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0. 12. 23:04

기묘한 균형 [시사IN 56호]

세제개편안을 둘러싼 정부의 발언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화가 나서? 아니, 웃겨서. 압권은 뭐니뭐니해도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감세효과의 53%가 중산층과 서민에게 돌아간다”면서 밝힌 중산층의 기준이 “통계청 과표구간으로 연소득 8천8백만원 이하”란다. 연소득 8천 6백만원으로 잡아도 실제연봉은 1억이 넘어간다. 이 발언이 기사화된 직후 아니나다를까, 수많은 사람들이 모멸감에 사로잡혔다. “내가 중산층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하류인생이었다”는 식이다. 여론은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부자를 중산층으로 둔갑시키는 ‘강부자 정권’”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애초에 중산층이란 용어 자체가 매우 허술한 개념이기 때문에 혼란이 가중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건 ‘강부자 정권’이라 불리는 이 정부가 하는 일마다 부자의 발목을 잡는다는 점이다. 즉, 부자들이 부자들을 궁지로 몰고 있다. 대한민국 서민들이 ‘중산층’이란 말에 얼마나 민감한데, 거기에 대고 “소득 8천8백만원” 운운했으니 작정하고 벌집을 쑤신 꼴이 아닌가.

어느 사회이건 지배계급은 자신의 이익을 사회전체의 이익으로 포장하기 마련이다. 그 ‘포장’이 얼마나 교묘하고 설득력이 있는가가 바로 지배계급의 역량을 재는 척도다. 따라서 유능한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의 ‘급소’와 ‘성감대’가 어디인지 귀신같이 파악하고 있다. 대영제국의 신화는 무력으로만 이루어진 게 결코 아니었다. 식민지에 관한 방대한 지식의 집적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다. 이렇게 피지배계급에 대한 지식이야말로 지배계급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자기이익을 관철할 수 있게 만드는 열쇠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그리고 한국의 부자들을 보면 도무지 지배계급의 역량이란 걸 눈 씻고 봐도 발견할 수 없다. 지배계급이 이렇게 무식한데 어떻게 이들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을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배당하는’ 사람들의 의식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대개 한국의 부자들은 “평등주의 근성이 나라를 망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나라 망친다는 건, 자기가 망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저건 ‘한국형 평등주의’가 얼마나 부자에게 유리한 이념인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일반적 의미에서 평등주의는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갖는 건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형 평등주의는 “나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이다. 자매품으로 “내 새끼도 서울대 가야 한다”와 “나도 MBA 따야 한다” 등이 있다. 즉, 일반적 평등주의는 ‘사회 전체의 비대칭’을 문제삼고, 한국적 평등주의는 ‘부자와 나의 비대칭’만 문제 삼는다. 전자의 입장에 서면 필연적으로 부자가 가진 것을 일정 부분 빼앗아올 수밖에 없다. 그래야 못 가진 자들에게 분배할 테니까. 그러나 후자의 입장에 서면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 부자들의 것을 빼앗는 것은 곧 자신의 숭고한 목적을 훼손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서점에서 ‘부자되기’ 처세서가 불티나게 팔리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그리하여 한국형 평등주의는 부자가 되기 위해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한 사람을 수탈하는 상황을 야기하고, 부자들에게는 어떤 위험도 초래하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게 바로 이것, 한국형 평등주의였다. 존재를 배반하는 피지배계급의 의식이 그렇게 지속적으로 지배계급의 무능을 상쇄시키는 한, 지배-피지배 관계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슬프고 기묘한 균형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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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에 실린 나의 마지막 칼럼. 쓰기 싫은데 억지로 쓴 티가 난다. 이제 진짜로 굿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