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5. 31. 00:45

예비군 색히들아

그 옷만 입으면 사타구니가 근질거리는 건 이해하겠는데, '길 막히면 유턴하는 집회'에서 웬 사수대 흉내질이니? '보호' 안해줘도 되니까 군복 입고 쓰잘데기 없이 뛰어다니지 좀 마. 오늘은 그냥 참았는데, 앞으로도 계속 그러면 이 형은 몹시 짜증이 날 거 같아.

2008. 5. 29. 02:57

'윈도우 커넥션'의 등장

이회창과 문국현이 교섭단체 결성을 합의했고 공동기자회견도 했다. 작년말부터 흘러나오던 '창-문 커넥션'의 실체가 드디어 드러난 셈이다. 문국현에 대해 실망을 넘어 절망했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두 사람은 그럴 이유가 충분히 있다. 물론 이건 정치적 이해관계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경제를 바라보는 큰 시각에서 둘은 공통점이 있었고 그 공통분모를 정치적 연대로 실현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지지할 수는 없지만, 납득할 수 있는 결합이며 심지어 한국정치 전체를 보았을 때 일종의 계몽적 효과마저 낼 수 있다.

노파심으로 적어둔다. 문국현의 "사람이 희망이다"에서 노동가치론 혹은 좌파적 성향을 추출해내는 것은, 이를테면 이회창의 "돈이면 다인줄 아느냐"에서 공산당선언을 연역해내는 것만큼이나 황당무계한 망상이다. 둘의 결합은 반신자유주의 연대가 좌파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게 아니라는 평범한 진실을 확인시켜줄 따름이다.

신자유주의는 보수주의와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제대로 정의하기 곤란한 개념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이게 급진주의적 혁명사상이란 거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한때 혁명적'이었다면 자본은 그 자체로, 또한 항상 혁명적이다. 신자유주의는 이 자본혁명의 속도를 높여 영속화 하겠다는 야심만만한 주장이다. 자본운동에서 마찰계수가 제로(0)가 되는 상태야말로 신자유주의의 꿈이다. 한 마디로 자본의 영구혁명론이다. 이회창과 문국현은 공히 혁명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공저로 <혁명에 반대한다>를 내놓으면 대박나지 않을까.)

다들 문국현을 중심에 놓고서 이 결합을 비난한다. 하지만 한번 이회창을 중심으로 생각해보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회창은 보수가 어떠해야 하는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알고 있다. 조중동같은 잡스런 것들에서 절대 느낄 수 없는 논리적 일관성을 보이면서도 실리를 놓치지 않았다. 이 영감님, 예전에 우리가 알던 사람이 아니다. 문국현을 파트너로 택했다는 데서 나는, 한국의 이른바 '보수'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느낀다. 이 결합은 지금 비록 엄청난 이슈는 아닐지 몰라도, 앞으로 점점 더 큰 의미로 다가올 것 같다. 두고봐야 알겠지만, 창과 문이 서로의 단점을 지워나가는 시너지를 일으킨다면 몰락하는 뉴라이트-MB 커넥션 쯤은 단번에 대체할 수 있다.
2008. 5. 26. 17:54

판단중지

어제밤부터 오늘 오후까지 뉴스를 보지 못했는데, 촛불문화제가 가두행진으로 변모하면서 폭력진압이 벌어졌다. 집회의 전위는 더이상 10대가 아닌 것 같다. 20대, 30대가 늘어났고 여성들은 여전히 많아 보인다. 시각과 청각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몇 가지 의심스러운 사실들도 있다. 그럴 때는 과감하게 판단중지하고 촉각과 후각을 동원해야 한다. 직접 광장으로 가야겠다.
2008. 5. 16. 16:56

세대론 단상

10대를 세대론으로 단번에 묶어버리는 담론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진다. 아래 칼럼 '촛불소녀의 혁명'은 지난 주 초에 썼고, 이번 주 <시사IN>에 실렸는데, 커버스토리 역시 10대들의 촛불집회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10대 '여성'에 방점을 두었기 때문에 결이 좀 다르긴 하지만... 그 중에서 박형숙 선배가 쓴 '그들은 이명박에 빚진 게 없다' 기사는 분명 잘 쓴 기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으로 '386스러운' 글이었다. 요컨대 10대는 노무현 정권은 물론이고 이명박 정권의 탄생에 아무런 책임도 없고, 따라서 마음의 빚이 없었기 때문에 거리낌이 없이 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는 거다.

