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1. 20. 15:10

아즈마 히로키

http://cauon.net/news/articleView.html?idxno=15250


아즈마 히로키의 책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외엔 읽어본 적이 없다. 이 책, 정말 재미있어서 손에 쥐자마자 빨려들어간다. 그의 핵심주장보다도, 오히려 심상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언급에서 의외의 수확이 좀 있었다.

한국에서 90년대 중반 이후 20대를 맞이한 세대의 상당수에게 일본 대중문화는 단순히 '생경한 외국문화' 이상의 무엇이다. 미처 거리두기를 할 여지도 없이 그 속에서 숨 쉬며 자라났기 때문이다. 일종의 '태내환경'이었던 셈인데, 그 점에서 이들은 일본대중문화 평론을 처음으로 시작했던 일부 386 세대 등의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취향과 인식태도를 갖게되었다.

아즈마 히로키는 1971년생이니까 오타쿠 1세대인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감독 안노 히데아키(1960년생)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자라났다고 볼 수 있다. 안노 히데아키의 경우, 전공투 세대와 같은 선배 세대와 사회의식을 일정부분 공유하고 있었고, 그 자신이 오타쿠이면서 오타쿠를 부정했다. 하지만 그것은 욕망에 따른 부정이 아니라, 윤리나 사회의식에 따른 부정이었다. 그러나 아즈마 히로키의 경우는 다르다. 책을 읽어보면 감이 바로 온다., 이 인간, 미소녀게임 하느라 식음을 전폐하는 전형적인 오타쿠다.

물론 글에서는 온갖 서구 석학의 이름과 개념들이 현란하게 소용돌이치고 오타쿠적 인식의 근저에 깔린 위험을 날카롭게 비평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비평은 사회의식이나 건강한 윤리 따위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이건, 태아가 엄마의 자궁을 발로 걷어차며 즐거워하는 행위에 가깝다.

"자네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인문학(철학이나 사상) 연구 대신에 미소녀 게임이나 분석하고 있다니 재능이 아깝네"
꼰대들의 이런 핀잔에 아즈마 히로키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지 않았을까.
"능력있는 너네들이나 연구 많이 하세요."
2008. 11. 19. 23:38

KBS 책문화대상

http://www.kbs.co.kr/1tv/sisa/book/preview/index.html

<88만원 세대>가 KBS 책문화대상 '우리 시대의 논점' 부문에 최종선정된 것 같다. 공중파에서 수상작이 공식발표되는 건 내일 밤 12시 35분이라고 한다. 후보작은 <나쁜 사마리아인들><지식인의 죽음><88만원 세대> 이렇게 세 권이었다.  완성도를 가리는 것이라면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제치고 <88만원 세대>가 선정되었을 리가 없다. 장석준의 평가처럼 <88만원 세대>는 "팜플렛", 참혹한 시대가 만들어낸 팜플렛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선정될 수 있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기뻐할 수가 없다.
2008. 11. 18. 08:19

일본의 편집자와 만나다

어제는, 아니 어제도 낮부터 술을 때려마셨다. <88만원 세대>의 일본어판 출판 건으로 서울에 온 아카시쇼텐(明石書店)의 편집자 효도 케이지 씨와 함께였다. <레디앙>의 이재영 선배와 출판 기획팀장님도 합석했다. 효도 씨는 나보다 한 살이 많고, 2년간 한국어학당에서 공부한 덕에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부스스한 머리결에, 항상 멍을 때리는 듯한 표정의 이 사나이는 알탕과 하이트 맥주를 좋아한다고 했다. 아니 그 맛있는 일본 맥주들보다 하이트가 좋단 말이예요? 우리가 농을 걸었지만, 그저 머리만 긁적인다. 그러나 하이트를 좋아한다는 말은, 그나마 한국맥주 중에서 그게 좀 낫다는 얘기를 돌려말한 것일테다. 동의한다. 카스보단 하이트가 아주아주 야악간 낫긴 하다. 그러나 나에게 한국맥주는 '소맥폭탄용 베이스' 또는 '안주가 목에 메이지 않게 하는 보습제'일 뿐, 맥주가 아니다.

온갖 잡다한 주제로 수다를 떨었는데, 두 가지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부라쿠민(部落民) 차별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카시 쇼텐의 대표이사가 예전에 부라쿠민 운동을 하던 사람이라고 한다. 부라쿠민은 잘 알려졌다시피 전근대 일본의 신분제도상 최하층 천민으로 과거 한국에서의 '백정'과 같은 직업을 생각하면 된다. 일본 특유의 서발턴(subaltern)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호모 사케르라고 할까.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는데 좀 놀랐던 건 아직도, 즉 2008년이라는 시점에서도 부라쿠민 차별이 여전하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특히 취업과 혼인에서 심각한 장벽이 존재한다고 한다. 과장이 섞여있겠지만, 야쿠자가 되거나 공무원시험에 패스하거나, 둘 중 하나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근대화를 빨리 수행한 사회에 아직도 신분제도의 악습이 뿌리깊게 남아있는 걸 보면, 한국사회가 미칠듯한 격변의 시기를 거치며 공고했던 신분제가 어쩔 수 없이 무너졌던 사실을 축복이라도 해야 할까.

두번째는 아소 다로 총리 이야기. 원래는 출판기획팀장님께서 <마징가>의 나가이 고와 <은하철도>의 린 타로 얘길 꺼냈는데, 효도 씨는 만화에 별로 관심이 없는 건지, 아니면 일본의 그 세대에게 너무 오래된 만화인건지 두 작가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 아소 다로 얘길 한다. 일본에서 아소 다로를 비웃는 말 중 하나가 "만화책만 읽는 총리"라는 거다. 총리가 되기 전부터 '무식한 발언을 일삼는 만화광'으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일본사람들은 그게 만화책만 읽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는 얘기다. 하긴, 만화를 좋아하는 것과, 만화만 줄창 읽어대는 것은 정말 백만 광년 떨어진 게다. 그러고보니 나도 아소 다로의 소문에 대해 얼핏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인에게 추천할만한 책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고르고13>이라 했다던가...OTL (아소 다로 총리의 '등 뒤'에 섰다간 쥐도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얼마 전 방한했던 '건담의 아버지' 토미노 요시유키 씨의 명언도 떠오른다. "명심해. 애니메이션만 보는 인간은 절대 좋은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없어."

<88만원 세대> 일본판은 1월 말 경 출간될 예정이다. 아카시 쇼텐이란 출판사의 성향을 보아하니 베스트셀러 따위와는 아주 거리가 먼 곳이다. 여기서 출간하는 월간지가 하나 있는데, 이름이 무려 <빈곤연구>다. 효도 씨에게 한권 선물받았는데, 표지만 봐도 두통이 밀려왔다. 베스트셀러 따윈 바라지도 않으니 아무쪼록 3쇄만 넘겨주길.
2008. 11. 14. 14:41

동희오토, 미래를 교살하는 공장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321797.html

동희오토에 다녀와서 쓴 글이 <인터넷 한겨레>에 실렸다. 기획 시리즈 형태로 정리가 된 모양이다. 어찌하다보니 내가 이번 프로젝트의 '1번 타자'가 되고 말았는데, 취재한 것의 반절도 풀어내지 못해 아쉽다. 하지만 취재한 내용의 대부분은 몇몇 매체를 통해 이미 알려진 문제점들을 재확인하는 수준이었고, 그 외의 부분들은 일반독자들이 이해하기가 다소 어려운 노동계 내부 문제였다.
만약 내가 매체에 속한 기자로서 본격적으로 취재를 했다면, 동희오토의 설립과정, 특히 현재 동희오토 본사의 이사들과 간부들의 과거 행적을 추적했을 것이다. 동희오토라는 괴물이 태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교묘한, 그리고 철저한 노동착취 시스템을 만들어내고 또 완벽하게 운영하는 능력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한 마디로 '프로의 냄새'가 난다. 취재를 하면할수록 심증이 굳어졌지만, 동희오토 노동자들조차 이 회사의 '머리'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이사급 인물 한두명의 행적 외에는 모든 것이 미스테리다.  아무튼, '다음 타자'들이 더 잘해주리라 믿는다. 아래는 원본.

-------------------------------



동희오토, 미래를 교살하는 공장


정지훈(가명) 씨는 스물 여섯 살이다. 소년처럼 해사한 얼굴과 대조적으로, 우람한 팔뚝에 힘줄이 툭툭 불거져 있다. 그는 현대기아 자동차 ‘모닝’을 만드는 동희오토라는 회사에서 수습직원으로 3개월을 일했다. 그리고 2008년 11월 6일자로 수습기간이 끝났다. 그러나 정식직원이 될 수 없었다. 수습기간이 끝나기 정확히 일주일 전, 채용취소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동희오토는 생산직 노동자의 100%를 최저임금선의 비정규직으로 꽉 채우는 기념비적 시도로 인해, 최근 몇 년 사이 경영계와 노동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기업이다.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850명 전원은 13개 사내하청업체에 소속돼 있고, 기아의 1차 협력사인 동희오토가 이들 업체와 노무도급계약을 맺는다. 국내최초의 완성차 위탁생산업체로서 ‘모닝 대박 신화’의 주인공이다. 이곳 비정규 노동자의 상황은 열악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지경이다. 1년차 직원의 2008년 시간당 임금은 3770원. 올해 법정최저임금이다. 다른 완성차 업체 정규직 노동자의 절반 수준이다. 그러다보니 이직률이 극도로 높아서 3년을 넘겨 일하는 노동자가 드물다. 민주노조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보이면 해당하청업체를 통째로 계약해지시켜 버리면 그만이다. 노동자의 요구는 철저히 무시된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꿈의 공장’, 노동자 입장에서 보면 ‘절망의 공장’이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제조업 분야에서 소위 ‘동희오토 방식’이 역병처럼 번져가고 있다.

