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5. 16. 16:56

세대론 단상

10대를 세대론으로 단번에 묶어버리는 담론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진다. 아래 칼럼 '촛불소녀의 혁명'은 지난 주 초에 썼고, 이번 주 <시사IN>에 실렸는데, 커버스토리 역시 10대들의 촛불집회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10대 '여성'에 방점을 두었기 때문에 결이 좀 다르긴 하지만... 그 중에서 박형숙 선배가 쓴 '그들은 이명박에 빚진 게 없다' 기사는 분명 잘 쓴 기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으로 '386스러운' 글이었다. 요컨대 10대는 노무현 정권은 물론이고 이명박 정권의 탄생에 아무런 책임도 없고, 따라서 마음의 빚이 없었기 때문에 거리낌이 없이 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는 거다.

'빚이 있다/없다'는 시각으로 10대의 정치적 성향을 재단하는 것은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의 발언에서 비롯된 것이다. '빚' 운운 하는 것은 사실 과거 월간 <말>에서 종종 보이던 프레임이다. 월간 <말>  2003년 1월호 표지는  '아무에게도 빚진 것 없는 자수성가 대통령'이었다.

마음의 빚, 또는 부채의식으로 개인이나 집단의 성향을 설명하는 것은 물론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 동지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운동을 했던 386과 10만 광년쯤 떨어진 요즘의 10대들을 그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 자의적인 것 아닐까. 386에게는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작 당사자인 10대들은 부채의식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그런 식의 사고방식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완전히 생뚱맞은 소리가 되어 버린다. '저 서람 대체 뭐라는 거니?'

오연호 대표는 또 "20대 역시 별로 빚이 없지만 취업준비의 중압감 때문에 참여하기 힘들지 않나 한다"는 요지의 발언도 했다. 그럼 10대들에게는 그런 중압감이 없다는 것인가?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는 10대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대학입시 강박은 취업강박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 '2.0 세대' 운운하는 어떤 지식인의 발언을 보면 (그 분석의 타당성은 둘째치고) 한국 10대를 핀란드의 10대로 착각할 지경이다. 한국의 10대들은 386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해맑고 생기발랄하지 않다. 자살자가 속출할 정도로 우울한 집단이며, 몇년 후에는 그들 역시 지금의 20대가 처한 상황에 놓이게 될 운명이다. 피상적인 세대 규정이나 섣부른 20대와의 구별짓기 이전에, 10대들의 생활을 미시 수준에서 관찰하는 게 먼저 아닐까.

사람들로 하여금 행동에 나서게 하는 첫번째 요인은 부채의식 혹은 순수함 따위가 아니다. '공감'과 '분노'다. 더구나 이번 사안에는 젠더의 관점이 반드시 필요하다. 남성에 비해 훨씬 탈정치적이라 평가되던 젊은 여성들이 대거 쇠고기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단순히 오가닉(organic) 제품의 소비자에 머물던 여성들이 처음으로 오거나이즈(organize)할 가능성을 보이고 있는 거다. 이것이 녹색정치를 향한 청신호가 될지 일시적 현상에 그칠지는 아직 모르지만, 기성언론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분석을 찾아보기 힘들다.

반면 지금 10대를 규정하는 몇몇 세대론은 다양한 정치-성정치적 의미를 모두 거세시킨 채 마케팅 용어를 만들 듯 10대를 박제화시키고 있다. 동시에 20대를 게토화하고 있다. 386들이 자신들의 로망(민주 대 반민주, 이명박 대 반이명박 등등의 아마겟돈 식 선악대결구도)을 10대에게 투영해서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런 식의 세대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2008. 5. 16. 12:28

촛불소녀의 혁명 [시사IN 35호]

소녀시대, 아니 ‘소녀혁명의 시대’다. 과장이나 수사가 아니다. 2008년 5월 대한민국에는 진짜 혁명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5월 2일과 3일 서울 청계광장에는 엄청난 수의 십대들이 모였다. 그것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더욱 충격적인 건 이들 중 다수가 소녀들이었다는 점이다. 생기발랄한 환호성만 들으면 마치 콘서트에 온 듯 착각할 정도다. 하지만 소녀들이 하늘 높이 쏘아올린 함성은 아이돌 스타의 이름이 아니었다. “너나 먹어 미친 소!”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고 있는 듯 했다. 평범한 사물이 익숙한 자리를 벗어났을 때의 생경함과 위화감. 초현실주의적 광경이 서울 한 복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나처럼 놀란 어른들이 많았나보다. 곧장 이런 질문을 던진다. 독서실, 집, 학원에 있어야할 소녀들이 왜 저기 있나? 누가 순진한 저들을 꼬드겨 집회장에 동원했나? 불순한 정치세력이 배후에 있는 것 아니냐?

꼰대들이 꼰대일 수밖에 없는 건 인지능력의 결핍 때문이다.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면 반사적으로 보청기와 색안경을 착용한다. ‘음모론’이라는 보청기와 ‘배후설’이라는 색안경을. 이런 보조기구가 없으면 꼰대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문화제는 ‘광장의 권력’이 교체됐다는 사실만을 담백하게 보여줄 뿐이다. 심지어 배후로 지목된 ‘운동권’과 ‘좌빨’조차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시덥잖은 음모론과 배후설은 치워버리고 그저 소박하게 물어보자. 무엇이 소녀들을 거리로 나서게 했는가.

십대소녀만이 아니다. 촛불문화제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 특히 여성이 많다. 20대, 30대 여성, 아이를 업고 나온 여성도 있다. 몇 해 전 신효순·심미선 씨 사망사건과 대통령 탄핵사건 당시와 비교해 봐도, 집회에 참가한 여성의 비율은 기이할 정도로 높아 보인다. 돌이켜 보면 한국사회에서 광장은 늘 ‘남성의 공간’이었다. “건국 이후 가장 진보적인 세대”라 평가받던 ‘386’ 세대에게조차 그랬다. 전대협 의장은 늘 남학우 차지였고, 여학우는 항상 리더가 아닌 서포터였다. 아니면 가열찬 투쟁에 지친 남학우가 잠깐 쉬어가는 연애의 대상이거나. 그렇게 광장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가부장적 위계와 군사용어로 얼룩져왔다.

광장의 남성들이 왁자지껄 권력놀음에 빠져있을 때, 여성들은 ‘소리 없는 파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지도부’도 ‘선도투’도 없는 기묘한 총파업, 바로 출산파업이다. 한국여성들이 이심전심으로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안은 세계최저수준의 출산율로 적나라하게 표현됐다. 쪼잔하게 공장을 멈추는 정도가 아니었다. 한국사회의 재생산 메커니즘을 아예 중단시키겠다는 무언의, 그러나 무시무시한 항의였다.

‘건강’에 대한 여성들의 염려는 남성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경제학적으로도 유기농 제품에 대한 여성의 선호는 확연하다. 그런 여성에게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단순히 미래에 대한 불안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공포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십대소녀들에게는 더욱 절박한 생존의 문제였으리라. 그 소녀들이 광장에 나왔으니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하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그리고 광장을 소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