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2. 15. 14:11

"괜찮아 별일 아니야"

요즘 어째 생활밀착형 잡감만 쓰게된다. 독감 내상이 심해서리... 쿨럭.

암튼 어제도 약간의 사고가 있었다. 보일러 배관이 터졌다. 다용도실과 방 하나가 침수됐다. 자는 중이라 집안 전체가 물바다가 돼도 몰랐을텐데, 잠에서 깬 건 냄새 때문이다. 체인스모커치고는 기이하게 후각이 예민한 편이라, 번개처럼 이불을 박차고 뛰어올라서 작은 방으로 갔더니 바닥이 온통 물이다. 코를 킁킁, 냄새의 원인은 책상 뒤의 콘센트였다. 살펴보니 이제 막 물이 닿아 불꽃을 튀기기 시작하는 찰라다. 이런 십라...잽싸게 전원을 차단했다. 약간 그을린 흔적밖에 없는데, 이 희미한 냄새를 자다가 어떻게 맡았는지 내가 생각해도 신기...

그러나 책장공간이 모자라 방바닥에 쌓아놓은 책들 중 일부가 수장되고 말았다. 보일러가 있는 다용도실은 거의 저수지다. 바닥에 배수구가 있는데도 슬리퍼가 둥둥 떠다닌다. 보일러에 문제가 있는 건 알겠는데, 대체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즉각 파악이 안됐다. 자취생활 10여년에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그냥 너무 황당하고 황망했다. 아악! 내 책!! 내 (환율 올라서 값이 두배가 된) 프라모델!! 빤쓰 바람으로 한동안 멍을 때렸던 것 같다. 일단 보일러 기사에게 전화를 하고, 여친사마께 보고전화.

"난데, 아놔, 보일러 터진 거 아녀? 물바다야(목소리 갈라짐)."
"(자다가 받았음) 우우웅...잉? 먼 소리야? 집 전체가?"
"아니 다용도실하고 거기 붙어있는 작은 방만. 바닥에 물이 고였어."
"응...그려? 기사 아저씨한테 연락했어? 응, 그럼 올때까지 책부터 좀 마루로 옮겨. 나도 좀있다 날아간다. 놀랬겠네. 괜찮아, 별일 아니야."
사실은 너무 당황해서 그때 그녀가 "괜찮아, 별일 아니야"라고 워딩을 날렸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분명 그런 느낌의 말을 했던 것 같다. 여친과 통화하고 나니 급속히 마음의 평정을 찾게 됐다. '음, 사실 별일 아닐지도...? 마루랑 안방도 일단 멀쩡하고...'

보일러 기사 아저씨가 와서 하는 말이, 보일러 본체는 멀쩡한데 방으로 연결되는 급수배관이 삭아서 끊어졌다고 한다. 직접 보여줬는데, 과연, 처참한 상황이다. 견적이 만만치 않았지만, 30-40분이면 새것으로 교체가능하다고. 10년 가까이 된 빌라에서는 가끔 있는 일이라고도 한다. 여친께서 날아오셔서 요령없이 갈팡질팡 헤매고 있는 날 보더니, 껄껄껄 호탕하게 웃으며 일사불란하게 상황정리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교시를 내려주신다. 아, 졸라 믿음직스럽다. 역시 학교 댕길 때 괜히 농활대장하신 게 아니었어. 그때 별명 중 하나가 '농기계'였지. 아무튼 보일러 배관은 고쳤고, 밤엔 뜨뜻하게 잤다. 괜찮아, 괜찮아, 별일 아니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