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1. 23:04

최장집 선생


어제 열린 비판사회학대회에서 최장집 선생의 육성강연을 오랜만에 들었다. 나는 세션 13의 발제를 맡아서 참가했는데, 대학생이나 일반인들을 상대로 강연하다가 교수님들 앞에서 발표를 하려니 영 어색했다. 특히 어느 좌파 노교수님께선 시간이 끝났다는데도 질문 5개를 폭탄드랍하는 바람에 아주 진땀을 뺐다.

흥미로웠던 건 그게 아니라 최장집 선생의 강연내용이었다.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 사회와 지식인의 변형'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10년의 개혁정권 하의 이른바 진보개혁 지식인들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 비록 날이 아주 시퍼렇게 벼려진 비판은 아니었지만, '역시 최장집 선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시의성 있는 지적이었다. 

개인적인 수확이라면, 촛불시위 당시에 최장집 선생의 발언에 내가 왜 그렇게 열이 받았는지에 대해서도 좀더 선명히 알 수 있게 됐다는 거다. 강연 이후 이어진 질문에 대한 답변 중에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가 할 수 있는 맥시멈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제어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 그런 기획을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가지고 하기는 불가능하다."

저 문장 속에 모든 게 담겨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선생의 이런 최소주의적 규정에 내가 결코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 그렇게 반발했던 게다. 결국, 여전히 문제는 민주주의다.
2009. 10. 8. 16:32

생존보고


여름내 노느라, 그리고 이런저런 개인적인 일들 때문에 글을 거의 쓰지 못했다. 기자질까지 포함하면 글 써서 먹고 산지 7년인데,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금단증상이 있다거나 우울하진 않다. 어쩌다보니 담배와 블로그를 거의 동시에 끊었는데 담배를 못피워서, 글을 못써서 우울할 이유는 별로 없다. 내 경험상 오히려 "글쓰기는 내 존재의 이유" "글을 못쓰면 난 죽을 것 같애" 따위의 발언을 하는 인간과는 아예 상종을 않는 게 좋다. 십중팔구 '사짜'이거나 '환자'다. 요즘 특히 블로그하며 점점 환자가 되어가는 인간들이 많이 보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일들까지 시시콜콜, 내장 깊숙한 악취까지 꾹꾹 쥐어짜내어 인터넷에 흘려보낸다. 그러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견디는 거다. 솔직함을 가장한 저 눈먼 폭력들... 손바닥만한 블로고스피어 혹은 '진보개혁' 진영에서 고만고만한 애들끼리 살벌하게 나와바리 싸움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측은하고 서글프다(어디 애들 뿐이랴). 모름지기 고기 한번 제대로 못 먹어본 애들일수록 쏘세지 한두 개에 목숨거는 법이다. 어쨌든 이 블로그에 가끔이나마 들러주시는 지인들, 친구들, 익명의 히치하이커들을 위해서 내가 살아 있다고, 그것도 아주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블로그도 슬슬 재개할 작정이라고, 생존보고를 적어둔다.^^ (금연 이후 살이 너무 쪄서 올 봄에 산 스키니진이 안들어간다는 게 유일한 걱정거리다).
2009. 9. 5. 02:41

레이먼드 윌리엄스

테리 이글턴 같은 학자에 비한다면 엄청나게 간결한 문장을 구사한다. 고딩 때 문화연구 관련서적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한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그냥 고루하고 진부한 할아버지였는데 지금 읽어보니, 무시무시하다. 소박한 주장 하나를 결론으로 내밀기 위해서  방대한 논거를 치밀하게 배치한다. 박물학자, 아니 곤충학자 같다. 그런 자세가 과연 문화연구라는 분야와 어울리는 것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2009. 9. 3. 18:23

정운찬 총리...재미있게 됐다


개각이란 이렇게 한번 탁 쳐주는 맛이 있어야 한다. 간만에 청와대도 머리 썼다. 경제부처 수장이 아니라 총리라는 점이 포인트. 개혁진영 쪽에서 정운찬이라는 인물에게 뭔가 기대하는 분위기도 있는데, 택도 없다. 그렇게 간을 봤으면서 아직도 정운찬이라는 사람을 모르나. 어쨌든 이건 명백히 '정치인 정운찬'의 본격적인 시험대다. 대한민국 총리라는 자리의 정치적 스탠스라는 게 뻔하지만 혹시 아는가. "정치를 잘 모르고 관심도 없다"는 대통령이 통치하는 국가에서, 우리는 '총리정치'라는 새로운 사건을 목격하게 될지도.
2009. 8. 24. 03:17

금연

금연 4일차다. 처음 48시간 동안 불안하고 초조한 증상이 극에 달했다. 정말 하루종일 담배말고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지금은 안정세. 그러나 여전히 흡연욕구가 급작스레 엄습한다. 특히 흡연자가 낀 술자리가 문제였는데, 근성으로 버티는 것 말고는 별 방법이 없었다. 정 힘들 때는 빨대를 입에 문다. 14년간 하루에 두 갑 또는 세 갑씩 담배를 피워왔으므로 끊는 일이 고통스럽지 않을 리가 없다. 내 인생에서 금연시도는 이번이 최초다.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이 될 것이다(그러길 바란다). 금연하면 살이 찐다고들 하는데, 실제로 살이 차오르는(?) 걸 느낀다. 자전거를 좀더 격렬하게 타주어야겠다. 금연의 부수효과로 미각과 후각이 점점 예민해지고 있다. 한달 정도 지나면 이런 감각들도 담배 피우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을까.  
2009. 8. 19. 00:29

김대중 전 대통령


거대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87년 체제의 주인은 노동계급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또 오직 그런 의미에서만,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은 87년 체제의 산파이자 적자이며 첫 영웅이었다. 87년 체제의 마지막 영웅은-87년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인물인- 노무현이다. 김대중은 국부, 다시말해 '아버지'라는 호칭이 그리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아들'의 유비만 존재했던 전후 한국의 부르주아 정치는, 김대중에 의해 비로소 '선생-도반'의 유비를 인정하게 되었다. 몇 달 새 87년 체제의 두 정치적 영웅이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마음 한구석이 허한 건 어쩔 수 없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09. 7. 30. 17:42

금융지주회사법과 삼성

7월 29일에 올라온 <한겨레>의 전성인 교수 칼럼. 내가 아래 댓글에서 적은 것을 포함해, 중요한 급소들을 짚어주고 있다.

