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5. 14. 02:08

촛불의 매트릭스: 한국형 평등주의 보론


내가 만든 용어 중에 '88만원 세대' 말고는 변변한 '히트상품'이 없지만, 그나마 좀 알려진 게 '한국형 평등주의'다. (참고: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96 )  작년 10월쯤 쓴 글이니까 촛불이 정점을 찍고 내려왔을 무렵이다. '촛불은 대체 무엇이었을까'를 고민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다시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 독특한 평등주의는 '사회구성원의 불평등'을 문제삼기보다 '부자'와 '나' 사이의 불평등만 문제삼는 평등주의를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부자아빠 평등주의''이기적 평등주의'랄까. 꽤나 냉소적인 단어이지만, 단지 냉소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은 아니다.

강준만은 "공적 영역과 공인에 대한 불신이 워낙 강한 한국사람들이기에 사회문제에 있어서 개인이나 가족 단위로 각개약진하려고 한다"면서 '협동의 문화' 반대편에 '한국형 평등주의'를 놓는다. (http://sun4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1423) 물론 그런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한국형 평등주의의 원인과 그 결과를 좀더 세밀하게 분석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언제든 '속류 한국학'이 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공적 영역과 공인에 대한 불신이 워낙 강하다"라는 건 단지 현상을 다른 방식으로 기술한 것일 뿐, 한국형 평등주의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형 평등주의를 근대 한국인의 고유한, 그리고 나쁜 습속으로 환원해버리면 결국 협동의 문화를 기르자는 식의 계몽성 캠페인으로 귀결되고 만다.

그럼 한국형 평등주의, 부자아빠 평등주의, 이기적 평등주의의 배경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중간계급의 양극화'다. 그 기원은 1997년 외환위기, 그리고 이와 연결된 개혁정권 10년에 있다. 과거 고도성장기간 동안 서서히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졌던 중간계급은, 1980년대 중후반부터 단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기인식의 단계에 들어서기 시작한다. 정치적 자기인식은 1987년의 민주화운동의 주요 동력 중 하나라는 사실로 집약되고, 사회문화적 자기인식은 KBS의 1991년도 드라마 제목인 <우리는 중산층>으로 상징된다. "우리가 한국사회의 주류'라는 자부심도 이때 형성되었다. 전통적인 블루컬러 노동계급 중 조직화한 일부는 중간계급적 라이프 스타일로 점차 수렴되어 갔다. 이때 한국에서 평등주의라는 것은 '전국민이 중간계급이 되는 것'이다. 기준은 명백했고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중간계급의 짧았던 '아름다운 시절(belle epoque)'은 1997년 외환위기라는 외상적 사건에 의해 1차적으로 종결된다.

이후 10년, 이른바 개혁정권 10년은 극심한 사회경제적 구조변화를 통해 '덩어리'가 해체되는 기간이었다. 그 와중에 중간계급 중 상당수가 저소득층으로 떨어졌고, 일부는 위로 올라섰다. 물론 중간계급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지만 이미 '소셜 스탠더드'로서의 의미는 사라져버렸다. 그렇게나 행복해보이던 이웃집 아저씨가 정리해고당해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멀쩡히 잘살던 친척이 카드빚으로 노숙자가 되는 걸 두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삶 자체의 불안이 쓰나미처럼 덮쳐왔다.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이 새로운 삶의 문법이 됐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철저히 깨닫는다. 다같이 잘 먹고 잘 살수 있다고 믿었던 아름다운 시절은 끝나버렸다. 이제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부자 아빠냐, 아니면 자살하는 아빠냐.

'먹고사니즘'은 그리하여 숭고의 영역에 올라서고, 밥벌이의 지겨움은 삶의 예술로 승화한다. 일본의 저널리스트 출신 저술가인 이시카와 마스미가 기성세대가 된 전공투 세대가 일상에서 보여주는 행태를 '생활보수주의'라 이름붙인 적이 있다. 중간계급이 된 소위 386세대의 먹고사니즘은 생활보수주의와 절묘하게 겹친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위해 운동했던 그들조차 이제 부자와 나 사이의 불평등에만 반응한다. 그러면서 이제 이념의 시대는 끝났고 경제의 시대라고 말한다. 아직도 평등과 해방을 말하는 친구들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친구야, 밥은 먹고 다니냐?" 아직도 냉전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수구꼴통'들에겐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 사람은 못되도 괴물은 되지 맙시다." 이런 식의 '합리성'과 '가치중립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대타자를 향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 대타자는 미국도 아니고 옛소련도 아니다. 다름아닌 시장규율이다.

