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14. 12:22

계급을 배반한 투표, 투표를 배반한 계급


손낙구의 역작 <대한민국 정치사회지도>가 향후 선거담론에 끼칠 영향은 아주 클 수밖에 없다. 책을 끝까지 읽어봐야 알겠지만 몇몇 매체에 실린 북리뷰만 본다면 잘 살든 못 살든 계급투표 현상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준 이 책 이후로는 기존의 계급배반투표이론, 즉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일수록 보수정당을 지지한다"는 이야기를 더이상 할 수 없게 된 것 같다. 설령 하더라도 최소한 몇 가지 전제나 배경설명을 깔아야 가능하게 됐다. 아무튼 계급배반투표이론은 설득력이 떨어지며, 가난한 사람일수록 투표를 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사실이 실증적으로 밝혀졌다고 한다(물론 이 '실증'에 대한 '검증'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로서, 수도권에 한정된 조사라는 점과 극우/보수정당 지지자의 상당수가 자신의 지지를 숨기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 등 여러 요소들이 공정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관련해 박상훈은 "수도권 하층의 불안정한 주거현실이 정치의식 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된 요인"이라는 주장을 한다(<한겨레21> 798호). 일리 있는 얘기이며,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몇해 전에 내가 속한 당의 지역 활동을 왜 나는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을까, 아니 열심히 할 생각이 들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는데 개인적인 이유는 '지역정치에 대한 마인드가 후진데다 게을러서'이고, 사회적인 이유는 '언제 이사갈지 몰라서'였다. '지역에 뿌리내리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은, 대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서울생활 십여년 동안 지속되어온 불변조건이다. 정치공동체 형성의 조건이 일정기간의 정주라면, 나는 언제나 정치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던 셈이다.

이 책이 도드라지는 지점은, 현행 선거제도나 이를 떠받치는 의사대표원리가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계급배반투표 가설 자체를 논파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선거관련 담론들이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는 어떤 명제, 즉 '각 계급의 투표율이 대체로 비슷할 것'이라는 명제에 균열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계급을 배반한 투표'가 아니라 '투표를 배반한 계급'이다. 과거의 정치가 적대를 드러내고, 조직화하고, 승리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면 현대의 정치가 직면한 문제는 정치적 적대 자체가 증발해버리는(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 문제는 정치적 적대의 존재 자체를 증명하는 과제와 정치적 적대에서 승리하는 과제, 요컨대 이중의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각각의 과제는 공히 계급적 관점에서 계급구조의 역동적 현실-flow를 명확히 파악하고 빠르게 업데이트하는 것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데, <대한민국 정치사회지도>는 그런 논의의 드물고도 중요한 정초가 될 수 있는 책이다. 또 계속 보완되고 축적되어야 하는 책이라는 점도 물론이다.

사실 책의 내용은 민주당이나 진보정당들의 기존전략과 크게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어쨌든 투표율이 높은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걸 경험칙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계급배반이론에 따른 몇 가지 전략적 고려들을 좀더 줄이고 투표율 제고에 좀더 집중하게 될 수는 있겠다.

가난한 사람들은 투표라는 행위 하나를 하는 데도 부유한 사람들보다 더한 심리적, 경제적 자원을 소모하게 된다. 불평등은 이 지점에서부터 '이미' 발생한다. 돈 많은 정치공동체와 가난한 비-정치공동체들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개별시민의 정치적 대표성을 논하는 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이명박 찍은 국민들이 개새끼"라고 욕하고 자기 블로그 대문에다 "나는 찍지 않았'읍'니다"라고 써놓는 등의 짓거리가 무의미한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투표를 하지 않는 것도 정치적 의사표현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투표율의 저하가 계급과 거주지역으로 표현된다면 그것은 보장되어야할 정치적 의사표현이 아니라 반드시 개선해야할 사회문제가 된다. 정치적 의사표현의 '향방'보다  더욱 민감하고 어쩌면 중요할 정치적 이슈는 바로 정치적 의사표현의 '유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