비정규직 유랑기

정지훈 씨가 태어난 곳은 경기도 성남시, 지금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은 전남 목포다. 지방에 있는 대학에 합격해 1학년까지 다녔지만, 군대에 다녀온 뒤 자퇴서를 냈다.
“집안형편이 어려웠어요. 지방의 작은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서 취직이 된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사실 졸업한 선배들을 봐도 그랬구요. 무슨 일이든 일단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처음 갔던 회사가 목포의 삼호조선소라는 데였어요. 처음이라 그런지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정규직이였냐구요? 아뇨, 당연히 비정규직이죠.”
정지훈 씨는 조선소에서 7개월을 일하다가 다른 직장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경기도 발안에 있는 대연 에스티라는 공장이었다. 수습기간 1년을 넘기면 정규직을 시켜준다는 이야기가 결정적이었다. 휴대전화에 쓰이는 1회용 테이프를 제조하는 곳이었는데 조선소 일에 비해 몸이 덜 힘들었고, 대우도 좋았다. “동희오토는 생일날 1만 원짜리 상품권을 주는데, 대연 에스티는 5만 원짜리 상품권을 줬어요. 보너스도 600%였구요.” 이렇게 말하며 정지훈 씨는 살풋 웃는다.
“그런데 거길 왜 그만뒀나요? 일도 그리 힘들지 않고, 대우도 괜찮았다면서요?”
“작업반장이랑 문제가 좀 있었어요. 버스가 끊길 시간까지 일을 시켜놓고 자기는 맨날 노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혼자 일을 하다가 집에 택시를 타고 가야해요. 한두 번이면 참고 넘어갔을텐데 계속 그래서 제가 한 마디 했더니 그 뒤부턴 저를 더 괴롭히기 시작했어요. 결국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그의 ‘유랑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경기도 기흥의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1년을 일했고, 다시 목포의 삼호조선소에 가서 일을 했다. 서해안 전역을 떠돌며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했던 셈이다. 그런데 저임금·비정규 노동으로 악명이 높은 동희오토에는 어떻게 오게 됐을까. 정지훈 씨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막노동을 많이 하다보니 컨베이어 벨트 타는 건 오히려 쉽게 느껴졌어요. 수습이 3개월이니까 ‘3개월만 아무 소리 말고 버티자’라는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원래 대연에스티에 같이 있던 형이 동희오토에 취직하자고 해서 같이 입사했는데, 그 형은 일이 힘들다고 이틀만에 그만둬버렸어요.”

컨베이어 벨트 위로 날아간 세대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지훈 씨는 어째서 잘린 거예요? 채용취소 통보를 받았다면서요.”
“결근은 한 번도 안했고 몸이 너무 아파서 허가를 받고 조퇴를 딱 한번 했는데 채용취소 이유를 보니까 ‘근무불성실, 약속 불이행’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솔직히 어이가 없었어요.”
정지훈 씨 생각에 자신이 채용취소 통보를 받은 이유는 따로 있다. “해복투 형들과 어울렸기 때문”이다. 해복투, 즉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는 글자그대로 동희오토의 해고자들이 복직을 요구하며 결성한 단체다. 2008년 11월 10일 현재 여섯 명의 해고자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지훈 씨의 말에 따르면 각 라인의 반장과 조장들이 노동자를 수시로 불러서 ‘해복투랑 어울리지 말라’고 주의를 주거나 때로 협박도 한다고 한다. 평소에 누가 해복투 사람들과 자주 만나는지 감시하는 것은 물론이다. 정지훈 씨는 “내가 해복투 형들이랑 밥을 같이 먹은 걸 가지고 뭐라 그러기에 ‘왜 밥 먹는 것 가지고 그러느냐, 그런 식으로 감시하지 마라’고 쏘아붙여줬다”고 한다. 전후사정을 보면 그 사건이 채용취소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불합리한 일에 맞서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그 불합리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희오토에는 정지훈 씨와 같은 또래들이 가장 많다. 생산직 노동자 중에서 삼십대 중반 이상은 거의 없고 대부분 이십대 중반에서 이십대 후반이다. 공장에서 야간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얼굴들을 보면, 하나같이 젊다. 젊다 못해 앳된 얼굴들도 적지 않다. 동희오토 해복투 이백윤 의장의 말에 따르면, 그들 대부분이 고졸학력 이하의 이십대다. 사회경제적 여건이 가장 나쁠 때 사회로 진출하게 된 88만원 세대, 그 중에서도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 속한 젊은이들이다.
88만원 세대가 대학교와 고시원에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88만원 세대 중의 88만원 세대’는 동희오토에서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있다. 그들은 세대 내부 경쟁과 세대 간 경쟁 뿐 아니라 ‘인종간 경쟁상황’에 놓여있다. 동희오토 노동자의 20%는 외국인 노동자다. 이 사실은, 88만원 세대가 ‘삼중경쟁’의 톱니바퀴에 끼여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들 대다수는, 당연한 말이지만 <88만원 세대>라는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 모른다. 정지훈 씨와 같은 젊은이가 스스로 입을 열어 그 고통과 분노와 불안을 전하지 않는다면, 아마 대다수의 시민들 역시 그들 존재를 알지 못할 것이다. 광화문에서 촛불이 타오를 때 122km 떨어진 서산에서도 촛불이 타올랐다. 그러나 그 사이엔 물리적 거리보다 더 아득한 심연이 존재한다. 그 심연에 다리를 놓는 지난한 작업을,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한다.

대한민국 불안지도’를 만들면?

동희오토라는 기업이 나쁜 이유는 그들이 효율성을 추구해서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런 기업이 불안을 양산해서 사회전체의 생산력을 급속도로 불임화 시키기 때문이다. 정지훈 씨의 예만 봐도 그렇다. 5년 넘게 노동현장에 있었음에도, 그는 숙련기술을 익히지 못했다. 지금처럼 불안정 노동을 전전할 경우, 그는 평생동안 숙련노동자가 되기 어렵다. 가처분소득이 극단적으로 줄어들어 구매력 또한 낮아진다. 동희오토와 같은 기업이 확산되면 한 세대 전체가 더욱 가난해질 것이다. 그 사회적 부담을 부자들과 기업이 지려할까. 단언컨대 결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부담은 지금의 중간계급과 그 이하 계급, 그리고 그들의 자녀세대가 짊어지게 된다. 동희오토의 ‘모닝대박’은 우리의 미래를 교살한 대가였다.
하루빨리 해야 할 일은, 동희오토 노동자들과 작은 연대를 시작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와 같은 방식의 노동착취가 확산되는 속도를 늦추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장돌뱅이처럼 전국을 떠돌고 있다. 서산에서, 울산에서, 여수에서, 목포에서, 창원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제2, 제3의 동희오토다. 아직 실태조차 파악되지 않은 곳이 많다.
노동계 뿐 아니라 시민사회가 힘을 합쳐 위키페디아처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대한민국 불안 지도’를 만드는 건 어떨까. 우선 이 지도는 전국을 떠도는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작은 가이드라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 실용적인 이유 외에도 그 지도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연대의 방식이다. 노동, 생태, 인권, 교육 등 각 분야의 ‘불안 지도’를 만들 수도 있다. 별조차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 가야할 길을 찾지 못하는 시대다. 더듬더듬 지도라도 만들밖에.

2008. 11. 14. 11:17

종부세 단상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4582

공영방송 수호투쟁에 올인하는 바람에 읽을 게 없었던 <미디어오늘>에 간만에 괜찮은 기사가 올라왔다. 이정환 기자 말마따나 <한겨레><경향신문>의 종부세 관련 비난은 쓸모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당초의 입법정신마저 무력화하고 있다. 특히 <오마이뉴스>는 종부세가 사실상 무력화될 경우 헌법재판관 개개인의 종부세가 얼마나 줄어드는가를 탑에 올렸다. 이른바 '개혁 선정주의'의 귀감이 될만한, 기념비적 기사였다.  

