤리적 호소라는 점에서 보수적이지만, 새로운 정치적 저항의 주체를 요청한다는 점에서는 급진적이기도 하다. 청년빈곤 문제 혹은 88만원 세대 담론은 한 세대의 낙오와 탈락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대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이 20여 년을 관통하는 사회구조 변동의 산물이자, 모든 사회성원이 직면한 불안정노동 전면화의 한 단면이라는 사실을 환기할 때, 세대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것은 경제의 문제인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경제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경제학이 말하는 ‘수요’는 구매력을 전제하며 따라서 구매력이 없는 자는 수요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의 셈에 포함되지 못하는 인간, 몫 없는 인간, 낙오하고 탈락한 인간, 결국 아무도 아닌 저 수많은 사람들-우리를 어떻게 ‘셈’해야 하는가. 낙오와 탈락과 불평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우리 스스로 발 딛고 있는 이 세계가 아름답고 추상적이며 평평하고 매끈한 경제의 공간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곳은 정치의 들판, 윤리의 바다, 주체의 숲이다.
1. 사흘 동안 새벽 4시 이전에 집에 들어온 적이 없다. 대체로 즐거운 술자리였지만 이렇게 연일 내달리니 몸이 버티질 못한다. 잠깜잠깐 필름도 끊어졌던 것 같다. 당분간 자제를.
2. 명석하기도 어렵고 유연하기도 어렵지만, 명석하면서 유연하기란 더욱 어렵다. 어디나 마찬가지이고 내 또래에서도 그런 재능은 무척이나 드문데, 그런 이조차 조직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위아래로 치이며 괴로워한다. 답은 없고 가슴만 먹먹하다.
3. 작업의 윤곽이 좀 잡히는 느낌이다. 어제 술자리가 나 뿐 아니라 모 편집자님에게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듯. 그나저나 또다른 편집자인 모 선배와의 프로젝트는 어찌될지...(먼산) 내가 쥑일 놈이다.
4. "싸가지가 없다"는 뉘앙스의 말을 전해들었다. 평소 존경하던 선생님의 나에 대한 평이어서 유리알 같은 내 영혼에 스크래치가 생겨버렸다. 그래서 여친사마께 일러바쳤다. 썩소를 날려주시는 그녀. "몰랐어?" ...그래 안다. 아니까 더 상처인 거다.
1. 인디스페이스 월례비행에서 김응수 감독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를 보았다. 1986년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분신자살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러나 사건 자체에 대한 촘촘한 역사적 재구성은 없다. 그 사건의 정치사회적 의미 같은 건 철저히 배제된다. 영화는 그날 날씨가 어땠는지, 어떤 버스를 탔는지, 사건 직전에 주변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등과 같은 세부적 사실들에 의도적으로 집중한다. 당시 같이 활동하던 사람들(그러나 사건의 주동자라고 할 수는 없는)의 인터뷰를 반복해서 보여줄 뿐이다. 영화 속 인터뷰어는 마치 공안검사처럼 건조하고 집요하게, 전혀 중요해보이지 않는 세부사항들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인터뷰이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힘겹게 답변을 이어간다. 이제까지 보기힘들었던 새로운 형식의 '386 후일담'이다. 인터뷰의 형식은 단조로웠지만 지루한 영화는 아니다. 동석한 유운성 평론가의 말처럼, '뒷통수를 확 쌔려주는' 맛이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인터뷰이들은 결계에 걸린 것처럼 뭔가에 억눌려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의견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저널리스트의 관점에서 보면, 인터뷰에서 저런 식으로 답변하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위화감이 밀려왔다. 설사 경찰이나 검찰이 질문해도 그렇게 하기 어렵다. 저것은 감독이 인터뷰 이전에 모종의 강력한 '사전처리'를 해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즉, 내 위화감의 이유는 소격효과와 같은 미학장치에 의해 감정몰입을 방해받아서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가 너무 노출되어서였다. 영화가 끝나고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서 김응수 감독 자신이 내 짐작이 맞았음을 밝혀주었다. 의도적으로 인터뷰이의 답변방식을 제한했다는 것이다. 그는 과거를 신화화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역사적 사건을 다루면서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기승전결 구조의 기존 다큐멘터리들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그 사건의 주변인물이기도 한)자신이 대학생일 때 어떤 거창한 역사적 사명감으로 운동을 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물론 과거를 신화화하는 것에 나 역시 반대하고, 반대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런 윤리적 성찰을 이 영화처럼 인식론적 문제로 곧장 환원해 버리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특정 사건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보여주기 위해 인터뷰 대상을 포함한 환경을 멸균처리한 실험실처럼 만들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구부러진 막대를 펴는 게 아니라 아예 반대편으로 다시 구부리는 것이다. 악셀 호네트의 정식화를 빌리자면 인정은 인식에 선행한다. 행동을 결정하는 우선순위는 인식이 아니라 인정에 있다. 인식을 특권화해서 끝까지 밀고가다보면 회의주의 또는 불가지론으로 귀결되고 우리의 행동을 해명할 수 없게 된다. 인식론적 환원은 현실의 풍부한 맥락을 표백하고 시공간을 동결시켜버린다. 사건들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가, 과도한 인식론적 환원을 정당화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각자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리고 그래야지만 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 '팩트'란 그걸 전제한 무엇이지, 맥락도 배경도 없이 던져진 행위들의 총합이 아니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꼭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2. <트랜스포머2>에 대한 이야기들을 보면서, 그저 직관일 뿐이지만, CG영화가 어떤 물리적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다. 영화가 기술적 한계에 봉착하면 남은 건 무엇일까. 우리의 몸을 개조(일테면 몸에 칩을 심는다든가)하는 것 아닐까. 기존 기술이 한계에 다다르고 우리의 역치가 점점 그에 맞춰 커져왔다면, 영화만이 아닌 모든 감각적인 것을 새롭게 경험하기 위해서는 결국 인간 신체를 확장할 수밖에 없다.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48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85
"성장전략이 있어야 집권할 수 있다=집권할 수 없는 건 성장전략이 없어서다"
"진보진영이 안되는 건 비판만 해대기 때문이다"
1. 저 비판이 계속해서 겨냥하는 "진보진영"은 어디를 가리키는가. 민주당을 가리킨다면 지난 10년간 온갖 성장전략을 내놓았고 대부분 실패했다(대개 민족문제로만 치부되는 통일정책 역시 궁극적으로는 안보와 성장전략이 결합된 내부식민지 전략이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을 가리킨다면 현재로선 집권은커녕 이들 당의 생존 조차 불투명하기 때문에 독일식 선거제도라도 도입한 다음에 추궁할 일이다.
2. 국가주도형 산업정책을 장기적으로 수행할 수 있으려면 강력한 정치적 헤게모니가 필수불가결하다. 지난 10년간 정치권력은 탈권위, 규제완화, 다시말해 '글로벌스탠더드'의 명목으로 재벌과 금융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과거의 명시적 수단들을 자진해서 포기했다. 더구나 포기된 수단들 상당수는 다시는 돌이키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광범위한 정치혐오, 시민운동의 쇠락, 진보정당의 지체, 5년단임제로 인한 정책연속성의 부재라는 치명적 제약조건도 있다. 이미 고도성장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게다가 성장전략을 관철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지반조차 없는 상황에서 내놓는 성장전략이, 오직 집권을 위한 레토릭 또는 국가주의로의 이념적 회귀 이외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3. '성장전략이 있어야 집권할 수 있다=집권할 수 없는 건 성장전략이 없어서다'라는 명제는 증명된 적이 없다. 이명박의 747공약은 성장전략이라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지만 집권에 성공했다. 민주당이 정권을 잃은 이유 중 하나는 성장전략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고도성장 신화를 깨는데 실패하고 나름의 성장전략을 실현시키는데도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장전략의 유무는 관심을 기울여야할 문제임이 분명하지만 생각만큼 핵심적인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건 시대에 부합하는 성장전략을 관철시킬 수 있느냐 여부다. 더욱 중요한 건 성장전략이 무조건적 규제완화와 동의어가 아니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방만해진 시장권력에 대한 규준과 제어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포스트 신자유주의 시기의 성장전략은 제아무리 정교하고 '성장친화적'이라 해도 오지않은 미래에 대한 시장규제적 기획일 수밖에 없으며, 고삐 풀린 재벌과 관료집단은 결코 설득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은 이미 지난 10년간, 특히 참여정부 시기 여실히 증명되었다. 그 집단은 상대가 강하면 굴복하고 약하면 짓밟는다. 성찰과 고민과 토론과 설득이 아니라 철저히 힘의 논리와 이해관계에 의해 정책이 결정되거나 왜곡된다. 그럴듯한 성장전략만 있으면 기득권세력도 설득할 수 있을 거라는 순진한 착각을 이제 버릴 때도 되었다. 오히려 진보가 '성장'을 강조하면 할수록, 낡은 어떤 구도-민주화세력 vs. 산업화세력-를 재생산할 뿐이며, '성장이 없으면 분배도 없다'는 기득권세력이 선점한 이념적 프레임에 포획될 수밖에 없다. 사회경제분야의 정책에서 한나라당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열린우리당-민주당, 이 꼴이 된 게 단순히 성장전략이 없기 때문이었을까.
