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의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오늘 읽어보았다. 전에 만났을 때 증정본을 받았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서야 한번 훑어본 셈이다. 본래 저자로 참여하기로 한 책이었기 때문에 대강의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정독해본 건 처음이다. 한국경제 대안 시리즈(총 4권)의 3권에 해당한다.
저자서문에도 밝혀놓았듯이 처음에 이 책의 큰 프레임을 기획한 것은 나였다. 하지만 집필기간 중에 신상의 변화가 생겨서 우석훈 선배와의 공동작업은 기존에 나온 <88만원 세대>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로 일단락되었다.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다. 당시 내가 몸담았던 직장에서도 꽤 공력이 필요한 책을 급히 써야했기 때문에 불가항력이었다. 출간을 연기하면 어찌어찌 내가 글을 쓸 여유가 생겼을 테지만 "출간일정을 미룰 수 없다'는 얘기에 깨끗하게 마음 접었다. 앞으로도 우 선배와의 공동작업은 없을 것이다. 결국 두 권의 책을 우 선배와 같이 한 셈인데, <88만원 세대>와 달리, <샌드위치 위기론..>의 경우에는 내가 약간의 브레인스토밍에 참여한 것 말고는 내가 직접 집필한 부분이 별로 없는 책이다. 그래서 인세도 10원짜리 한 개 받지 않았다. 이번에 <샌드위치..> 개정판을 낸다는데 이름을 아예 빼달라고 요구할 작정이다.
시리즈 3권, 즉,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내가 오랫동안 고민해온 문제인 북한 내부식민지화와 이중국가(dual state)론을 전면에 배치하려 했던 책이다. 내가 쓸 부분의 세부 목차와 주요개념을 이미 오래 전에 우 선배에게 보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을 보니 상당 부분 반영이 되어 있었다. 이중국가나 내부식민지를 언급하긴 하는데, 잠깐 언급하는 수준이라 제대로 논의를 전개했다고 보기 어렵다. 게다가 이중국가를 말하는 대목에서는 서울/지방의 문제 즉, 지나치게 공간경제학적인 측면에 치중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중국가론은 이중경제(dual economy)라는 기존의 개념을 활용해서 내가 만들어본 조어인데, 경제학적 측면 뿐 아니라 정치/문화적 측면까지 포괄할 수 있는 큰 개념이다. 때문에 자칫 조악해질 수 있지만, 현재 한국상황을 조망해볼 수 있는, 그리고 한국사회의 새로운 주체형성에 긴밀하게 관련된, 하나의 쓸모있는 도구라는 생각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좀더 정교화해볼 작정이다. 근데 이렇게 게을러서 원...
북한 내부식민지론은 2002년 초반부터 내가 고민해온 문제였는데, 작년 연말에 폐기했다. 남한의 제국주의 에너지가 아무리 커지더라도 북한을 남한(자본)의 내부식민지로 만드는 것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깨달음 때문이다. 업데이트된 양질의 관련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덕분이다. 물론 내부식민지론은 '통일의 낭만화'를 경계한다는 면에서는 여전히 의의가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동북아의 국가간 역학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해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게 되었다. 쉽게 말해서, 남한 자본이 아무리 용을 써봐야 북한을 내부식민화하기 어렵다는 거다. 또한 남한 자본의 북한 내부식민화 과정이 남한 정권의 이념적 속성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는다는 점도 약점이다.
내부식민지라는 개념은 사실상 안토니오 그람시에 의해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탈리아 남북간 격차에 대한 탁월한 논문 <남북문제에 대한 몇 가지 측면>이 내부식민지론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주요 참고서적으로는 MIchael Hechter 의 <Internal Colonialism: The Celtic Fringe in British National Development, 1536-1966 >이 있고 John M. Merriman의 <The Red City : Limoges and the French Nineteenth Century>등이 있다. 국내 자료로는 '김대중주의'로 한때 끗발 날렸던 황태연 교수가 오래 전에 전라도의 지역차별을 내부식민지론을 통해 살펴본 논문이 있고, 지자체 연구자들이 가볍게 내부식민지론을 언급한 논문들이 몇 개 있다. 그러나 그람시가 내부식민지론을 이탈리아 문제에 한정했듯이, 이것은 지나치게 확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개념이다. 좌파가 남북한 문제를 바라보는 이론적 틀이 너무 미흡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현재 한국의 이중국가화는 '한국형 제국주의'의 동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질곡이다. 그리 간단한 인과관계는 아니다. 동력인 측면과 질곡인 측면을 나누어 논하는 작업은 날달걀의 노른자와 흰자를 다루듯 섬세하고 미시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이중국가화가 제국주의의 동력으로 작용한다고 해서 동북아의 평화균형이 급작스럽게 깨지는 것은 아니며, 질곡으로 작용한다고 해서 한국이, 혹은 동북아가 곧장 평화체제에 다가서는 것은 아니다. 양자의 매개가 되는 변수들이 존재하며, 그것을 치밀하게 골라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볼륨이 너무 작다. 어쨌든 쓰기로 해놓고 못쓴 내 잘못이 크다. 가능한 많이 팔려서 이 책을 계기로 논의가 활성화된다면 좋겠다.