금융지주회사법과 삼성
2009. 7. 23. 11:43

2009년 7월 22일, "삼성데이"


글자 그대로다. Samsung Day. 미디어법도 그렇지만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은 노골적으로 재벌에게 특혜를 몰아주는 조문들로 가득차 있다. 공성진 법안의 문구들을 보면, 빤스까지 벗어던진 노골성에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이로써 장하준이 "한국경제의 끝장"이라고까지 표현한 '재벌의 금융화'는 최후의 고비를 넘어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미디어법과 금융지주회사법이 만나는 소실점에 삼성이 있다. MB도, 국회의원도 모두 이 거대한 몸통의 '하수인'에 불과하다. 삼성은 겹경사, 국민은 줄초상.
2009. 7. 21. 16:02

롤플레잉 동물원


요즘 Mnet의 '2NE1 TV'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케이블 치고는 시청률이 놀랄 정도로 높다고 한다. 이제 우리들은, 무명의 소녀(혹은 소년)들이 어떻게 살벌한 자기수련과 찌질한 연습생 시절을 거쳐 동아시아 쇼비즈니스의 거물로 성장해가는지를 낱낱이 보고 듣게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들의 시련에 가슴아파하고, 그들의 성공에 기뻐하고, 그들에게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수많은 익명의 팬-페이트런들은 인터넷을 통해 이합집산한다. 단순한 수용이나 일방적 소비가 아니라 롤플레잉 게임에서 캐릭터를 키우듯, 팬들은 실시간으로 그들의 스타-다마고치를 키우고 있다. 키워지는 쪽 역시 실시간으로 팬-페이트런의 반응을 체크하고 있다. 그 성장의 과정은 양쪽 모두에게 쾌락적이다. 프로야구에서도, 스타리그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정치 쪽도 예외가 아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 첫번째 케이스였다. 촛불집회에서 칼라TV팀과 함께 종횡무진했던 진중권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자신이 롤플레잉 캐릭터였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해명했던 첫번째 캐릭터다. 이 모든 현상들은 동물원과 트루먼쇼 사이에, 아니 그 너머에 있는 것이다. 보는 존재와 보여지는 존재 사이에 존재하는 건 쇠우리가 아니라 디지털 미디어다. 이제 조련사와 구경꾼의 구별은 한없이 희미해진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위계, 권력담론은 낡은 것으로 치부된다. 보여지는 존재에게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나 억압적 상황에 대한 분노는 없다. 이들은 스스로의 의지와 재능과 노력으로 트루먼 혹은 동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일한 관건은, 성공을 향해 무한질주할 수 있는가다. 이를 위해 필요한 건 경쟁의 압력을 정신적으로 견뎌내고 몸을 망가뜨리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자기에 대한 배려'다. 푸코가 말한 '실존의 미학'은 이렇게 기이한 형태로 출몰한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이 행복한 수행적(performative) 공간 속에 비평적 공간은 없다. 따라서 비평이 의미를 획득하려면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자-보여주는 자를 드러내야 한다.
2009. 7. 14. 19:32

마지막 단락

최근 모처에 기고한 글 중 마지막 단락.  "뜨거워져라!" 라고 말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늘 시리고 추워 뜨거워질 수 없었던 사람은 연탄재 한번쯤 발로 찰 권리도 없는 걸까. 요즘 이곳이 방치되고 있는데, 애초에 북적대던 곳도 뜨겁던 곳도 아니었기에 이렇게 시들시들 말라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해해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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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는 젊은 세대에 대한 사회적 응급조치를 통해 이러한 빈곤의 연쇄를 끊어야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사회의 붕괴를 막기 위한 윤리적 호소라는 점에서 보수적이지만, 새로운 정치적 저항의 주체를 요청한다는 점에서는 급진적이기도 하다. 청년빈곤 문제 혹은 88만원 세대 담론은 한 세대의 낙오와 탈락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대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이 20여 년을 관통하는 사회구조 변동의 산물이자, 모든 사회성원이 직면한 불안정노동 전면화의 한 단면이라는 사실을 환기할 때, 세대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것은 경제의 문제인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경제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경제학이 말하는 ‘수요’는 구매력을 전제하며 따라서 구매력이 없는 자는 수요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의 셈에 포함되지 못하는 인간, 몫 없는 인간, 낙오하고 탈락한 인간, 결국 아무도 아닌 저 수많은 사람들-우리를 어떻게 ‘셈’해야 하는가. 낙오와 탈락과 불평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우리 스스로 발 딛고 있는 이 세계가 아름답고 추상적이며 평평하고 매끈한 경제의 공간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곳은 정치의 들판, 윤리의 바다, 주체의 숲이다.

2009. 7. 5. 04:50

Dancing The Pain Away

                Marco Pantani(1970~2004), Giro d'Italia 1999
2009. 7. 3. 18:24

잡감 0703


1. 사흘 동안 새벽 4시 이전에 집에 들어온 적이 없다. 대체로 즐거운 술자리였지만 이렇게 연일 내달리니 몸이 버티질 못한다. 잠깜잠깐 필름도 끊어졌던 것 같다. 당분간 자제를.

2. 명석하기도 어렵고 유연하기도 어렵지만, 명석하면서 유연하기란 더욱 어렵다. 어디나 마찬가지이고 내 또래에서도 그런 재능은 무척이나 드문데, 그런 이조차 조직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위아래로 치이며 괴로워한다. 답은 없고 가슴만 먹먹하다.

3. 작업의 윤곽이 좀 잡히는 느낌이다. 어제 술자리가 나 뿐 아니라 모 편집자님에게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듯. 그나저나 또다른 편집자인 모 선배와의 프로젝트는 어찌될지...(먼산) 내가 쥑일 놈이다.

