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8. 22. 18:11

치유로서의 인터뷰 [시사IN 49호]

요즘 가장 즐겨보는 TV프로그램은 ‘인터뷰게임’이다. 흔히 인터뷰라고 하면, 기자가 유명인을 만나서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는 걸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의 인터뷰는 다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건네주고 그들의 주변 사람들을 인터뷰하게 만든다. 어색한 멘트와 어정쩡한 자세가 절로 웃음을 자아내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진지하다. 남들이 보기에 참으로 시시콜콜한 개인사적 사건들이 인터뷰의 주제다.

내가 이 프로그램을 처음 봤을 때 등장한 사람은 “아내가 자신도 모르게 큰 빚을 졌는데 그에 대해 속 시원히 답해주지 않아서 이혼을 신청했다”는 아저씨였다. 아내는 이불을 빨아 장에 넣고 집안정리를 말끔히 한 다음, 냉장고 반찬통에 일일이 메모까지 써놓고 집을 나갔다.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았던 남편은 아내를 잘 아는 주변인물을 인터뷰하기 시작한다. 먼저 자신의 친누나를 찾아갔다. 하지만 아내를 극구 두둔하는 누나. 괜히 자기만 욕을 먹고 본전도 못 찾는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인터뷰해가는 동안 ‘사건의 전모’가 서서히 드러난다. 빚을 지게 된 이유는 자녀의 교육비였다. 의심이 유달리 많았던 남편은 교육비로 돈이 필요하다는 아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설득에 지친 아내는 오랜 기간 남편 몰래 돈을 융통해왔고 어느새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버린 것이다.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남편은 아내를 어렵게 만나 재결합을 요청하지만,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거절한다. “내가 노력할 때 당신 마음이 닫혀있었고, 이제 내 마음도 닫혀버렸어.”

프로그램이 회를 더하면서 너무 자극적인 소재만 등장한다는 비판이 많았다. 분명 소재선정이나 편집에서 선정적인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인터뷰게임’의 핵심은 소재가 아니라 형식에 있다.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자기라는 존재의 퍼즐을 맞추는 그 형식이, 새로운 감동과 재미를 낳는다. 그걸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나의 재발견’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무리 일기장에다 자신의 속내를 가감 없이 털어놓는다 해도, 그것이 나의 객관적인 모습일 수는 없다. 인간은 본래 ‘합리화하는 동물’이며, 그 에너지의 99%는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다. 그렇다면 ‘객관적인 나의 모습’은 어디 있는가. 바로 타인에게 있다. 나란 인간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결국 내 주변 사람들이다. 엠티나 야유회에서 흔히 하는 ‘롤링페이퍼 놀이’가 여전히 인기 있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묘사한 몇 마디 말이 의외로 ‘발견의 쾌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롤링페이퍼가 일방적으로 나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인터뷰는 인터랙티브, 즉 쌍방향이라서 그때그때 자신이 개입할 수 있다. 게다가 인터뷰는 본래 저널리즘에서 탄생한 것인 만큼 ‘공식성’을 띤다. 흔히 사람들은 사적인 자리에서 솔직하고, 공적인 자리에서 가식적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의외로 사람들은 공식석상에서 깜짝 놀랄 정도로 정직한 반면 일상생활에서는 그저 습관적인 반응만 보이기 쉽다. 마이크와 녹음기를 들이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사래를 치다가도 계속 부탁하면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인터뷰에 응해준다. 그리고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파란 것을 파르스름하다 정도로 순화해서 말할지언정 빨갛다고 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건 글자그대로 우리 주변의 ‘보통 사람들’ 얘기다. 정치인들처럼 고도로 단련된 인간은 인터뷰에서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새빨간 거짓말을 쏟아낸다.)

TV 앞에서 ‘인터뷰게임’을 멍하니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의 가족들과 저렇게 이야기해본 게 언제더라? 가족이란, 정말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아는 사이인 걸까? 그럴 리 없다. 그저 가족이란 핑계로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주고, 한 인간으로서의 서로에게 무관심했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마이크와 디지털 카메라를 준비하자. 없다면 ‘숟가락 마이크’도 좋다. TV에 나올 리 없으니 부담도 없다. 나는 지금 하나의 놀이를 제안하고 있다. 치유로서의 인터뷰를.