저자서문에도 밝혀놓았듯이 처음에 이 책의 큰 프레임을 기획한 것은 나였다. 하지만 집필기간 중에 신상의 변화가 생겨서 우석훈 선배와의 공동작업은 기존에 나온 <88만원 세대>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로 일단락되었다.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다. 당시 내가 몸담았던 직장에서도 꽤 공력이 필요한 책을 급히 써야했기 때문에 불가항력이었다. 출간을 연기하면 어찌어찌 내가 글을 쓸 여유가 생겼을 테지만 "출간일정을 미룰 수 없다'는 얘기에 깨끗하게 마음 접었다. 앞으로도 우 선배와의 공동작업은 없을 것이다. 결국 두 권의 책을 우 선배와 같이 한 셈인데, <88만원 세대>와 달리, <샌드위치 위기론..>의 경우에는 내가 약간의 브레인스토밍에 참여한 것 말고는 내가 직접 집필한 부분이 별로 없는 책이다. 그래서 인세도 10원짜리 한 개 받지 않았다. 이번에 <샌드위치..> 개정판을 낸다는데 이름을 아예 빼달라고 요구할 작정이다.
시리즈 3권, 즉,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내가 오랫동안 고민해온 문제인 북한 내부식민지화와 이중국가(dual state)론을 전면에 배치하려 했던 책이다. 내가 쓸 부분의 세부 목차와 주요개념을 이미 오래 전에 우 선배에게 보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을 보니 상당 부분 반영이 되어 있었다. 이중국가나 내부식민지를 언급하긴 하는데, 잠깐 언급하는 수준이라 제대로 논의를 전개했다고 보기 어렵다. 게다가 이중국가를 말하는 대목에서는 서울/지방의 문제 즉, 지나치게 공간경제학적인 측면에 치중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중국가론은 이중경제(dual economy)라는 기존의 개념을 활용해서 내가 만들어본 조어인데, 경제학적 측면 뿐 아니라 정치/문화적 측면까지 포괄할 수 있는 큰 개념이다. 때문에 자칫 조악해질 수 있지만, 현재 한국상황을 조망해볼 수 있는, 그리고 한국사회의 새로운 주체형성에 긴밀하게 관련된, 하나의 쓸모있는 도구라는 생각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좀더 정교화해볼 작정이다. 근데 이렇게 게을러서 원...
북한 내부식민지론은 2002년 초반부터 내가 고민해온 문제였는데, 작년 연말에 폐기했다. 남한의 제국주의 에너지가 아무리 커지더라도 북한을 남한(자본)의 내부식민지로 만드는 것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깨달음 때문이다. 업데이트된 양질의 관련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덕분이다. 물론 내부식민지론은 '통일의 낭만화'를 경계한다는 면에서는 여전히 의의가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동북아의 국가간 역학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해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게 되었다. 쉽게 말해서, 남한 자본이 아무리 용을 써봐야 북한을 내부식민화하기 어렵다는 거다. 또한 남한 자본의 북한 내부식민화 과정이 남한 정권의 이념적 속성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는다는 점도 약점이다.
내부식민지라는 개념은 사실상 안토니오 그람시에 의해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탈리아 남북간 격차에 대한 탁월한 논문 <남북문제에 대한 몇 가지 측면>이 내부식민지론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주요 참고서적으로는 MIchael Hechter 의 <Internal Colonialism: The Celtic Fringe in British National Development, 1536-1966 >이 있고 John M. Merriman의 <The Red City : Limoges and the French Nineteenth Century>등이 있다. 국내 자료로는 '김대중주의'로 한때 끗발 날렸던 황태연 교수가 오래 전에 전라도의 지역차별을 내부식민지론을 통해 살펴본 논문이 있고, 지자체 연구자들이 가볍게 내부식민지론을 언급한 논문들이 몇 개 있다. 그러나 그람시가 내부식민지론을 이탈리아 문제에 한정했듯이, 이것은 지나치게 확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개념이다. 좌파가 남북한 문제를 바라보는 이론적 틀이 너무 미흡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현재 한국의 이중국가화는 '한국형 제국주의'의 동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질곡이다. 그리 간단한 인과관계는 아니다. 동력인 측면과 질곡인 측면을 나누어 논하는 작업은 날달걀의 노른자와 흰자를 다루듯 섬세하고 미시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이중국가화가 제국주의의 동력으로 작용한다고 해서 동북아의 평화균형이 급작스럽게 깨지는 것은 아니며, 질곡으로 작용한다고 해서 한국이, 혹은 동북아가 곧장 평화체제에 다가서는 것은 아니다. 양자의 매개가 되는 변수들이 존재하며, 그것을 치밀하게 골라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볼륨이 너무 작다. 어쨌든 쓰기로 해놓고 못쓴 내 잘못이 크다. 가능한 많이 팔려서 이 책을 계기로 논의가 활성화된다면 좋겠다.
시로 마사무네 원작의 <애플시드>가 3D 영화로 개봉되는데 한국판 제목이 이뭐병이다. 무려 엑스 "머시나". 라틴어인 machina를 어메뤼칸 스따일로 조져버린 센스에 무릎을 꿇는다. (물론, 미쿡에서도 machina는 마키나지 머시나가 아님.) 이걸 보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기계장치의 신)"를 전국에 유행시킨 진중권 사마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근데 왜 '엑스'는 가만 놔뒀나. 아쌀하게 된장경숙 스타일로 '익스 머쉬나'로 하든가. 이게 뭐니, 이게. 고백하자면, 처음에 이 포스터를 얼핏 보고 '애플시드: 섹스 머시마'로 읽었다.
여러 블로그에서 이걸 가지고 실컷 비웃고들 있는데, 댓글 와중에 영화 '가을의 전설' 번역 문제도 나왔다. 원제대로 하면 몰락(the fall)의 전설인데, 가을남자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는 슬픈 이야기. 그랬던 거야? 몰랐어!!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