종부세가 처음 추진될 때부터 세대합산 부분은 위헌소지가 다분하다는 게 잘 알려져 있었다. 입법을 추진한 주체들이 그걸 몰랐다면 멍청한 것이고, 알았다면 대비를 해야했다. 음모론적 시각으로 보면, 위헌이 될 것을 알면서도 '눈가리고 아웅'한 셈이 된다. 세대합산은 지금까지 종부세 징수의 핵심수단이었으나 그것이 무력화된 이상, 당초 입법취지를 살리는 방식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언론이란 그런 걸 하라고 존재하는 거다. 일부 위헌 판결 날 것을 조금이라도 예상했다면, 이후 의제설정에 대해 전문가 좌담이라도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부동산으로 인한 불로소득을 어느 정도 선까지 부당이익으로 볼 것인가는 법리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건 사회적 합의의 영역, 다시말해 정치의 영역이다. 세법의 논리로는 돌파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종부세를 둘러싼 최근 개혁진영의 대응은 따라서, 그 자체로 징후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008. 11. 8. 04:31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동희오토에 1박 2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폭력적인 구사대도, 검은 군복을 입은 공장경비도, 자본을 비호하기 위해 아침부터 바지런을 떨며 출동하는 경찰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부르는 노래, 팔뚝질, 출근선전전의 풍경 마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이 막막한 기시감이라니. 풋내기 기자로 전국의 공장을 떠돌던 5년 전의 나에게 비정규 노동자들이 싸우는 현장은 냄새로 기억되고 있다. 피냄새, 그리고 향냄새다. 한달이 멀다하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던 시절이다. 변한 것은 얼굴 뿐이다. 변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아니 더 철저하게 다음 세대로 대물림되었다. 젊다못해 앳된 해고노동자의 말간 웃음을 보니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다시금 깨닫는다. 내가 20대일 때 만났던 그 많은 비정규 노동자들 역시 20대였다는 사실을. 그들과 조우했기에 비로소 내가 88만원 세대라는 단어를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김승옥의 소설에서 튀어나온 듯한 안개는 '꿈의 공장'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군대에 다시 끌려가는 꿈을 꾸면 이런 기분일까.
2008. 11. 5. 01:18

공장에 갑니다

http://xenga.tistory.com/entry/드림-팩토리

'꿈의 공장'으로 취재하러 갈 것 같습니다. 특정 단체나 매체와는 무관한, '개인자격'으로 가는 것입니다. 어떤 지경일지야 '안봐도 비디오'입니다만, 직접 현장에 가보면 또 느낌이 다른 법이지요.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 중에서 현장상황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댓글로 달아주세요. 최대한 참고해서 취재할 때 반영하겠습니다. 다녀와서 글을 하나 쓸 예정입니다.


2008. 11. 3. 18:43

잡감 1103

1. 어제는 대낮부터 지하철이 끊길 때까지 술을 진탕 때려먹고 집에 와서 뻗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보니 재킷이 현관문 손잡이에 걸려있다. 아니, 이게 왜 여기에? 재킷을 방에 걸어놓으려고 집어드는데 팔부분에 이물질이 매달려있다. 아니, 이건 또? 난 오바이트를 한 적이 없으니 어디에선가 묻혀온 것이리라. 곧장 세탁소로 가서 옷을 맡겼다. 막걸리를 그렇게 때려먹었는데 머리가 아프지 않은 걸 보니, 그사이 양조기술이 혁명적으로 발전했거나 나의 체질에 변화가 생긴 것 같다.

2. 후진 미감(美感)을 스스로 폭로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 블로그 따위에서 그런 걸 보는 건 이중으로 불쾌한 경험인데, 우선 후진 감수성 그 자체로 불쾌하고, 그 후진 감수성을 자신의 전문분야와 억지로 엮어 정당화하는 것 때문에 또 불쾌하다. 글을 세련되게 쓰지 못하거나 기초적인 맞춤법이 틀리는 것 등에 진심으로 혐오감을 느껴본 적은 한번도 없지만, 글 전체에서 풍겨나오는 천박한 감수성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혐오스럽다. 대개 미감을 취향의 문제로 단순화시키는 사람들이 많지만, 미감이야말로 어떤 사람이 가진 지성을 총체화시키는, 다시말해 지성을 지성이게 만드는 '현자의 돌'이다.

3. 조만간 운전면허를 딸 작정이다. 남자아이들은 움직이는 기계를 좋아하게 되어 있고 나도 예외가 아니지만, 어릴 적 교통사고를 당해 코마상태에 빠졌던 경험 때문에 본능적으로 차에 대한 공포감 같은 게 있다. 자전거를 타면서 자동차라는 탈것에 대해 깊은 불신을 갖게 된 면도 크다. 그런데 면허가 없어서 극도로 힘들었던 경험을 최근 잇따라 하면서, 분하지만 이 사회적 압력에 굴복하기로 했다. 실제로 스티어링 휠을 쥐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있을 때 면허만이라도 따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2008. 10. 31. 00:53

민증 깠다

평소 가던 가게가 아닌 데서 담배를 사게됐다. 값을 치르고 나오려는데, 계산대의 아줌마가 날 아래위로 훑더니, "잠깐만요! 죄송한데, 민증 좀..."

죄송한데 민증 좀...

죄송한데 민증 좀...

그래서 민증 깠다. 생년월일을 확인한 아줌마의 당혹스런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좀 타이트한 후드티와 핫옐로우 운동화가 결정적 역할을 한 듯. 걸레가 될 때까지 입어주고 신어주마.  
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08. 10. 28. 17:15

업데이트 #1

트라우마가 미래를 승인하는 방식 

젖을 뗄 때가 되었는데도 공갈젖꼭지를 늘 물고있던 아이가 있었다. 어느날 아버지가 공갈젖꼭지에 집착하는 아이를 보며 짜증이 난다. 그래서 그는 아이의 눈 앞에서 위협적으로 가위를 흔들어 대다가 공갈젖꼭지를 싹둑 잘라버린다. 아이는 공포에 질려 큰소리로 울지만, 이 사건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른다.

그것이 어떤 의미였던가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은 젖을 완전히 떼고 난 뒤, 처음으로 다른 음식을 먹게되면서부터다. 젖꼭지의 명백한 대체물이 등장하고 그것을 스스로 인지했을 때, 비로소 아이는 상황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공갈젖꼭지를 체념하고 상황이 변화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공갈젖꼭지의 절단이라는 외상(trauma)은 극복된 것이 아니라, 은폐되었을 뿐이다.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웠던 상실의 경험은 우연히 이웃의 아기가 물고있는 공갈젖꼭지를 보았을 때 미묘한 분열증으로 나타난다. "한없이 친근하게 생긴 저것은 나의 것이었지만, 이제 결코 나의 것이 아니야."

평온한 어느날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붕괴하는 초현실적인 사건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수 개월 동안 그 사건의 물리적 사회적 원인에 대해 이해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상징으로, 즉 보다 추상적인 차원에서 '이해'한 것은 몇년 후였다. 이후에 벌어진 IMF구제금융이란 미래사건이, 성수대교와 삼풍 백화점 붕괴란 과거사건이 무엇을 암시했는지 드러낸 것이다. 기업의 과도한 채무가 초래한 IMF를 상징하는 전조로서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라는 스펙타클은 이제 필연의 차원에 올라선다. "그때 벌써 우리나라는 썩어있었던 거야." 그렇게 성수대교와 삼풍참사는 시간을 역전해서 IMF를 합리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시공간의 격차를 상당히 둔 그 두 사건-성수대교/삼풍백화점붕괴와 IMF-은 실상 별로 관련이 없는 별개의 사건이다. 그러나 미디어에 의해 마사지되는 스펙터클의 사회는 두 사건을 긴밀하게 엮는다. 대중-수용자의 관점에서 사건들은 질적 특성에 의해 분류되는 게 아니라 쇼크의 역치에 따라 분류되거나 기억되기 때문이다. 두 사건이 엮이면서 IMF는 명백한 전조가 드러난 실재로서 반복승인된다. 이중의 역사적 기억은 일종의 '확인사살' 효과를 가지며 사람들은 두 번 반복된 역사를 우연이 아니라 필연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우연과 필연 사이의 차이만큼 '과잉'의, 어떤 새로운 심적 상태가 출현한다. 이제 IMF는 피할 수 없는 재난, 우리의 원죄가 야기한 '에덴에서의 추방'으로 인정되고, "글로벌 스탠더드"는 모세가 받아든 십계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 # by 쟁가 | 2007/04/30 07:09

--------------------------------------

예전 블로그에 썼던 글인데, 지금의 '위기'국면에서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2008년 10월 현재, 이명박과 강만수에게 금융-실물 위기의 책임을 떠넘기는 '어떤 경향성'은, 내가 보기엔 촛불의 트라우마가 미래를 승인하는 방식이다. '그래, 역시 촛불은 옳았어!' 그리하여 촛불은 이제 꿈틀대며 역동하는 운동이 아니라 합리화-박제화된 상징의 지위에 올라서려 한다. 이런 저런 촛불 기념사업들이 출범하기 시작한 건 우연이 아니다. 미래사건이 과거의 구조적 요인들의 분석이 아니라 특정한 과거의 트라우마에 의해 설명되는 것은 흔히 시대정신이란 말로 치장되는 중간계급 특유의 인식틀(frame)이 어떻게 배치되고 작동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신자유주의가 문제"라며 뜬금포를 날린 전직 '좌파 신자유주의자' 대통령과, 강만수를 경질하면 사태가 단번에 호전되는 양 목청을 돋우는 몇몇 '전문가들'이 이런 경향성을 더욱 부채질한다. 그 이데올로기적 귀결은 민주적 시장경제론과 같은, 낯익은 것들의 귀환이다."

2008. 10. 25. 18:23

미 대선의 결정타?