2008. 7. 24. 17:57

끔찍하다, 그 솔직함 [시사IN 45호]

‘솔까말’이란 은어가 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의 준말이다. 용례는 다음과 같다. “솔까말, 원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섹스 아니니?” “솔까말, 지잡대와 SKY는 하늘과 땅 차이지(*지잡대: 지방에 있는 대학교를 비하하는 속어).” 이 때 한껏 냉소적인 표정을 짓는 게 포인트다.
솔직함은 분명 미덕이다. 거짓과 위선을 폭로하는 통쾌함을 안겨준다. 겉으로는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면서도 속으로 딴 생각을 하는 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TV 버라이어티 쇼에서는 예전에 엄두도 못 낼 수위의 ‘솔직한’ 대화들이 오고간다. 권위주의 시대에 비한다면, 지난 10년 간 우리는 분명 솔직해졌다.
일본사람의 특성을 묘사할 때 흔히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표현을 쓴다. 혼네(本音)는 속마음, 다테마에(建前)는 표정이다. 본심은 따로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다르다는 의미다. 한국사람들은 이를 두고 “겉 다르고 속 다른 일본”이라며 그들의 속물성을 비난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예의와 체면 따지기 좋아하는 중국과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구사회 역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적으로 유사한 면이 있다. 이건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고유한 속성이다. 인간은 욕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욕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물은 타자(他者)가 있든 없든 먹고, 싸고, 잔다. 다시 말해서 욕구는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욕망은 타자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나의 욕망은 언제나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친 욕망이며 그 거울이 깨지는 순간 나는 그저 한 마리 동물이 된다. ‘다테마에’는 단순히 ‘혼네’를 감추는 가면이 아니라, 타자를 적극적으로 의식해서 욕망이 온전히 욕망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안전핀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동물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의 솔직함이 그녀를 죽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점점 ‘솔직’해지는 건, 이제 더 이상 ‘혼네’를 감출 필요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솔직함은 닳고 또 닳아버려서 자신의 노골성을 뻔뻔하게 드러내는 상투적 형식이 됐다. 달리 표현하면, ‘혼네’가 ‘다테마에’의 자리를 강탈했다. 서점에 넘쳐나는 이른바 실용처세서들을 보라. 온통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다. “가난한 아빠라니, 솔직히 쪽팔리지 않아? 부자아빠가 되라구!” “30대에 모은 돈이 고작 5천만 원? 까놓고 말해 당신, ‘루저’야!” 즉, 이 모든 ‘솔까말’ 뒤에 생략된 말은 ‘돈 밖에 없지, 안 그래?’다. 그렇게 ‘동물’들은 냉소주의자 흉내를 낸다.
지난 7월 5일 한 일간지에 여고생이 투신자살했다는 소식이 실렸다. 그녀의 부모는 청와대와 교육청에 진정서를 냈다. 진정서에 따르면 “담임교사가 기초생활수급자를 조사한다며 해당학생을 교실에서 일어나라고 했고 딸이 가만히 있자 공개적으로 명단을 불러 모욕감을 줬다”고 한다. 기사가 인용한 익명의 제보자가 말하길, 그 교사는 평소에도 그런 행동을 많이 했던 사람이었고 죽은 소녀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생활 내내 유무형의 멸시에 시달렸다. 1급 지체장애인인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노점상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오고 있었다.
진정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담임교사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과연 교사 개인의 소양 탓으로만 돌릴 일일까. 이 비극은 단지 예외적인 사건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1시간 더 공부하면 마누라 얼굴이 바뀐다’라는 급훈을 ‘명언’ 취급하는 한국사회야말로, 지금 이 시각 건물 옥상에 선 어느 가난한 소녀의 등을 떠밀고 있기 때문이다. 끔찍하다, ‘한국판 자본주의 정신’의 저 투명한 솔직함이.

2008. 6. 24. 20:18

국가의 귀환 [시사IN 41호]