<참고>
http://blog.ohmynews.com/cjc4u/tag/%EC%A0%95%EA%B8%80%EC%9E%90%EB%B3%B8%EC%A3%BC%EC%9D%98
4. 따라서 집권과 집권 이후 개혁의 성공을 담보하는 필요조건은 경제성장전략이 아니라 재벌과 관료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것은 노사모의 예에서 증명되었듯 감성적 지지계층과 인기정치인의 세몰이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역동적인 시민사회, 건강한 우파, 강력한 진보정당이라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기득권세력을 구조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그러나 권위주의 시절과는 다른 형태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명분을 용의주도하게 쌓아나가야 한다. 성장전략은 그렇게 '바닥에서 박박 기는' 과정에서 나와야지만 실현가능한 것이 되며, 지지세력을 뛰어넘어 신뢰감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그 정도 수준의 사회가 되면 진보가 강박적으로 경제성장을 대안으로 내세울 이유도 없어질 터이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참여정부 5년이 남긴 가장 큰 교훈이다. 몇몇 이데올로그들이 성장전략 문건 쌈박하게 만든다고, 또는 개혁진보세력이 당장 집권한다고 해결될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경제성장전략과 레토릭 개발에 집착하는 태도는 영미의 특수한 정치문화에서 두드러지는 것으로, 한국사회에 곧바로 적용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프로젝트라 하기 어렵다.
20대 왕따시켜 10대 찬양하는 돌림병이 돈다
p.s) 회사 다니는 30대들은 20대 혐오를 표출하는 직접적인 '근거'로 자기 밑에 들어온 20대들의 무능과 무개념을 들며 광분하곤 한다. 나도 겪어봐서 안다. 내가 봐도 요즘 20대들이 좀 개념이 없긴 하더라. 근데 니들이 눈에 넣어도 안아파하는 10대들이 회사 들어오면 중뿔나게 다를 것 같니? 내가 비밀 하나 말해줄게. 니네들 신입 시절에 말야, 386 사수들 사이에 스트레스성 원형탈모가 유행이었어.
조갑제류는 글자 그대로의 '우국충정'이다. 물론 이 우국충정은 그들의 무뇌성과는 별개다. 내가 노빠들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조갑제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노빠들의 가장 큰 문제는 진정성을 자기들만 독점하고 있다고 믿는다는 점이지만). 어쨌든 이명박을 향한 조갑제류의 가장 큰 불만은, 광장에 나온 "무뢰배"을 쥐잡듯 때려잡지 못하는 정권의 미온성 때문이다. 이들이 보기에 압도적 폭력의 행사로 국가의 권위를 드러내지 못하는 정권은 '아랫것들'한테 얕잡아 보이게 되어 있다. 머슴들이 반항하면 호되게 멍석말이를 시켜 '반병신'을 만들어놔야 하는데, 주인이 안채에 들어앉아 문을 닫아걸고 있으니 울화통이 터지는 거다. 마름들 몇몇이 나서서 몽둥이를 휘둘러대고는 있지만 확실히 기를 꺾기엔 부족하다. 즉, 조갑제류가 이명박을 비판하는 논리는 다름아닌 치안의 논리다. 그리고 이 모든 게 다 이명박의 진정성이 없어서이고, 진정성이 안보이는 이유는 이념이 흐리멍덩해서다.
<조선일보>의 논리는 조갑제류보다는 세련된 모습이다. 그러나 한 마디로 요악가능하다. 경영의 논리다. 대통령이 국정 전반의 매니지먼트를 못하고 있다는 거다. 경영을 못하고 있다는 건 같은 편에 속하는 집단들의 사적 이익들을 조정하고 계산해서 '효율적'으로 국정에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조선일보>의 숙원인 방송진출을 이루려면 미디어법이 빨리 통과되어야 하는데, 어영부영 여름으로 넘어갈 것 같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 <조선일보> 김대중은 "MB가 스스로 나가주기만을 바랄 것이 아니라 탄핵 등 구체적 절차를 밟으며 전국민적 동참을 유도하는 적극적 액션에 나설" 것을 요구하는 등 거의 조갑제와 유사한 멘탈리티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사실 그를 제외한 <조선일보> 기사의 전반적인 논조는 철저히 '실용적'이었다. 경영의 논리로 이명박을 비판하는 건 <조선일보>만이 아니다. 재계도 불안이 불만으로 전화하기 직전인 상황이고, 만약 지금 추진하고 있는 '유사 대운하' 프로젝트마저 엎어진다면 건설족들과 지역토호들이 일거에 반이명박 세력으로 돌변하게 된다. 치안 논리보다 어쩌면 훨씬 무서운 게 바로 경영의 논리다.
한나라당 현 실세들의 불만은 갖가지 수사로 포장하긴 하지만 딱 하나, 정치공학의 논리다. 박근혜 때문에 당이 언제 결딴날지 모를 판국이고 당 지지율도 급전직하하고 있다. 그럴 때는 한국특유의 정치구조상 청와대가 일종의 원외구심의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데 이명박은 뭐하나 만회할만한 업적은커녕 "나는 정치에 소질도 없고 잘 모른다"라는 소리나 하고 앉았으니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을 게다. 언론보도만 보고있으면 요즘 '열심히' 일하고 있는 건 문광부 밖에 없는것처럼 보일 정도다. 한예종 박살내는 일에 이렇게나 열내는 것 자체가 이미 '막장'이다. 참여정부가 '막장테크' 타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사회경제적 개혁보다 정치문화적 구별짓기에 열올린 점도 무시못할 이유 중 하나였다.
결론적으로 이명박은 지금 사면초가 상황이다. 정권 2년차에 우파들에게조차 공격받고 있다. 하루종일 이명박 욕 하는데만 열 올리는 사람한테는 참 고소한 일이겠다. 그러나 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이 '독선'을 넘어 '자폐'의 단계로 들어섰다는 건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다. 이명박의 최근 발언, "저는 정치에 소질도 없고 잘 모른다"라는 발언은 정치적 자폐의 명백한 징후로 보인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발언만큼이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 이렇다 할 대안정치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사태를 더욱 절망적으로 만든다. 개혁진영의 개편은 기정사실로 보이지만 여전히 '누구를 내세울 것인가'에만 촉각을 곤두세우는 한, 그 모든 움직임은 박근혜라는 '깔대기'로 수렴될 뿐이다. 우파들이 '반MB'를 외치고 있다. 우리도 '반 MB'를 외치고 있다. 바야흐로 명실상부 '전국민의 반MB' 시대다. 눈여겨 봐야하는 것은 이명박의 논리, 치안의 논리, 경영의 논리, 정치공학의 논리 모두가 '정치가 아닌 무엇들'이란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니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 '반MB'를 외치고 있는지 근본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자문해봐야 한다.
인디포럼에서 처음 만난 윤성호 감독이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블로그에 가끔 가서 글을 읽곤 하는데요, 글과 인상이 좀 다르네요. 제 경우엔 기분이 우울하거나 답답할 때 거길 찾게되는 것 같아요." 그 말에 나는, "글과 실제 캐릭터가 다르다는 얘길 많이 듣는데 제가 우울한 캐릭터는 절대 아니예요"하고 웃으며 넘어갔는데 사실 알쏭달쏭한 이야기다. 우울하고 답답할 때 찾는 글이라는 건 글 자체가 우울하고 답답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반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드라이하게 쓰는 편이고 그러다보니 단정적이고 공격적인 말투 등등의 일종의 '후까시'가 상당히 들어가게 된다. 솔직히 인정한다. 내면이, 혹은 내공이 약한 글쟁이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 일종의 방어기제인 셈이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까지의 글들은 안그랬다. 유희성이 강했기 때문에 쓰는 나도 읽는 사람들도 꽤나 즐거워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나이가 한살한살 들어갈수록 변해왔다. 20대 중반 이후 글쓰기 환경이 급격히 변한 탓도 있는 것 같다. 자기검열도 강해졌다. 내가 과거에 썼던 글을 잘 모르는 후배들은 무섭다고까지 한다. 그런 얘길 들으면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반성하게 된다. 권위가 없는 사람이 권위주의적인 글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이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다.