4. "싸가지가 없다"는 뉘앙스의 말을 전해들었다. 평소 존경하던 선생님의 나에 대한 평이어서 유리알 같은 내 영혼에 스크래치가 생겨버렸다. 그래서 여친사마께 일러바쳤다. 썩소를 날려주시는 그녀. "몰랐어?"  ...그래 안다. 아니까 더 상처인 거다.
2009. 7. 1. 16:08

잡감 0701


1. 인디스페이스 월례비행에서 김응수 감독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를 보았다. 1986년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분신자살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러나 사건 자체에 대한 촘촘한 역사적 재구성은 없다. 그 사건의 정치사회적 의미 같은 건 철저히 배제된다. 영화는 그날 날씨가 어땠는지, 어떤 버스를 탔는지, 사건 직전에 주변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등과 같은 세부적 사실들에 의도적으로 집중한다. 당시 같이 활동하던 사람들(그러나 사건의 주동자라고 할 수는 없는)의 인터뷰를 반복해서 보여줄 뿐이다. 영화 속 인터뷰어는 마치 공안검사처럼 건조하고 집요하게, 전혀 중요해보이지 않는 세부사항들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인터뷰이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힘겹게 답변을 이어간다. 이제까지 보기힘들었던 새로운 형식의 '386 후일담'이다. 인터뷰의 형식은 단조로웠지만 지루한 영화는 아니다. 동석한 유운성 평론가의 말처럼, '뒷통수를 확 쌔려주는' 맛이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인터뷰이들은 결계에 걸린 것처럼 뭔가에 억눌려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의견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저널리스트의 관점에서 보면, 인터뷰에서 저런 식으로 답변하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위화감이 밀려왔다. 설사 경찰이나 검찰이 질문해도 그렇게 하기 어렵다. 저것은 감독이 인터뷰 이전에 모종의 강력한 '사전처리'를 해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즉, 내 위화감의 이유는 소격효과와 같은 미학장치에 의해 감정몰입을 방해받아서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가 너무 노출되어서였다. 영화가 끝나고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서 김응수 감독 자신이 내 짐작이 맞았음을 밝혀주었다. 의도적으로 인터뷰이의 답변방식을 제한했다는 것이다. 그는 과거를 신화화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역사적 사건을 다루면서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기승전결 구조의 기존 다큐멘터리들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그 사건의 주변인물이기도 한)자신이 대학생일 때 어떤 거창한 역사적 사명감으로 운동을 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물론 과거를 신화화하는 것에 나 역시 반대하고, 반대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런 윤리적 성찰을 이 영화처럼 인식론적 문제로 곧장 환원해 버리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특정 사건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보여주기 위해 인터뷰 대상을 포함한 환경을 멸균처리한 실험실처럼 만들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구부러진 막대를 펴는 게 아니라 아예 반대편으로 다시 구부리는 것이다. 악셀 호네트의 정식화를 빌리자면 인정은 인식에 선행한다. 행동을 결정하는 우선순위는 인식이 아니라 인정에 있다. 인식을 특권화해서 끝까지 밀고가다보면 회의주의 또는 불가지론으로 귀결되고 우리의 행동을 해명할 수 없게 된다. 인식론적 환원은 현실의 풍부한 맥락을 표백하고 시공간을 동결시켜버린다. 사건들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가, 과도한 인식론적 환원을  정당화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각자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리고 그래야지만 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 '팩트'란 그걸 전제한 무엇이지, 맥락도 배경도 없이 던져진 행위들의 총합이 아니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꼭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2. <트랜스포머2>에 대한 이야기들을 보면서, 그저 직관일 뿐이지만, CG영화가 어떤 물리적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다. 영화가 기술적 한계에 봉착하면 남은 건 무엇일까. 우리의 몸을 개조(일테면 몸에 칩을 심는다든가)하는 것 아닐까. 기존 기술이 한계에 다다르고 우리의 역치가 점점 그에 맞춰 커져왔다면, 영화만이 아닌 모든 감각적인 것을 새롭게 경험하기 위해서는 결국 인간 신체를 확장할 수밖에 없다.

2009. 6. 26. 17:02

[메모]진보의 경제성장전략

<시사IN>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48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85

"성장전략이 있어야 집권할 수 있다=집권할 수 없는 건 성장전략이 없어서다"
"진보진영이 안되는 건 비판만 해대기 때문이다"
 
1. 저 비판이 계속해서 겨냥하는 "진보진영"은 어디를 가리키는가. 민주당을 가리킨다면 지난 10년간 온갖 성장전략을 내놓았고 대부분 실패했다(대개 민족문제로만 치부되는 통일정책 역시 궁극적으로는 안보와 성장전략이 결합된 내부식민지 전략이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을 가리킨다면 현재로선 집권은커녕 이들 당의 생존 조차 불투명하기 때문에 독일식 선거제도라도 도입한 다음에 추궁할 일이다.

2. 국가주도형 산업정책을 장기적으로 수행할 수 있으려면 강력한 정치적 헤게모니가 필수불가결하다. 지난 10년간 정치권력은 탈권위, 규제완화, 다시말해 '글로벌스탠더드'의 명목으로 재벌과 금융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과거의 명시적 수단들을 자진해서 포기했다. 더구나 포기된 수단들 상당수는 다시는 돌이키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광범위한 정치혐오, 시민운동의 쇠락, 진보정당의 지체, 5년단임제로 인한 정책연속성의 부재라는 치명적 제약조건도 있다. 이미 고도성장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게다가 성장전략을 관철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지반조차 없는 상황에서 내놓는 성장전략이, 오직 집권을 위한 레토릭 또는 국가주의로의 이념적 회귀 이외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3. '성장전략이 있어야 집권할 수 있다=집권할 수 없는 건 성장전략이 없어서다'라는 명제는 증명된 적이 없다. 이명박의 747공약은 성장전략이라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지만 집권에 성공했다. 민주당이 정권을 잃은 이유 중 하나는 성장전략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고도성장 신화를 깨는데 실패하고 나름의 성장전략을 실현시키는데도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장전략의 유무는 관심을 기울여야할 문제임이 분명하지만 생각만큼 핵심적인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건 시대에 부합하는 성장전략을 관철시킬 수 있느냐 여부다. 더욱 중요한 건 성장전략이 무조건적 규제완화와 동의어가 아니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방만해진 시장권력에 대한 규준과 제어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포스트 신자유주의 시기의 성장전략은 제아무리 정교하고 '성장친화적'이라 해도 오지않은 미래에 대한 시장규제적 기획일 수밖에 없으며, 고삐 풀린 재벌과 관료집단은 결코 설득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은 이미 지난 10년간, 특히 참여정부 시기 여실히 증명되었다. 그 집단은 상대가 강하면 굴복하고 약하면 짓밟는다. 성찰과 고민과 토론과 설득이 아니라 철저히 힘의 논리와 이해관계에 의해 정책이 결정되거나 왜곡된다. 그럴듯한 성장전략만 있으면 기득권세력도 설득할 수 있을 거라는 순진한 착각을 이제 버릴 때도 되었다. 오히려 진보가 '성장'을 강조하면 할수록, 낡은 어떤 구도-민주화세력 vs. 산업화세력-를 재생산할 뿐이며, '성장이 없으면 분배도 없다'는 기득권세력이 선점한 이념적 프레임에 포획될 수밖에 없다. 사회경제분야의 정책에서 한나라당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열린우리당-민주당, 이 꼴이 된 게 단순히 성장전략이 없기 때문이었을까.