'빚이 있다/없다'는 시각으로 10대의 정치적 성향을 재단하는 것은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의 발언에서 비롯된 것이다. '빚' 운운 하는 것은 사실 과거 월간 <말>에서 종종 보이던 프레임이다. 월간 <말>  2003년 1월호 표지는  '아무에게도 빚진 것 없는 자수성가 대통령'이었다.

마음의 빚, 또는 부채의식으로 개인이나 집단의 성향을 설명하는 것은 물론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 동지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운동을 했던 386과 10만 광년쯤 떨어진 요즘의 10대들을 그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 자의적인 것 아닐까. 386에게는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작 당사자인 10대들은 부채의식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그런 식의 사고방식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완전히 생뚱맞은 소리가 되어 버린다. '저 서람 대체 뭐라는 거니?'

오연호 대표는 또 "20대 역시 별로 빚이 없지만 취업준비의 중압감 때문에 참여하기 힘들지 않나 한다"는 요지의 발언도 했다. 그럼 10대들에게는 그런 중압감이 없다는 것인가?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는 10대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대학입시 강박은 취업강박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 '2.0 세대' 운운하는 어떤 지식인의 발언을 보면 (그 분석의 타당성은 둘째치고) 한국 10대를 핀란드의 10대로 착각할 지경이다. 한국의 10대들은 386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해맑고 생기발랄하지 않다. 자살자가 속출할 정도로 우울한 집단이며, 몇년 후에는 그들 역시 지금의 20대가 처한 상황에 놓이게 될 운명이다. 피상적인 세대 규정이나 섣부른 20대와의 구별짓기 이전에, 10대들의 생활을 미시 수준에서 관찰하는 게 먼저 아닐까.

사람들로 하여금 행동에 나서게 하는 첫번째 요인은 부채의식 혹은 순수함 따위가 아니다. '공감'과 '분노'다. 더구나 이번 사안에는 젠더의 관점이 반드시 필요하다. 남성에 비해 훨씬 탈정치적이라 평가되던 젊은 여성들이 대거 쇠고기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단순히 오가닉(organic) 제품의 소비자에 머물던 여성들이 처음으로 오거나이즈(organize)할 가능성을 보이고 있는 거다. 이것이 녹색정치를 향한 청신호가 될지 일시적 현상에 그칠지는 아직 모르지만, 기성언론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분석을 찾아보기 힘들다.

반면 지금 10대를 규정하는 몇몇 세대론은 다양한 정치-성정치적 의미를 모두 거세시킨 채 마케팅 용어를 만들 듯 10대를 박제화시키고 있다. 동시에 20대를 게토화하고 있다. 386들이 자신들의 로망(민주 대 반민주, 이명박 대 반이명박 등등의 아마겟돈 식 선악대결구도)을 10대에게 투영해서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런 식의 세대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2008. 5. 14. 00:12

자전거 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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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되어 있던 나의 폴딩 자전거 '초록이(다혼 보드웍)'를 여친사마께 헌상하고, 새 자전거를 장만했다. 이번에 고른 것도 다혼 미니벨로지만, 폴딩 방식이 아닌 2008년에 새로 나온 데몽터블 미니 스프린터다. 과거 버전과 달리 샥이 사라지고 구동계에  울테그라급 부품도 쓰는 등 로드바이크에 더욱 가까워졌다. 휠셋은 얄쌍하다못해 하늘거릴 정도.

무게는 8.3kg. 무서운 로드짐승들이 타고 다니는 풀 카본 프레임 등등에 비길 수야 없지만, 나같은 허접엔진에게는 과분하게 가벼운 자전거다. 이름은 그냥 평범하게 '망치'. (해머헤드는 '귀상어'인데, 망치모양 머리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듯).

말근육은 언감생심이니 빤스 고무줄을 질식시키고 있는 이 뱃살이라도 떡메 치듯 두들겨다오, 망치야.