2008년 6월 중순 현재, 대의민주제의 핵심인 정당정치가 실종된 상황을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 대한민국이 ‘이중권력(dual power)' 상태라고 말한다. 정부 권력과 시민 권력이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다는 거다.
내가 알기로 이중권력이라는 말의 용례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일본 쇼군-천황 체제의 기묘한 권력분점을 묘사하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꽤 유서 깊다. 약 90년 전에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란 가명으로 활동하던 러시아의 대머리 아저씨가 최초로 이 말을 사용했다. 우리의 맥락은 전자와는 무관하므로 후자라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혁명전야? 에이, 설마! 대다수 ‘빨갱이’들조차 지금이 혁명전야라고 진심으로 믿진 않을 것이다. 오늘날 OECD 가입국에서 ‘혁명’이란 단어는 광고문구 또는 비유적 과장일 뿐이다. 체 게바라의 여전한 인기는 혁명의 절박한 요구 때문이 아니라 티셔츠로 소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뉴욕타임스>는 이번 사태를 두고 “한국 민족주의 정서의 표출”이라 주장한다. 북조선에 알 수 없는 친근감을 가진 일부 운동권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물론 대한민국은 동북아시아의 마지막 분단국이고, 오랜 세월 외세에 시달려온 나라다. 그러나 북조선의 쇠락과 함께, 단일민족국가에 대한 한국인의 판타지는 상당 부분 사라졌다. 월드컵, 한류, 황우석 사태, ‘디워’ 논란 등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 것은 ‘강한 국가’에 대한 열망이지 과거와 같은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한국인에게 민족 혹은 통일은 여전히 중요한 가치이지만 더 이상 그 자체가 목적이 되기 어렵다. 이제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한 국가를 위한 수단으로서만 존재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그러므로 민족주의니 민족정서를 언급하는 것은 최근 10년간 대한민국에 얼마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는지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 변화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중국가(dual state)’다. 이것은 위기에 처한 중산층과 ‘막장’에 몰린 빈곤층이 90%를 이루고, 금융위기 이후 압도적 부를 축적한 10%로 구성된 사회다. 그리고 매일 천 원 김밥을 먹는 사람과 만 오천 원 브런치를 먹는 사람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그런 사회다. 이중권력이 아니라 실은, 이중국가가 문제인 것이다.
단순히 ‘10대90의 사회’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계화라는 미명 하에 벌어진 급격한 사회경제적 충격이, 국가의 역할에 대한 한국사회의 합의를 걷잡을 수 없이 붕괴시켰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적 욕망만이 소용돌이치던 혼란의 와중에서 사회가 지켜내야 할 공공성은 무참히 찢겨나갔다. 그 빈자리에 자리 잡은 게 바로 강한 국가, 일류국가에 대한 달뜬 기대였다. ‘국가의 후퇴’가 ‘강한 국가의 열망’으로 나타나는 것은 초국적 자본이 판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동북아 중심국가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정부는 이런 국민의 열망을 잘 감지했지만, 시장주의와 국가주의 사이에서 분열병적으로 오락가락하다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해괴한 농담을 만들어냈고, 급기야 한미 FTA까지 밀어붙였다. 5년 내내 혼란스러워하던 중산층은 정권이 바뀌고서야 자신이 사는 나라의 실체를 깨달은 듯 이렇게 외친다. “이게 뭥미?”
거리집회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구호는 쇠고기 재협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물 민영화, 의료 민영화 등 수십 가지에 이른다. 거칠게 묶으면 모두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포기하지 말고 제대로 하라는 얘기다. 가히 국가의 귀환이라 할 만 하다. 그러나 여기엔 중요한 질문이 빠졌다. 대체 우리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2008. 6. 3. 01:56

'축제와 탈진'을 넘어

광우병 정국이 초반을 넘어서자 사람들이 국민소송이란 걸 준비하는 모양이다. 과연 현명한 짓인지는 둘째지고 이건 그 자체로 흥미로운 사회문화적 현상이다. '거리의 정치'는 본래 법을 뛰어넘기 위한, 일종의 '목숨 건 도약'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껏 쌓아올린 바리케이드를 버리고 다시 법에 호소하고 있다. 집회방식은 창조적이지만, 사고방식은 구태의연하다.

부르주아지에게 '법'이 있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단결'이 있다면, 중간계급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상식'이다. 이 불투명하기 짝이 없는 단어는 중간계급이 강력해질 수 있는 이유이면서 동시에 '아킬레우스의 발목'이기도 하다. 대체 상식이란 무엇인가. 최고로 지당하고 최고로 모순적인 것.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모르는 것. 눈에는 보이지만 손에 틀어쥘 수 없는 안개같은 것. 사회경제적 지위 변화에 가장 민감하기 때문에 가장 불안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중간계급이, 자기확신의 준거로서 '상식'에 집착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다.

상식은, 법이라는 보편성을 전유한 부르주아지에게 대항하는 또 다른 보편성의 언어가 된다. 그리고 자신이 보편계급이라 주장하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대항하는 보편성의 언어가 되기도 한다. 보편성을 둘러싸고 세 개의 계급이 경합하고 있는 셈이다. 법이나 계급의 언어가 외관상 논리체계의 형상을 갖추고 있는 반면, 상식의 언어는 논리체계라기보다 감수성의 체계에 가깝다. 특정 국면에서 중간계급은 자신의 상식의 근거로 법을 내세우다가가도 어느 순간부터는 법의 근거가 상식이어야 함을 역설한다.