<참고>
http://blog.ohmynews.com/cjc4u/tag/%EC%A0%95%EA%B8%80%EC%9E%90%EB%B3%B8%EC%A3%BC%EC%9D%98


4. 따라서 집권과 집권 이후 개혁의 성공을 담보하는 필요조건은 경제성장전략이 아니라 재벌과 관료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것은 노사모의 예에서 증명되었듯 감성적 지지계층과 인기정치인의 세몰이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역동적인 시민사회, 건강한 우파, 강력한 진보정당이라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기득권세력을 구조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그러나 권위주의 시절과는 다른 형태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명분을 용의주도하게 쌓아나가야 한다. 성장전략은 그렇게 '바닥에서 박박 기는' 과정에서 나와야지만 실현가능한 것이 되며, 지지세력을 뛰어넘어 신뢰감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그 정도 수준의 사회가 되면 진보가 강박적으로 경제성장을 대안으로 내세울 이유도 없어질 터이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참여정부 5년이 남긴 가장 큰 교훈이다. 몇몇 이데올로그들이 성장전략 문건 쌈박하게 만든다고, 또는 개혁진보세력이 당장 집권한다고 해결될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경제성장전략과 레토릭 개발에 집착하는 태도는 영미의 특수한 정치문화에서 두드러지는 것으로, 한국사회에 곧바로 적용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프로젝트라 하기 어렵다.
2009. 6. 15. 18:28

20대 개새끼론

김용민씨가 20대를 비난하는 글을 썼다고 한다. CBS 시사자키 출연할 때 안면 튼 양반인데, 교수인줄은 몰랐고 그렇게 나이가 어린지도 몰랐다. 93학번이면, 386은커녕 학생운동 콩가루로 만든 선두주자가 아닌가. 미친듯한 해외어학연수 붐의 자랑스런 주인공들이시고. 내가 김용민씨를 이렇게 비난하는 것이 부당한 '자격론'인 것처럼, 20대 개새끼론도 마찬가지다. 머리가 있다면 그 논리가 어떻게 자신에게 똑같이 되돌아올지 생각을 좀 해얄 게 아닌가. 아니면 염치라도 좀 있든가. 전에 내가 실크세대 까는 글에서 적었듯이 "모든 세대의 능력은 동일하다." 다만 사회적 조건이 다를 뿐. 이건 진리니까 이해가 안되면 외워라. 20대에 대한 가학증이 진보진영 꼰대들의 공공연한 향락이 되었다는 사실, 또한 그것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아니라 '시대의 환멸'을 '세대의 환멸'로 도착시키는 개혁진보-기성세대의 심리적 증상이라는 사실만 다시 한번 강조해두기로 하자. 20대 개새끼론에 대해 새삼 글을 쓸 여유는 없으니 예전 글로 대체한다(작년에 쓴 글이지만 정확히 김용민 씨 같은 이를 겨냥하는 글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20대 왕따시켜 10대 찬양하는 돌림병이 돈다

p.s) 회사 다니는 30대들은 20대 혐오를 표출하는 직접적인 '근거'로 자기 밑에 들어온 20대들의 무능과 무개념을 들며 광분하곤 한다. 나도 겪어봐서 안다. 내가 봐도 요즘 20대들이 좀 개념이 없긴 하더라. 근데 니들이 눈에 넣어도 안아파하는 10대들이 회사 들어오면 중뿔나게 다를 것 같니? 내가 비밀 하나 말해줄게. 니네들 신입 시절에 말야, 386 사수들 사이에 스트레스성 원형탈모가 유행이었어.
2009. 6. 12. 13:02

반MB의 이유

조갑제류의 극우보수진영, <조선일보>, 한나라당 일부 실세들이 이명박을 흔들어대고 있다. 10년만에 되찾은 정권에 대한 저들의 분노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현상이다. 그런데 조금 들여다보면 분노의 이유가 제각각이다.

조갑제류는 글자 그대로의 '우국충정'이다. 물론 이 우국충정은 그들의 무뇌성과는 별개다. 내가 노빠들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조갑제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노빠들의 가장 큰 문제는 진정성을 자기들만 독점하고 있다고 믿는다는 점이지만). 어쨌든 이명박을 향한 조갑제류의 가장 큰 불만은, 광장에 나온 "무뢰배"을 쥐잡듯 때려잡지 못하는 정권의 미온성 때문이다. 이들이 보기에 압도적 폭력의 행사로 국가의 권위를 드러내지 못하는 정권은 '아랫것들'한테 얕잡아 보이게 되어 있다. 머슴들이 반항하면 호되게 멍석말이를 시켜 '반병신'을 만들어놔야 하는데, 주인이 안채에 들어앉아 문을 닫아걸고 있으니 울화통이 터지는 거다. 마름들 몇몇이 나서서 몽둥이를 휘둘러대고는 있지만 확실히 기를 꺾기엔 부족하다. 즉, 조갑제류가 이명박을 비판하는 논리는 다름아닌 치안의 논리다. 그리고 이 모든 게 다 이명박의 진정성이 없어서이고, 진정성이 안보이는 이유는 이념이 흐리멍덩해서다. 

<조선일보>의 논리는 조갑제류보다는 세련된 모습이다. 그러나 한 마디로 요악가능하다. 경영의 논리다. 대통령이 국정 전반의 매니지먼트를 못하고 있다는 거다. 경영을 못하고 있다는 건 같은 편에 속하는 집단들의 사적 이익들을 조정하고 계산해서 '효율적'으로 국정에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조선일보>의 숙원인 방송진출을 이루려면 미디어법이 빨리 통과되어야 하는데, 어영부영 여름으로 넘어갈 것 같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 <조선일보> 김대중은 "MB가 스스로 나가주기만을 바랄 것이 아니라 탄핵 등 구체적 절차를 밟으며 전국민적 동참을 유도하는 적극적 액션에 나설" 것을 요구하는 등 거의 조갑제와 유사한 멘탈리티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사실 그를 제외한 <조선일보> 기사의 전반적인 논조는 철저히 '실용적'이었다. 경영의 논리로 이명박을 비판하는 건 <조선일보>만이 아니다. 재계도 불안이 불만으로 전화하기 직전인 상황이고, 만약 지금 추진하고 있는 '유사 대운하' 프로젝트마저 엎어진다면 건설족들과 지역토호들이 일거에 반이명박 세력으로 돌변하게 된다. 치안 논리보다 어쩌면 훨씬 무서운 게 바로 경영의 논리다.