2008. 5. 12. 20:47

이것저것

[Flash] http://dory.mncast.com/mncHMovie.swf?movieID=10060729120080424112044&skinNum=1



1. 나도 제라드가 더 좋아. 캡틴, 오 마이 캡틴 제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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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공갈 젖꼭지를 물고 파파라치를 째려보시는 제라드 사마와 그 분의 令愛.



2. 월간 <맛> 투어을 다녀왔다. 철저하게 맛집 중심으로 이동하다보니, 3개 군을 넘나드는 부조리한 동선이 됐다. 내가 봐도 변태적인 식탐여행이다. 도보로 움직인 거리만 따져도 20km는 훌쩍 넘는다. 시간이 갈수록 투어의 범위가 넓어지고 강도는 빡세지는 것 같다. 발바닥에 물집 잡힌 게 대체 몇 년만이냐.-_-;; 그래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가는 여행은 언제나 즐겁다. 영덕대게 그렇게 쳐먹고도 이제 끝물이라 생각하니 또 먹고싶네.

2008. 5. 10. 00:23

징그럽다

20대 왕따 현상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들 스스로가 찌질하여 사회적 발언권을 축소시키고 있는 것도 아마 사실일게다. 그런데 10대들이 촛불집회에서 부각될수록 20대의 게토화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좀 당황스럽고 씁쓸하다. 요즘 누구나 "10대들이 사랑스럽다"라고 말한다. 나도 저 '참을 수 없이 남성화된 광장'이 사실상 처음으로 여성의, 그리고 십대소녀의 놀이터가 된 것이 너무나 기쁘다. 내가 불편한 건, 386들의 지랄맞은 구별짓기 때문이다. 10대들을 상찬하면서 꼭 "20대와 달리"라는 말을 붙인다. 같은 말을 해도 꼭 그런 식으로 해야겠나. 동참하려던 20대들마저 등 돌리게 하는 그런 말뽄새, 참 징그럽다 징그러워.  이런 구별짓기에 나도 일조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2008. 5. 4. 22:24

멘토링과 리더십

2002년 신효순 심미선 씨 사망사건 당시, 광장에서 열리는 초대형 대중 집회가 더이상 운동단체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시대가 왔음을 직감했다. 운동권의 눈에 비친 이른바 대중은, "당신들에게 사상도, 운동도, 집회도, 그 무엇도 지도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처럼 보였다.  

그 서슬에 놀란 운동권들이 멈칫거리는 사이, 과실은 고스란히 '노빠'들의 것이 됐다. 비슷한 광경이 이후에도 몇번인가 반복되었는데 미국산 쇠고기 문제가 '광장의 싸움'이 된 지금, 운동권과 진보적 지식인 중 일부는 이 현실을 완전히 승인한 것 같다.

2008년의 한국시민들은 자신의 삶을 지도해 줄 '멘토(mentor)'를 그렇게나 욕망하면서도 집단행동에 나설 때에는 '리더십'을 벌레보듯 혐오한다. 개인은 지도받지 못해 안달이고, 그 개인이 모이면 지도받기 싫다고 난리다. 이런 묘한 이중성은 분명 과거와 구별되는 현상이다.

이런 생각이 든다. 그동안 좌파 또는 진보들은 거꾸로 움직여온 게 아닐까. 대중이 능동적으로 움직일 때 가오 팍팍 잡으며 리더십을 발휘하려 하고, 대중이 수동적일 때는 조신하게 멘토링을 하는 식으로 말이다. 사실은 그 반대로 해야 하지 않았을까. 물론 어느 경우라도 '가오 잡고 악을 쓰는 리더십'은 금물이겠지만.

2008. 5. 2. 18:14

밥상 걷어차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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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탄핵 서명자가 50만을 넘어섰다고 한다. ㅎㄷㄷ... 처음 제안한 이는 고등학생으로 알려져 있는데, 때맞춰 방송된 시사프로그램과 맞물려 굉장한 폭발력을 보여주고 있다. 여당은 처음엔 '지가 깝쳐봤자지 ㅋㅋ' 하면서 쪼깨고 앉아 있었을텐데, 사태가 불과 하루이틀 사이에 일파만파 커져서 이제 더이상 찻잔 속의 태풍이라고 할 수가 없게 됐다. 나는 대운하가 정권을 흔들 뇌관이 될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침을 묻혀놔서 '젖은 화약'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쇠고기가 반MB의 기폭제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역시, 한국사람들이 쌓이고 쌓인 불만을 드러내는 타이밍은 먹는 것을 앞에 두고 있을 때다.  1) 숟가락을 내동댕이치면서  2) 밥상을 확 걷어차고  3) 벌떡 일어서는, 요 세 가지 동작을 동시에 수행하는 능력을 가진  게 한국인이다.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아드레날린은 맥시멈을 찍는 것이다.