지금 CNN을 얼핏 보니 맥케인 진영의 막판 최대 악재가 터진 것 같다. 맥케인 진영의 직원인 애슐리 토드라는 백인여성이 "차에 맥케인 지지 스티커를 붙였다는 이유로 어떤 흑인남성이 나를 일방적으로 구타했다"고 밝혔던 모양이다. 사진상으론 얼굴이 아주 엉망이었다. 그런데, 이게 구라였다능...-_-;; "사기: 맥캐인 직원 거짓말하다"라는 제목이 반복해서 나가고 있다. 설령 이것이 인종변수를 노린 선거캠프의 조직적인 작전이 아니었다고 해도 거의 결정타가 될 것 같다.
2008. 10. 24. 23:02

데 키리코와 브라크가 온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요즘 주로 쓰는 카드가 하나카드인데, 전시회 할인행사한다고 메일을 보내왔다. 꼴랑 2천원 할인해주면서 생색은...-_-;; 심드렁하게 읽어보다가 조르지오 데 키리코의 이름 발견("드 키리코"라고 표기되어 있다). 조르주 브라크까지. 데 키리코의 어떤 작품이 오느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릴테지만, 아무튼, 이건 꼭 가야 해!(요즘 너무 남발하는 듯)
2008. 10. 23. 11:17

[펌]대형마트와 동네상점

http://newkoman.mireene.com/tt/1958
일본 2ch 게시판 유머를 번역해서 올리는 유명 블로그인데 예전에 흥미로운 번역 스레드가 올라왔던 게 갑자기 생각나서 퍼왔다. 대형마트로 마을 하나가 초토화되는 건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 그러나 아래 글을 보면, 특히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대형마트에 가는 것에 아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그야말로 '수준차이'를 느끼게 된다.
-------------------------

* 원문은 일본 이온그룹이 운영하는 대형마트 쟈스코를 빗댄 이야기입니다만, 우리로서는 그다지 와닿지 않는
   기업들인만큼 그냥 대기업-대형마트 로만 표기했습니다
.

13
대기업 「물렀거라! 물렀거라! 대형 유통그룹님의 등장이시다!」
상점A  「헉! 와, 왔다. 대형마트가 온다!」
상점B  「히익―!대기업이 왔어―!」
대기업 「흐으음……꽤 좋은 마을 아닌가……좋아 결정했다! 이 마을에 지점을 세우겠다!」
상점B  「……! 그렇지 않아도 인구가 줄어 큰일인데……!」
상점C  「그만둬……! 우리는 생존이 걸린 문제야……그만둬 제발!」
대기업 「내 알 바 아니잖아 버러지들www 좋아 대형마트, 가서 벌어와라!」
대형마트 「네!」
상점A  「우와악! 손님들을 빼앗긴다!」
상점B  「모두 참아라! 지금은 참는거다!」
상점C  「우웃……, 모두들…….나는 더이상 안된다……(쿵)」
상점AB「시계 가게! 시계 가게!」



14
>>13
재밌는데
 



15
완곡한 대형마트 비판이군요, 압니다.





18
백화점도 내리막길인데





19
백화점계

이세탄       「아아, 정말 천박한 싸움들이네요」
미츠코시    「후후★ 너무 보기 흉해서 눈길도 주기 싫으네요★」
다이마루    「벼, 별로 신경쓰지 않는게, 너, 너무 천박해서, 보는 제가 다 부끄러운・・・」
이와타야    「진정해 다이마루」
마츠자카야 「더 해라∼!재미있다구! 끝까지 해봐!」
다카시마야 「・・・정말 너무 천박한 것들이네요」





22
>>19에 나온 백화점 한번도 못 가본 나는 촌놈




21
상점

상점A「시계가게……! 50년이나 이 마을의 상징이었는데……!」
상점B「크윽……그 놈들만 오지 않았다면……!」
상점D「급이 다른데……」
상점E「그렇다면 반대운동을 일으킬 수 밖에 없겠는데……」
상점A「그래! 이대로 끝날 수는 없잖나!」
상점B「모두! 각오는 했나!」

고졸  「아, 저……! 잠깐, 모두들……!」
상점A「응? 뭐야, 고졸」
고졸  「응, 나, 글자, 실은……고등학교 졸업 하면, 대형마트에 취직한다……」
상점B「……뭐, 뭐라고!」
상점D「뭐!」




30
상점F「무슨 바보같은 소리를……! 고졸, 무슨 일 있었던거야?」
상점D「그래! 이 마을의 상권을 무너뜨린 대형마트에 취직하다니 미친 소리다!」
고졸  「……모두, 현실을 봐라!」
상점A「!」
상점B「!」
고졸  「……대형마트는 이 마을의 유일한 취직처야……! 나도 그런 최저임금만 간신히 주는 회사 따위에
           취직하는 것은 싫어.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 이 마을에서 취직할 길은 이것 밖에 없어!」
상점D「그래서, 우리들을 배반할 생각인가!」
상점E「그래! 한번 더 다시 생각해라! 이 마을에게는 아직 작은 공장이나 상점이 있잖아!」
고졸  「……그 작은 공장도 기껏해야 토요타 자동차의 하청의 하청의 하청의 하청인 제 5차 하청업체
           아닌가! 게다가 나, 내년에는 아버지가 된다고!」
일동 「……!」
고졸 「아내와 아이를 부양하려면, 그나마 이 길 밖에 없었어……! 모두들 이해해줘!……!」




38
>>30
그렇지만 전근 갈 각오가 없다면 절대 승진이 힘들고, 매일매일이 수당도 없는 야근이야. 최악의 일자리라고.




47
>>38
확실히 우리 형 그 자체의 이야기.
 



44
수개월 후

상점A「……상점B, 오늘은 가게 안 열어?」
상점B「제기랄! 입 닥쳐!」
상점A「후, 너도 힘들겠구나, 아들이 대형마트 점원이 되어버렸으니. 그렇지만 그렇게 마시면 몸이……」
상점B「켁, 뭐가 몸이냐!……3대가 물려온 이 전파상도 이제 대가 끊기는데……술이 안 들어갈 수 있냐고……」
상점A「그렇게 비관적으로 보지는 마. 그래도 이 마을에서 50년간 쭉 가전제품을 팔아온 기반이 있잖아」
상점B「그것도 끝이야. ……내년에는, 야마다 전기 대형양판점이 생긴다고 하더구만」
상점A「……! 사실인가, 상점B!」
상점B「그게 들어오면 이제 난 끝이야 ……그때까지 이렇게 술이나 마셔야지 ……아」
상점A「……」



 

58
동네헌책방  「북오프! ··죽어버려!!」
북오프        「후후훗」


 

59
상점A「하……설마 전파상이 그리 되다니……. 이 마을에서 제일 밝은 놈이었는데……응?」
상점D「아, 손님, 저희 문방구에 오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상점A「아……! 문방구다……! 저 손님은 대형마트에서 돌아오는 길의 손님이 아닌가……!」
상점D「저희 가게에서는 닥터그립 스크린 톤도 팔고있습니다……! 그러니 잠시 구경하시다 가세요」
손님A「뭐 이 아저씨www재수없어www」
손님B「닥터그립www그게 뭐 자랑이라고ww그냥 대형마트에 널려있는데www」
상점D「우, 우리는 대형마트 와는 조금 달라……! 부, 부탁해 우리 가게에……!」
손님A「아 귀찮게스리. 이 영세기업이!(뻥!)」
상점D「우, 우웃……」
손님A「아 대형마트가 있는데 이런 곳에 올 리가 없잖아 www그냥 그만둬버려」
손님B「맞아ww」
상점D「다, 다음에 오실 때는 부디, 저희 가게에……!」

상점A「……우, 우우……흐,흐흑」


 

61
>>59
누, 눈물이 나온다;;



 

62
재미있지만, 마음 속 한 구석이 조금 쨘하다




64
>>59
조금 우울해졌다
왜 감정이입이 되어버리지
 



78
상점E「크, 큰일이야! 약국! 약국……?」
상점A「……! (눈물을 닦는다)……응, 무슨 일이야 옷가게?」
상점E「너, 울고 있었어……?」
상점A「뭐, 아무튼……그런데 무슨 일이야? 안색이 창백해」
상점E「아, 그래! 큰일이야! 슈퍼(상점F)가! 슈퍼가!」
상점A「뭐라고?」
상점E「그 바보, 대형마트와 싸워보려고 무리하게 주차장을 넓혔나봐, 그래서 빚이 늘어나서, 그래서……!」
상점A「그래서, 슈퍼, 슈퍼는 어떻게 되었는데!」
상점E「아, 그, 그게, 저, 그……」
상점A「어, 어떻게 된거야! 왜 입을 다물지?」
상점E「……」
상점A「……무슨 일인데! 슈퍼, 슈퍼는 어떻게 된거냐고!」
상점E「……조금 전에, 마을 강변에서……낚시꾼이 그 시체를……」
상점A「……! 거짓말……거짓말이야……거짓말이라고오오오오오!」




85
이거 말고도 편의점끼리의 전쟁도 볼만하지 


 

86
대기업    「어이, 대형마트, 잠깐 이리와 봐」
대형마트 「네, 무슨 일입니까」
대기업    「음……너희가 입주한 그 마을, 동네 상권이 완전히 죽어버린 모양이던데」
대형마트 「네. 반년 전까지는 나름대로 먹고 살만했지만, 요즘 몇 개월은 거의 뭐」
대기업    「쯧! 뭐 애초에 젊은 인구가 많지 않은 마을이었으니까. 이 정도가 한계인가」
대형마트 「에? 그렇다면?」
대기업    「닫는다」
대형마트 「응?」
대기업    「그 마을에서 철수해라」
대형마트 「……. 그, 그러나 그 마을은 이제 우리 마트가 먹여살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우리 마트에 취업해서 먹고 살고 있는만큼 즉시 철수하는 것은……」
대기업    「그게 뭐?」
대형마트 「!」
대기업    「더이상 그 마을에서 쥐어짤 수 있는 돈은 없다고. 적자를 볼 수는 없으니 철수해라」
대형마트 「……네」
대기업    「그 동네 상권의 황폐화는 우리 알 바가 아니다. 10월에는 닫을 테니 준비해둬라」
대형마트 「……네. 알겠습니다」