한나라당 현 실세들의 불만은 갖가지 수사로 포장하긴 하지만 딱 하나, 정치공학의 논리다. 박근혜 때문에 당이 언제 결딴날지 모를 판국이고 당 지지율도 급전직하하고 있다. 그럴 때는 한국특유의 정치구조상 청와대가 일종의 원외구심의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데 이명박은 뭐하나 만회할만한 업적은커녕 "나는 정치에 소질도 없고 잘 모른다"라는 소리나 하고 앉았으니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을 게다. 언론보도만 보고있으면 요즘 '열심히' 일하고 있는 건 문광부 밖에 없는것처럼 보일 정도다. 한예종 박살내는 일에 이렇게나 열내는 것 자체가 이미 '막장'이다. 참여정부가 '막장테크' 타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사회경제적 개혁보다 정치문화적 구별짓기에 열올린 점도 무시못할 이유 중 하나였다.

결론적으로 이명박은 지금 사면초가 상황이다. 정권 2년차에 우파들에게조차 공격받고 있다. 하루종일 이명박 욕 하는데만 열 올리는 사람한테는 참 고소한 일이겠다. 그러나 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이 '독선'을 넘어 '자폐'의 단계로 들어섰다는 건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다. 이명박의 최근 발언, "저는 정치에 소질도 없고 잘 모른다"라는 발언은 정치적 자폐의 명백한 징후로 보인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발언만큼이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 이렇다 할 대안정치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사태를 더욱 절망적으로 만든다. 개혁진영의 개편은 기정사실로 보이지만 여전히 '누구를 내세울 것인가'에만 촉각을 곤두세우는 한, 그 모든 움직임은 박근혜라는 '깔대기'로 수렴될 뿐이다. 우파들이 '반MB'를 외치고 있다. 우리도 '반 MB'를 외치고 있다. 바야흐로 명실상부 '전국민의 반MB' 시대다. 눈여겨 봐야하는 것은 이명박의 논리, 치안의 논리, 경영의 논리, 정치공학의 논리 모두가 '정치가 아닌 무엇들'이란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니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 '반MB'를 외치고 있는지 근본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자문해봐야 한다.
2009. 6. 5. 03:41

쾌락과 글쓰기


인디포럼에서 처음 만난 윤성호 감독이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블로그에 가끔 가서 글을 읽곤 하는데요, 글과 인상이 좀 다르네요. 제 경우엔 기분이 우울하거나 답답할 때 거길 찾게되는 것 같아요."  그 말에 나는, "글과 실제 캐릭터가 다르다는 얘길 많이 듣는데 제가 우울한 캐릭터는 절대 아니예요"하고 웃으며 넘어갔는데 사실 알쏭달쏭한 이야기다. 우울하고 답답할 때 찾는 글이라는 건 글 자체가 우울하고 답답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반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드라이하게 쓰는 편이고 그러다보니 단정적이고 공격적인 말투 등등의 일종의 '후까시'가 상당히 들어가게 된다. 솔직히 인정한다. 내면이, 혹은 내공이 약한 글쟁이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 일종의 방어기제인 셈이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까지의 글들은 안그랬다. 유희성이 강했기 때문에 쓰는 나도 읽는 사람들도 꽤나 즐거워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나이가 한살한살 들어갈수록 변해왔다. 20대 중반 이후 글쓰기 환경이 급격히 변한 탓도 있는 것 같다. 자기검열도 강해졌다. 내가 과거에 썼던 글을 잘 모르는 후배들은 무섭다고까지 한다. 그런 얘길 들으면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반성하게 된다. 권위가 없는 사람이 권위주의적인 글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이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다.

평소의 나는, 어른들 말씀에 따르면 "집안 말아먹을 한량" 스타일이다. 그런데 나의 쾌락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정확히 얘기하면 지적 쾌락은 말초적 쾌락을 억압하고 말초적 쾌락은 지적 쾌락을 유예시키는 형태다. 그래서 '이중 전도'가 일어난다. 말초적 쾌락은 억압된 쾌락이어서 더 강한 쾌락이 된다. 반면 지적 쾌락은 유예된 쾌락이어서 더 강한 쾌락이 된다. 전자는 해방감을 주는 대신 죄의식을, 후자는 우월감을 주는 대신 정당화를 요구한다. 양자는 샴쌍둥이처럼 붙어있다. 동시적으로 드러나야 하지만 동일하게 드러나선 안된다. 내가 특별히 변태적이어서는 아니고, 따지고보면 단순하고 일반적인 이야기다. 20대 초반에 나는 그것을 '균형잡힌 자아'라고 명명한 적이 있다. 내가 변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지적 쾌락과 말초적 쾌락을 완벽히 동일시하는, 다시 말해 모든 지적 쾌락을 말초적 쾌락화하는 사람이다. 내가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적 쾌락과 말초적 쾌락을 명확히 구분하고 분류한 뒤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어느 한쪽만 추구하는 사람이다(실은 이쪽이 진정한 변태). 내가 가엾게 여기는 사람은 말초적 쾌락을 지적 쾌락으로 착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특정인을 글쓰기의 롤모델로 삼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글쓰기가 자신의 쾌락 메커니즘을 제대로 반영하는 게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글이 나의 쾌락과 점점 괴리되는 것 같아서 요즘 좀 걱정스럽다.
2009. 5. 29. 15:06

애도를 시작하기 위하여


어떤 진보인사가 "우리들 중에 노빠 아니었던 사람이 있는가"라고 말했다. 아마 맞는 말일 게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노빠였던 적이 없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 내가 첫 직장에서 처음 쓴 기사가 고 배달호씨의 죽음에 대한 것이었고, 그 후로도 노무현 시대의 많은 죽음들을 현장에서 기록해왔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 높은 곳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꿈을 꾸곤 한다. 폐소공포와 고소공포가 동시에, 온몸의 땀구멍을 열어젖히며 노도처럼 밀려들어온다. 그곳은 낯익은 공간이다. 한진중공업의 노동자 김주익 씨가 절망과 고독에 지쳐 목을 맨 바로 그 크레인. 부산에 취재하러 갔을 때, 실제로 그 곳에 올라가서 사시나무처럼 떨었던 적이 있다.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저녁놀에 핏빛으로 물든 그 작고 높은 밀실을.

한 마디로 나에게 노무현은 그 시대의 죽음들과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다. 어떤 좌파들은 20년 전의 '진보' 노무현을 애도하자고 말하지만, 나는 그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대체 20년 전의 노무현만을 애도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럼 20년 후의 노무현은 애도의 대상이 아닌가. 관념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은 또다른 박제화다. 이런 식의 관점은 "더이상 노무현만큼 훌륭한 대통령은 나올 수 없다"고 말하며 노무현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대치로 한계짓는 사람들과 동일한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우리를 대신해줄 훌륭한 지도자 없이는, 우린 안될거야 아마."  