2008. 4. 24. 11:40

영악한 처세가 혹은 포스트모던한 주체

"미친 듯 헤매도 내뜻대로 사는 행복 위해"
호스트바 나가는 대광고 '종교자유' 시위 강의석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04231429305&code=900315



생각해볼 꺼리가 있는 인터뷰다. 강의석 씨가 '호빠' 나가건 택시기사를 하건 그건 별로 중요치 않다. 핵심은, 강의석이라는 인물의 내면에서 '세계평화'가 '개인의 행복'으로 반전되기까지의 과정이겠다.

두 가지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인터뷰에서도 언급되다시피 '영악한 처세가'로서의 강의석이다. 고3 이후 그가 살아온 이력을 보면, 확실히 그런 면모가 보인다. 고등학교 때의 운동경력을 훈장 삼아 대학에 진학하고, 비주류적 방식으로 또래와의 경쟁우위에 서려는 '어린 권력자'들의 모습은 굳이 강의석 씨의 예가 아니라도 이미 심심찮게 목격되어 왔다. 강 씨의 경우는 서울대 법대라는 레떼르까지 달았으니, 튀면 튈수록 주목받기 쉽다. 본인도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미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만만찮은 언론플레이 능력을 보인 이가 아닌가.

더구나 1990년대 초반 고등학교에서 운동을 했던, 이른바 '고운 세대'를 기억하는 이라면 강의석 씨를 바라보는 마음이 더욱 불편해진다. '고운 세대' 중 일부는 부당한 입시제도에 대한 거부 차원에서 대학진학을 포기했고,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고졸'이란 딱지를 붙인 채 고통받아 왔다. 인생 '망가진' 사람 여럿이다.

그러나 만약 강의석 씨가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사회운동에 매진했다면, 그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누구도 그런 삶을 강의석 씨에게 요구할 권리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씁쓸해 할 수는 있겠지만 거기까지다. 사르트르가 말했던 사회적 투신, '앙가주망'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결단에 속하는 문제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짐을 온전히 본인의 어깨에 올려놓는다는 점에서 앙가주망은 존경해 마땅한 행동이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이런 우연에 가까운 개개인의 결단에 운동판의 생존을 의지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잘못된 관행이 아닌가. 나는 그것이 오늘날 진보 또는 좌파의 불임현상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시선은 강의석 씨를 '포스트모던한 주체'로 보는 것이다. 강의석 씨는 어렸을 때는 '세계평화'를 고민하다가 회의를 느끼고 '개인의 행복'을 찾게 됐다고 말한다. 이렇게 '세계평화'라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고민이 '개인의 행복'이라는 작은, 그러나 실존적인 고민으로 단번에 환치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포스트모던적'이라는 것이다. 즉, '세계평화'와 '개인의 행복' 사이를 매개하는 중간 단계가 소거돼 있다. 아즈마 히로키가 일본사회 오타쿠의 특징으로 지적했던 증상이다.

대부분의 정치사회적 문제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세계평화'와 '개인의 행복' 사이의 공간에서 양자를 규정하고 붙잡아두는 고리 역할을 한다. 정치사회적 공간이 매개되지 않으면, 세계평화는 종교와 형이상학의 구름 위로 올라가 버리고 개인의 행복은 대개 '먹고사니즘'으로 귀결되고 만다. 강의석 씨의 행보는 2008년 한국사회의 그 '잃어버린 고리 (missing link)'에 관한 하나의 스냅사진 같은 거다.

강의석 씨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 별개의 것은 아니다. 영악한 처세가이건 포스트모던한 주체이건 어떤 사회구조 하에서 개인은 매 순간 생존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으며, 강의석 씨는 그 나름의 생존방식을 치열하게 궁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행복하게 잘 살길 진심으로 바란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다른 20대가 저렇게 하다간 십중팔구 망한다는 거다. 저건 고등학교 때에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현재 서울대 법대를 다니는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일 뿐이다.

