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은 일테면 한때 번성했던 지방도시의 전형이다. 사람들의 표정은 의외로 무척 밝았다. 이 지역 사람들만 특별히 낙천적인 게 아니라면, 뭔가 이유가 있을 테다. 택시기사들과의 얘길 나누다보니, 중규모 이상 공장들이 많은데다 새만금 개발에 대한 거대한 기대심리가 존재하고 있다. 인근의 고만고만한 중소도시들 찍어누르겠다는 자신만만함이 느껴진다. 씁쓸했다. 우리가 반대하고 싸웠던 새만금은 그렇게 '지역민의 희망'이었다. 연안의 시궁창같은 물 위에는 많은 갈매기들이 날개가 퇴화한 듯 떼지어 내려앉아 수면을 뒤적이고 있었다.
서울과 비서울의 기형적 위계구조는 중소도시들 사이의 약탈적 경쟁으로 축소재생산된다. 서해안 개발광풍의 한가운데에 있는 군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사상최대의 조선업 호황으로 흥청대는 거제시의 와인 소비량이 서울 강남을 앞질렀다는 소식을 들은 게 벌써 작년이다. 거제와 울산 같은 도시들에 대한 다른 도시들의 선망은 거의 종교와 같다. 무엇으로 그 벽에 균열을 낼 것인가. 아득하기만 하다.
군산의 맛집은 훌륭했다. 군산횟집이라는 이른바 전국구 점포가 있는데, 이번 여행에선 제외했다. 서울사람들이 군산에 가면 꼭 들러야 하는 횟집이라고 여러 매체에서 침이 마르게 띄워줬던 곳이다. 그런데 가격대 성능비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게 '선수'들의 중평이다. 특히 서울 강남에 있는 군산횟집 분점은 회 좀 먹어본 사람들에게는 아주 악명 높다. 어렸을 적부터 3일에 한번 꼴로 자연산 회만 먹었던 나는 회맛에 까다롭다. 비싼 돈 내고 실망하고 싶진 않다. 군산 시내는 의외로 회를 먹을만한 데가 없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그래서 회는 군산서 배를 타고 한시간 정도 나가야하는 선유도에서 먹기로 결정했다. 거기서 자연산 광어회를 먹었는데, 광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같은 남해안 출신도 빠져들 수밖에 없는 육질이었다. 입천장에 쫀득하게 달라붙는 광어회, 정말 오랜만이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한적한 해변에서 가볍게 태닝도 해주었다.
군산에 도착해서 처음 들른 식당에서 먹은 '전북식 아귀찜'도 훌륭했지만, 저녁에 먹은 양념소갈비는 더욱 압권이었다. 환상적인 고기색깔이 그대로 드러나는 투명한 양념의 갈비다. 소갈비의 양념은, 달지만 들척지근하지 않고 고기 자체의 맛을 살려내는 양념이어야 한다. (물론 최상위 등급의 갈비는 양념갈비로 만들지 않는다.) 얼마 전 영덕 인근에서도 비슷한 느낌의 갈비를 먹은 적이 있다. 당시에 정말 최고라고 생각했지만 이번 것은 최소한 필적하거나 능가하는 맛이었다. 양념과 고기의 등급이 비슷하다면, 갈비를 펼쳐내는 칼솜씨와 숯, 이 두 가지가 맛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영덕에서 먹었던 갈비와 다른 점이 거기에 있는 듯 했다. 육식깨나 즐기시는 여친사마께서 아주 환장을 하셨다. 마지막으로 갔던 간장게장집은 상당히 유명한 곳이었는데, 교통이 불편해서 만만찮은 택시비를 지불해야했다. 맛은 명불허전. 게장은 말할 것도 없고 곁반찬들도 서울의 초일류 한정식 집 뺨을 칠만큼 정갈한 맛이었다.