그러므로 나는 애도한다. 노무현을 통해서만 세계를 인식하던 우리를, 그리고 나 자신을. 우리는 스스로를 애도함으로써 노무현을 떠나보내야 한다. 민주주의가 단지 '독재자의 자리에 선량한 호민관을 앉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민주주의는 언제나 그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시리도록 깨달으며 노무현을 떠나보내야 한다. 그를 '순교자'로 혹은 '최선의 대통령'으로 규정하는 짓은 그래서 값싼 감상주의이며 패배주의다. 결국 우리 중 누구도 노무현의 과오를 넘어설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넘어가려는 순간 우리는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인을 존중하는 것이기는커녕 욕보이는 짓이다.

애도는 오늘의 영결식 이후에 시작되어야 한다. 충격과 오열과 분노와 탈진이 신화로 귀결되는 그런 애도가 아닌 글자 그대로의 애도, 애도의 주체와 애도의 대상을 아프게 분리하는 의례 말이다. 그 애도의 완결은 이명박보다 좀 나은 대통령을 뽑는 것 따위로 달성될 수 없다. 한명의 대통령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정의를 증명할 때, 비로소 애도는 완결될 것이다. 아마, 생각보다 오랜 세월이 걸릴지 모르겠다. 노무현 대통령, 잘가시라. 당신을 끝내 사랑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당신이 넘어설 수 없었던 벽을 우리가 부술 것이다. '순교자의 사도'로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필요와 의지로. 그리하여 정말로 우리의 애도가 끝나는 날, 웃으며 당신께 편지 한장 쓰리라.
2009. 5. 24. 23:07

뒤샹의 경제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56584.html

[한겨레] 경제계, "경제에 영향 없길…"

경제단체들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국가적으로 큰 불행”이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동시에, 어려운 경제상황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우려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과 관련해 낸 논평에서 “경제계는 충격과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으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며 애도를 표했다.

대한상공회의소도 공식 논평을 내어 “충격과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대한상의 이현석 전무는 “국가적으로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라며 “이번 일이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며, 특히 경제위기 극복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국민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이동응 전무도 “역대 대통령들의 좋지 않은 일이 사회 문제로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며 “다만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이 겨우 회복 조짐을 보이는 경제상황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중앙회 역시 이날 공식 논평을 내어 “우리나라 중소기업 육성 발전에 큰 기여를 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 소식이 매우 충격적이며 안타깝다”고 밝혔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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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조심스럽게 내놓았을 '공식논평'임을 감안한다면, 이건 '인간에 대한 예의' 운운하는 차원보다 좀더 심층적인 이데올로기의 문제라고 판단된다. 그런데 일부 노 지지자들은 이런 발언을 처음 본 것처럼 맹렬하게 분노하고 있다. "지금 이 상황에 돈 얘기라니!" 물론 동감이다. 나도 저들의 말이 차마 해선 안될 망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저 기사를 가져온 이유는 저 발언이 유별나서가 아니라 너무 익숙해서였다. 정확히 말하면, 너무 익숙한 것이 너무 낯선 맥락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미술관에 걸린 뒤샹의 변기를 처음 본 기분이랄까. 사실 저 발언은 그 많은 노동자의 죽음을 보고 거리로 나선 사람들, 그리고 김선일의 죽음을 막기 위해 거리로 나선 이들에게 경제계와 소위 '개혁정권'과 그 지지자들이 습관처럼 들이밀던 것이었다.

2009. 5. 23. 11:21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검찰의 수사를 받아오던 전직 대통령이 목숨을 끊은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연합뉴스>는 문재인 씨의 발언을 빌어 노 전 대통령이 유서를 남기고 투신했다고 보도했다. 황망하고 슬픈 일이다. 이 사건이 혹시라도 지지자나 측근의 또 다른 죽음을 불러오지나 않을지 걱정부터 앞선다. 애도하고 슬퍼하되 자중자애하기를. 진심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09. 5. 18. 15:32

참여해주세요


2009. 5. 12. 15:46

스타트렉 번역크리


<스타트렉: 더 비기닝>을 보러갈까 했는데, 영화자막에 문제가 많은 것 같다. 크고 작은 번역오류들이 지뢰처럼 매설되어 있다고 하고, 특히 "워프항법"과 "트랜스포터"를 둘다 "순간이동"으로 번역했다는 소릴 듣는 순간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 이건 번역 이전의 문제다. 한 마디로 작품(특히 SF)을 대하는 기본자세의 문제인 거다. 번역한 분은 이미 몇몇 커뮤니티에서 유명인사로 등극했다. <스타트렉>은 <스타워즈>와 달리 상당히 탄탄한 과학이론에 기반한 시리즈다. <스타트렉>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게 때로 몇몇 <스타트렉> 빠들이 <스타워즈> 빠들을 업수이 여기는 근거로 돌변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오덕들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타트렉>을 처음 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번역에 대한 감수를 제대로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2009. 5. 8. 17:28

잡감 0508

-시험 전날은, 시험공부가 아닌 모든 게 마술처럼 재밌어진다. 평소에 그렇게나 읽기 고통스러웠던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시험 전날 빨려들어가듯 다 읽은 적도 있는데, 아침햇살이 막 쏟아져 들어오는 하숙방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중얼거린 듯 하다. "신이시여, 정녕 제가 이 책을 다 읽었단 말입니까!" 그대로 쓰러져 잠깐 눈을 붙였다 '참, 오늘 시험인데!'하는 생각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지만, 창 밖은 이미 눈물과 회한의 붉은노을... 그날 있었던 모든 시험을 빵구내고 밤새도록 당구를 친 뒤 4연속 학사경고 달성. 요즘 해야할 작업들이 산더미인데 엉뚱한 책들에 자꾸 정신이 팔린다. 시험전날도 아닌데 증상이 비슷하다. 이거 뭔가 불길해.

-감성이 뾰족한 소년소녀, 자기가 그렇다고 착각한 소년소녀들(대부분 이쪽이겠다)이 문학을 택했던 꿈같은 시절이 있었다. 그 소년소녀들이 고다르와 트뤼포를 경배하며 영화를 택했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쉬크한 사회의식을 간지나게 드러내는 패션에디터, 혹은 파워블로그 굴리며 돈도 버는 트렌드세터. 레닌이 살아있다면 <이스크라>는 패션잡지가 됐을지도 모른다. 아, 그 전에 모발이식부터.

