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4. 10. 01:07

늙은 혁명의 종언

46%라는 터무니없이 낮은 투표율, 그리고 한나라당이 그렇게 욕을 들어먹으면서도 원내과반을 끝내 달성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더이상 정치공학적 분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선진국일수록 투표율이 낮다지만, 한국의 경우 다른 나라가 국민소득 2만달러 언저리에서 보여준 투표율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한국사회에서 대의제 정치가 정치학의 영역에서 '자극-반응'이라는 생물학의 영역으로 넘어왔다는 사실을 말한다. 투표하지 않은 54%는 기존 자극에 더이상 반응하지 않는 개체군이다. 이들 개체군이 불감증에 걸린 주요원인들 중 하나는, 좌깜박이 켜고 들입다 우회전만 했던 어떤 실험에 대한 학습효과다. 이 개체군은 지난 10년간 특정 자극에 대한 역치(閾,)가 극도로 높아졌다. 그 결과 민주주의니 진보니, 보수니 하는 말에 더이상 반응하지 않는다. 대신에 펀드, 환율, 주가 등의 단어에 대한 역치는 극도로 낮아져서 아주 작은 자극에도 감전이라도 된 양 격렬하게 반응한다.

54%의 개체군에게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해 설교를 늘어놓는 것은 그래서 무의미한 짓이다. 그들은 브나로드 운동하던 시절의 러시아 농민이 아니다. 대의제 민주주의가 뭔지 몰라서가 아니라는 의미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는 이유는 스스로의 의지로 동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치적 자유로 포장하는 재주 또한 인간만의 특성이다.

스스로 동물이 된 폴리스의 시민들에게, 소크라테스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그들과 마주보며 대화를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들, 과거에 '진보'라 불리던 사람들은 이번 선거결과를 보며 "이제 더이상 내려갈 곳도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한번도 제대로 내려가본 적이 없다. 낡은 언어로 얼기설기 꿰맨 운동권의 당위만 외쳐대면서 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다 불평만 늘어놓았을 뿐이다. 지난 십년간 새롭게 등장한 어휘 중에서 우리가 만들어낸 게 대체 몇 개나 되는가. 거의 없다. 보수는 멈춰서는 게 미덕이지만, 진보는 그렇게 멈춰서는 순간 죽는다.

스스로 동물이 된 사람들은 스스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은 정치이고, 새로운 정치는 곧 새로운 언어로 구성된다. 아무런 이슈가 없다는 것이 유일한 이슈가 된 이번 총선이 가르쳐준 사실은 87년 체제가 글자그대로 확인사살됐다는 것이다.  IMF 이후 10년이 지나며 사회경제적 토대가 전면적으로 재배치됐다. 새로운 주체들이 등장했다. 그런데도 87년 체제가 만들어낸  낡은 언어들은 여전히 유령처럼 우리를 휘감고 있다. 시인이 죽었다면 당신이 시를 써야 한다. 늙은 혁명은 더이상 혁명도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