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능력주의는 허구다』
『시민과 세계』 제23호_서평 『능력주의는 허구다』
미국사회 부(富)의 상속에 대한 분석
이 책 『능력주의는 허구다』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능력주의 신화를 배반하는 현실에 대한 고발’이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개인의 능력 및 노력에 비례해 보상해주는 사회 시스템을 뜻한다. 능력주의를 이상적인 시스템으로 여겨져 왔다. “그 누구에게도 차별적 특혜를 주지 않으며,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며, 타고난 계층 배경이나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상관없이 오로지 개인의 능력에 따라 보상을 제공한다는 논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켰다.”(12쪽)
스티븐 J. 맥나미와 로버트 K. 밀러 주니어(이하 저자)는 주로 미국 사례를 들어 능력주의 신화가 왜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지 설명하고 있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한국사회에도 부합한다. 한국 역시 미국처럼 능력주의를 일종의 사회적 당위로 여기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에서 현재 능력주의가 어떻게 오작동되고 있는지를 주로 논한다. 저자에 따르면 “지금의 능력주의 신화는 잘못된 가정을 바탕으로 부유층과 특권층은 칭송하고 저소득층과 빈곤층은 부당하게 비난하는 등 경제적인 측면에서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14쪽) 능력적 요인보다 비능력적 요인(상속 등)이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능력적 요인(merit factor)’은 타고난 재능, 능력, 근면성실함, 올바른 태도, 높은 도덕성, 이상적인 자질 등이다. ‘비능력적 요인(non-merit factor)’에는 부모의 경제적 자원과 가족의 계층 배경, 부의 세습, 특권의 대물림, 우수한 교육,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 행운, 차별적 특혜, 태어난 시기, 시대적‧사회적 상황 같은 요인이 있다. 저자는 비능력적 요인이 현실에서 어떻게 불평등을 생산하고 또 확대시키는지에 논의를 집중시킨다. 이런 논의들을 근거로 저자는 (미국) 사회가 능력주의를 주창하지만 실은 전혀 능력주의 사회가 아님을 보인다.
이 책의 한계는 능력주의를 주제로 삼고 있음에도 능력주의 개념에 대한 심층 분석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의 논의는 주로 비능력적 요인이 얼마나 개인의 성공을 좌우하는지, 상속주의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 등에 집중된다. 능력주의가 현실에서 잘 작동하지 않는 신기루 같은 이념이라는 점은 물론 지적되어야 하겠으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능력주의라는 개념 자체에 더 심각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능력’의 모호성,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능력주의조차 그 자체로 정당화하기 어렵다는 점이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는다. 먼저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요약한 다음, 한계를 짚어보기로 한다.
특권의 매개체, 교육
교육(학교)은 성공의 열쇠인가 아니면 성공의 징표인가? 이는 교육을 계층이동의 수단으로 보느냐 계층화의 결과로 보느냐라는, 전혀 다른 두 개의 관점을 반영한 표현이다. 많은 사람들은 교육이 성공의 열쇠라고 믿지만, 저자에 따르면 교육은 “불평등을 대물림하는 잔인한 매개체”일 뿐이다.
교육이 성공의 열쇠라는 주장, 즉, 교육을 계층이동의 수단으로 보는 관점은 그동안 다양한 이론으로 뒷받침됐다. 기능적 교육 이론, 인적 자본 이론, 지위 획득 이론 등이 그것이다. 기능적 교육 이론은 현대사회에서 교육의 사회적 기능을 ‘일자리를 얻기 위해 필요한 훈련과 기술을 제공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기능적 교육 이론은 능력주의적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으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할당되고 개인의 능력은 모든 사회 계층에게 동등하게 분배된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이 이론에 따르면 교육의 확대는 불평등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인적 자본 이론은 인간을 자원으로, 자본의 한 형태로 본다. 교육은 개인이 자신의 인적 자본에 투자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인적 자본 이론 속의 개인은 노동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는 자본가가 된다. 능력주의와 강한 친연성을 지닌다.