평소의 나는, 어른들 말씀에 따르면 "집안 말아먹을 한량" 스타일이다. 그런데 나의 쾌락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정확히 얘기하면 지적 쾌락은 말초적 쾌락을 억압하고 말초적 쾌락은 지적 쾌락을 유예시키는 형태다. 그래서 '이중 전도'가 일어난다. 말초적 쾌락은 억압된 쾌락이어서 더 강한 쾌락이 된다. 반면 지적 쾌락은 유예된 쾌락이어서 더 강한 쾌락이 된다. 전자는 해방감을 주는 대신 죄의식을, 후자는 우월감을 주는 대신 정당화를 요구한다. 양자는 샴쌍둥이처럼 붙어있다. 동시적으로 드러나야 하지만 동일하게 드러나선 안된다. 내가 특별히 변태적이어서는 아니고, 따지고보면 단순하고 일반적인 이야기다. 20대 초반에 나는 그것을 '균형잡힌 자아'라고 명명한 적이 있다. 내가 변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지적 쾌락과 말초적 쾌락을 완벽히 동일시하는, 다시 말해 모든 지적 쾌락을 말초적 쾌락화하는 사람이다. 내가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적 쾌락과 말초적 쾌락을 명확히 구분하고 분류한 뒤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어느 한쪽만 추구하는 사람이다(실은 이쪽이 진정한 변태). 내가 가엾게 여기는 사람은 말초적 쾌락을 지적 쾌락으로 착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특정인을 글쓰기의 롤모델로 삼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글쓰기가 자신의 쾌락 메커니즘을 제대로 반영하는 게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글이 나의 쾌락과 점점 괴리되는 것 같아서 요즘 좀 걱정스럽다.
어떤 진보인사가 "우리들 중에 노빠 아니었던 사람이 있는가"라고 말했다. 아마 맞는 말일 게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노빠였던 적이 없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 내가 첫 직장에서 처음 쓴 기사가 고 배달호씨의 죽음에 대한 것이었고, 그 후로도 노무현 시대의 많은 죽음들을 현장에서 기록해왔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 높은 곳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꿈을 꾸곤 한다. 폐소공포와 고소공포가 동시에, 온몸의 땀구멍을 열어젖히며 노도처럼 밀려들어온다. 그곳은 낯익은 공간이다. 한진중공업의 노동자 김주익 씨가 절망과 고독에 지쳐 목을 맨 바로 그 크레인. 부산에 취재하러 갔을 때, 실제로 그 곳에 올라가서 사시나무처럼 떨었던 적이 있다.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저녁놀에 핏빛으로 물든 그 작고 높은 밀실을.
한 마디로 나에게 노무현은 그 시대의 죽음들과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다. 어떤 좌파들은 20년 전의 '진보' 노무현을 애도하자고 말하지만, 나는 그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대체 20년 전의 노무현만을 애도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럼 20년 후의 노무현은 애도의 대상이 아닌가. 관념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은 또다른 박제화다. 이런 식의 관점은 "더이상 노무현만큼 훌륭한 대통령은 나올 수 없다"고 말하며 노무현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대치로 한계짓는 사람들과 동일한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우리를 대신해줄 훌륭한 지도자 없이는, 우린 안될거야 아마."
그러므로 나는 애도한다. 노무현을 통해서만 세계를 인식하던 우리를, 그리고 나 자신을. 우리는 스스로를 애도함으로써 노무현을 떠나보내야 한다. 민주주의가 단지 '독재자의 자리에 선량한 호민관을 앉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민주주의는 언제나 그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시리도록 깨달으며 노무현을 떠나보내야 한다. 그를 '순교자'로 혹은 '최선의 대통령'으로 규정하는 짓은 그래서 값싼 감상주의이며 패배주의다. 결국 우리 중 누구도 노무현의 과오를 넘어설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넘어가려는 순간 우리는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인을 존중하는 것이기는커녕 욕보이는 짓이다.
애도는 오늘의 영결식 이후에 시작되어야 한다. 충격과 오열과 분노와 탈진이 신화로 귀결되는 그런 애도가 아닌 글자 그대로의 애도, 애도의 주체와 애도의 대상을 아프게 분리하는 의례 말이다. 그 애도의 완결은 이명박보다 좀 나은 대통령을 뽑는 것 따위로 달성될 수 없다. 한명의 대통령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정의를 증명할 때, 비로소 애도는 완결될 것이다. 아마, 생각보다 오랜 세월이 걸릴지 모르겠다. 노무현 대통령, 잘가시라. 당신을 끝내 사랑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당신이 넘어설 수 없었던 벽을 우리가 부술 것이다. '순교자의 사도'로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필요와 의지로. 그리하여 정말로 우리의 애도가 끝나는 날, 웃으며 당신께 편지 한장 쓰리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56584.html
[한겨레] 경제계, "경제에 영향 없길…"
경제단체들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국가적으로 큰 불행”이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동시에, 어려운 경제상황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우려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과 관련해 낸 논평에서 “경제계는 충격과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으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며 애도를 표했다.
대한상공회의소도 공식 논평을 내어 “충격과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대한상의 이현석 전무는 “국가적으로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라며 “이번 일이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며, 특히 경제위기 극복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국민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이동응 전무도 “역대 대통령들의 좋지 않은 일이 사회 문제로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며 “다만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이 겨우 회복 조짐을 보이는 경제상황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중앙회 역시 이날 공식 논평을 내어 “우리나라 중소기업 육성 발전에 큰 기여를 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 소식이 매우 충격적이며 안타깝다”고 밝혔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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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조심스럽게 내놓았을 '공식논평'임을 감안한다면, 이건 '인간에 대한 예의' 운운하는 차원보다 좀더 심층적인 이데올로기의 문제라고 판단된다. 그런데 일부 노 지지자들은 이런 발언을 처음 본 것처럼 맹렬하게 분노하고 있다. "지금 이 상황에 돈 얘기라니!" 물론 동감이다. 나도 저들의 말이 차마 해선 안될 망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저 기사를 가져온 이유는 저 발언이 유별나서가 아니라 너무 익숙해서였다. 정확히 말하면, 너무 익숙한 것이 너무 낯선 맥락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미술관에 걸린 뒤샹의 변기를 처음 본 기분이랄까. 사실 저 발언은 그 많은 노동자의 죽음을 보고 거리로 나선 사람들, 그리고 김선일의 죽음을 막기 위해 거리로 나선 이들에게 경제계와 소위 '개혁정권'과 그 지지자들이 습관처럼 들이밀던 것이었다.
검찰의 수사를 받아오던 전직 대통령이 목숨을 끊은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연합뉴스>는 문재인 씨의 발언을 빌어 노 전 대통령이 유서를 남기고 투신했다고 보도했다. 황망하고 슬픈 일이다. 이 사건이 혹시라도 지지자나 측근의 또 다른 죽음을 불러오지나 않을지 걱정부터 앞선다. 애도하고 슬퍼하되 자중자애하기를. 진심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
내가 만든 용어 중에 '88만원 세대' 말고는 변변한 '히트상품'이 없지만, 그나마 좀 알려진 게 '한국형 평등주의'다. (참고: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96 ) 작년 10월쯤 쓴 글이니까 촛불이 정점을 찍고 내려왔을 무렵이다. '촛불은 대체 무엇이었을까'를 고민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다시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 독특한 평등주의는 '사회구성원의 불평등'을 문제삼기보다 '부자'와 '나' 사이의 불평등만 문제삼는 평등주의를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부자아빠 평등주의''이기적 평등주의'랄까. 꽤나 냉소적인 단어이지만, 단지 냉소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은 아니다.
강준만은 "공적 영역과 공인에 대한 불신이 워낙 강한 한국사람들이기에 사회문제에 있어서 개인이나 가족 단위로 각개약진하려고 한다"면서 '협동의 문화' 반대편에 '한국형 평등주의'를 놓는다. (http://sun4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1423) 물론 그런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한국형 평등주의의 원인과 그 결과를 좀더 세밀하게 분석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언제든 '속류 한국학'이 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공적 영역과 공인에 대한 불신이 워낙 강하다"라는 건 단지 현상을 다른 방식으로 기술한 것일 뿐, 한국형 평등주의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형 평등주의를 근대 한국인의 고유한, 그리고 나쁜 습속으로 환원해버리면 결국 협동의 문화를 기르자는 식의 계몽성 캠페인으로 귀결되고 만다.
그럼 한국형 평등주의, 부자아빠 평등주의, 이기적 평등주의의 배경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중간계급의 양극화'다. 그 기원은 1997년 외환위기, 그리고 이와 연결된 개혁정권 10년에 있다. 과거 고도성장기간 동안 서서히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졌던 중간계급은, 1980년대 중후반부터 단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기인식의 단계에 들어서기 시작한다. 정치적 자기인식은 1987년의 민주화운동의 주요 동력 중 하나라는 사실로 집약되고, 사회문화적 자기인식은 KBS의 1991년도 드라마 제목인 <우리는 중산층>으로 상징된다. "우리가 한국사회의 주류'라는 자부심도 이때 형성되었다. 전통적인 블루컬러 노동계급 중 조직화한 일부는 중간계급적 라이프 스타일로 점차 수렴되어 갔다. 이때 한국에서 평등주의라는 것은 '전국민이 중간계급이 되는 것'이다. 기준은 명백했고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중간계급의 짧았던 '아름다운 시절(belle epoque)'은 1997년 외환위기라는 외상적 사건에 의해 1차적으로 종결된다.
