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13. 01:12

박연차 로비사건: 민주화운동세력의 도덕성에 관하여


로비사건은 결국 노 전대통령 패밀리의 스캔들이 됐다. 수사중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언론에 나온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다. '충격'이라는 건 충격적일 정도로 낯익은 풍경이라는 의미다. 한국땅에서 전직 대통령과 그 가족들의 운명은 늘 그렇게 비슷하다. 뭔가 예감했던 것인지 사건이 불거지기 얼마 전에 그는 "정치 절대로 하지 마라"는 말을 남겼는데, 결국 이 말은 정치인 노무현이 남긴 마지막 충고가 됐다. 어쨌든 이로써 '노무현의 시대'는 완전히 종결되었다. 후마니타스의 박상훈 대표는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이 사건으로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세력에 아무런 부채감을 갖지 않게 될 것"이고 그것은 한마디로 "민주화운동세력에게 재난적 상황"이라고 말한다. 일견 틀린 이야기는 아니며 민주화운동세력에 속한 사람들이 대체로 동의할만한 내용이기도 하다. 하지만 피상적인 시각이란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이런 시각을 비판하는 세 가지 논점이 있을 수 있다.

첫째, '민주화운동세력의 대표성이 노무현과 그 지지자들에게 있는가'라고 되묻는 경우. 즉 이것은 노무현 시대의 종막이지 민주화운동세력의 종막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런 입장은 '우리들이야말로 민주화운동세력의 적통을 잇는다'고 생각하는 세력 중 일부가 품을 법한 시각이다. 혹은, 노동운동세력과 좌파들이 동참했던 민주화운동의 과실을 특정세력이 모두 가져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일부의 시각일 수도 있겠다. 따지고보면 노무현 정권에 핵심에 들어갔던 이른바 '386세대'들은 민주화운동 당시에 '주류'였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런 식의 주장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비겁하다. 좌파들이건 민주화운동세력의 주류이건간에 민주화운동세력/독재-산업화세력의 구도 속에서는 모두 민주화운동세력에 포함되는 건 분명하며, 직간접적으로 정권의 탄생에 크게 기여했고 상당수는 정권의 유지에 협력해온 게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시대가 이런 식으로 끝났다고 해서 '사실 그들한테는 민주화운동세력의 정통성이 없었어'라고 말하는 건 그저 졸렬한 책임회피 밖에 되지 않는다. 윤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최악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을테지만, 그걸 입 밖에 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둘째,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세력에 아무런 부채감을 갖지 않게 된 시점이 정말로 지금에 와서인가, 박연차 로비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서야 민주화운동세력이 "재난적 상황"을 맞은 거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지금, 2009년 4월 중순이라는 시점에서 민주화운동세력이 재난적 상황에 처한 것 자체는 맞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박연차 로비 사건 이전에 민주화운동세력은 이미 재난적 상황이었다" "부채감 따위는 참여정부 5년 동안 말끔히 날아갔다"고 말이다. 민주화운동세력이 보기에 정말 '말도 안되는 인물'이었던 이명박이 큰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가 아닌가. 부채감은커녕,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온 기간이 '개혁정권 10년'이라면 어쩔 것인가. 물론 이에 대해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부채감은 도덕성 차원의 문제고, 참여정부에 대한 불신은 능력 차원의 문제이니 서로 다른 문제'라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예전부터 의문스러웠던 게 있다. 정말로 민주화운동세력이 도덕성에서 우위였기 때문에 지지를 얻어온 것일까. 그것은 혹시 어느 순간부터 민주화운동세력 스스로가 자신에게 부여한 셀프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다시말해 현재 민주화운동세력이 처한 재난적 상황의 중심에 도덕성 문제가 놓여 있다는 주장은 과연 옳은 걸까.