중간계급의 감수성은 순간적으로 다른 편에 할당되었다가 또 어느 순간 그것을 취소한다. 이명박을 찍은 사람이 이명박 탄핵을 외치는 촛불집회는 상식을 전유한 중간계급의 싸움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법'에 의지해서 이명박을 공격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을 느끼지 못하는 것, 비폭력이라는 자기규율에 집착하는 것(실제로는 그렇지 못함에도) 또한 중간계급 특유의 행동양식이다. 한국 현실정치의 스펙트럼에서 진보냐 보수냐의 구분은 여기에서 그리 쓸모가 없다. 다만 그 구분은 10년간의 양극화를 경험하며 끝없이 추락해온 중간계급이 왜 노무현 정부 때가 아니라 이명박 정부 시기에 봉기했는지를 설명하는 데는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지난 5년간 한계에 몰릴 때까지 유지된 이들의 인내는, '건국 이후 가장 때리기 좋게 생긴 샌드백'이 때마침 등장하면서 싱겁게 마감됐다. 불과 100일만에 '상식 대 몰상식'이라는, 중간계급의 아드레날린이 최대치를 찍는 구도가 완성되어 버린 거다. 온라인 상에서 이 구도를 주도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과거 참여정부의 열성적 지지 계층으로 보인다. 실제로 다음 아고라에서 엄청난 추천수를 기록한 베스트 게시물 중 상당수가 "그분이 그립습니다" 류의 감성적 토로다. 물론 '그분'은 노무현이다. 참여정부 5년은 많은 전문가들이 공히 지적하듯 기록적으로 양극화가 확대된 시기다. 자신이 급속히 몰락한 시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기이한 행태는 '정치의식'이 계급적 이해관계를 압도한 정치적 스톡홀름 신드롬의 사례로서 연구해볼만한 주제다.

계기야 어쨌든 프롤레타리아트와 중간계급이 연대할 수 있는 기회가 참으로 오랜만에, 그리고 극적으로 찾아온 것만은 분명하다. '좌파'들은, 다소 당혹스럽긴 하겠지만,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이 기회를 목숨 걸고 붙잡아야 한다. 이것이 중간계급이 주도하는 거리정치라는 사실을 제외하고, 분명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떤 방식으로 마무리될지 섣불리 예측할 수도 없다. 이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진보신당의 제안은 지금까지 현실정치세력이 내놓은 대안 중 가장 상식적이지는 않지만, 가장 탁월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소송으로 해결하자는 '아메리칸 스타일'보다는 훨씬 낫다. 광장에서 그렇게 민주주의를 요구했다면, 시민들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일관적이고 올바르다. 만약 그것이 실현된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비로소 한 단계 도약했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정권을 압박하는데만 정신이 팔려서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2000년대 이후 거의 모든 대규모 촛불집회는 '축제와 탈진의 반복'이었다. 자기 삶이 구체적으로 변하지 않는 축제, 그것은 냉소와 탈정치만 낳을 뿐이다. 이제 의미있는 결실을 만들 때도 됐다. 중간계급이 상식의 굴레를 깨트린다면, 어제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리게 된다.
2008. 5. 30. 17:27

20대 왕따시켜 10대 찬양하는 '돌림병' 이 돈다 [시사IN 37호]

*청탁받아 갑자기 쓰게 된 글. 쓰는 시점이 이미 5월 22일이라 타이밍이 좀 늦은 감이 있었지만, 한 번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이긴 했다. 이건 풀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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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세대론의 홍수다. 이번엔 촛불을 들고 혜성처럼 등장한 10대가 주인공이다. 광장에 대한 추억이 각별한 386 아저씨와 아줌마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이들 ‘신인류’를 찬양·고무하고 있다. <한겨레>의 ‘2.0 세대’ 특집기획은 사랑스런 10대에게 바치는 개혁세력의 절절한 오마쥬(homage)였다. 감동으로 따지면 <시사IN> 35호 커버기획 ‘10대는 말한다’가 발군이다. 읽다가 코끝이 찡했다고 고백한 사람이 많다.
그런데 뒷맛이 고약하다. 10대를 칭찬하는 어른들은 “20대와는 달리”라는 말을 꼭 덧붙인다. ‘10대는 희망이 있지만 20대는 싹수가 노랗다’는 식이다. 이 글은 그런 ‘구별짓기’에 대한 반박이다. 명확히 밝혀두지만 이건 20대에 대한 변명이나 옹호가 아니다. 그들은 변명해야할 정도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다.
물론 지금처럼 전선이 명확히 양분된 시점에 괜히 딴죽 걸었다 본전도 못 찾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 촛불집회 이후 10대와 20대를 비교하는 담론이 부쩍 늘어나면서 점차 20대에 대한 무시와 ‘왕따’로 표출되고 있다.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최근 들어 어떤 정치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20대 혐오증’이 반복되어왔기 때문이다. 일종의 사회적 돌림병이라고밖에 달리 묘사할 말이 없다.