94
아이 「엄마……여기서 그냥 살면 안 돼?」
엄마 「미안해……이제 이 마을에서는 더 살 수 없어……」
아이 「이잉, 학교에는 친구도 있고, 헤어지고 싶지 않아……」
엄마 「미안해……엄마 아빠가 조금만 더 잘 살았더라면……」
아이 「엄마……울지 마. 나, 참을께. 새 학교에 가서도 노력할테니까 울지 마……」

상점A「……지금부터, 어디에 갈 생각이지?」
상점G「……도쿄에 도요타 하청공장이 있다. 당분간 거기서 일할 생각이야」
상점A「그런가……」
상점G「미안, 약국. 너를 혼자 두고 가게 되다니 ……」
상점A「아냐, 신경쓰지마 책방.……거기에 가서도 열심히 살아」
상점G「그래. ……그럼」
상점A「안녕……」


반년 후

우체부(비정규직) 「우편입니다」
상점A                 「아, 네. 으음……어라? 이건 책방 부인의………!」

상점A 「책방이……! 책방이 과로로 죽었다……!」




101
>>94
와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악




105
대형마트 「자……오늘이 영업 마지막이다……응? 당신은 약국의……」
상점A     「……무슨 짓이냐……」
대형마트 「응?」
상점A     「철수한다는게 진짜냐?」
대형마트 「네. 최근 매상이 영 침체되어서……」
상점A     「웃기지 마……! 뭐가 매상이냐! 이 마을 상권을 이 꼴로 만들어놓고서는……!」
대형마트 「……! 침착하세요. 우리도 적자를 볼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자선단체도 아니고」
상점A     「닥쳐! 너희는 악마야! 이 마을의 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그런 짓을……!」
대형마트 「……」
상점A     「?」
대형마트 「후후……하 하 하! 참 답답한 말씀이십니다. 저희 기업이 공짜로 이런 대형유통그룹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상점A     「뭐라고……!」
대형마트 「후후…… 당신도 이제 깨달으셨겠지요. 저희 그룹의 역사를……」
 



220
정말 촌스러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 고향도 지금 이 꼴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241
괴로운 것은 인근 상가 뿐만이 아니야. 꿈을 갖고 마트 안에 입점한 가게들도 괴롭다. (특히 중소세입자)
격렬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고 인테리어도 1년에 몇 번이나 바꿔서 간신히 버틴다 싶으면
채산성이 낮은 점포니까 나가라는 요구까지w 확실히 지옥이야
2008. 10. 22. 15:19

어머, 이건 사야 해!

http://www.takaratomy.co.jp/products/zoids/staff/001.html

오오오~귀여워 귀여워!
쥐며느리 그 자체!
대체 태엽 하나로 저런 움직임이 가능한거야? 그나저나 30여 개 되는 조이드들 다 처분했는데, 이런 뽐뿌가.ㅠ.ㅠ  12월 발매 예정.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8. 10. 18. 18:55

천년의 고독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마이뉴스 권우성


반포 래미안 아파트에 있는 천년 된 느티나무다. 가격은 10억 원 정도.  사진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초현실주의적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저 나무는 왜 천년이나 살아온 대지에서 무참히 뿌리뽑혀 콘크리트 건물 틈에 주저앉아야 했을까. 천년 된 나무를 아파트 단지에 심는 천박함보다 더 끔찍한 건, 대다수의 한국인이 꿈꾸는 삶이 바로 저곳에 있다는 점이다.
2008. 10. 12. 23:04

기묘한 균형 [시사IN 56호]

세제개편안을 둘러싼 정부의 발언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화가 나서? 아니, 웃겨서. 압권은 뭐니뭐니해도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감세효과의 53%가 중산층과 서민에게 돌아간다”면서 밝힌 중산층의 기준이 “통계청 과표구간으로 연소득 8천8백만원 이하”란다. 연소득 8천 6백만원으로 잡아도 실제연봉은 1억이 넘어간다. 이 발언이 기사화된 직후 아니나다를까, 수많은 사람들이 모멸감에 사로잡혔다. “내가 중산층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하류인생이었다”는 식이다. 여론은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부자를 중산층으로 둔갑시키는 ‘강부자 정권’”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애초에 중산층이란 용어 자체가 매우 허술한 개념이기 때문에 혼란이 가중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건 ‘강부자 정권’이라 불리는 이 정부가 하는 일마다 부자의 발목을 잡는다는 점이다. 즉, 부자들이 부자들을 궁지로 몰고 있다. 대한민국 서민들이 ‘중산층’이란 말에 얼마나 민감한데, 거기에 대고 “소득 8천8백만원” 운운했으니 작정하고 벌집을 쑤신 꼴이 아닌가.

어느 사회이건 지배계급은 자신의 이익을 사회전체의 이익으로 포장하기 마련이다. 그 ‘포장’이 얼마나 교묘하고 설득력이 있는가가 바로 지배계급의 역량을 재는 척도다. 따라서 유능한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의 ‘급소’와 ‘성감대’가 어디인지 귀신같이 파악하고 있다. 대영제국의 신화는 무력으로만 이루어진 게 결코 아니었다. 식민지에 관한 방대한 지식의 집적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다. 이렇게 피지배계급에 대한 지식이야말로 지배계급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자기이익을 관철할 수 있게 만드는 열쇠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그리고 한국의 부자들을 보면 도무지 지배계급의 역량이란 걸 눈 씻고 봐도 발견할 수 없다. 지배계급이 이렇게 무식한데 어떻게 이들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을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배당하는’ 사람들의 의식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대개 한국의 부자들은 “평등주의 근성이 나라를 망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나라 망친다는 건, 자기가 망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저건 ‘한국형 평등주의’가 얼마나 부자에게 유리한 이념인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일반적 의미에서 평등주의는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갖는 건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형 평등주의는 “나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이다. 자매품으로 “내 새끼도 서울대 가야 한다”와 “나도 MBA 따야 한다” 등이 있다. 즉, 일반적 평등주의는 ‘사회 전체의 비대칭’을 문제삼고, 한국적 평등주의는 ‘부자와 나의 비대칭’만 문제 삼는다. 전자의 입장에 서면 필연적으로 부자가 가진 것을 일정 부분 빼앗아올 수밖에 없다. 그래야 못 가진 자들에게 분배할 테니까. 그러나 후자의 입장에 서면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 부자들의 것을 빼앗는 것은 곧 자신의 숭고한 목적을 훼손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서점에서 ‘부자되기’ 처세서가 불티나게 팔리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그리하여 한국형 평등주의는 부자가 되기 위해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한 사람을 수탈하는 상황을 야기하고, 부자들에게는 어떤 위험도 초래하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게 바로 이것, 한국형 평등주의였다. 존재를 배반하는 피지배계급의 의식이 그렇게 지속적으로 지배계급의 무능을 상쇄시키는 한, 지배-피지배 관계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슬프고 기묘한 균형이여.

------------------

<시사IN>에 실린 나의 마지막 칼럼. 쓰기 싫은데 억지로 쓴 티가 난다. 이제 진짜로 굿바이.

2008. 10. 11. 18:24

재밌네

http://foog.com/686
http://foog.com/687
http://foog.com/689

셋 다 <파이낸셜 타임즈>의 기사인데, 날이 갈수록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대형은행을 국유화해야한다"는 소릴 FT에서 보게 될 줄은... 저러다가 이 매체가 결국 자본주의를 부정하게 되지나 않을지 두려워진다. 정말 오래살고 볼 일이다. 뭐,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뜻이겠다.

요즘 foog님 블로그에 들러 글을 읽는 재미가 쏠쏠한데, 미국거시경제에 대해 이 정도의 속도감과 시의성을 갖춘 블로그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foog님은 옛날에 진보누리에서 놀던 사람이라면 다 알만한 분이기도 하다(물론 당시 필명은 다름). 그때나 지금이나 명석함은 여전하신데, 인기블로거여서인지 방문객에게 너무 친절해서 가끔 느끼하다는 생각도. ㅋㅋㅋ 그러고보니 당시 진보누리 사람들 중에서 날 따로 불러 밥을 사준 대인배가 딱 세 명 있었는데, 그 중 한 분이시다. 조만간 진보누리OB-블로거 모임을 한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2008. 10. 10. 00:15

<유럽적 보편주의> 중 발췌

"나는 분명히 해두고싶다. 가치중립성이 신기루이자 기만이라고 말하면서 나는 분석적, 윤리적, 그리고 정치적 과제들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차이가 있고 그 차이는 근본적이다. 이 세 가지는 간단히 통합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들은 또한 분리될 수도 없다. 우리의 문제는 통합될 수도 분리될 수도 없는 세 가지 과제들에 관한 이런 표면상의 역설을 어떻게 뚫고 나가느냐다."
...
"따라서 지식인들은 전문분야의 범위가 방대한 제반 지식세계의 특정분야에 사실상 국한된다고 하더라도 '다방면의 지식을 갖춘 사람들(generalists)'이다."
...
"대체로 사회과학자들은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이것이 사회과학자들의 생산물에서 어떤 윤리적 혹은 정치적 활용법도 배우지 못했다고 느끼는 수많은 노동계급 뿐 아니라 힘있는 사람들과 그들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사회과학자들을 그렇게 낮게 평가하는 이유다."
...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우리의 학문적인 분석을 역사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것이) 아무리 유용할지라도 연대기적 세부사항의 축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는) 모든 특정한 상황이 다른 모든 특정한 상황들과 다르고, 모든 구조는 날마다, 10억분의 1초마다 끊임없이 진화한다는 뻔한 사실을 역설하는 식의 설익은 상대화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역사화한다는 것은 정반대다. 그것은 우리가 바로 가까이에서 연구하는 현실을 더 큰 맥락, 즉 그 현실이 자리잡아 작동하는 역사적 구조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관련된 전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세부항목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역사화는 체계화의 반대가 아니다. 전체의, 즉 분석단위의 역사적 매개변수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체계화가 불가능하다."