이후 10년, 이른바 개혁정권 10년은 극심한 사회경제적 구조변화를 통해 '덩어리'가 해체되는 기간이었다. 그 와중에 중간계급 중 상당수가 저소득층으로 떨어졌고, 일부는 위로 올라섰다. 물론 중간계급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지만 이미 '소셜 스탠더드'로서의 의미는 사라져버렸다. 그렇게나 행복해보이던 이웃집 아저씨가 정리해고당해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멀쩡히 잘살던 친척이 카드빚으로 노숙자가 되는 걸 두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삶 자체의 불안이 쓰나미처럼 덮쳐왔다.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이 새로운 삶의 문법이 됐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철저히 깨닫는다. 다같이 잘 먹고 잘 살수 있다고 믿었던 아름다운 시절은 끝나버렸다. 이제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부자 아빠냐, 아니면 자살하는 아빠냐.
'먹고사니즘'은 그리하여 숭고의 영역에 올라서고, 밥벌이의 지겨움은 삶의 예술로 승화한다. 일본의 저널리스트 출신 저술가인 이시카와 마스미가 기성세대가 된 전공투 세대가 일상에서 보여주는 행태를 '생활보수주의'라 이름붙인 적이 있다. 중간계급이 된 소위 386세대의 먹고사니즘은 생활보수주의와 절묘하게 겹친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위해 운동했던 그들조차 이제 부자와 나 사이의 불평등에만 반응한다. 그러면서 이제 이념의 시대는 끝났고 경제의 시대라고 말한다. 아직도 평등과 해방을 말하는 친구들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친구야, 밥은 먹고 다니냐?" 아직도 냉전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수구꼴통'들에겐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 사람은 못되도 괴물은 되지 맙시다." 이런 식의 '합리성'과 '가치중립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대타자를 향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 대타자는 미국도 아니고 옛소련도 아니다. 다름아닌 시장규율이다.
한국형 평등주의는 단순히 개인의 이기심을 노골적으로 노출해서 문제인 게 아니다. 한국인이 '신자유주의적 시장규율을 내면화하는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에 문제적인 것이다. 정치를 '평등의 과정'이라 정의할 때(랑시에르), 한국형 평등주의는 정치를 대체하는 논리로 기능한다. 물론 당위적 차원에서는 시장논리가 정치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1997년, 그리고 이후 10년의 경험칙이 그 당위를 정면에서 부정한다. 1987년의 에너지가 탄생시킨 정치권력이 시장권력을 통제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는 사실을 머리가 아닌 피부로 절감했을 때, 생활인들은 현실을 깨닫고 분노하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규율을 바꿔 적응하려 한다. 개인적 차원에서 적응의 규율이 일종의 상식으로 일반화되었을 때, 이것은 사회적 차원에서 적응하려 하지 않는 자, 혹은 집단에 대한 배제의 논리로 표현된다. 따라서 한국형 평등주의가 가리키는 것, 또는 그 필연적 결과물은 이것이다. '정치가 불가능해지는 지점', 그리고 탈정치의 이데올로기적 조건.
탈정치는 제도정치(국회의원들의 활동 등등)와 공공성에 대한 혐오와 냉소에서 곧장 발생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경제라는 영역과 정치라는 영역 간의 '관계'에서 출현한다. 요컨대 정치권력이 압도적 시장의 힘에 의해, 그리고 오직 그에 대비되어서만 상대화된다는 것이다. 이 때 경제와 정치의 선언적 분리(물론 이 분리는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불가능하다)가 선행한 다음, 경제에 대한 정치의 개입이 더이상 정당화되지 못하는 시점, 다시말해 경제는 보편성을 획득한 반면 정치는 주관성, 당파성, 부패와 불투명성, 사익추구로 프레이밍되었을 때 비로소 탈정치가 현현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2008년 촛불집회의 슬로건이었고 주제가였던 헌법 제1조가 기묘하게 해석될 가능성이 열린다. 알다시피 헌법제1조 1항과 2항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혹자는 헌법 제1조가 촛불집회에 등장한 걸 두고 "모호하긴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정치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무엇"으로 보기도 하지만, 과연 그럴까. 헌법은 사실명제의 형태로 당위명제를 주장하고 있다. 헌법 제1조 2항이 사실명제라면 아마 이래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시장에 있고 모든 권력은 시장으로부터 나온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의 선언은 정치가로서 무책임한 것이었지만 관찰자로서 정직한 것이었다. 말을 안해서 그렇지 대부분의 국민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만약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을 중간계급이 정말로 관철해야할 당위로 '믿었다면', 헌법 제1조를 목놓아 외칠 필요조차 없다. 100만명이 청와대로 몰려가서 그냥 권력을 접수하면 된다. 중간계급은 헌법이라는 낡은 대타자를 온전히 '믿지' 못한다. 신자유주의적 시장합리성이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은 이것이 진짜 문제다. 그러므로 촛불시민들이 헌법 제1조를 노래하며 이명박에 분노했던 진짜 이유는 이런 게 아니었을까. "이명박 대통령, 당신은 사실 최고권력자가 아니야. 왜냐하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지 오래거든. 넘버투 주제에 우릴 이렇게 무시해?" 제1권력인 시장권력과 매순간 소통하는 소비자-시민 입장에서, 귀와 눈을 틀어막은 저 이명박이란 이름의 정치권력은 얼마나 분통터지는 존재인가.
촛불은 중간계급의 불안이 물화한 사건이다. 그 불안은 정확히 말해서 계급적 인식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명박이 '대한민국 주류시민'의 신념체계를 훼손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그 신념체계는 민주주의에 대한 소박한 믿음 따위가 아니라 내면화된 시장 합리성이다. 중간계급에게 이명박은 오소독스한 시장주의자이긴커녕 글로벌 스탠더드를 완전히 무시하고 권력을 사적으로 전유하려는 자였다. 희망적인 건-이걸 희망이라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그 합리성만으로는 이명박을 거꾸러뜨릴 수 없다는 게 증명됐다는 점이다. 촛불에 참여한 중간계급 중 일부가 노동계급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점은 그래서 의미 있는 것이다.
<스타트렉: 더 비기닝>을 보러갈까 했는데, 영화자막에 문제가 많은 것 같다. 크고 작은 번역오류들이 지뢰처럼 매설되어 있다고 하고, 특히 "워프항법"과 "트랜스포터"를 둘다 "순간이동"으로 번역했다는 소릴 듣는 순간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 이건 번역 이전의 문제다. 한 마디로 작품(특히 SF)을 대하는 기본자세의 문제인 거다. 번역한 분은 이미 몇몇 커뮤니티에서 유명인사로 등극했다. <스타트렉>은 <스타워즈>와 달리 상당히 탄탄한 과학이론에 기반한 시리즈다. <스타트렉>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게 때로 몇몇 <스타트렉> 빠들이 <스타워즈> 빠들을 업수이 여기는 근거로 돌변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오덕들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타트렉>을 처음 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번역에 대한 감수를 제대로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감성이 뾰족한 소년소녀, 자기가 그렇다고 착각한 소년소녀들(대부분 이쪽이겠다)이 문학을 택했던 꿈같은 시절이 있었다. 그 소년소녀들이 고다르와 트뤼포를 경배하며 영화를 택했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쉬크한 사회의식을 간지나게 드러내는 패션에디터, 혹은 파워블로그 굴리며 돈도 버는 트렌드세터. 레닌이 살아있다면 <이스크라>는 패션잡지가 됐을지도 모른다. 아, 그 전에 모발이식부터.
여의도 언저리에서 기자질하던 시절에 심상정, 노회찬과 달리 조승수는 직접 인터뷰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저 그의 행보만 보고 '이런 사람이겠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정치인으로서의 치명적 약점을 가진 사람이란 소리는 참 많이 들었다. "'유도리'가 없다""주위사람을 못챙긴다" 심지어 "꽉 막힌 꼴통"이란 얘기까지. 그런 걸로 정치인의 자질을 재면, 전두환과 김영삼이 일등을 다투겠지. 그래서 나는 조승수의 '치명적 약점'들이 더욱 마음에 든다. 드물게 신뢰가 가는 진보정치인이고, 앞으로 더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 조승수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진보신당은 비록 상징적 의미에 불과하지만 마침내 원내에 한 사람 밀어넣는데 성공했다. 스리슬쩍 봉합해오던 당내 문제들과 정면대결하는 것부터 집권을 향한 구체적 비전까지,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임: (실실 쪼개며) 콩, 제대할려면 며칠 남았음?
콩: 아, 몰라. 왜?
임: 아니, 나 같음 자살한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화는 사진과 무관.