‘20대 투표율 낚시’ 사건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개혁세력 및 진보세력이 거둔 성적은 참패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거의 ‘분쇄’ 당했다. ‘수구꼴통 축출’만이 대한민국이 사는 길이라 굳게 믿던 사람들은 망연자실했다. 절망이 지나치면 자기혐오로 이어진다던가. “찍은 국민이 죄인”이라는 식의 담론이 급속히 유포되기 시작했다. 대선 출구조사자료 등이 공개되자 즉시 희생양이 정해졌다. 바로 20대였다.
SBS-TNS 출구조사에 따르면 20대의 이명박 후보 지지율은 42.5%, 이회창 후보는 15.7%였다. “나이 든 양반들이야 그렇다 치고, 젊은 것들이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비난이 쏟아졌다. 언론들도 ‘20대 보수화’에 대해 연일 입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총선이었다. 예상대로 한나라당의 압승. 그런데 선거가 끝나자마자 또다시 20대를 향한 공격이 시작됐다. ‘총선에서 20대 투표율이 19%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가면서 본격적인 ‘마녀사냥’이 벌어졌다. <경향신문>은 ‘20대 투표율 19%는 대의정치 심각한 위기’라는 제목의 대담기사를 싣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저도 20대지만 투표율 19%라니 정말 창피합니다”라는 고해성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처구니없는 사실이 밝혀진다. ‘19%’는 근거 없는 루머였던 것이다. 당연한 것이, 총선의 연령별 투표율은 당시까지 발표된 적이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글자 그대로 ‘낚여버린’ 셈이다. 왜 이런 블랙코미디가 벌어진 걸까. 그 사람들이 유달리 멍청해서? 그렇지 않다. 19%라는 수치를 보기 전에 이미 어떤 프레임, 다시 말해 20대 보수화라는 인식의 그물에 갇혀버린 까닭이다. 그러니 떡밥이 보이자마자 덥석 물 수밖에.
따지고 보면 대통령 선거 직후 불거진 20대 보수화 담론도 상당히 과장된 면이 있었다. 분명 20대는 보수후보에게 적지 않은 표를 줬다. 그러나 진보로 분류되는 문국현 후보와 권영길 후보에 대한 20대의 지지율은 전 연령대 중 최고였으며, 집권여당 정동영 후보에게는 가장 적은 표를 줘 엄청난 취업난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이것만 가지고서 보수라고 잘라 말하기도, 그렇다고 진보라 분류하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20대 혐오증’과 ‘10대 애호증’은 동전의 양면

20대에 대한 ‘전사회적 왕따’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반복되는 것 같다.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가 점화된 초기, 중고생들이 대거 청계천 광장으로 몰려나왔다. 교복 입은 여중생, 여고생이 촛불을 들고 “너나 먹어 미친 소!”라고 외쳤다. ‘전직’ 기자로서 단언하는데, 이렇게 ‘섹시’한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그건 기자도 아니다. 당연히 취재가 집중될 수밖에 없다.
기사를 접한 수많은 ‘386’들, 충격과 감동에 몸을 부르르 떤다. 20년 전 자기 모습이 생각나 주책 맞게 눈물부터 나온다. 나폴레옹이 진군하는 모습에 감동 먹은 헤겔의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저기 교복 입은 절대정신이 촛불을 켰다!” 나이를 따져보니 내 아들과 딸 또래다. 때맞춰 <한겨레>의 시의적절한 제목 뽑기, 벅찬 감동에 불을 댕긴다. ‘‘2.0 세대’ 386부모 ‘뜨거운 피’ 물려받았다!’ 시대정신이 자식사랑과 화학적으로 결합하는 행복한 순간이다. 기자들은 다시 아이템 개발에 분주해진다. 그러고 보니 10대가 저렇게 나서는데 20대는 안 보이는 것 같네? 역시 20대들은 몸을 사리는구만. 그래서 ‘그 많던 20대는 어디로 갔나’ 류의 기사들이 다시 쏟아져 나온다.
물론 내용적으로 20대에 대해 균형 있는 접근을 보여준 기사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건 10대와 20대를 비교하는 구도 자체다. 이미 20대의 보수화가 하나의 완고한 프레임으로 자리 잡은 이상, 20대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리 잘 써봐야 10대를 칭찬하는 도구로 이용될 뿐이다. ‘20대 보수화’라는 기존 프레임에 ‘10대와 20대의 비교’가 더해지면서 잠복했던 20대 혐오증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을 보라.
10대에 대한 지나친 감정이입과 20대에 대한 지나친 혐오는 사실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개혁정권 10년에 대한 지지세력의 환멸과 피로감이 원인이다. 정치문화적 개혁에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사회경제적 개혁에 실패하면서 사람들은 ‘적을 두 번이나 이겼는데 내 삶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공허감에 사로잡힌 것이다. 최근 치러진 두 번의 선거에서 아노미 상태에 빠진 개혁세력은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이 된 건 우리 탓이 아니”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은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세상이 이렇게 된 진정한 이유가 그런 사고방식 때문이라는 어떤 진실을 폭로할 뿐이다. 20대 혐오증은 타자에게 환멸을 전가하는 일종의 심리적 보상행위이며 10대에 대한 지나친 기대도 본질은 마찬가지다.

