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8. 12:06

싸움의 방식 2 : 형식주의와 원칙주의

어떤 의제를 두고 의견이 대립할 경우, 사람들은 종종 그것을 '원칙주의' 대 '실용주의'의 구도로 인식하는 버릇이 있다. 좌우파간 대립에서는 물론이고 각 진영 내부의 의견대립에서도 흔히 보이는 일이다. 논의의 내용을 조금만 눈여겨보면 그 구도가 '원칙주의' 대 '실용주의'가 아니라 실은 '형식주의' 대 '기회주의'인 경우가 많다. 물론 형식주의라는 단어가 단순히 원칙주의를 조롱하는 표현이며, 기회주의는 실용주의를 경멸하는 표현일 뿐이라 일축할 수도 있다. 다시말해 형식주의와 원칙주의의 쌍, 실용주의와 기회주의의 쌍은 각각 실질적으로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고, 그저 표현상의 차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경우도 적지 않으므로 아주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어떤 사안에서는 형식주의와 원칙주의가, 그리고 실용주의와 기회주의가 또렷이 구별되기도 하므로 정확한 이해라고 할 수는 없다. 참고로 실용주의와 기회주의를 구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주장의 내용이, 주장하는 사람 또는 집단의 사적 이익에 봉사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살펴보면 된다.

대개의 사람들은 별 관심조차 없지만 블로고스피어라는 좁디좁은 찻잔 속에  큰 소용돌이를 일으킨 사건이 하나 있었다. 목수정-정명훈 논란이 그것인데, 시시비비를 떠나 형식주의와 원칙주의가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 사례다. 그리고 이 점은 아마도 그 논란이 지니는 유일한 사회적 순기능이라 할 수 있을 게다. 목수정과 정명훈 사이에 있는 센세이셔널한 대립에 온통 눈이 팔려서 "약자에 대한 연대는 필요하다"라며 평소 자신이 비난하던 "식상한 주류좌파"의 당위명제를 뜬금없이 늘어놓거나, "도와줄 거 아니면 입닥쳐"라는 식의 주장을 태연히 내뱉는 '나름 유명 블로거'들이 있다. 이들은 '약자와의 연대'라는 원칙을 고수하는 원칙주의자들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마치 동굴 벽에 매머드를 그리면 매머드 고기가 눈앞에 나타날 거라 믿었던 순박한 원시인들처럼, 이들은 "약자와의 연대"라는 발화행위가 그 자체로 약자와의 연대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정작 연대해야할 약자들의 이야기가 지금의 여론환경과 '대 정명훈'의 전선 속에서 어떻게 휘발되고 있는지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강자/약자의 형식적 대립전선을 긋고 스스로의 윤리적 당위에 도취되어 있을 뿐이다. 정명훈과의 전면전과 그에 따른 파장이 약자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생각조차 않는다. 걸핏하면 약자를 들먹이지만 정작 그들이 바라보는 건 약자가 처한 현실이 아니다. 거울아 거울아, 누가 누가 정치적으로 가장 올바르지? 그건 바로 나지! 비장하게 선언했던 강자/약자의 형식적 대립전선은 이제 자신의 윤리적 정당성을 빛내줄 액세서리로 전락한다. 그런 건 연대가 아니라 '연대의 포즈'다. 그야말로 '입만좌파 형식주의자'의 전형이다. 결과적으로 약자와의 연대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묵묵히 현장에서 싸우고있는 좌파와 운동권들의 얼굴에도 오물을 뿌리고 말았다. 이들이 그냥 블로거인게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만일 알량한 현실권력이라도 손에 쥐게되면, 레닌이 비난했던 '좌익소아병'적 행태를 전사회적 차원에서 보여줄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원칙주의는 무엇일까. 원칙주의는, 그저 원칙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여 원칙을 관철하기 위한 최선의 방식을 모색하는 태도다. 이는 단순히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적인 사고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아무리 전략적으로 움직여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 태반이다. 그러나 원칙과 목적의식만은 분명히 인식하고 행동해야 한다. 요즘 지사(志士)라는 단어를 비웃는 이들이 부쩍 늘었지만, 지사는 본래 그런 원칙주의자를 말한다. 좌파가 연대할 때 원칙이란 무엇인가. 연대해야할 대상, 투쟁주체에게 우선순위를 두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건 분명 '가오'가 서지도, '간지'가 나지도 않는 일이다. 원칙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좌파적 연대란 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