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3. 31. 16:51

동물은 속물의 미래다 [시사IN 29호]

구멍가게 의자에 모로 앉아 한 쪽 팔을 등받이에 헐렁하게 걸쳐두고 클라우드 나인 담배를 꺼내 문 저 남자. 퇴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찍은 한 장의 사진이 꽤나 인기였다. 어느 네티즌은 이렇게 썼다. “긴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남자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물론 그 네티즌이 ‘노빠’ 또는 ‘전직 노빠’라는 데 5백 원 걸겠지만, ‘노간지’란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내가 봐도 ‘간지작살’이었으니.

한참동안 사진을 들여다봤다. 우리 동네 목욕탕 사장님 같기도 하고, 언젠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나에게 담뱃불을 빌리며 멋쩍게 웃던 아저씨를 닮기도 했다. 이 소박한 사나이와 함께 보낸 지난 5년, 그 시절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왜 그토록 그를 사랑했고 또 혐오했을까.

2002년 개봉한 홍상수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연극배우 경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사람 되긴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 아직도 사람들이 입에 올리는 ‘명대사’다. 뜬금없이 영화 얘길 꺼낸 건, 이 말이 참여정부와 그 지지자들의 정치적 무의식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괴물은 되지 말자’라는 말의 기능은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윤리적 마지노선을 요구하는 게 결코 아니다. 그 말이 기능하는 부분은 다른 데 있다. 오히려 “내가 비록 인간 같지 않은 짓을 하고 있지만 최소한 괴물만 아니면 괜찮은 거지”라는 식의 은밀한 도덕적 위안을 안겨주는 것이다.

참여정부의 출범부터 그랬다. <생활의 발견>이 개봉했던 바로 그 해 대선에서 예의 비판적 지지론이 기승을 부렸다. 즉 최선을 택하기보다 최악(한나라당 집권)을 피하자는 것인데, 이 논리는 ‘최소한 괴물은 되지 말자’는 말과 정확히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여기서 ‘최선’이란 당연히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정당에 투표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노동자가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민주노동당을 제쳐두고 민주당 후보에 표를 몰아줬다.

대표적 재벌개혁 정책인 출자총액제한제도는 참여정부 5년 동안 글자 그대로 누더기가 됐고, 순환출자 금지 논의도 스리슬쩍 사라졌다. 인수위 시절 반드시 관철하겠노라 공언했던, 그리고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인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 역시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증발해버렸다. 지난 5년,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전혀 개혁되지 못했다. ‘개혁’과 ‘진정성’이라는 말을 어느 정부보다 남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과 행동의 괴리, ‘최소한 괴물만 아니면 된다’는 사고방식, 바로 속물의 특성이다. 속물에 대한 역겨움이 ‘참된 인간’에 대한 갈망으로 승화한다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귀찮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속물은 필연적으로 ‘동물’을 불러오게 돼 있다. 즉, 동물은 속물의 미래다.

속물이 욕망(desire)에 좌우되는 위선적 존재라면, 동물은 욕구(needs)에 솔직한 존재다. 타인의 시선? 그게 밥 먹여주니? 배고프니 먹고, 마려우니 싸는 거다. 미로에 갇힌 생쥐는 생각하기보다 움직인다. 길이 막히면 다른 길로, 또 막히면 또 다른 길로. 해보고 또 해본다. 이명박 대통령이 가장 즐겨 쓴다는 말은 그래서 감동이다. “해봤어?”  똥인지 된장인지 굳이 찍어 먹는 ‘동물의 왕국’, 이제 딱 4년 11개월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