2008. 4. 22. 01:43

동네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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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고향에 다녀왔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내 유년의 동네로 마실을 나갔다. 지금의 집에서 버스로 한참이나 가야하는 곳이다. 참, 눈부시게 빛나는 봄날이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섯 살 무렵  삼촌이 찍어준 사진에는 커다란 머리통을 갸우뚱 누인 채 골목을 내달리는 나의 모습이 담겨 있다. 뒷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뛰어라, 우리 조카! 세상 끝까지 달려가려무나." 하지만 '세상의 끝'이 있었던 골목엔 황당할 정도로 거대한 종합스포츠센터가 들어섰고 다방구를 하던 공터는 아파트가 됐다. 사실은 그곳이 공터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내가 제대로 찾아왔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나의 동네는 낯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 서 있는데, 사진 속의 골목에서 튀어나온 듯한 남자아이가 방긋 웃으며 다가와, "안녕하세요? 어디 가시는 거예요?"라고 물었다. 그 눈망울이 너무 천진하고 예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무릎을 굽혀 말을 걸려는데, 누나가 거칠게 남자아이를 낚아챘다. "너 아무한테나 인사하지 말랬지?" 총총 사라지는 남매의 등을 보며, 나는 다시 울적해졌다.
2008. 4. 18. 00:36

금과옥조

이건희 일당 10명이 모두 불구속 처리됐다. 대한민국 검찰은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집어넣을 수 있어도, 재벌총수는 구속조차 하지 못한다. 이것이 노무현이 그렇게 강조하던 '검찰독립'의 결과다. 오늘을 기억해야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금과옥조가 확인된 날이므로.
"정치권력은 헌법 아래 있고, 경제권력은 헌법 위에 있다."
2008. 4. 13. 00:48

20대 투표율, 그 '낚시'의 이면

재미있는 사건이다. 총선 직후 "18대 총선에서 20대의 투표율이 19.2%였다"라는 이야기가 급속히 유통되면서 '투표 안하는 20대 한심하다? 인터넷 논쟁중'이라는 기사가 <오마이뉴스> 메인에까지 올라왔다. 아래는 해당기사에서 무단으로 퍼온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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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부터 밝혀두자면, '20대 투표율 19.2%설'은 근거 없는 낭설이었다. 18대 총선의 연령대별 투표율은 공식적으로 발표된 적이 한번도 없었고, 매체에 기사화된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 투표율을 놓고 큰 논쟁이 벌어졌던 셈이다.

재수없게도 우석훈 박사 역시 낚여버렸다. http://retired.tistory.com/12 

게다가 <경향신문>의 좌담에서 언급하는 바람에 그만 그 수치가 기사 타이틀이 되고 말았다. '20대 투표율 19%는 대의정치 심각한 위기'라는 제목의 기사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4101824195&code=910113

우박사 블로그에 달린 어느 댓글에 따르면 20대 투표율 19.2% 설의 진원지가 나온다. 물론 이곳이 최초의 진원지인지는 확실치 않다.

" 제가 알기로 19%(정확히는 19.2%)란 숫자의 출처는 이곳이고 (현재 비공개 되어 있습니다)
http://seirion.com/82
(다만 작성일이 4월 10일로 되어있는 점은 의문입니다. 수정한 시간이리라 생각합니다만..) 이 숫자에 대한 뜨거운 반응에 대한 작성자의 글이 이렇게 올라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http://seirion.com/83 "


단순한 착오에서 벌어진 해프닝이라 치부해버릴 수 있겠지만, 과연 그럴까. 나는 이것이 이유 있는 해프닝이었다고 본다.

먼저, 통계수치나 퍼센티지는 일종의 후광효과를 발생시킨다는 것.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그 효과는 훈련된 학자에게도 예외없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숫자 자체가 객관성의 표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경제관료들이 숫자를 가지고 그렇게 장난을 쳐대는 이유다.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20대 보수화'라는 담론이 이미 한국사회에서 부정할 수 없는 상식, 다시말해 프레임으로 자리잡았다는 데 있다. 일단 하나의 프레임이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으면 관련된 근거들은 정합성과 별로 상관없이 그 프레임에 맞춰 재배치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서의 '20대 보수화'는 명료하게 정의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20대는 무뇌아다""20대는 싸가지가 없다""20대는 이기적이다" 등등의 유사명제들로 이뤄진, 모호하지만 놀랍도록 질기고 튼튼한 인식의 그물망 전체를 의미한다.