'우여곡절' 끝에 오마이에 실렸다. 원고 쓴지 4일이 지나버린 시점..orz |
['질주' 릴레이 기고 ①] 다중과 고통 받는 비정규직, 연대를 꿈꾼다 |
![](http://ojsfile.ohmynews.com/MEM_ETC/00011677.jpg)
각자가 처한 상황의 작은 차이를 넘어 서로 어깨를 걸었다. 모르는 이가 보면 영락없는 오합지졸이다. 하나의 깃발 아래, 하나같이 심각한 표정인 '철의 노동자' '강철대오'와는 영 거리가 머니 말이다. 대신에 우리는 형형색색의 퀼트 천처럼 자신을 엮어 하나의 깃발이 됐다. 그것이 바로 모두의 삶을 처참하게 찢고 있는 불안정노동, 일하고 또 일해도 벗어날 수 없는 빈곤의 악순환에 맞서 싸우기 위한 질주, '너희가 아닌 우리의 세상을 향한 질주' 프로젝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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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질주' : 연대의 새로운 방식
2009년 4월 21일, 프로젝트 '질주'는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한 뒤 첫 번째 목적지인 대구를 향해 출발했다. 대구-구미-서산-광주-평택-안산-인천-서울로 이어지는 9박 10일 여정의 시작이었다. 이주노동자와 장애노동자를 포함해 전국의 불안정·미조직 노동자들을 만나고, 투쟁사업장에서는 같이 집회도 하는 것이 일정의 주된 내용이다.
한마디로 가장 고통받는 노동자가 있는 곳에 달려간다는 게 기본취지다. 이 전국 순회라는 개념은 과거 전해투(해고자복직투쟁특별위원회)의 단골메뉴였다. 해고노동자들이 전국을 돌며 다른 사업장의 해고노동자들을 만나고 서로 연대하는 형태였다. '질주'도 형식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구성원의 다양성이다.
동희오토, 기륭전자, 코오롱과 같은 2000년대 중후반 노동운동의 상징격인 해고노동자 뿐 아니라, 진보신당 등의 정당, 촛불시민연석회의 등의 자발적 참여시민, 르포작가, 블로거, 백수, 소설가, 대학교수 등 다양한 직업과 계층에 속한 개인들이 참여하고 있다. 참여자들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호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정규직 노동자도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도 있으며, 제조업 노동자, 사무직 노동자, 자영업자, 학술노동자, 예술노동자도 있다. 이념지향은 대체로 진보적이지만 의외로 보수적인 사람도 있으니 역시 하나로 묶을 수 없다. 대체 이들 집단을 뭐라 불러야 할까.
스피노자가 '발견'했고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네그리가 20세기 후반 새로이 조명한, '다중(多衆 multitude)'이 현재로선 가장 가까운 명칭이 아닐까 싶다. 수동적이고 획일화된 '대중(mass)'과 달리 자신의 고유성과 개별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공통의 가치를 위해 능동적으로 네트워킹하고 연대하는 집단, 그것이 바로 다중이다. 과거에 노학연대 혹은 지식인-노동자의 연대사업은 각 소속집단의 의결에 의해 참여가 결정되었고, 연대의 방식이나 기간, 참여주체의 선별까지도 '조직의 결단'에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질주'의 참여형태는 조직적 결의와 개인적 결단이 혼재된 형태다. 물론 네트워크의 노드(node 결절점), 다시 말해 제각각인 사람들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모이게 하는 역할은 존재한다. '질주'의 상황실장이자 진보신당의 비정규담당인 이상욱씨다. 하지만 또 다른 프로젝트에서는 그가 단순참여자가 되고 이번에 참여한 사람 중 하나가 자발적으로 이 역할을 맡을 수도 있다. 모든 과정에서 온라인 활동은 필수요소다. 어쨌든 기존 대형노조의, 조직노동자 중심의 연대활동과는 사뭇 다른 방식임은 분명하다.
단장님 실종사건
첫날인 21일 오후 대구에 도착했을 때 일행이 버스에서 처음 내린 곳은 대구출입국관리사무소 정문. 이주노동자 폭력단속을 항의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최근 동영상이 공개돼 파장을 낳았던 중국여성 이주노동자에 대한 대전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의 무참한 폭력이 새삼 떠오른다. 어디 대전뿐이랴. 전국의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법무부 직원들의 '법보다 주먹' 앞에 속수무책이다.
등록된 이주노동자이건 미등록 이주노동자이건, 그들의 처지를 개선시키지 않고선 비정규노동자의 처지도 개선될 수 없다. 그들이 사실상 한국의 최저임금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주노동자를 자신들의 안전판으로 여기고 방관한다면, 지금 한국의 정규직 노조들처럼 정당성을 잃고 고립되는 건 시간문제다. 누구보다 기업이 이 사실을 귀신같이 알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집회를 마치고 숙소인 건설노조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질주실천단' 단장이 보이지 않는다. 기아자동차 모닝의 생산공장이자 100% 비정규직 사업장으로 '악명'이 자자한 충남 서산의 동희오토. 한국 비정규노동문제의 핵으로 떠오른 그곳 사내하청 지회장인 이백윤씨가 '질주'의 단장이다.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를 처음 낸 사람이 바로 그였다.
얼마 전 서울모터쇼에서 모닝 자동차에 돼지피를 뿌리는 퍼포먼스를 멋지게 성사시킨 서른둘의 '훈남'이다. 자연스럽게 단장으로 추대돼 9박 10일을 끌어가게 됐다고 한다. 저녁식사 자리에서야 그의 근황을 들었다.
"이백윤 단장은 지금 서산경찰서 유치장에 있습니다. 구속적부심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해요."
이상욱 상황실장이 어두운 표정으로 전해준 소식.
"모터쇼에서 선지피 좀 뿌렸다고 잡아간 건가요?"
"아뇨. 그 건은 아니고 작년 12월에 미신고로 집회한 걸 가지고 검찰이 구속기소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유치장에서 아무런 저항도 안 했는데 경찰한테 집단폭행을 당했답니다. 꽤 다친 것 같은데요, 부상치료 요구는 묵살됐습니다."
4개월 전의 미신고 집회 건으로 지금에서야 구속적부심이라니, 서산경찰 전원이 넉 달 동안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왔단 말인가. 하여간 서울경찰이나 서산경찰이나 사람 두들겨 패는 건 일등이다. 참가자들끼리 자기소개를 하고 회의를 하는 도중에도, 자꾸만 이백윤의 선한 얼굴이 아른거린다. 밤 11시 쯤 그가 끝내 구속되고 말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프로젝트 첫날부터 단장 구속이라니, 이놈의 나라가 제대로 '환영인사'를 해주는구나 싶어 오기가 생긴다.
뜻밖의 사태로 첫발부터 단장이 공석이 되는 바람에 새로 뽑아야 했다. 같은 동희오토의 조합원인 이청우씨가 단장을, 기륭전자의 윤종희씨가 부단장이 됐다. 둘 다 군기 팍팍 잡는 스타일이라 좀 무섭다. 다음날 오전 6시부터 분단위로 일정이 이어진다. 일정표를 모니터 너머로 보던 내가 투정 한마디 한다.
"이건 뭐 A급 연예인 스케줄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낄낄대며 한마디씩 거든다. 예상치 못한 비보가 있었지만, 분위기는 의외로 밝다. 수년간 거리에서 싸워온 사람들 특유의 낙천성, 그들을 보며 자신의 삶도 함께 변하고 있는 사람들의 건강함이 기분 좋게 섞여든다. '질주'의 첫날은 그렇게 깊어갔다.
'포맷'되는 노동자, 반복되는 비극
대구엔 성서공단이라는 큰 공단이 있다. 1980년대 1차 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해서 2000년대에 4차 단지까지 생겼다. 울산처럼 고부가가치 금속산업에 특화된 지역이 아니라 영세사업장들이 빽빽하게 밀집해 있는 곳이다. 2500여개 업체의 80% 정도가 50인 이하 기업이고, 6만 여 노동자 중 불과 130여명만 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다.
대구 특유의 보수주의까지 작용해서 노조설립은 물론 가입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영세사업장의 비정규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극한의 노동환경에 처해있다. '질주'와 조우한 성서공단 노동조합의 박찬희 위원장은 성서공단의 불안정노동자를 "경제위기에 가장 고통받는 노동자"라고 정의한다.
"전자부품, 섬유, 기계, 생활용품에서 어묵에 이르기까지 업종도 천차만별입니다. 특히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가 많습니다. 1%가 채 되지 않는 노조조직률에서 무법적 해고는 일상다반사예요. 성서공단에서 한국의 노동법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집에서 쉬세요. 일거리 생기면 다시 부르겠습니다'라는 일방적 통보를 받은 노동자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없자 노동조합에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물으러 옵니다. 자신이 일방적으로, 그리고 불법적으로 해고를 당했다는 사실조차 잘 모르는 게 현실입니다."
전태일이 일하던 1970년대 평화시장, 1980년대 구로공단, 2000년대 성서공단…. 아침에 주인공이 일어날 때마다 같은 날 같은 시각이 무한히 반복되는 어떤 영화가 떠오른다. 한국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은 친재벌·반노동이라는 '국가종교 제1교리'와 결합해서 10년에 한번 꼴로 노동환경을 글자그대로 '포맷'해 왔다. 10년간 조금씩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하는가 싶으면 경제위기가 닥쳐오고, 국가와 기업집단은 그 위기를 핑계로 10년의 진보를 단번에 '무(無)'에 가까운 상태로 되돌려 버린다.