그들 모두가 88만원 세대

10대와 20대에 대한 이런 식의 구별짓기를 단호하게 차단하지 않으면 20대는 앞으로 계속해서 잉여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개혁세력과 진보세력에게 장기적으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20대가 정치적 냉담자로 남아있는 한, 개혁세력이 그렇게도 몸서리치는 수구기득권 세력의 토양만 비옥해질 뿐이니까. 2002년 심미선·신효순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10대가 지금의 20대라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지금의 10대도 머지않아 20대처럼 보수화되리라는 것? 부정적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본다면 지금의 20대가 계기만 찾는다면 언제든 광장에 나설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10대와 20대는 모두 88만원 세대다. 그들 앞에 놓여있는 현실은 공히 참혹하다. 그들을 굳이 구분할 이유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 기성세대가 할 일은 20대를 10대와 비교하고 평가하는 게 아니다. 그들이 광장에 나섰을 때, 자신의 삶을 정말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1987년에 만든 다리를 우리는 지난 10년간 힘겹게 건너왔다. 이제 다음세대 모두에게 새로운 다리 하나를 놓아줄 때다.

2008. 5. 16. 12:28

촛불소녀의 혁명 [시사IN 35호]

소녀시대, 아니 ‘소녀혁명의 시대’다. 과장이나 수사가 아니다. 2008년 5월 대한민국에는 진짜 혁명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5월 2일과 3일 서울 청계광장에는 엄청난 수의 십대들이 모였다. 그것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더욱 충격적인 건 이들 중 다수가 소녀들이었다는 점이다. 생기발랄한 환호성만 들으면 마치 콘서트에 온 듯 착각할 정도다. 하지만 소녀들이 하늘 높이 쏘아올린 함성은 아이돌 스타의 이름이 아니었다. “너나 먹어 미친 소!”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고 있는 듯 했다. 평범한 사물이 익숙한 자리를 벗어났을 때의 생경함과 위화감. 초현실주의적 광경이 서울 한 복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나처럼 놀란 어른들이 많았나보다. 곧장 이런 질문을 던진다. 독서실, 집, 학원에 있어야할 소녀들이 왜 저기 있나? 누가 순진한 저들을 꼬드겨 집회장에 동원했나? 불순한 정치세력이 배후에 있는 것 아니냐?

꼰대들이 꼰대일 수밖에 없는 건 인지능력의 결핍 때문이다.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면 반사적으로 보청기와 색안경을 착용한다. ‘음모론’이라는 보청기와 ‘배후설’이라는 색안경을. 이런 보조기구가 없으면 꼰대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문화제는 ‘광장의 권력’이 교체됐다는 사실만을 담백하게 보여줄 뿐이다. 심지어 배후로 지목된 ‘운동권’과 ‘좌빨’조차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시덥잖은 음모론과 배후설은 치워버리고 그저 소박하게 물어보자. 무엇이 소녀들을 거리로 나서게 했는가.