2009. 4. 30. 01:07

조승수 당선


여의도 언저리에서 기자질하던 시절에 심상정, 노회찬과 달리 조승수는 직접 인터뷰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저 그의 행보만 보고 '이런 사람이겠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정치인으로서의 치명적 약점을 가진 사람이란 소리는 참 많이 들었다. "'유도리'가 없다""주위사람을 못챙긴다" 심지어 "꽉 막힌 꼴통"이란 얘기까지. 그런 걸로 정치인의 자질을 재면, 전두환과 김영삼이 일등을 다투겠지. 그래서 나는 조승수의 '치명적 약점'들이 더욱 마음에 든다. 드물게 신뢰가 가는 진보정치인이고, 앞으로 더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 조승수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진보신당은 비록 상징적 의미에 불과하지만 마침내 원내에 한 사람 밀어넣는데 성공했다. 스리슬쩍 봉합해오던 당내 문제들과 정면대결하는 것부터 집권을 향한 구체적 비전까지,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2009. 4. 29. 00:24

아시발 눈물나


임: (실실 쪼개며) 콩, 제대할려면 며칠 남았음?
콩: 아, 몰라. 왜?
임: 아니, 나 같음 자살한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화는 사진과 무관.
2009. 4. 27. 12:40

'캠퍼스 컴뱃 가이드'

"무일푼 하류인생의 통쾌한 반란"이라는 카피가 붙어있는 <가난뱅이의 역습>을 읽다가 맨처음 든 생각. '뭐야 이놈들, 젊은 주제에 한국의 40대 언니오빠들보다도 온건하잖아!' 저자는 대학 다닐 때 '찌개투쟁' '갈고등어투쟁' '술투쟁'같은 기발한 투쟁방식을 선보였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이런 게 큰 소동이 됐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술판, 먹자판 벌이는 건 내가 학교에 다니던 2000년대 초반 무렵까지 그냥 생활이었단 말이다!

그러고보니 며칠 전 대학후배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최근 학생회관에서 선후배들끼리 고기 구워먹고 술을 마셨는데 이후 학교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과방이 '폐쇄조치'당했다고 한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여친님 불같이 화를 낸다. "아니, 그런 짓을 당하고도 가만 내버려뒀어? 학교를 확 뒤집어 엎어야지!" 그러게. 여친보다 훨씬 온건한 나같은 사람이 봐도 말이 안된다. 등록금 문제도 있어서 학생들의 불만은 높아져 있지만, 실질적인 저항이나 반발은 없다고 한다. '짜증나긴 하지만 아무도 안나서니 난 취업공부나 열심히 하자' 이런 생각인듯. 지금 대학생들이 학교측에 철저히 얕보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줄이야.

지나간 세월을 한탄해봐야 다 부질없다. 나같은 선배들의 업보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안하는 후배들이라 욕해봐야 제 얼굴에 침뱉기일 뿐. 사실 그들이 안하는게 아니라 못하는 것에 더 가깝다. 화는 나는데 싸우는 걸 본 게 없으니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운동권이라 욕먹을까봐 움츠러들고, 뭐 그런 거다. 이제 한국도 'CC를 위한 가이드' 같은 게 있어야 할 것 같다. 캠퍼스 커플 말고 '캠퍼스 컴뱃', 약칭 CCG...

학교측의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고 싸우는 노하우나 자세같은 것들은 선후배가 학교에서 같이 술 마시고 고기 뜯으면서 암묵지처럼 전수되기 마련인데, 선배라는 작자들은 가끔 술 사주면서 운동권 무용담을 늘어놓거나 자기 스펙 자랑이나 해대니... 세상이 변했다지만 예나 지금이나 투쟁의 구조와 본질은 똑같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대학의 분위기에서 대학생이 느닷없이 짱돌 모으고 꽃병 제조해서 싸울 수는 없다.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다. 하지만 구체적인 투쟁방식을 같이 고민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홈커밍데이 같은 날, 괜히 선배들한테 아부떨지 말고 '내 모교를 돌려줘'같은 구호로 'OBXNB 크로스!' 집회같은 걸 조직해보는 것도 괜찮지 싶다. 스타벅스같은 외식체인에 점령당한 캠퍼스에 회한을 가진 선배들, 참 많다. 그 과정에서 또 여러 고민과 아이디어들이 나올 수도 있다.  일단 학생들끼리 학내투쟁을 한다치고, 내가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어디까지나 '예'를 드는 거다. 리스크가 낮은 것부터 단계적으로 투쟁을 고양시키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그 구조에다 액션 아이디어들을 집어넣기만 하면 된다. 

만약 이슈가 등록금 문제라고 할 때 단식투쟁이나 삭발투쟁 같은 건 식상할 뿐 아니라 하는 사람만 괴롭고, 후유증도 심각하니 지양해야 한다. 기자회견하고 성명서 발표해봐야 기자들은 별 신경도 안쓴다. 먼저 '학생회관 동맹폭식의 날'을 지정해서 굶주린 배를 채우고 저항의 기운을 한껏 북돋는 게 최우선이다. 이른바 폭식투쟁이다. 그 다음, '선영아, 사랑해'같은 류의 티저광고지를 학교에 쫙 부착한다. 등록금 문제니까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같은 알듯모를듯한 짧은 문장이나 간단한 이미지로 하는 게 좋다. 그리고 한달 묵힌 양말 대량투척, 츄리닝에 스모키 화장하고 수업듣기 같은 비교적 쉬운 전술로 교내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 이후 수영복 입고 학생처 앞 복도 삼보일땡(세걸음 걷고 저질땐스), 총장실이나 학생탄압교수의 책상에 똥싸고 나오기 등과 같은 하이레벨 택틱까지 가는 거다. 국과수의 DNA 감정이 두려우면 근처 개똥을 주워와도 상관없다. '투입'부터 '배설'까지 서서히 고양되고 하나로 완결된 서사적 구조, 미학적 저항이라는 점이 포인트. 투쟁에는 어찌됐건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참여하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지적인 측면에선 10대, 20대, 30대 초반까지 포괄하는, 88만원 세대를 위한 '저항의 커리큘럼' 같은 걸 짜볼 수 있다. 사회에 대해 좀 더 알고싶어도 마땅한 커리가 없어서 삽질하는 친구들이 의외로 많으니까 이 방면의 선수들이 모여서 체계적인 학습과정을 제시해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선수'들이어야 하는 이유는, 체계적이되 쉽고 재미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줄요약까진 아니라도 제대로 다이제스트해주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심화학습으로 나아간다. "반이명박" 같은 하나마한 소리만 나불대는 선배 따윈 필요없다.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게 중요하다. 감나무에서 배 열리길 기다리지 말고, 배 먹고싶으면 배나무를 심어라.
2009. 4. 25. 23:54

안티조선의 '옥동자' <키보드 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

한윤형과는 7년 전부터 알던 사이다. 그가 자서전 비슷한 책을 낸다고 했을 때, 사실 어떤 이야기들이 들어있을지는 '안봐도 비디오'였다.  나는 2000년부터 2009년이라는 기간 동안 그가 온라인에 쓴 글 대부분을 읽어왔기 때문이다. 한윤형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내가 그 기간 동안 온라인에 쓴 글의 거의 전부를 읽었다(아마도 내가 쓴 '기사'를 '돈 주고' 읽은 적은 거의 없을 테지만).