-<유럽적 보편주의>, 이매뉴얼 월러스틴, 김재오 옮김, 창비

----------
시시콜콜한 내용들을 나열하는 책들을 몰아서 읽어야할 때는 중간중간, 이렇게 거대한 스케일의 에세이를 좀 읽어줘야 사람이 쫀쫀해지지 않는다.
2008. 10. 7. 23:27

엄마는 못말려

저녁에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뜸 하소연이다.

"아들! 니가 느그 엄마 좀 말려봐라! 내 말은 콧등으로도 안듣는다안카나!"

강력한 '절대모권 가족'인 우리집에서 종종 발생하는 상황이다. 근데 이번엔 무슨 일로? 부친 말씀인즉, 어머니가 뜬금없이 꽤 큰 규모의 MTB 아카데미에 가입해 자전거를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했다는 거다. 엥? 환갑 다 되도록 자전거 한번 안 타보신 양반이?

"푸하하, 아부지, 근데 자전거라니, 엄마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래요?"
"모올라! 내가 다친다꼬 그래 말리도 안듣는다! 수영장 끊어가 잘 다니다가 와 저라노, 느그 엄마? 그라고 동네에서 살살 타는 것도 아이고 한 시간도 넘게 버스타고 가가 굳이 거기서 자전거 배운다카이 이거 완전 본격적으로 타겠다는 거 아이겠나? 나이묵어가꼬 고마 쌀쌀 수영이나 하고 국선도나 요가 같은 거나 하믄 얼마나 좋노..."

울 아부지, 마작부터 낚시까지, 골프와 스쿠버다이빙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레저를 섭렵해오신 분이다. 자전거를 '본격적으로 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계신다. 물론 돈이 얼마나 깨질지도 잘 알고 계신다. 그리고 그게 결국 아버지의 용돈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도 아마 직감하셨겠지...ㅜ.ㅜ 아버지와 통화를 끊고, 바로 어머니 휴대폰으로 연결했다.

"아들래미다."
"어, 아들이가? 우짠 일로 먼저 전화를 다 했지비?" ("~했지비?"는 모친의 기분이 괜찮음을 알려주는 정체불명의 종결어미)
"와, 우리 엄마 자전거 타러댕긴다매? 아부지가 걱정이 장난이 아니드라."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호탕한 웃음소리. 음, 설마설마했는데 이 아줌마가 진짜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아파트 옆동 사는 20년지기 친구한테 뽐뿌 제대로 받으신 거였다. 처음엔 말리려했지만, 어머니의 밝은 목소리를 들으니 차마 못그러겠다. 그저, 아버지가 걱정하시는 것도 일리가 있으니까 관절에 무리 안가게 살살 타시라고만 했다. 하긴 엄마는 말린다고 들을 분이 아니다. 어떤 일이든 자기가 납득해야만 그만두는, '전제군주형 장녀' 캐릭터. 절대모권이란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사실 얼마 전 어머니가 혈압으로 쓰러지는 사건이 벌어져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적이 있다. 당신께서도 많이 놀라셨는지, 그렇게 즐기시던 술(어머니랑 대작하다 기절한 적도 있음-_-)도 끊으시고, 돈 없다고 버티는 아들한테 기어코 용돈 타내서(-_-) 헬스장에도 등록하셨다. 본인이 스스로 건강을 챙기기 시작하신 걸 보며 안도하면서도, '울 엄마 포쓰도 많이 죽었네'라고 생각하며 묘하게 울적하기도 했다. 근데 오늘 보니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역시, 울 엄마는 못말려.
2008. 10. 5. 18:11

쥐벼룩의 우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아주 유명한 우화 하나.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제목이 '벼룩의 우화'인지, '쥐벼룩의 우화'인지 헷갈리는데, 그냥 쥐벼룩으로 하자.

...
어느 과학자가 애지중지 길러온 쥐벼룩 한 마리가 있었다. 과학자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이 귀여운 곤충은 물경 30cm 이상 점프할 수 있는 건강한 쥐벼룩이 되었다. 충분히 자랐다고 판단한 어느날, 과학자는 드디어 실험실로 향한다. 그는 먼저 쥐벼룩의 앞다리 두 개를 과감히 절단한 뒤 소리쳤다.
"뛰어!" 
쥐벼룩은 평소처럼 힘껏 도약했다. 과학자는 연구노트에 기록을 적었다. '앞다리 2개 절단시 35cm 도약.' 이번엔 중간다리 두 개마저 절단해보기로 한다.
"뛰어!"
쥐벼룩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마침내 힘껏 뛰었다. 25cm다. 과학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다리 4개 절단시 25cm 도약.' 과학자는 상기된 얼굴로 쥐벼룩의 뒷다리,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남은 다리 두 개를 절단했다.
"뛰어!"
그러나 가엾은 쥐벼룩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뛰어! 뛰란 말이야!"
목이 터져라 소릴 질러보지만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과학자는 심각한 얼굴로 그의 연구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쥐벼룩은 다리를 모두 떼어내면 귀머거리가 됨.'
...

정부의 세제개편안과 각종 경제정책들, 게다가 요즘의 '최진실법'까지 보고있자니, 우화가 더이상 우화로 보이지 않는다.
2008. 10. 2. 06:15

다시, 강의석

블로그 유입경로를 살펴보니, 7개가 '강의석' 관련단어였다. 아마 강의석 씨가 알몸시위 등으로 기사화되자 예전에 내가 썼던 '영악한 처세가 혹은 포스트모던한 주체'라는 글이 다시 화제가 된 것 같다. 검색해보니 장난이 아니다. 사방팔방 글이 돌아다니고 있다. 어느 기자 녀석은 다른 말 다 빼버리고 '영악한 처세가'라는 단어만 똑 떼어내 강의석 씨 인터뷰 자리에서 그를 자극하는 용도로 이용하기도 했다. 하여간 인용도 제대로 못하는 인간을 기자라고... 강의석 씨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글이 돌아다니는 것 자체는 신경쓰이지 않는데, 저 글이 이상한 방식으로 편집되는 건 좀 짜증스럽다.

강의석 씨는 국군의 날 퍼레이드에서 알몸으로 탱크를 막아선 뒤 양심적 병역거부 허용과 군대폐지를 주장했다고 한다. 그의 주장과 관점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양심적 병역거부운동과 평화운동의 대의만큼은 적극 지지한다. 만일 강의석 씨가 그 운동 때문에 납득하기 어려운 수위의 처벌을 받게 된다면,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기꺼이 그를 도울 것이다. 특히 국군의 날에 보여준 퍼포먼스는 젊은 활동가다운 대담하고 깜찍한 액션이라 놀라면서도 꽤 즐거웠다. 모름지기 활동가라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파문을 일으켜야 하는 법이다. 이왕이면 앞으로도 말을 아끼는 게 본인에게 훨씬 도움이 될 것 같다. 경범죄 등으로 체포됐다고 하는데, 별 탈없이 풀려났으면 한다.
2008. 10. 2. 00:49

시밤

요 며칠 34권의 책을 사들였다. 이런 금욕적인 지름은 처음이다. 모든 책이 쾌락이 아니라 필요에 따른 것이니, '금욕적 지름'이란 형용모순이 적당하다. 몇달 전 직장에서 집필자료용으로 하루에 책을 수십권씩 사곤 할 때는 참 좋았다. 당연하다. 내 돈이 아니라 정부돈이었으니까(청와대 돈이었나? 뭐 아무튼). 법인카드랑 초대형 쇼핑백 두개를 들고가서는, 은행강도가 은행돈 쓸어담듯 책들을 퍼담았다. 쵸큼 짜릿했다. -_-  그나저나 앞으로 또 얼마나 더 책을 사야할지 감도 안온다. 적어도 하루에 두 권 정도 정독을 하리라 마음 먹었는데 책 읽는 시간을 따로 정해놓지 않으면 쌓이는 속도를 읽는 속도가 영영 따라잡을 수 없다. 갈수록 높아지는 도서탑을 보고있자니 식은땀이 난다. 인세로 받은 돈을 책 구입에 다시 꼴아박아야 하는 내 신세. 시밤, 전생에 책이랑 무슨 원수를 졌길래.
2008. 9. 29. 15:30

죽지도 않고 또 왔네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12909.html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312071.html



소위 '개혁세력'의 레퍼토리인 '민주적 시장경제론'이 슬금슬금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다. "개혁진보세력"이라 뭉뚱그린 <한겨레>의 제목 붙이기도 다분히 의도성이 느껴진다. 어쩌라고? 다시 반한나라당으로 대동단결?