십대소녀만이 아니다. 촛불문화제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 특히 여성이 많다. 20대, 30대 여성, 아이를 업고 나온 여성도 있다. 몇 해 전 신효순·심미선 씨 사망사건과 대통령 탄핵사건 당시와 비교해 봐도, 집회에 참가한 여성의 비율은 기이할 정도로 높아 보인다. 돌이켜 보면 한국사회에서 광장은 늘 ‘남성의 공간’이었다. “건국 이후 가장 진보적인 세대”라 평가받던 ‘386’ 세대에게조차 그랬다. 전대협 의장은 늘 남학우 차지였고, 여학우는 항상 리더가 아닌 서포터였다. 아니면 가열찬 투쟁에 지친 남학우가 잠깐 쉬어가는 연애의 대상이거나. 그렇게 광장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가부장적 위계와 군사용어로 얼룩져왔다.

광장의 남성들이 왁자지껄 권력놀음에 빠져있을 때, 여성들은 ‘소리 없는 파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지도부’도 ‘선도투’도 없는 기묘한 총파업, 바로 출산파업이다. 한국여성들이 이심전심으로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안은 세계최저수준의 출산율로 적나라하게 표현됐다. 쪼잔하게 공장을 멈추는 정도가 아니었다. 한국사회의 재생산 메커니즘을 아예 중단시키겠다는 무언의, 그러나 무시무시한 항의였다.

‘건강’에 대한 여성들의 염려는 남성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경제학적으로도 유기농 제품에 대한 여성의 선호는 확연하다. 그런 여성에게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단순히 미래에 대한 불안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공포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십대소녀들에게는 더욱 절박한 생존의 문제였으리라. 그 소녀들이 광장에 나왔으니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하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그리고 광장을 소녀에게!

2008. 4. 29. 13:58

사이코패스의 꿈 [시사IN 32호]

 미국 TV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 마이클 스코필드(웬트워스 밀러 분)는 샤프한 외모에 더해 뇌쇄적 음성과 천재적 지성, 천사적 감성까지 갖춘 완벽남이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형을 구하기 위해 그는 스스로 감옥에 들어가 공전절후의 탈옥극을 벌인다. 정교한 설정과 숨 막히는 스토리 전개에 한국의 ‘미드 폐인’들은 열광 또 열광했다. 스코필드는 어느새 ‘석호필’이라는 한국식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당시 백수였던 내가 이 드라마를 그냥 지나쳤을 리 없다. 한 회라도 빠뜨릴세라 열심히 봤다. 그런데 시즌 1의 중반 즈음에 이르자,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다. 잘생기고 똑똑한데다 착하기까지 한 석호필이, 실은 ‘정신병자’라는 거다! 석호필의 주치의였던 정신과 의사는 그가 ‘잠재억압부족(Low Latent Inhibition)’이라는 희귀한 질병을 앓고 있다고 말한다. 이 증상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물을 볼 때 그 겉모습 뿐 아니라 내부구조와 구성요소들까지 직관적으로 파악해버린다. 보통사람이라면 지나치게 세세한 정보들은 미리 차단하기 때문에 별탈이 없지만, 잠재억압부족증상(LLI)이 있는 사람은 홍수처럼 밀려들어오는 정보 때문에 결국 미쳐 날뛰게 된다.

정신과 의사는 덧붙였다. “하지만 석호필처럼 아이큐가 높으면 그런 정보를 모두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엄청난 천재가 된다.” 에이, 이런 말도 안되는 설정이 어딨어, 라며 코웃음을 치다가 혹시나 싶어 잠재억압부족에 대해 검색을 해봤더니, 놀랍게도 관련 논문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2003년 하버드대와 토론토대 연구자들의 논문 ‘Decreased Latent Inhibition Is Associated With Increased Creative Achievement in High-Functioning Individuals’).

석호필은 드라마 속에서 타인의 고통을 결코 외면하지 못하는데, 곤경에 처한 사람의 아주 작은 신호조차 예민하게 감지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석호필이 착한 건,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착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인간이라서다. 이처럼 잠재억압부족(LLI)이 미국 드라마 속에서 ‘착한 놈’의 생물학적 증거로 그려진 반면, 요즘 한국사회에 자주 회자된 사이코패스 체크리스트(PCL: Psychopathy Checklist)는 ‘나쁜 놈’이 될 가능성을 진단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진화심리학자 린다 밀리 박사의 정의에 따르면, 사이코패스는 ‘경쟁적 환경 하에서 타인의 이타심을 악용해 자신의 욕구만 채우는 이기적 인간’이다. 그래서 사이코패스가 타인의 고통에 그토록 무관심할 수 있는 것이다. 연쇄살인과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건 사이코패스 중 극히 일부인데,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욕구는 금전적 이익이 아니라 살인 또는 강간이다. 이들을 제외한 대다수 사이코패스는 ‘멀쩡한’ 사람들이며, 경제학자들이 사랑해마지않는 ‘합리적 인간’ 그 자체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사이코패스를 미지의 괴물로 생각한다. 정작 우리 자신을 사이코패스로 만들고 있는 환경에는 의문조차 제기하지 않으면서.

