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 21. 20:11

[한국어사전] "경제" 보론: 갈등 프레임의 부재

"왜 이 지경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일 중요한 것."
경제에 대한 다분히 장난스런 이 정의가 의도하는 바는, "경제"라는 단어가 가치중립적이긴커녕 그 자체로 지금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 중 하나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 정의에는 두 가지 핵심사항이 담겨있다. "왜 이 지경이 됐는지 모르겠지만"이 하나이고, "아무튼 제일 중요한 것"이 다른 하나다. 후자에 대해서는 다음에 길게 써볼 기회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전자, 다시말해 "왜 이 지경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부분은 미네르바 사건을 이해하는데 필수요소다. 미네르바가 뜬 이유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사람들에게 "왜 이 지경이 됐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은 주기적으로 국가경제가 파탄 직전으로 몰리고 있다. 일종의 공황상존국가가 되었는데 아무리 외부요인을 고려하더라도 정상이 아니다. 그러나 도대체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누구도 속시원히 그 이유를 밝혀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관료집단과 정치집단의 모럴해저드가 관례처럼 굳어진 것도 한 이유겠지만 아무튼 그런 상황이 지속되다보니 "이게 다 누구때문이다"라는 형태의 진술은 그 논리의 전체적 정합성과 무관하게 작은 '예언' 하나만 들어맞으면 열광적으로 지지받기 쉬운 상황이 됐다. 모든 포퓰리즘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렇다고 누구의 잘못도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분명 정부와 경제부처는 위기대응능력에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하지만 무능은 언제나 '구체적 상황'과 '구체적 대응'에서 드러난다. 사실 대다수 사람들 역시 이런 종류의 문제는 구체적으로, 사안별로 이야기하는 게 올바르다는 것을 알고있다. '구체적으로 비판하라!' 말하긴 쉽다. 하지만 실천하긴 어렵다. 대중들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은 너무 나이브한 짓이다. 내 생각에 사람들이, 특히 이른바 범개혁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자꾸만 '유일악'을 설정해 '선악의 아마겟돈'을 펼치려는 것은 한국사회의 갈등 프레임이 1980년대에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몇몇 지식인들이 이명박을 전두환과 동일시하고 섣부르게 파시즘 개념을 끌어다 쓰는 지적 나태함을 노출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1980년대의 갈등프레임은 '민주화세력 대 군부독재세력'이었다. 그 아류로 '통일세력 대 반통일세력'이 있다. 당시에는 그것이 옳았다. 더 중요한 건 그것이 매우 효율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갈등 프레임으로 싸우는데 득보다 실이 많다. 범개혁진영 스스로도 이게 예전처럼 약발이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고있지만 그나마 갖고있던 지분마저 빼앗길까봐 관성적으로 이 구도를 고집하고 있는 것 같다. 1997년 이후 급격한 변동한 한국사회의 현실은, 이미 과거의 갈등 프레임으로 피아를 식별하는 것이 더이상 진보가 아니게끔 강제했다. 차라리 신자유주의 대 반신자유주의로 구분하는 것이 더 현실에 부합하는 것일테지만 공교롭게도 '그 1997년' 이후 10년간 정권을 잡아 '신자유주의의 제도화'를 주도한 세력이 이른바 '민주화세력'이라는 점이 상황을 악화시킨 것 같다. 물론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주장한 일부 좌파세력들이 존재해왔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힘은 1980년대에 비해서조차 쇠약해진 상태였고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정의하기가 지나치게 모호한 개념이어서 사회의 갈등프레임으로 자리잡는데 무리가 있었다.

사회문제를 소위 '386스런 프레임'으로 바라보면 참 편리하다. 그러나 그 편리함을 이제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게 얼마나 우리의 눈을 가리는지 이번 미네르바 사건에서 또(!) 배우고 있다. 그런데 프레임은 하루하침에 등장하지 않는다. 새로운 무기들, 다시말해 '새로운 언어'들이 계속 창조되고 축적되어야만 하나의 프레임을 비로소 만들어낼 수 있다. 그것은 '386'의 다음 세대가 할 일이다. 싸움에서 진 적이 없는 저 힘센 세대의 다음 세대는, 과거의 망령과 싸우지 않고선 작은 길 하나조차 뚫을 수 없다. 갈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