즉, '20대 투표율 19.2%설'에 낚인 사람들은 유달리  멍청해서가 아니라, 총선 이전에 이미 20대 보수화라는 인식의 그물에 (긍정이든 부정이든 상관없다) 포획당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니 19.2%라는 수치가 주어지자 마자 덥썩 낚일 수밖에. 나는 20대들을 보수로 낙인찍는 것이 기성세대의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하며 우리가 봉착한 진짜 문제를 해결하는데에는 별로 쓸모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 내용을 담은 글을 쓰기도 했다.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82

그러므로 20대 투표율을 둘러싼 이번의 웃지못할 사태는  더욱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다. 이번 사태는 아노미 상태에 빠진 386 등 기성세대, 그리고 이른바 범개혁세력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 그들은 "세상이 요 모양 요꼴이 된 건 우리 탓이 아니야!"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은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세상이 요모양 요꼴이 된 진정한 이유가 그런 사고방식 때문이라는 어떤 진실을 폭로해 버린다.





2008. 4. 10. 01:07

늙은 혁명의 종언

46%라는 터무니없이 낮은 투표율, 그리고 한나라당이 그렇게 욕을 들어먹으면서도 원내과반을 끝내 달성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더이상 정치공학적 분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선진국일수록 투표율이 낮다지만, 한국의 경우 다른 나라가 국민소득 2만달러 언저리에서 보여준 투표율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한국사회에서 대의제 정치가 정치학의 영역에서 '자극-반응'이라는 생물학의 영역으로 넘어왔다는 사실을 말한다. 투표하지 않은 54%는 기존 자극에 더이상 반응하지 않는 개체군이다. 이들 개체군이 불감증에 걸린 주요원인들 중 하나는, 좌깜박이 켜고 들입다 우회전만 했던 어떤 실험에 대한 학습효과다. 이 개체군은 지난 10년간 특정 자극에 대한 역치(閾,)가 극도로 높아졌다. 그 결과 민주주의니 진보니, 보수니 하는 말에 더이상 반응하지 않는다. 대신에 펀드, 환율, 주가 등의 단어에 대한 역치는 극도로 낮아져서 아주 작은 자극에도 감전이라도 된 양 격렬하게 반응한다.

54%의 개체군에게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해 설교를 늘어놓는 것은 그래서 무의미한 짓이다. 그들은 브나로드 운동하던 시절의 러시아 농민이 아니다. 대의제 민주주의가 뭔지 몰라서가 아니라는 의미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는 이유는 스스로의 의지로 동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치적 자유로 포장하는 재주 또한 인간만의 특성이다.

스스로 동물이 된 폴리스의 시민들에게, 소크라테스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그들과 마주보며 대화를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들, 과거에 '진보'라 불리던 사람들은 이번 선거결과를 보며 "이제 더이상 내려갈 곳도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한번도 제대로 내려가본 적이 없다. 낡은 언어로 얼기설기 꿰맨 운동권의 당위만 외쳐대면서 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다 불평만 늘어놓았을 뿐이다. 지난 십년간 새롭게 등장한 어휘 중에서 우리가 만들어낸 게 대체 몇 개나 되는가. 거의 없다. 보수는 멈춰서는 게 미덕이지만, 진보는 그렇게 멈춰서는 순간 죽는다.

스스로 동물이 된 사람들은 스스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은 정치이고, 새로운 정치는 곧 새로운 언어로 구성된다. 아무런 이슈가 없다는 것이 유일한 이슈가 된 이번 총선이 가르쳐준 사실은 87년 체제가 글자그대로 확인사살됐다는 것이다.  IMF 이후 10년이 지나며 사회경제적 토대가 전면적으로 재배치됐다. 새로운 주체들이 등장했다. 그런데도 87년 체제가 만들어낸  낡은 언어들은 여전히 유령처럼 우리를 휘감고 있다. 시인이 죽었다면 당신이 시를 써야 한다. 늙은 혁명은 더이상 혁명도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