‘착한 놈’이 착한 원인을 굳이 정신질환에서 찾아야 하는 미국 드라마, 그리고 ‘나쁜 놈’을 사이코패스로 규정하면서도 ‘나는 정상인’이라 굳게 믿는 한국사회. 공통점이 있다. 선악의 근거를 개인의 생물학적 결함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이는 공동체의 목표를 상실한 사회의 특징이자, ‘윤리’ ‘평등’과 같은 가치 지향적 단어를 순진하다며 냉소하는 ‘실용주의’가 다다른 기묘한 종착지다. 남는 것은 승자독식의 배틀로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 잠재적 사이코패스들의 꿈은 야무지다. ‘나 말고, 당신만은 석호필이길.’

2008. 3. 31. 16:51

동물은 속물의 미래다 [시사IN 29호]

구멍가게 의자에 모로 앉아 한 쪽 팔을 등받이에 헐렁하게 걸쳐두고 클라우드 나인 담배를 꺼내 문 저 남자. 퇴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찍은 한 장의 사진이 꽤나 인기였다. 어느 네티즌은 이렇게 썼다. “긴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남자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물론 그 네티즌이 ‘노빠’ 또는 ‘전직 노빠’라는 데 5백 원 걸겠지만, ‘노간지’란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내가 봐도 ‘간지작살’이었으니.

한참동안 사진을 들여다봤다. 우리 동네 목욕탕 사장님 같기도 하고, 언젠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나에게 담뱃불을 빌리며 멋쩍게 웃던 아저씨를 닮기도 했다. 이 소박한 사나이와 함께 보낸 지난 5년, 그 시절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왜 그토록 그를 사랑했고 또 혐오했을까.

2002년 개봉한 홍상수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연극배우 경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사람 되긴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 아직도 사람들이 입에 올리는 ‘명대사’다. 뜬금없이 영화 얘길 꺼낸 건, 이 말이 참여정부와 그 지지자들의 정치적 무의식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괴물은 되지 말자’라는 말의 기능은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윤리적 마지노선을 요구하는 게 결코 아니다. 그 말이 기능하는 부분은 다른 데 있다. 오히려 “내가 비록 인간 같지 않은 짓을 하고 있지만 최소한 괴물만 아니면 괜찮은 거지”라는 식의 은밀한 도덕적 위안을 안겨주는 것이다.

참여정부의 출범부터 그랬다. <생활의 발견>이 개봉했던 바로 그 해 대선에서 예의 비판적 지지론이 기승을 부렸다. 즉 최선을 택하기보다 최악(한나라당 집권)을 피하자는 것인데, 이 논리는 ‘최소한 괴물은 되지 말자’는 말과 정확히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여기서 ‘최선’이란 당연히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정당에 투표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노동자가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민주노동당을 제쳐두고 민주당 후보에 표를 몰아줬다.

대표적 재벌개혁 정책인 출자총액제한제도는 참여정부 5년 동안 글자 그대로 누더기가 됐고, 순환출자 금지 논의도 스리슬쩍 사라졌다. 인수위 시절 반드시 관철하겠노라 공언했던, 그리고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인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 역시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증발해버렸다. 지난 5년,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전혀 개혁되지 못했다. ‘개혁’과 ‘진정성’이라는 말을 어느 정부보다 남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과 행동의 괴리, ‘최소한 괴물만 아니면 된다’는 사고방식, 바로 속물의 특성이다. 속물에 대한 역겨움이 ‘참된 인간’에 대한 갈망으로 승화한다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귀찮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속물은 필연적으로 ‘동물’을 불러오게 돼 있다. 즉, 동물은 속물의 미래다.

속물이 욕망(desire)에 좌우되는 위선적 존재라면, 동물은 욕구(needs)에 솔직한 존재다. 타인의 시선? 그게 밥 먹여주니? 배고프니 먹고, 마려우니 싸는 거다. 미로에 갇힌 생쥐는 생각하기보다 움직인다. 길이 막히면 다른 길로, 또 막히면 또 다른 길로. 해보고 또 해본다. 이명박 대통령이 가장 즐겨 쓴다는 말은 그래서 감동이다. “해봤어?”  똥인지 된장인지 굳이 찍어 먹는 ‘동물의 왕국’, 이제 딱 4년 11개월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