어쨌든 이번 여행도 '먹기 위해 걸었던' 여정이었다. 운전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극도의 불편을 주는 나라가 한국이고, 군산 역시 그랬다. 하지만 새로운 길을 따라 즐겁게 걷고, 맛있게 먹고, 설레며 자는 것. 그게 바로 여행이다.
‘솔까말’이란 은어가 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의 준말이다. 용례는 다음과 같다. “솔까말, 원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섹스 아니니?” “솔까말, 지잡대와 SKY는 하늘과 땅 차이지(*지잡대: 지방에 있는 대학교를 비하하는 속어).” 이 때 한껏 냉소적인 표정을 짓는 게 포인트다.
솔직함은 분명 미덕이다. 거짓과 위선을 폭로하는 통쾌함을 안겨준다. 겉으로는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면서도 속으로 딴 생각을 하는 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TV 버라이어티 쇼에서는 예전에 엄두도 못 낼 수위의 ‘솔직한’ 대화들이 오고간다. 권위주의 시대에 비한다면, 지난 10년 간 우리는 분명 솔직해졌다.
일본사람의 특성을 묘사할 때 흔히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표현을 쓴다. 혼네(本音)는 속마음, 다테마에(建前)는 표정이다. 본심은 따로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다르다는 의미다. 한국사람들은 이를 두고 “겉 다르고 속 다른 일본”이라며 그들의 속물성을 비난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예의와 체면 따지기 좋아하는 중국과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구사회 역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적으로 유사한 면이 있다. 이건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고유한 속성이다. 인간은 욕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욕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물은 타자(他者)가 있든 없든 먹고, 싸고, 잔다. 다시 말해서 욕구는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욕망은 타자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나의 욕망은 언제나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친 욕망이며 그 거울이 깨지는 순간 나는 그저 한 마리 동물이 된다. ‘다테마에’는 단순히 ‘혼네’를 감추는 가면이 아니라, 타자를 적극적으로 의식해서 욕망이 온전히 욕망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안전핀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동물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의 솔직함이 그녀를 죽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점점 ‘솔직’해지는 건, 이제 더 이상 ‘혼네’를 감출 필요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솔직함은 닳고 또 닳아버려서 자신의 노골성을 뻔뻔하게 드러내는 상투적 형식이 됐다. 달리 표현하면, ‘혼네’가 ‘다테마에’의 자리를 강탈했다. 서점에 넘쳐나는 이른바 실용처세서들을 보라. 온통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다. “가난한 아빠라니, 솔직히 쪽팔리지 않아? 부자아빠가 되라구!” “30대에 모은 돈이 고작 5천만 원? 까놓고 말해 당신, ‘루저’야!” 즉, 이 모든 ‘솔까말’ 뒤에 생략된 말은 ‘돈 밖에 없지, 안 그래?’다. 그렇게 ‘동물’들은 냉소주의자 흉내를 낸다.
지난 7월 5일 한 일간지에 여고생이 투신자살했다는 소식이 실렸다. 그녀의 부모는 청와대와 교육청에 진정서를 냈다. 진정서에 따르면 “담임교사가 기초생활수급자를 조사한다며 해당학생을 교실에서 일어나라고 했고 딸이 가만히 있자 공개적으로 명단을 불러 모욕감을 줬다”고 한다. 기사가 인용한 익명의 제보자가 말하길, 그 교사는 평소에도 그런 행동을 많이 했던 사람이었고 죽은 소녀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생활 내내 유무형의 멸시에 시달렸다. 1급 지체장애인인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노점상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오고 있었다.
진정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담임교사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과연 교사 개인의 소양 탓으로만 돌릴 일일까. 이 비극은 단지 예외적인 사건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1시간 더 공부하면 마누라 얼굴이 바뀐다’라는 급훈을 ‘명언’ 취급하는 한국사회야말로, 지금 이 시각 건물 옥상에 선 어느 가난한 소녀의 등을 떠밀고 있기 때문이다. 끔찍하다, ‘한국판 자본주의 정신’의 저 투명한 솔직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