민주적 시장경제론을 한 마디로 요약하기 쉽지 않다. 논자에 따라 결이 달라져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상황을 치열하게 관찰하고 정교하게 주조한 이념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다. 사실 이건 블레어와 클린턴의 이데올로그들이 만들어낸 명제들 중에서 듣기 좋은 것만 골라서 짜깁기한 것이다. 영미식 신자유주의가 한계를 노출했다면서 들이미는 이념이 고작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시절의 '관제이념'이라니, 화가 난다기보다 서글프다. 우리 사회의 이념적 빈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좌파의 무능이 가져온 참상이라는 점에서.
2008. 9. 27. 08:02

웃으며 떠나기


‘일산 노옹’ 김훈 국장(김국)을 찾았습니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종횡무진 얘기를 나누던 차에, 슬슬 그의 선기(禪氣)가 끓어오르기 시작합니다. 주된 레퍼토리 중 하나라 예전 같으면 실실 웃으며 넘겼을 터이나, 이날만은 달랐습니다. 벼락 치는 소리처럼 귀를 때리더군요. “사실에 바탕해서 의견을 만들고, 의견에 바탕해서 신념을 만들고, 신념에 바탕해서 정의를 만들고, 정의에 바탕해서 지향점을 만들자. 이게 갈 길이다. 저널리스트로서 평생의 고민이 이것이다.”                    
                                                              -<시사IN> 54호, '편집국장의 편지' 중


<시사IN> 신임 편집국장의 첫 일성이다. "신념에 바탕해서 정의를 만들고" 대목까지 읽다가 끝내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한국일보> 시절 군사정권을 찬양한 김훈, 그 전력을 "사과하는 대신 끌어안고 살겠다"던 김훈, '밥벌이의 지겨움'을 마른 한숨처럼 토해내던 김훈이 저런 얘길 했다는 게 웃겨서 견딜 수가 없다. 선기(禪氣) 좋아하시네, 취기(醉氣)겠지. 인용한 부분 외에도 저 글 전체가 여러가지 '의미심장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앞으로 이 매체의 행보가 정말이지,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보니 내가 <시사IN>에 기고를 해온지도 벌써 반년이다. 그만둘 때가 된 것 같다. 화가 나서 그만두는 것보다 이렇게 웃으며 그만두는 것도 어찌보면 축복이겠다. 시점을 정확히 알려준 신임국장에게 심심한 감사를 전한다. 당분간 공부에 집중해야겠다.
2008. 9. 25. 01:36

드림 팩토리

http://www.hani.co.kr/arti/economy/car/298933.html


지인에게서 전해듣고 제대로 관심을 갖게 된 사업장이다. 충남 서산의 '동희오토'라는 업체인데 현대기아의 '모닝'을 생산하는 곳이다.

대기업의 불법 사내하청 문제가 사회문제화하자, 현대기아는 아예 완제품을 출고하는 '사외하청기업'을 만들어버렸다. 나도 기자생활하면서 별별 골 때리는 사업장을 다 돌아다녀봤지만, 이런 형태의 편법고용은 처음 봤다. 위 기사에 나와있듯 완성차 위탁생산방식은 도요타가 최초이지만, 본사와 비슷한 수준의 정규직 노동자를 쓰기 때문에 동희오토와 같은 방식이라 말할 수 없다. 아무튼 한국 자본가들 알아줘야 한다. 선진국 따라하기를 꼭 이렇게 최악의 형태로만 한다. '한국기업의 선진국 배우기'를  기획기사로 만들면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풍자이자 골계가 될 것이 분명하다.

놀랍게도 동희오토는 생산라인 노동자의 100%가 비정규직이다(2008년 9월 25일 현재, 정규직 비율이 달라졌을 수 있다).  정규직이 될 희망조차 없는 이 공장에서, 노동자는 한번 쓰고 버려지는 존재들이다. 실제로 2년 이상 버티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고 한다. 이런 곳은 노동의 장소가 아니다. 인간이 기계에게 에너지를 공급하고 버려지는 곳, 즉 매트릭스다. 그러나 기업들에게는 그야말로 꿈의 공장일테다.

하루 10시간 주6일 일하고 야근, 특근까지 해서 받는 돈이 130만원 정도라고 한다. 기본시급은 언제나 그 해의 최저임금에 딱 맞춰져 있다. 이런 제3세계형 노동착취가 최근 '모닝 대박신화'의 실체였다. 아직 기륭전자나 이랜드처럼 큰 이슈가 되고 있진 않은데, 이미 경제신문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경영혁신사례'로 추앙받고 있었다. 효과적인 이슈파이팅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2008. 9. 22. 16:09

닥치고 단 거


영화 <맘마미아>를 봤다. 무뇌적 스토리와 뇌쇄적 멜로디의 환상적 조화. 그야말로 '닥치고 단 거'의 끝을 보여준다. 그동안 난 뮤지컬 <맘마미아>를 철썩같이 80년대산인 줄 알고 있었는데 1999년에 초연됐단다. 내 기억력이 원래 막장이긴 하지만, 뭐냐, 이 엄청난 데쟈뷰는... 하긴 그렇게 친숙하기에 성공했을테다. 위의 노래는 내가 젤 좋아하는 80년대풍 디스코 '김매김매김매.' 영화에서 메릴 스트립의 딸로 분한 아만다 시프리드가 불렀다. 이 아가씨 노래 참 잘한다. 그래도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노래는 물론이요 퍼포먼스까지 킹왕짱'인 울 여친만은 못하다. ㅎㅎ

중고딩 때 아바 좋아한다 그러면 이뭐병 취급을 당했기 때문에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실은 다들 아바 노래를 많이 듣곤했을 거다. 인간이란 게, 가끔씩 단 게 무지무지 땡길 때가 있거든. 단 것은 언제나 모종의 죄의식을 동반하기 때문에 더 유혹적이다. 어릴적부터 '단거'라면 사족을 못쓰는, 그래서 지금도 초콜릿, 케익 등으로 누가 꼬시면 유괴당할 게 뻔한(대체 누가 널!) 나이기에, 영화를 참 즐겁게 봤다. 부모님 모시고 가서 보기에 딱 좋은 영화다. 울 엄니도 소시적에 고고장서 발바닥 좀 비비셨다는데, 기회되면 뮤지컬 맘마미아를 보여드려야겠다.
2008. 9. 21. 02:40

한국적 평등주의

한국의 부자 대다수가 "평등주의 근성이 나라를 망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나라 망친다는 건, 자기가 망한다는 의미다. (원래 어느 나라나 부르주아는 이렇게 '보편적 언어'를 구사한다.) 그러나 주의깊은 부자라면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적 평등주의야'말로 그들의 가장 강력한 방패라는 사실을 깨달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일반적 의미에서 평등주의는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갖는 건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적 평등주의는 "나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이다. (자매품 "내 새끼도 서울대 가야 한다"와 "나도 MBA 따야 한다" 등이 있다.) 즉, 일반적 평등주의는 '사회 전체의 비대칭'을 문제삼고, 한국적 평등주의는 '부자와 나의 비대칭'만 문제삼는다. 전자의 입장에 서면 필연적으로 부자가 가진 것을 일정 부분 빼앗아올 수밖에 없다. 그래야 못 가진 자들에게 분배할 테니까. 그러나 후자의 입장에 서면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 부자들의 것을 빼앗는 것은 곧 자신의 숭고한 목적을 훼손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국적 평등주의는 부자가 되기 위해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한 사람을 수탈하는 상황을 야기하고, 부자들에게는 어떤 위험도 초래하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게 바로 이것, 한국적 평등주의였다.
2008. 9. 18. 17:46

국가의 귀환?

미국발 금융위기가 금융자본주의의 종말이라고 하긴 어렵다. 그러나 요 며칠 스티글리츠가 거의 조증에 빠진 걸 보고 있자면 금융시장이 더 많은 통제를 받아야한다는 주장을 더이상 반박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이제 남은 건 세계자본주의 붕괴이고 전지구적 공산혁명일까. 그럴 리 없겠다. 그저 국가가 반복강박처럼 귀환할 뿐이다. 그 모습은 예전과 사뭇 다를 게 분명하다. 이제 국가의 귀환을 이해하는 방식이, 사회적 관점의 새로운 지표가 될 것이다. 지금 한국의 문제는, 국가가 시장을 통제할 생각을 않고 시민만 통제한다는 것. 견적이 안나온다.
2008. 9. 17. 18:03

강릉

사용자 삽입 이미지

참 먼데 가서 커피 마셨다. 무려 강릉.