1970년대 '공순이'란 사회적 경멸과 성차별, 인권유린에 시달리면서도 동일방직 사태의 주역으로 우뚝 섰던 여성노동운동의 기념비적 세대는 2009년 현재, 최저임금을 받으며 빌딩과 대학교의 청소용역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야만이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런 게 바로 야만이다. 그 야만은 또한 지방도시의 외딴 공장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곳에 비정규 노동자가 넘쳐난다.
이민을 떠나지 않는 한, 정규직 노동자도 자영업자도 온전히 그 불안과 공포에서 도망칠 수 없다. 이미 대한민국 자체가 거대한 비정규노동의 현장이며 참혹한 삶의 공장이기 때문이다. '질주' 프로젝트가 마지막 이틀을 보낼 장소가 서울인 건, 단순히 서울에서 일정을 시작해서가 아니다. 서울이 곧 현장이어서다.
가장 돈 많은 지역에 저가 음식 가게가 많은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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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층 노동은 점차 사라지는 추세이며 이는 중간계급의 붕괴 혹은 분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쨌든 1명의 엘리트가 먹고 입고 놀고 소비하는 것을 보조하는 '밑바닥 노동'의 수요가 지속적으로 존재하며 그런 노동은 대체로 단기 아르바이트와 같은 저임금 불안정노동이 된다.
그런 노동자들은 과거 중간계급처럼 대도시 주변의 위성도시에 거대한 베드타운을 형성할 수 있는 경제력이 안되기 때문에 대도시의 열악한 주거지역에 거주하게 되며 그런 지역은 점점 슬럼화하기 시작한다. 엄청난 부를 벌어들이는 신흥엘리트들은 중간계급의 주거지역보다 도심에 급격히 늘어나는 펜트하우스를 자신의 여러 거처 중 하나로 삼는다. 비교적 좁은 공간에서 극단적으로 이질적인 노동자 집단이 같이 일하고 또 생활하는 셈이다.
서울이 이런 형태의 도시가 되어간다는 단적인 예가 있다. 강남 핵심지역에 있는 엄청난 숫자의 '김밥천국'이다. 김밥천국이라는 특정상호가 아니더라도 1000원에서 2000원으로 한끼를 떼울 수 있는 저가 김밥전문점들이 강남에 무수히 많이 생겼다. 한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일하는 지역에 이런 점포가 많은 건 무엇을 시사하는가.
한끼 식사에 평균 이하의 돈을 지불할 수밖에 없는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비강남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강남은 훨씬 이질적인 계급들이 공존하는 곳이다. 고시텔과 같은 열악한 주거형태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점도 근거 중 하나다.
즉, 서울 강남은 드러나지 않을 뿐 울산이나 서산 못지않은 각종 노동문제의 화약고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의 노동문제는 결국 불안정노동의 문제이며, 불안정노동은 전통적인 제조업 분야 뿐만 아니라 전문직군이라 불리는 금융서비스업, IT산업, 사교육산업 등의 공식경제 부문은 물론 비공식경제에 발을 걸친 각종 오락·향락산업에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된다. 따라서 이 모든 곳은 불안정노동의 '현장'이고 '공장'이다.
'질주' 프로젝트는 '현장에 내려가서' 도움이 필요한 노동자에게 손 내밀어주는 온정사업이 아니다. 이 문제를 양심적인 시민들에게 알리는 데 그쳐서도 안된다. 이건 우리 모두가 처한 어떤 사실을 철저히 깨닫고 체감하는 여정이다. 노동의 비정규화는 단지 일부 지역에서 고통받는 몇몇 노동자의 현안이 아니라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규정하는 문제라는 사실을. 고통분담 운운하며 비정규직을 늘리고 대졸초임을 깎아내는 저들은, 설령 우리가 불안과 공포에 굴복해 안구와 신장을 팔고 영혼까지 내어주어도 결코, 결단코 만족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19688
그러고보니 며칠 전 대학후배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최근 학생회관에서 선후배들끼리 고기 구워먹고 술을 마셨는데 이후 학교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과방이 '폐쇄조치'당했다고 한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여친님 불같이 화를 낸다. "아니, 그런 짓을 당하고도 가만 내버려뒀어? 학교를 확 뒤집어 엎어야지!" 그러게. 여친보다 훨씬 온건한 나같은 사람이 봐도 말이 안된다. 등록금 문제도 있어서 학생들의 불만은 높아져 있지만, 실질적인 저항이나 반발은 없다고 한다. '짜증나긴 하지만 아무도 안나서니 난 취업공부나 열심히 하자' 이런 생각인듯. 지금 대학생들이 학교측에 철저히 얕보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줄이야.
지나간 세월을 한탄해봐야 다 부질없다. 나같은 선배들의 업보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안하는 후배들이라 욕해봐야 제 얼굴에 침뱉기일 뿐. 사실 그들이 안하는게 아니라 못하는 것에 더 가깝다. 화는 나는데 싸우는 걸 본 게 없으니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운동권이라 욕먹을까봐 움츠러들고, 뭐 그런 거다. 이제 한국도 'CC를 위한 가이드' 같은 게 있어야 할 것 같다. 캠퍼스 커플 말고 '캠퍼스 컴뱃', 약칭 CCG...
학교측의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고 싸우는 노하우나 자세같은 것들은 선후배가 학교에서 같이 술 마시고 고기 뜯으면서 암묵지처럼 전수되기 마련인데, 선배라는 작자들은 가끔 술 사주면서 운동권 무용담을 늘어놓거나 자기 스펙 자랑이나 해대니... 세상이 변했다지만 예나 지금이나 투쟁의 구조와 본질은 똑같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대학의 분위기에서 대학생이 느닷없이 짱돌 모으고 꽃병 제조해서 싸울 수는 없다.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다. 하지만 구체적인 투쟁방식을 같이 고민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홈커밍데이 같은 날, 괜히 선배들한테 아부떨지 말고 '내 모교를 돌려줘'같은 구호로 'OBXNB 크로스!' 집회같은 걸 조직해보는 것도 괜찮지 싶다. 스타벅스같은 외식체인에 점령당한 캠퍼스에 회한을 가진 선배들, 참 많다. 그 과정에서 또 여러 고민과 아이디어들이 나올 수도 있다. 일단 학생들끼리 학내투쟁을 한다치고, 내가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어디까지나 '예'를 드는 거다. 리스크가 낮은 것부터 단계적으로 투쟁을 고양시키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그 구조에다 액션 아이디어들을 집어넣기만 하면 된다.
만약 이슈가 등록금 문제라고 할 때 단식투쟁이나 삭발투쟁 같은 건 식상할 뿐 아니라 하는 사람만 괴롭고, 후유증도 심각하니 지양해야 한다. 기자회견하고 성명서 발표해봐야 기자들은 별 신경도 안쓴다. 먼저 '학생회관 동맹폭식의 날'을 지정해서 굶주린 배를 채우고 저항의 기운을 한껏 북돋는 게 최우선이다. 이른바 폭식투쟁이다. 그 다음, '선영아, 사랑해'같은 류의 티저광고지를 학교에 쫙 부착한다. 등록금 문제니까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같은 알듯모를듯한 짧은 문장이나 간단한 이미지로 하는 게 좋다. 그리고 한달 묵힌 양말 대량투척, 츄리닝에 스모키 화장하고 수업듣기 같은 비교적 쉬운 전술로 교내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 이후 수영복 입고 학생처 앞 복도 삼보일땡(세걸음 걷고 저질땐스), 총장실이나 학생탄압교수의 책상에 똥싸고 나오기 등과 같은 하이레벨 택틱까지 가는 거다. 국과수의 DNA 감정이 두려우면 근처 개똥을 주워와도 상관없다. '투입'부터 '배설'까지 서서히 고양되고 하나로 완결된 서사적 구조, 미학적 저항이라는 점이 포인트. 투쟁에는 어찌됐건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참여하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지적인 측면에선 10대, 20대, 30대 초반까지 포괄하는, 88만원 세대를 위한 '저항의 커리큘럼' 같은 걸 짜볼 수 있다. 사회에 대해 좀 더 알고싶어도 마땅한 커리가 없어서 삽질하는 친구들이 의외로 많으니까 이 방면의 선수들이 모여서 체계적인 학습과정을 제시해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선수'들이어야 하는 이유는, 체계적이되 쉽고 재미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줄요약까진 아니라도 제대로 다이제스트해주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심화학습으로 나아간다. "반이명박" 같은 하나마한 소리만 나불대는 선배 따윈 필요없다.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게 중요하다. 감나무에서 배 열리길 기다리지 말고, 배 먹고싶으면 배나무를 심어라.
한윤형과는 7년 전부터 알던 사이다. 그가 자서전 비슷한 책을 낸다고 했을 때, 사실 어떤 이야기들이 들어있을지는 '안봐도 비디오'였다. 나는 2000년부터 2009년이라는 기간 동안 그가 온라인에 쓴 글 대부분을 읽어왔기 때문이다. 한윤형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내가 그 기간 동안 온라인에 쓴 글의 거의 전부를 읽었다(아마도 내가 쓴 '기사'를 '돈 주고' 읽은 적은 거의 없을 테지만).
