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4. 1. 13:45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서평

교육공동체 <벗> 창간준비호에 실렸던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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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수업’에 담긴 20대의 진짜 목소리
엄기호(2010),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푸른숲


이 책의 ‘들어가는 글’을 3분의 1 정도 읽었을 때 직감했다. 내가 쓰고 싶었지만 쓰지 못했던, 바로 그 이야기라는 것을. ‘내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말하기 위해서는 <88만원 세대>에서부터 출발해야할 듯싶다. 나의 첫 월급을 모티브로 만든 신조어 “88만원 세대”가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면서, 또한 본래 의도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비되는 걸 지켜보면서 참 많은 고민을 했다. 우파적 프레임에 전유된 세대론, 사회문제를 세대의 특성으로 환원시키는 경향에 대해 단호하게 선을 긋고 싸우기도 했다. 심지어 같이 책을 쓴 우석훈의 행보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을 정도로 말이다(2009년 초 <조선일보>가 열심히 띄우고 있던 소위 ‘실크로드 세대론’을 그가 <한겨레> 지면을 통해 공식 지지했던 게 발단이었다).

나는 왜 그렇게 까칠했어야 했나. <88만원 세대>라는 책의 장점과 한계를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어서다. 많은 이들이 올바르게 짚었듯이, 이 책의 장점은 1997년 이후 10여 년 간의 사회경제적 격변을, ‘세대’라는 틀을 통해 직관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계도 명확했다. 그 한계란 몇몇 교조적 좌파들이 비난하듯 계급 문제를 세대 문제로 환원시켰다는 점은 아니다. <88만원 세대>는 한국사회의 모순이 세대 모순의 형태로 ‘표현’된다고 주장하는 책이지, 세대문제 그 자체라 단언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했듯 그런 식의 ‘세대환원론’에 대해 나는 누구보다 격렬하게 저항해왔다. 내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88만원 세대>의 한계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애초 내 집필동기였던 ‘불안정노동’이라는 의제가 너무 미진하게 다루어졌다는 점. 둘째, 88만원 세대 자신의 목소리가 없다는 점.

‘20대 담론’의 구조적 제약을 깬 현장성

첫 번째 한계에 대해서는 틈날 때마다 이런저런 글이나 강연을 통해 보강하거나 강조했으므로 변명의 여지라도 있다. 그런데 두 번째 한계는 아예 공백상태나 마찬가지였다. <88만원 세대> 이후 “20대 필자를 발굴하자”는 공감대 혹은 유행 같은 게 생겨나서, 몇몇 20대가 책을 내기도 했지만 완성도를 떠나서 과연 이게 우리 시대 청춘들의 생각과 현실을 보여주는 것인지 의문스러웠던 게 사실이었다. 몇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일단 대표성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88만원 세대’의 대표주자로 부각된 청춘들이 너무 ‘엄친아’들인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IN 서울’의 내로라하는 명문대 출신의, 소위 ‘예비 먹물’들이었다. 그들은 기성세대나 기성언론들이 자신들에게 원하는 어떤 속성들, 예컨대 “발칙”“재기발랄” 같은 것들에 대해 혐오와 반감을 드러내면서도 정작 생산된 말과 글을 보면 기성세대가 원하는 형태가 되기 일쑤였다.

물론 이건 20대의 잘못이 아니다. ‘결과물’을 통제하는 건 결국 기성세대요 매체이니까 일종의 구조적 제약에 가깝다. 이런 상황은 그 자체로, 세대담론이 기성세대에게 어떤 식으로 ‘선택’되고 ‘배제’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기성세대가 원하는 것은 한 마디로 ‘싱그러운 청춘들의 고난극복기’다. 그래서 명문대 다니는 20대는 필연적으로 자기 처지보다 과한 ‘찌질함’을 연출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그게 지나쳐서 중간계급 부모를 둔 명문대생이 정말로 자신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불행한 청춘이라 믿어버리는 ‘웃지 못할 과잉’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88만원 세대’라 할, 대다수 20대들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는가? 이른바 ‘기타대학’ 또는 ‘지잡대’에 다니는 20대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는가? 엄기호의 이 책,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는 바로 그런 20대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그러나 그 하나하나에 사회적 의미를 엮어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본문에 나온 대학생들의 말글은 깜짝 놀랄 정도로 명석할 뿐 아니라 풍부한 감성과 예리한 직관을 거침없이 뿜어냈다. 과연 어떤 매체가, 어떤 저자가 청춘들의 지적 성장을 이 정도로 깊이 있고 생기 있게 담아낼 수 있었을까. 나는 이런 성취가 가능했던 결정적 이유 중 하나가, 담론이 아니라 현장에 철저히 집중한 접근방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세대담론이 아니라 페다고지였기에 비로소, 우리 시대 청춘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김진경과 조한혜정

