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9. 13. 17:23

사민주의부터 재정립해야

얼마 전 술자리에서 몇권의 책을 전해 받았는데, 그 중 하나가 <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이었다. 여러 필자가 쓴 글을 취합한 책은 대체로 허접한 경우가 많은데, 특히 최근에 나온 <MBC MB氏를 부탁해(프레시안북)>는 글의 질이나 구성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역대 최악에 꼽힐만한 책이었다. 차라리 안나오는 게 MBC를 위해서 나았을 거란 생각조차 든다. 그러나 <한국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은 그 정도로 막나가는 책은 아니다. 나의 전 직장 상사이자 역량있는 저널리스트였던 이종태가 책을 총괄했던 덕이 아닌가한다.

책에 실린 여러 글이 흥미로웠지만, 내 눈길을 가장 잡아끈 글은 책의 가장 마지막에 자리잡은 이종태의 글 '국가-시민사회 논쟁과 국가주의적 개인주의 옹호'였다. "스웨덴의 소장학자 라르스 트레가르드가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국가분석을 통해 제시한 도발적인 테제, 즉 강한 개인과 강한 국가의 상호보완성 테제를 소개"한 글이다. 글의 서두는 일단 이진경을 '까면서' 시작한다.

"자본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이진경의 말처럼 쉽사리 포기하는 것은 옳은가? 그렇다면 자본이 주도하는 사회에서 이른바 진보세력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전면적으로 사회를 거부하는 은자로 살거나, 혁명을 일으키는 것인가?"

"트레가르드에 따르면 스웨덴인들은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 자체를 복지국가와 민주주의에 강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와 복지가 파괴되면 스웨덴 민족의 정체성 자체도 증발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스웨덴의 경우 전통적으로 민족 혹은 종족을 일컫는 에스노스와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을 일컫는 데모스의 개념적인 구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히 통합되어 있다. ...스웨덴 민족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끌어안는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고 트레가르드는 주장한다."

그리고 이종태는 한국의 진보세력이 국가를 개인을 억압하는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결국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봉사하는 것이라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서유럽의 경험에 기반한 바깥사상에 물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개인과 국가-민족을 반드시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길 필요는 없지 않을까?"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종태가 '한국의 진보세력'이라 부르는 사람들 중 대체 어느정도가 저런 생각을 하는걸까. 현재 한국의 대표적 진보정당이라고 하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딱 두개가 있다. 이들 정당이 국가-민족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긴다면 왜 저들은 그깟 '부르주아 의회'에 참여하려고 저렇게 기를 쓰고 있는걸까. 답은 뻔하다. 이종태는 논적을 오해하고 있거나 최소한 과대평가하고 있다. 그게 아니면, 이진경이 한국 진보세력의 대표선수라고 굳게 믿고 있거나. 과거부터 이진경의 논리를 극도로 혐오했던 평소 이종태의 성향을 봐서는 '이참에 좀 밟자'고 생각했을 수는 있겠지만, 만일 그렇다면 이진경만을 대상으로 글을 쓰면 될 일이다. 한국진보세력 전체를 싸잡기엔 이종태의 이번 그물은 너무도 협량하다. 논적의 허상을 만들어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린 다음 뻥, 터뜨리는 짓은 본인은 재미있을지 모르겠으나 보고있는 주변 사람들은 허탈하기 짝이 없다. 중고딩들이 논술시간에 이런 걸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라고 배운다.

글에서 이종태는 한국인의 민족-국가관이 영미나 서유럽보다는 스웨덴과 유사하다고 단언한다. 스웨덴의 민족성이 "복지국가와 민주주의에 강하게 연결된 민족성"이라고 했는데, 그럼 한국의 민족성이 그렇다는 것일까. 하지만 내가 보기에, 한국인의 민족성은 복지국가가 아니라 '울릉도 동남쪽의 어느 외로운 섬'과 훨씬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이종태는 87항쟁에서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었다는 사실을 특수화해서 논거로 들지만, 아마 대다수의 제3세계 민주화운동에서 국기를 '안든' 경우를 찾는 게 더 어려울 것이다. 이건 민족-국가에 대해 특정 민족이 다른 민족과 차별되는 각별한 신념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민족-국가 이데올로기가 제3세계에 이식된 자본주의의 폭력적 축적과정에 대해 일정한 대항논리, 요컨대 모든 민족구성원을 향한 형평성을 약속해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종태는 87년 한국에서 사람들이 요구한 "민주주의"와 트레가르드가 말하는 스웨덴의 "민주주의"를 별다른 논증없이 동일시하며 논리를 비약한다. 그런 식이면 국가명에다 아예 민주주의 네 글자를 박아놓은 북조선이야말로 "민족정체성에 민주주의가 강하게 연결된 나라" 아닌가.

어떤 민족의 국가주의적 성향이 강한가 아닌가, 혹은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얼마나 유사한가 따위를 말하는 것은 기실 한국 사회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무익한 짓이라는 걸 이종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한국에 사민주의를 뿌리내리는 데 정작 필요한 것은 스웨덴과의 민족감정적 유사성이 아니라, 정치경제적 조건들의 상이성이기 때문이다. 스웨덴 내부에 복지국가 이데올로기가 성공적으로 뿌리내린 이유 중 하나는 서유럽과의 차이를 역사화-서사화한 데 있다. 즉, 이종태가 바라는 한국형 사민주의가 리얼리티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스웨덴과 한국의 차이를 더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다. 모순적으로 들리지만, '우리가 스웨덴과 닮기 위해서는 스웨덴과 달라야 한다.' 그 작업은 사민주의를 '선언'하는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지난한 과정일 것이다.

얼마 전에 공식지면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http://xenga.tistory.com/entry/국가의-귀환-시사IN-41호), 기본적으로 나도 한국사회가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극단적 아나키가 아닌 다음에야 대부분의 좌파들도 동의할 것이다. 특히 '국가의 역할'에 대한 연구와 대중화에서 장하준, 이종태 등의 지식인들이 누구보다 긍정적인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한국의 자칭 사민주의자들은 요즘 좀 좌충우돌하는 것 같다. 뉴라이트 매체에 기고를 한다든가, 엔엘-피디, 한줌도 못되는 포스트모던 좌파들에 버럭 역정을 낸다든가 하는 짓에 시간낭비할 겨를이 어딨는가. 포스트모더니즘 까는 짓, 유행 지나간지 한참 됐다. 자꾸만 기존 좌파들과 각을 세우는데 골몰하다보면, 이종태 등은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스탈린주의자'로만 포지셔닝될 뿐이다. 담론투쟁의 영역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전통적으로 약하다. 논리와 감성이 섹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건 뉴라이트랑 (제3의 지면에서) 하시라. 그게 이길 가능성도 높을 뿐더러 더 생산적일 것이다.

반면 현실구성의 영역, 구체적으로는 조직을 불리고 정책을 생산하는 장에 좀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 분야에서 한국의 사민주의자는 주사파보다 무능하다. 정말 현실을 변화시키려 한다면, '먹물집단'이라는 인식부터 바꾸고 현실정치인을 키워내는 일에 좀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정치인' 주대환이 최근 보여주는 정치감각을 보면, 사민주의하기가 혁명보다 훨씬 어려워 보이니 말이다. 좌파 재정립 이전에 사민주의 진영부터 교통정리 좀 하란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