호사가들은 한윤형의 글에서 '논리'만을 보며 칭찬하고 감탄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재능은 논리가 아니라 '윤리'에 있다. 사실 논리구조가 명확히 노출되는 글은 잘쓴 글이라고 하기 어렵다. 정말 글을 잘 쓰는 이들은 확립된 논리를 절묘하게 숨겨놓는다. 강렬한 직관과 감성에 호소하되 독자가 이를 곱씹으면 탄탄한 논리가 슬며시 드러나는 식이다. 논리적으로 쓰는 능력, 논리를 내재화시키는 능력 모두가 적당한 훈련을 통해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그러나 윤리적 감수성은 쉽게 흉내낼 수 있는 재능이 아니다. 윤리는 '착하게 살자'는 하나마나한 소리를 반복하는 게 아니라 자신과 발딛고 있는 세계 사이의 긴장을 끝없이 견뎌내며 앞으로 밀어붙이는 힘이다. 그 힘이 없는 논리는 그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팩트와 지식을 직접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자들의 손바닥 위에서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건 선불교에서 수행자를 평가하는 기준인 '근기(根機)'와도 일맥상통하는데, 어쨌든 한윤형은 내가 아는 '온라인 20대 글쟁이' 중 가장 근기가 강한 이다(술만 보면 환장해서 그렇지). 앞으로의 책이 더 기대되는 이유다. 안티조선운동이 실패했다고 말하는 자들은 앞으로 나서라.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한윤형을 보라. 안티조선이 낳은 저 '옥동자'를. 좌절과 환멸이 적지 않은 운동이었지만, 이 젊은이 하나만으로도 결코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키보드 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는 그 자체로 안티조선운동의 '순익증명서'다.
로비사건은 결국 노 전대통령 패밀리의 스캔들이 됐다. 수사중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언론에 나온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다. '충격'이라는 건 충격적일 정도로 낯익은 풍경이라는 의미다. 한국땅에서 전직 대통령과 그 가족들의 운명은 늘 그렇게 비슷하다. 뭔가 예감했던 것인지 사건이 불거지기 얼마 전에 그는 "정치 절대로 하지 마라"는 말을 남겼는데, 결국 이 말은 정치인 노무현이 남긴 마지막 충고가 됐다. 어쨌든 이로써 '노무현의 시대'는 완전히 종결되었다. 후마니타스의 박상훈 대표는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이 사건으로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세력에 아무런 부채감을 갖지 않게 될 것"이고 그것은 한마디로 "민주화운동세력에게 재난적 상황"이라고 말한다. 일견 틀린 이야기는 아니며 민주화운동세력에 속한 사람들이 대체로 동의할만한 내용이기도 하다. 하지만 피상적인 시각이란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이런 시각을 비판하는 세 가지 논점이 있을 수 있다.
첫째, '민주화운동세력의 대표성이 노무현과 그 지지자들에게 있는가'라고 되묻는 경우. 즉 이것은 노무현 시대의 종막이지 민주화운동세력의 종막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런 입장은 '우리들이야말로 민주화운동세력의 적통을 잇는다'고 생각하는 세력 중 일부가 품을 법한 시각이다. 혹은, 노동운동세력과 좌파들이 동참했던 민주화운동의 과실을 특정세력이 모두 가져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일부의 시각일 수도 있겠다. 따지고보면 노무현 정권에 핵심에 들어갔던 이른바 '386세대'들은 민주화운동 당시에 '주류'였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런 식의 주장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비겁하다. 좌파들이건 민주화운동세력의 주류이건간에 민주화운동세력/독재-산업화세력의 구도 속에서는 모두 민주화운동세력에 포함되는 건 분명하며, 직간접적으로 정권의 탄생에 크게 기여했고 상당수는 정권의 유지에 협력해온 게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시대가 이런 식으로 끝났다고 해서 '사실 그들한테는 민주화운동세력의 정통성이 없었어'라고 말하는 건 그저 졸렬한 책임회피 밖에 되지 않는다. 윤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최악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을테지만, 그걸 입 밖에 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둘째,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세력에 아무런 부채감을 갖지 않게 된 시점이 정말로 지금에 와서인가, 박연차 로비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서야 민주화운동세력이 "재난적 상황"을 맞은 거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지금, 2009년 4월 중순이라는 시점에서 민주화운동세력이 재난적 상황에 처한 것 자체는 맞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박연차 로비 사건 이전에 민주화운동세력은 이미 재난적 상황이었다" "부채감 따위는 참여정부 5년 동안 말끔히 날아갔다"고 말이다. 민주화운동세력이 보기에 정말 '말도 안되는 인물'이었던 이명박이 큰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가 아닌가. 부채감은커녕,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온 기간이 '개혁정권 10년'이라면 어쩔 것인가. 물론 이에 대해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부채감은 도덕성 차원의 문제고, 참여정부에 대한 불신은 능력 차원의 문제이니 서로 다른 문제'라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예전부터 의문스러웠던 게 있다. 정말로 민주화운동세력이 도덕성에서 우위였기 때문에 지지를 얻어온 것일까. 그것은 혹시 어느 순간부터 민주화운동세력 스스로가 자신에게 부여한 셀프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다시말해 현재 민주화운동세력이 처한 재난적 상황의 중심에 도덕성 문제가 놓여 있다는 주장은 과연 옳은 걸까.
세번째 비판은 두번째와 연결되는 것이며 이런 의문에 관한 거다.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세력을 지지했던 이유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 과연 부채감이었냐는 것.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민주화운동세력의 이러한 '자기인식의 불철저성'이야말로 위기의 진짜 원인일 수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민주화세력은 더 도덕적이지만 국가운영능력은 상대적으로 미흡하고, 산업화세력은 비도덕적이지만 국가운영능력은 낫다'는 식의 일종의 비교우위적 인식구도가 정말로 한국사람들의 정치적 지지를 추동하는 보편적인 인식틀인지 의심스럽다는 이야기다. 김영삼정부(독재세력과의 야합이었지만)까지 포함하면, 물경 15년간 민주화운동세력의 상징적 인물이 잇달아 국가의 수장이 되어 나라를 운영해왔는데(게다가 퇴임 후엔 여지없이 가족비리사건이 터졌다), 국민들이 단지 부채감 같은 이유로 지지하고 당선시켰다고 생각하는 것은 좀 이상하다. 사실 부채감이란 건 대체로 같이 운동했던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는 정서다. 일반적인 생활인들은 그런 식으로 사고하는 게 익숙치 않다. 사람들의 생각은 이런 쪽에 가까운 게 아니었을까. "그동안 너무 오래 고생했어. 이 사람들 '한'도 풀어줘야지."
한풀이와 도덕적 채무의식을 청산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비록 도둑놈이라도 크게 한을 품고 죽으면 그걸 풀어주고 싶어하는 게 한국사람 정서다. 한풀이나 부채감 청산이나 모두 도덕판단의 일종이긴 한데 전자가 유니버설한 시혜에 가깝다면 후자는 기본적으로 호혜성(기브앤테이크)에 닿아있는 문제이고 그래서 일종의 교환 형식을 띤다. 현실은 전자였을 수도 있고 후자일 수도 있고 양쪽 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설령 사람들이 부채감과 죄의식 때문에 지지해 줬다고 치자. 그 채무관계는 두명 혹은 세명의 대통령 당선으로 청산된 것이다. 문제는 별다른 고민없이 자신의 도덕성에 과잉의미부여를 하는 것이다. '딴 건 몰라도 이건 우리가 낫다'는 식의 자부심으로 그치면 좋은데 그것이 우월의식으로 왜곡되는 게 문제다. 그것은 민주화운동세력처럼 살지 못한 대다수 사람들의 죄의식만 자극할 뿐이고 그것이 지나치면 '뭔가를 더 갚아야한다'는 생각보다는 외면과 냉소로 흐르게 된다. 최악의 경우는, 자신의 도덕성을 다른 잘못들의 알리바이로 이용하는 것이다. 참여정부를 비롯해 민주화운동세력 대다수가 이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민주화운동세력이 상대적으로 도덕적이란 이미지는 실제로 그들 대다수가 도덕적이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며 분명 국민들로 하여금 호의적 평가를 하게 만든 이유다. 그러나 한국제도정치에서 그것은 플러스알파의 요소지, 지지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돈 안받아먹는 것, 물론 중요하다. 더이상 전직 대통령의 비리가 이렇게 폭로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도덕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돈 안(덜) 받아먹은 도덕성만이 유일한, 그리고 최후의 정당화 기제가 된 상황 자체가 이미 '막장'이라는 얘기다. 그 상황을 제로베이스로 놓고 치열한 반성을 했어야 하는데 '전가의 보도'같은 도덕성이 이렇게 무너진 지금이 돼서야 패닉에 빠지거나 재난적 상황이라며 걱정하고 있다. 장례식에서 망자의 관에 못질한 사람을 살인범으로 지목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설상가상 유시민은 박연차 로비사건이 터진 사건 이후 "노무현 대통령을 모신 시간은 큰 영광이자 행운""이번 사태는 민주당 재보선에 오히려 호재" 등의 발언을 하고 있다. 박연차로비사건이 재난이 아니라, 이 모든 풍경들의 총합이야말로 진짜 재난적 상황 아닐까. 민주화운동세력이 정말 우려해야하는 건 국민들의 부채감이 사라지는 따위가 아니다. 정상정치의 회복을 위해서라면 되려 민주화운동세력이 '아직까지도' 부채감 같은 것에 의지하는 걸 비판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정말 우려해야 하는 것은 자신들이 운동할 때 했던, 그리고 정치할 때 했던 약속과 공약의 대부분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정권핵심세력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반성하긴커녕 눈알을 부라리며 합리화는 데 바빴다. '노무현 너마저!"라는 탄식과 분노 뒤로 참여정부, 그리고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냉정하고 집요한 역사적 평가와 비판이 생략되거나 소홀히 취급되어선 안되는 이유다.