한국형 평등주의는 단순히 개인의 이기심을 노골적으로 노출해서 문제인 게 아니다. 한국인이 '신자유주의적 시장규율을 내면화하는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에 문제적인 것이다. 정치를 '평등의 과정'이라 정의할 때(랑시에르), 한국형 평등주의는 정치를 대체하는 논리로 기능한다. 물론 당위적 차원에서는 시장논리가 정치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1997년, 그리고 이후 10년의 경험칙이 그 당위를 정면에서 부정한다. 1987년의 에너지가 탄생시킨 정치권력이 시장권력을 통제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는 사실을 머리가 아닌 피부로 절감했을 때, 생활인들은 현실을 깨닫고 분노하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규율을 바꿔 적응하려 한다. 개인적 차원에서 적응의 규율이 일종의 상식으로 일반화되었을 때, 이것은 사회적 차원에서 적응하려 하지 않는 자, 혹은 집단에 대한 배제의 논리로 표현된다. 따라서 한국형 평등주의가 가리키는 것, 또는 그 필연적 결과물은 이것이다. '정치가 불가능해지는 지점', 그리고 탈정치의 이데올로기적 조건.

탈정치는 제도정치(국회의원들의 활동 등등)와 공공성에 대한 혐오와 냉소에서 곧장 발생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경제라는 영역과 정치라는 영역 간의 '관계'에서 출현한다. 요컨대 정치권력이 압도적 시장의 힘에 의해, 그리고 오직 그에 대비되어서만 상대화된다는 것이다. 이 때 경제와 정치의 선언적 분리(물론 이 분리는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불가능하다)가 선행한 다음, 경제에 대한 정치의 개입이 더이상 정당화되지 못하는 시점, 다시말해 경제는 보편성을 획득한 반면 정치는 주관성, 당파성, 부패와 불투명성, 사익추구로 프레이밍되었을 때 비로소 탈정치가 현현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2008년 촛불집회의 슬로건이었고 주제가였던 헌법 제1조가 기묘하게 해석될 가능성이 열린다. 알다시피 헌법제1조 1항과 2항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혹자는 헌법 제1조가 촛불집회에 등장한 걸 두고 "모호하긴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정치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무엇"으로 보기도 하지만, 과연 그럴까. 헌법은 사실명제의 형태로 당위명제를 주장하고 있다. 헌법 제1조 2항이 사실명제라면 아마 이래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시장에 있고 모든 권력은 시장으로부터 나온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의 선언은 정치가로서 무책임한 것이었지만 관찰자로서 정직한 것이었다. 말을 안해서 그렇지 대부분의 국민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만약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을 중간계급이 정말로 관철해야할 당위로 '믿었다면', 헌법 제1조를 목놓아 외칠 필요조차 없다. 100만명이 청와대로 몰려가서 그냥 권력을 접수하면 된다. 중간계급은 헌법이라는 낡은 대타자를 온전히 '믿지' 못한다. 신자유주의적 시장합리성이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은 이것이 진짜 문제다. 그러므로 촛불시민들이 헌법 제1조를 노래하며 이명박에 분노했던 진짜 이유는 이런 게 아니었을까. "이명박 대통령, 당신은 사실 최고권력자가 아니야. 왜냐하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지 오래거든. 넘버투 주제에 우릴 이렇게 무시해?"  제1권력인 시장권력과 매순간 소통하는 소비자-시민 입장에서, 귀와 눈을 틀어막은 저 이명박이란 이름의 정치권력은 얼마나 분통터지는 존재인가.

촛불은 중간계급의 불안이 물화한 사건이다. 그 불안은 정확히 말해서 계급적 인식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명박이 '대한민국 주류시민'의 신념체계를 훼손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그 신념체계는 민주주의에 대한 소박한 믿음 따위가 아니라 내면화된 시장 합리성이다. 중간계급에게 이명박은 오소독스한 시장주의자이긴커녕 글로벌 스탠더드를 완전히 무시하고 권력을 사적으로 전유하려는 자였다. 희망적인 건-이걸 희망이라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그 합리성만으로는 이명박을 거꾸러뜨릴 수 없다는 게 증명됐다는 점이다. 촛불에 참여한 중간계급 중 일부가 노동계급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점은 그래서 의미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