얼마 전에 여친사마께서 dslr 질러주셨고, 내가 단렌즈 하나를 진상했던 터라, 당연히 카메라도 들고 갔다. 카메라 소유권은 여친께 있으나, 보관권은 나에게 있으므로, 내킬 때 출사를 다닐 수 있게 됐다. ㅋㅋ 기종은 무난하게 캐논 450D. 렌즈는 캐논 35mm f2. 일명 사무캅이라 불리는 렌즈인데, 가격대 성능이 정말 킹왕짱이라능. 작은 바디에 물려놓으니 정말 딱이다. 원래 배두나가 들고 다닌다는 35mm f1.4L 렌즈('럭셔리의 L렌즈'!)를 한 번 써 보고 뻑이 가서 미친 척하고 지르려 했으나, 구입 직전 다음을 기약. (까막눈인 내가 봐도 일명 '사무엘'이라 불리는 그 L렌즈, 참 눈물나게 감동적인 화질이었고, 피눈물나게 비쌌다.) 친한 선배네 부부와 동행했는데, 선배의 남편이 광고사진 등으로 밥 먹고사는 '프로'였기 때문에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주셨다. 차에는 5d와 L렌즈가 막 굴러다닌다... 제대로 광고사진을 만들 때는 왜곡을 최소화는 핫셀블라드 같은 중형카메라로 찍는다고 한다. 가격이 내가 사는 집 전세가격에 육박한다. ㅎㄷㄷ뭐, 나와는 무관한 세계 이야기다. 이날 형에게 피사계심도와 화이트밸런스의 개념과 예시를 일목요연하게 듣고 보면서, "오오오!" 쌩초보가 이렇게 L렌즈 만지작거리며 사진 배우면 버릇 나빠지는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커피를 마신 곳은 한국 커피문화의 산 증인이자, 소위 일본유학파의 거두 중 한 명인 박이추 씨가 운영하는 보헤미안이다. 하와이언 코나를 마셨는데, 명불허전. 정말 정성스런 핸드드립이 뭔지 보여줬다. 사실 커피 마시려고 강릉까지 간 것은 아니었으나, 그 먼 길이 보상되고도 남는 맛이었다. 보헤미안 뒷편에는 바로 해변인데, 그곳에서 해가 저물 때까지 사진찍기 놀이와 사진찍기 강좌가 벌어졌다. 그러고보니 이 부부와 우리의 인연도 참 징하다 징해.

2008. 9. 13. 17:23

사민주의부터 재정립해야

얼마 전 술자리에서 몇권의 책을 전해 받았는데, 그 중 하나가 <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이었다. 여러 필자가 쓴 글을 취합한 책은 대체로 허접한 경우가 많은데, 특히 최근에 나온 <MBC MB氏를 부탁해(프레시안북)>는 글의 질이나 구성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역대 최악에 꼽힐만한 책이었다. 차라리 안나오는 게 MBC를 위해서 나았을 거란 생각조차 든다. 그러나 <한국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은 그 정도로 막나가는 책은 아니다. 나의 전 직장 상사이자 역량있는 저널리스트였던 이종태가 책을 총괄했던 덕이 아닌가한다.

책에 실린 여러 글이 흥미로웠지만, 내 눈길을 가장 잡아끈 글은 책의 가장 마지막에 자리잡은 이종태의 글 '국가-시민사회 논쟁과 국가주의적 개인주의 옹호'였다. "스웨덴의 소장학자 라르스 트레가르드가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국가분석을 통해 제시한 도발적인 테제, 즉 강한 개인과 강한 국가의 상호보완성 테제를 소개"한 글이다. 글의 서두는 일단 이진경을 '까면서' 시작한다.

"자본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이진경의 말처럼 쉽사리 포기하는 것은 옳은가? 그렇다면 자본이 주도하는 사회에서 이른바 진보세력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전면적으로 사회를 거부하는 은자로 살거나, 혁명을 일으키는 것인가?"

"트레가르드에 따르면 스웨덴인들은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 자체를 복지국가와 민주주의에 강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와 복지가 파괴되면 스웨덴 민족의 정체성 자체도 증발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스웨덴의 경우 전통적으로 민족 혹은 종족을 일컫는 에스노스와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을 일컫는 데모스의 개념적인 구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히 통합되어 있다. ...스웨덴 민족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끌어안는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고 트레가르드는 주장한다."

그리고 이종태는 한국의 진보세력이 국가를 개인을 억압하는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결국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봉사하는 것이라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서유럽의 경험에 기반한 바깥사상에 물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개인과 국가-민족을 반드시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길 필요는 없지 않을까?"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종태가 '한국의 진보세력'이라 부르는 사람들 중 대체 어느정도가 저런 생각을 하는걸까. 현재 한국의 대표적 진보정당이라고 하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딱 두개가 있다. 이들 정당이 국가-민족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긴다면 왜 저들은 그깟 '부르주아 의회'에 참여하려고 저렇게 기를 쓰고 있는걸까. 답은 뻔하다. 이종태는 논적을 오해하고 있거나 최소한 과대평가하고 있다. 그게 아니면, 이진경이 한국 진보세력의 대표선수라고 굳게 믿고 있거나. 과거부터 이진경의 논리를 극도로 혐오했던 평소 이종태의 성향을 봐서는 '이참에 좀 밟자'고 생각했을 수는 있겠지만, 만일 그렇다면 이진경만을 대상으로 글을 쓰면 될 일이다. 한국진보세력 전체를 싸잡기엔 이종태의 이번 그물은 너무도 협량하다. 논적의 허상을 만들어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린 다음 뻥, 터뜨리는 짓은 본인은 재미있을지 모르겠으나 보고있는 주변 사람들은 허탈하기 짝이 없다. 중고딩들이 논술시간에 이런 걸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라고 배운다.

글에서 이종태는 한국인의 민족-국가관이 영미나 서유럽보다는 스웨덴과 유사하다고 단언한다. 스웨덴의 민족성이 "복지국가와 민주주의에 강하게 연결된 민족성"이라고 했는데, 그럼 한국의 민족성이 그렇다는 것일까. 하지만 내가 보기에, 한국인의 민족성은 복지국가가 아니라 '울릉도 동남쪽의 어느 외로운 섬'과 훨씬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이종태는 87항쟁에서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었다는 사실을 특수화해서 논거로 들지만, 아마 대다수의 제3세계 민주화운동에서 국기를 '안든' 경우를 찾는 게 더 어려울 것이다. 이건 민족-국가에 대해 특정 민족이 다른 민족과 차별되는 각별한 신념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민족-국가 이데올로기가 제3세계에 이식된 자본주의의 폭력적 축적과정에 대해 일정한 대항논리, 요컨대 모든 민족구성원을 향한 형평성을 약속해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종태는 87년 한국에서 사람들이 요구한 "민주주의"와 트레가르드가 말하는 스웨덴의 "민주주의"를 별다른 논증없이 동일시하며 논리를 비약한다. 그런 식이면 국가명에다 아예 민주주의 네 글자를 박아놓은 북조선이야말로 "민족정체성에 민주주의가 강하게 연결된 나라" 아닌가.

어떤 민족의 국가주의적 성향이 강한가 아닌가, 혹은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얼마나 유사한가 따위를 말하는 것은 기실 한국 사회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무익한 짓이라는 걸 이종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한국에 사민주의를 뿌리내리는 데 정작 필요한 것은 스웨덴과의 민족감정적 유사성이 아니라, 정치경제적 조건들의 상이성이기 때문이다. 스웨덴 내부에 복지국가 이데올로기가 성공적으로 뿌리내린 이유 중 하나는 서유럽과의 차이를 역사화-서사화한 데 있다. 즉, 이종태가 바라는 한국형 사민주의가 리얼리티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스웨덴과 한국의 차이를 더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다. 모순적으로 들리지만, '우리가 스웨덴과 닮기 위해서는 스웨덴과 달라야 한다.' 그 작업은 사민주의를 '선언'하는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지난한 과정일 것이다.

얼마 전에 공식지면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http://xenga.tistory.com/entry/국가의-귀환-시사IN-41호), 기본적으로 나도 한국사회가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극단적 아나키가 아닌 다음에야 대부분의 좌파들도 동의할 것이다. 특히 '국가의 역할'에 대한 연구와 대중화에서 장하준, 이종태 등의 지식인들이 누구보다 긍정적인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한국의 자칭 사민주의자들은 요즘 좀 좌충우돌하는 것 같다. 뉴라이트 매체에 기고를 한다든가, 엔엘-피디, 한줌도 못되는 포스트모던 좌파들에 버럭 역정을 낸다든가 하는 짓에 시간낭비할 겨를이 어딨는가. 포스트모더니즘 까는 짓, 유행 지나간지 한참 됐다. 자꾸만 기존 좌파들과 각을 세우는데 골몰하다보면, 이종태 등은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스탈린주의자'로만 포지셔닝될 뿐이다. 담론투쟁의 영역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전통적으로 약하다. 논리와 감성이 섹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건 뉴라이트랑 (제3의 지면에서) 하시라. 그게 이길 가능성도 높을 뿐더러 더 생산적일 것이다.

반면 현실구성의 영역, 구체적으로는 조직을 불리고 정책을 생산하는 장에 좀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 분야에서 한국의 사민주의자는 주사파보다 무능하다. 정말 현실을 변화시키려 한다면, '먹물집단'이라는 인식부터 바꾸고 현실정치인을 키워내는 일에 좀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정치인' 주대환이 최근 보여주는 정치감각을 보면, 사민주의하기가 혁명보다 훨씬 어려워 보이니 말이다. 좌파 재정립 이전에 사민주의 진영부터 교통정리 좀 하란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