그러나 나같은 '온라인 특수관계인' 몇몇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책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는 경이로운 체험일 것이다. 빛바랜 사진같은 과거의 정치사회적 사건들이, 이 젊은 글쟁이의 내면을 통과해 형상화되는 순간 숨기고 있던 다채로운 빛깔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책을 덮는 순간, "이 모든 것들은 기록되어야 한다"는 그의 모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독자들은 느끼게 되리라. 대통령 선거마다, 즉 5년마다 한번씩 정치적 진보가 '리셋'되고 10년에 한번씩 경제위기로 사회적 진보가 '포맷'되어버리는 한국같은 곳에선 더욱 그러하다. 책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선 별로 할 말이 없다. 읽어보면 알게 된다. 절판되기 전에 꼭 사라!

호사가들은 한윤형의 글에서 '논리'만을 보며 칭찬하고 감탄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재능은 논리가 아니라 '윤리'에 있다. 사실 논리구조가 명확히 노출되는 글은 잘쓴 글이라고 하기 어렵다. 정말 글을 잘 쓰는 이들은 확립된 논리를 절묘하게 숨겨놓는다. 강렬한 직관과 감성에 호소하되 독자가 이를 곱씹으면 탄탄한 논리가 슬며시 드러나는 식이다. 논리적으로 쓰는 능력, 논리를 내재화시키는 능력 모두가 적당한 훈련을 통해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그러나 윤리적 감수성은 쉽게 흉내낼 수 있는 재능이 아니다. 윤리는 '착하게 살자'는 하나마나한 소리를 반복하는 게 아니라 자신과 발딛고 있는 세계 사이의 긴장을 끝없이 견뎌내며 앞으로 밀어붙이는 힘이다. 그 힘이 없는 논리는 그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팩트와 지식을 직접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자들의 손바닥 위에서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건 선불교에서 수행자를 평가하는 기준인 '근기(機)'와도 일맥상통하는데, 어쨌든 한윤형은 내가 아는 '온라인 20대 글쟁이' 중 가장 근기가 강한 이다(술만 보면 환장해서 그렇지). 앞으로의 책이 더 기대되는 이유다. 안티조선운동이 실패했다고 말하는 자들은 앞으로 나서라.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한윤형을 보라. 안티조선이 낳은 저 '옥동자'를. 좌절과 환멸이 적지 않은 운동이었지만, 이 젊은이 하나만으로도 결코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키보드 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는 그 자체로 안티조선운동의 '순익증명서'다.

2009. 4. 24. 17:08

십시일반


2009. 4. 20. 15:59

메이데이, 그리고 현장

어제 '다중지성의 공간' 강의를 끝으로 각종 포럼이나 강연일정을 모두 캔슬하거나 거절했다. 4월 마지막주부터는 메이데이 주간이다. 다시 불안정노동의 현장에 내려간다. 지난번 '미행' 프로젝트에서 첫타자로 동희오토에 다녀왔는데, 이번에도 내가 첫 타자다. 지금 시작하는 프로젝트의 별칭은 '질주'다.  전국의 불안정노동 투쟁사업장을 순회하는 긴 여정이라고 한다. 여전히 마음은 무겁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참담한 풍경들을 보게 될까. 그리고 나는 또 얼마나 무력감을 느껴야 할까. 그럼에도 가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88만원 세대의 문제는 다름아닌 우리 모두가 처한 삶의 불안정성,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노동문제의 '현장'은 더이상 공장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제는 공장만 취재해서는 노동문제의 전모를 전혀 알 수가 없다. 산업구조의 신자유주의적 변화는 이미 한국의 대도시를 그 자체로 거대한 노동문제의 현장으로 변모시켰다. 우리 삶의 모든 공간은 현장이 되었다. 따라서 지역의 현장에 내려가는 일의 목표는 단순히 주변부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중심부의 양식있는 시민들에게 고발하는 것에 그쳐선 안된다. 이제 현장으로 내려가는 일은 역설적인 무엇이 된다. 현장이라는 단어가 주는 거리감, 소격효과를 허물어뜨리는 것. 저 먼 곳에 있는 공장에서 벌어지는 일이 우리의 일상이라는 사실을 더 철저히 깨닫는 것.
2009. 4. 9. 22:02

블로그라는 이름의 자살도구


나는 여전히 블로그라는 것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것 하나만큼은 명확해 보인다. (블로그란) '함량미달의 먹물이 사회적으로 자살하는 최적의 도구'라는 것. 게시판 논객들이 설치던 시절에는 거친 논쟁을 통해 내상을 입은 논객이 자취를 감추는 식이었다. 간혹 잠수탔던 이가 내공을 증진해 복수전을 벌이거나 폼나게(혹은 겸연쩍게) 재기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반면 블로그의 무서운 점은, 다른 누구도 아닌 블로거 자신의 글을 통해 자아가 붕괴하는 모습이 생중계된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댓글을 싹 지워버리기도 한다. 이래서야 재기조차 쉽지 않다. 게시판이 무협지라면 블로그는 사이코리얼리티드라마랄까. 게시판에 비해 블로그는 훨씬 사적이고 내밀한 공간인 반면 콘텐츠의 유통속도는 비할 바 없이 빠르다. 이 특성이 자살 위험도를 높이는 핵심요소다. 물론 개인적으로야 안타깝지만 맬서스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사회적 자살이 공익에 일정 부분 이바지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최근의 노모씨를 포함해 '표본들'이  이 정도까지 쌓이다 보니 블로그 회의론자인 나조차도 블로그의 사회적 순기능을 겸허히 인정치 않을 수 없다. 나도 뽀록나기 전에 접어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