나는 여전히 블로그라는 것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것 하나만큼은 명확해 보인다. (블로그란) '함량미달의 먹물이 사회적으로 자살하는 최적의 도구'라는 것. 게시판 논객들이 설치던 시절에는 거친 논쟁을 통해 내상을 입은 논객이 자취를 감추는 식이었다. 간혹 잠수탔던 이가 내공을 증진해 복수전을 벌이거나 폼나게(혹은 겸연쩍게) 재기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반면 블로그의 무서운 점은, 다른 누구도 아닌 블로거 자신의 글을 통해 자아가 붕괴하는 모습이 생중계된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댓글을 싹 지워버리기도 한다. 이래서야 재기조차 쉽지 않다. 게시판이 무협지라면 블로그는 사이코리얼리티드라마랄까. 게시판에 비해 블로그는 훨씬 사적이고 내밀한 공간인 반면 콘텐츠의 유통속도는 비할 바 없이 빠르다. 이 특성이 자살 위험도를 높이는 핵심요소다. 물론 개인적으로야 안타깝지만 맬서스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사회적 자살이 공익에 일정 부분 이바지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최근의 노모씨를 포함해 '표본들'이 이 정도까지 쌓이다 보니 블로그 회의론자인 나조차도 블로그의 사회적 순기능을 겸허히 인정치 않을 수 없다. 나도 뽀록나기 전에 접어야 할 듯.
다들 한번 읽어보셨으면 좋겠다. 기사에도 언급되다시피 예술노동자의 문제는 기존의 노동문제처럼 풀어가기 어려운 지점이 분명히 있다. 섬세하고 심도있는 논의가 필요한 이유다.
"쟁가" 님의 점수는 1,140점 입니다.
애정인지력 | 300점 |
감정제어력 | 150점 |
긍적적낙관력 | 300점 |
연애공감력 | 190점 |
관계유지력 | 200점 |
합계 | 1140점 |
애정인지력 A 등급 | 당신은 자신의 능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표현 할 수 있는 당신의 인지력은 최고입니다. |
감정제어력 B 등급 | 냉정한 판단력은 가지고 있지만 사소한 일에 쉽게 감정적이 되어 버립니다. 인간답고 좋긴 하지만 너무 지나치면 의도한데로 진행이 되지 않습니다. |
긍적적낙관력 A 등급 | 느긋한 사고의 당신 10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 없다는 말이 당신에게 어울립니다.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아주 멋진 이성을 찾아서 고백하세요. 물론 한번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죠?? |
연애공감력 B 등급 |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놓쳐 , 그(그녀)를 불안한 마음을 갖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상대를 잘 파악해, 「무엇을 바라고 있을까」를 알아내는게 중요합니다 |
관계유지력 A 등급 | 싸움을 부추기거나 상대를 불안하게 하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항상 두 사람의 감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당신은 연애의 달인 입니다 |
애정인지력? | 자신이 누구를 좋아하는가 깨닫기 위한 능력. 「그 사람은 좋아한다」라고 하는 기분이 들었을 때로부터, 연애는 시작된 것 입니다. |
감정제어력? | 너무 정열적이면 아무리 좋아하는 상대라도 상대방이 탁구공처럼 튕겨 나갑니다. 자신의 감정을 잘 정리해 상대방에게 전하세요 연애에 냉정한 판단력은 필수사항입니다. |
긍적적낙관력? | 「해 보지 않고서는 모른다」,「어떻게든 되겠지.. 이러한 느긋한 마음이, 사랑의 시작에는 필요합니다. 「차이면 어떻게 하지?」 이런 고민하지 말고 ,우선 행동으로 사랑을 시작하세요 |
관계유지력? | 연애를 지속시키고 발전시킬수 있는 능력,둘 사이에 문제가 발생했을 대 적절한 대응을 취할 수 있을지?? 핵심이 관계유지력에 있습니다. |
연애공감력? | 그(그녀)의 기분을 눈치채는 능력.지금, 어떤 기분으로 있는지? 어떤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이런 것을 잘 파악하면 연애의 마라톤에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
사실 내가 황당할 정도로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것도 맞고,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다이렉트로 들이댔던 것도 맞다. 근데 "연애의 달인"이라니 이건 좀 아니잖아(내 연애기간을 아는 지인들이라면 '연애의 장인' 정도로는 평가해줄 듯;;;;). 아래 사이트에서 테스트해볼 수 있다.
http://www.enjoycell.com/index.html?source=2
대개의 사람들은 별 관심조차 없지만 블로고스피어라는 좁디좁은 찻잔 속에 큰 소용돌이를 일으킨 사건이 하나 있었다. 목수정-정명훈 논란이 그것인데, 시시비비를 떠나 형식주의와 원칙주의가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 사례다. 그리고 이 점은 아마도 그 논란이 지니는 유일한 사회적 순기능이라 할 수 있을 게다. 목수정과 정명훈 사이에 있는 센세이셔널한 대립에 온통 눈이 팔려서 "약자에 대한 연대는 필요하다"라며 평소 자신이 비난하던 "식상한 주류좌파"의 당위명제를 뜬금없이 늘어놓거나, "도와줄 거 아니면 입닥쳐"라는 식의 주장을 태연히 내뱉는 '나름 유명 블로거'들이 있다. 이들은 '약자와의 연대'라는 원칙을 고수하는 원칙주의자들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마치 동굴 벽에 매머드를 그리면 매머드 고기가 눈앞에 나타날 거라 믿었던 순박한 원시인들처럼, 이들은 "약자와의 연대"라는 발화행위가 그 자체로 약자와의 연대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정작 연대해야할 약자들의 이야기가 지금의 여론환경과 '대 정명훈'의 전선 속에서 어떻게 휘발되고 있는지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강자/약자의 형식적 대립전선을 긋고 스스로의 윤리적 당위에 도취되어 있을 뿐이다. 정명훈과의 전면전과 그에 따른 파장이 약자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생각조차 않는다. 걸핏하면 약자를 들먹이지만 정작 그들이 바라보는 건 약자가 처한 현실이 아니다. 거울아 거울아, 누가 누가 정치적으로 가장 올바르지? 그건 바로 나지! 비장하게 선언했던 강자/약자의 형식적 대립전선은 이제 자신의 윤리적 정당성을 빛내줄 액세서리로 전락한다. 그런 건 연대가 아니라 '연대의 포즈'다. 그야말로 '입만좌파 형식주의자'의 전형이다. 결과적으로 약자와의 연대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묵묵히 현장에서 싸우고있는 좌파와 운동권들의 얼굴에도 오물을 뿌리고 말았다. 이들이 그냥 블로거인게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만일 알량한 현실권력이라도 손에 쥐게되면, 레닌이 비난했던 '좌익소아병'적 행태를 전사회적 차원에서 보여줄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원칙주의는 무엇일까. 원칙주의는, 그저 원칙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여 원칙을 관철하기 위한 최선의 방식을 모색하는 태도다. 이는 단순히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적인 사고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아무리 전략적으로 움직여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 태반이다. 그러나 원칙과 목적의식만은 분명히 인식하고 행동해야 한다. 요즘 지사(志士)라는 단어를 비웃는 이들이 부쩍 늘었지만, 지사는 본래 그런 원칙주의자를 말한다. 좌파가 연대할 때 원칙이란 무엇인가. 연대해야할 대상, 투쟁주체에게 우선순위를 두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건 분명 '가오'가 서지도, '간지'가 나지도 않는 일이다. 원칙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좌파적 연대란 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노래 '절룩거리네'가 나온지 벌써 4년이 지났다. 떠올려보니 이런 가사였다.
"내 발모가지 분지르고 월드컵 코리아
내 손모가지 잘라내고 박찬호20승"
그러고보니 모터쇼에서 모닝 자동차에 돼지피를 뿌렸던 동희오토의 88만원 세대들이 가사를 슬쩍 바꿔부를만한 노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루저정서의 엑기스'같은 노래의 적나라함이, 어느 대학생으로 하여금 'OT에서 왕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럼 장기하 현상은 무얼까? 네이버 지식인은 가끔 이렇게 진리를 누설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