엄기호의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돌아다닌 두 권의 책이 있었다. 김진경의 <스스로를 비둘기라 믿는 까치에게>, 그리고 조한혜정의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가 그것이다. 나에게 “페다고지”하면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파울로 프레이리가 아니라 김진경과 조한혜정일 정도로, 의미가 참 각별하다. <스비까>는 참된 스승에 대한 사춘기 시절의 갈망을 상징하는 책이었고, <글 읽기 삶 읽기>는 내가 발 디딘 현실에서 사유가 출발해야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계기가 된 책이다. 사실 두 책은 내용이나 감수성이 무척이나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육현장에서의 경험에 기반한 생생하고 구체적 사례들이 넘쳐나는 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내가 보기에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는 김진경과 조한혜정의 각각의 책이 지닌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는 것 같다. 엄기호가 “우리의 수업은 선포된 ‘진리’에 맞서는 일”이라고 말할 때, 쉬운 길을 알면서도 굳이 그런 효율성을 거부하는 교육자의 진정성이라는 측면에서 김진경과 참 많이 닮았다. 한편으로 엄기호는 학생들의 분절된 경험들을 다양한 개념과 이론으로 언어화시키도록 하고, 그런 자기 삶의 살아있는 해석이 얼마나 매혹적인 경험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조한혜정과도 닮았다. 조한혜정에게서 직접 배운 엄기호가 스승을 닮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 있겠지만, 스승의 좋은 점을 닮을 수 있는 제자가 사실 몇이나 되겠는가.

어쨌든 그 결과, 이 페다고지는 뭐라 명확히 정의하기 난처한 다층적인 텍스트가 되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20대가 세상을 읽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한 지식인이 20대를, 그리고 세상을 읽는 방식을 보여주는 텍스트이다. 또한 각각의 특정한 이슈들에 대해 같은 세대라 해도 얼마나 다르게 볼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의견들이 충돌하고 뒤섞이는지를 볼 수 있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에 대해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고 전달받는다는 식의 관점을 갖고 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텍스트다. ‘무지한 스승’ 조제프 자코토의 사례를 통해 스승과 제자의 지적/지능적 평등을 자명한 공리로 전제하자고 주장하는 랑시에르처럼, 엄기호는 자기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지적 능력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학생들은 자신의 삶을 더없이 지적인 언어로 해명하고 있다. 여기에 논술식 모범답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은 “20대의 문제는 이것이다” “20대의 삶은 이런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분류하고, 정의하는 것 보다 20대와 함께 현실을 사유하고 토론하는 것이 20대의 삶과 사유를 더 풍부하게 보여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청춘의 노동’에도 페다고지가 필요하다

이 책의 뛰어난 성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20대 담론에는 공백이 남아있다. ‘청춘의 노동’, 특히  대학중퇴자, 고졸 이하 학력의 20대 저임금-블루컬러 노동자들 말이다. 이들이 수적으로 다수는 아닐지 몰라도 이들 역시 ‘청춘’임에 틀림없다. 산업임금구조의 가장 밑바닥을 전전하는 이들 젊은 육체노동자들은 ‘청춘’인지 아닌지를 묻기 전에 ‘인간’의 조건을 먼저 물어야할 정도로 비참한 처지에 놓여있다.

88만원 세대가 대학교와 고시원에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88만원 세대 중의 88만원 세대’는 동희오토에서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있다. 그들은 세대 내부 경쟁과 세대 간 경쟁 뿐 아니라 ‘인종 간 경쟁상황’에 놓여있다. 동희오토 노동자의 20%는 외국인 노동자다. 이 사실은, 88만원 세대가 ‘삼중경쟁’의 톱니바퀴에 끼여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들 대다수는, 당연한 말이지만 <88만원 세대>라는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 모른다. 정지훈 씨와 같은 젊은이가 스스로 입을 열어 그 고통과 분노와 불안을 전하지 않는다면, 아마 대다수의 시민들 역시 그들 존재를 알지 못할 것이다. 광화문에서 촛불이 타오를 때 122km 떨어진 서산에서도 촛불이 타올랐다. 그러나 그 사이엔 물리적 거리보다 더 아득한 심연이 존재한다.   
-박권일(2008), ‘동희오토, 미래를 교살하는 공장’,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321797.html

젊은이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꿈이나 사랑, 열정 따위의 단어는 자주 입에 올리면서도 알바 계약서를 어떻게 써야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입에 올리기를 거북해한다. 부당하게 해고를 당해도 ‘억울하면 사장해야지’라고 생각하지 노동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려는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나는 불안정노동 등의 노동담론을 세대 담론으로 만들자고 주장하는 게 결코 아니다. 반대로 젊은이들의 일상 속에 노동담론을 적극적으로, 그러나 자연스러운 형태로 담아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청춘들의 삶이 불안정노동으로 꾸려진다는 점을 떠올릴 때, 기존의 딱딱한, 게다가 정규직 노조 중심의 노동담론으로는 이 문제를 사실상 풀어내기 어렵다. 요컨대 ‘청춘의 노동’에도 역시 이 책처럼 탁월한 페다고지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가 앞으로 ‘청춘의 노동’ 담론의 출발점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