세번째 비판은 두번째와 연결되는 것이며 이런 의문에 관한 거다.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세력을 지지했던 이유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 과연 부채감이었냐는 것.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민주화운동세력의 이러한 '자기인식의 불철저성'이야말로 위기의 진짜 원인일 수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민주화세력은 더 도덕적이지만 국가운영능력은 상대적으로 미흡하고, 산업화세력은 비도덕적이지만 국가운영능력은 낫다'는 식의 일종의 비교우위적 인식구도가 정말로 한국사람들의 정치적 지지를 추동하는 보편적인 인식틀인지 의심스럽다는 이야기다. 김영삼정부(독재세력과의 야합이었지만)까지 포함하면, 물경 15년간 민주화운동세력의 상징적 인물이 잇달아 국가의 수장이 되어 나라를 운영해왔는데(게다가 퇴임 후엔 여지없이 가족비리사건이 터졌다), 국민들이 단지 부채감 같은 이유로 지지하고 당선시켰다고 생각하는 것은 좀 이상하다. 사실 부채감이란 건 대체로 같이 운동했던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는 정서다. 일반적인 생활인들은 그런 식으로 사고하는 게 익숙치 않다. 사람들의 생각은 이런 쪽에 가까운 게 아니었을까. "그동안 너무 오래 고생했어. 이 사람들 '한'도 풀어줘야지."

한풀이와 도덕적 채무의식을 청산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비록 도둑놈이라도 크게 한을 품고 죽으면 그걸 풀어주고 싶어하는 게 한국사람 정서다. 한풀이나 부채감 청산이나 모두 도덕판단의 일종이긴 한데 전자가 유니버설한 시혜에 가깝다면 후자는 기본적으로 호혜성(기브앤테이크)에 닿아있는 문제이고 그래서 일종의 교환 형식을 띤다. 현실은 전자였을 수도 있고 후자일 수도 있고 양쪽 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설령 사람들이 부채감과 죄의식 때문에 지지해 줬다고 치자. 그 채무관계는 두명 혹은 세명의 대통령 당선으로 청산된 것이다. 문제는 별다른 고민없이 자신의 도덕성에 과잉의미부여를 하는 것이다. '딴 건 몰라도 이건 우리가 낫다'는 식의 자부심으로 그치면 좋은데 그것이 우월의식으로 왜곡되는 게 문제다. 그것은 민주화운동세력처럼 살지 못한 대다수 사람들의 죄의식만 자극할 뿐이고 그것이 지나치면 '뭔가를 더 갚아야한다'는 생각보다는 외면과 냉소로 흐르게 된다. 최악의 경우는, 자신의 도덕성을 다른 잘못들의 알리바이로 이용하는 것이다. 참여정부를 비롯해 민주화운동세력 대다수가 이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민주화운동세력이 상대적으로 도덕적이란 이미지는 실제로 그들 대다수가 도덕적이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며 분명 국민들로 하여금 호의적 평가를 하게 만든 이유다. 그러나 한국제도정치에서 그것은 플러스알파의 요소지, 지지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돈 안받아먹는 것, 물론 중요하다. 더이상 전직 대통령의 비리가 이렇게 폭로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도덕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돈 안(덜) 받아먹은 도덕성만이 유일한, 그리고 최후의 정당화 기제가 된 상황 자체가 이미 '막장'이라는 얘기다. 그 상황을 제로베이스로 놓고 치열한 반성을 했어야 하는데 '전가의 보도'같은 도덕성이 이렇게 무너진 지금이 돼서야 패닉에 빠지거나 재난적 상황이라며 걱정하고 있다. 장례식에서 망자의 관에 못질한 사람을 살인범으로 지목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설상가상 유시민은 박연차 로비사건이 터진 사건 이후 "노무현 대통령을 모신 시간은 큰 영광이자 행운""이번 사태는 민주당 재보선에 오히려 호재" 등의 발언을 하고 있다. 박연차로비사건이 재난이 아니라, 이 모든 풍경들의 총합이야말로 진짜 재난적 상황 아닐까. 민주화운동세력이 정말 우려해야하는 건 국민들의 부채감이 사라지는 따위가 아니다. 정상정치의 회복을 위해서라면 되려 민주화운동세력이 '아직까지도' 부채감 같은 것에 의지하는 걸 비판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정말 우려해야 하는 것은 자신들이 운동할 때 했던, 그리고 정치할 때 했던 약속과 공약의 대부분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정권핵심세력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반성하긴커녕 눈알을 부라리며 합리화는 데 바빴다. '노무현 너마저!"라는 탄식과 분노 뒤로 참여정부, 그리고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냉정하고 집요한 역사적 평가와 비판이 생략되거나 소홀히 취급되어선 안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