지위 획득 이론은 다변량 통계 기법을 활용해 개인이 가진 심리적 특성과 특징적 태도가 교육 수준, 직업에서 비롯된 사회적 지위, 소득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한다. 그러나 지위 획득 이론은 비능력적 요인이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산업적 기회 구조처럼 개인의 능력과 무관한 사회경제적 요인이 미치는 영향을 간과한다. 이런 구조적 요인은 개인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요소지만 개인의 직업 선택이나 인적 자본의 가치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이런 이론들과 대조되는 이론도 있다. 대표적인 게 사회적 재생산 이론이다. 이 이론은 교육을 성공의 열쇠가 아니라 (성공의) 징표로 보고, 계층화의 (수단이 아니라) 결과라고 주장한다. 보울스와 긴티스는 『자본주의 미국의 학교 교육』에서 학교 교육이 개인의 경제적인 성공에 미치는 영향은 부분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계층에 따라 불평등한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 부모의 개입, 수준별 수업, 부유한 동네냐 가난한 동네냐에 따라 차이가 나는 학교 재정 등은 세대가 바뀌어도 교육의 질과 수준이 거의 바뀌지 않는 이유가 된다. 사회적 재생산 이론은 구체적으로 어떤 메커니즘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를 설명한다.”(58쪽)
저자는 다양한 통계와 사례를 들어 사회적 재생산 이론이 더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음을 보인다. 미국의 상위 146개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 중 74퍼센트가 부모 소득 기준 상위 25퍼센트에 속하며 소득 하위 25퍼센트에 속하는 학생은 3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그런 예들 중 하나다. 사회학자 미첼 스티븐스는 『계층을 만들다』에서 학생 개개인의 능력을 반영한다는 SAT나 ACT 등의 평가 방식은 평등한 교육 기회를 만들어내지 못하며 오히려 계층의 특권만 재생산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저자가 교육 및 학교에 관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학교는 사회에 존재하는 기존의 불평등을 오히려 더 반영하고 심화시킨다. 학교는 특권층 자녀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을 더욱 발전시키고 이런 자본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을 더욱 발전시키고 이런 자본들이 갖고 있는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특권층 아이들에게 더 많은 보상을 제공한다. 반면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집안 아이들에게는 별 볼일 없는 교사와 질이 떨어지는 교육 과정, 수준별 수업, 부실한 학교를 배정하고 이런요소들이 만들어내는 낮은 기대치라는 자기충족적인 예언을 강요하는 등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 아이들을 벌한다.”(80쪽)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
이어서 저자는 두 개의 비능력적 요인,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으로 시선을 돌린다.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은 ‘누구를 알고 있는가’ 혹은 ‘당신이 알고 있는 누군가의 가치’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인맥’이다. 기회는 사회적 자본에 따라 차별적으로 주어진다. 개인과 가족의 인맥은 교육적 경제적 기회에 접근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자본은 자기 능력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대부분 부모 이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사회적 자본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에 의해 수행되었고, 미국 사회학자 제임스 C. 콜맨도 관련 연구를 축적했다. 사회적 자본의 주요 구성 요소나 자원, 그 접근 기회 중 그 어느 것도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자원이 존재하고 그 자원에 접근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사회적 자본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화적 자본(cultural capital)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알아야할 모든 것, 규점과 가치관, 신념, 매너, 학위, 취미, 라이프 스타일 등에 관한 지식이다. 그것은 한 집단의 문화가 다른 집단의 문화보다 뛰어나다는 암묵적 인식에 기반한다. 문화적 자본은 부르디외가 아비투스(habitus, 집단습속)라고 부른 것 속에 자리잡고 있고 이를 통해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 부르디외는 또한 학교 졸업장, 즉 학력 자격증이 문화적 자본의 증거로 기능한다고 말한다.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학위를 따면 법적으로 보장되는 문화적 자본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와튼 스쿨을 졸업한 MBA 소지자가 일정 금액 이상의 연봉을 보장받는 것처럼, 학력 자격증은 능력의 우월성을 보증하는 증거가 되는 동시에 자격을 갖지 않은 사람을 걸러내는 ‘여과장치’로 기능한다.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은 부모의 구체적이고 의도적인 실천으로 전수된다. 아네트 라루는 『불평등한 어린 시절』이라는 책에서 노동계급‧빈곤층 아이들과 중산층 아이들이 어떻게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지를 묘사한다. 라루는 중산층 부모들이 집중 양육 방식을 통해 자녀들에게 체계적이고 의식적인 방식으로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중산층 가정과 노동자 계층 가정은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되는지에 대해 각기 다른 문화적 레퍼토리를 갖고 있으며, 따라서 기회의 차이로 이어지는 각기 다른 사회적 역량과 문화적 역량을 갖도록 자녀들을 사회화시킨다.”(106쪽)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오바마의 성공이 능력주의를 상징하는 사건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버락 H. 오바마는 미국의 44대 대통령이자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고 2012년 재선에도 성공했다. 오바마의 당선은 아메리칸 드림과 능력주의의 재확인이라고 칭송받았다. 조지 W. 부시의 경우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오바마의 당선이 1960~1970년대 인권운동의 정당성을 최종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저자는 오바마의 경험이 미국에서 소수 인종이나 흑인의 경험을 대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바마는 교육 수준이 높고 문화적으로 다양한 가족 환경에서 성장하며, 어린 시절에 이미 상당한 수준의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아이비리그에서 교육받으며 자신의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을 한층 강화하며 상류층으로 공인받았다. 오바마는 물론 미국 최상류층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바마와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과도한 기회와 명망 있고 영향력 있는 형태의 사회적 자본 및 문화적 자본에 접근할 수 있는 특혜를 물려받는다.(124쪽)
돈, 교양, 인맥 그리고 운
저자는 일관되게 비능력적 메커니즘이 능력을 압도한다는 근거를 제시한다. 특히 글자 그대로의 자본, 즉 돈은 교육, 사회적 자본, 문화적 자본의 영향력을 능가하는 최강의 비능력적 요소다. 특히 저자는 소득 불평등보다 부의 격차(자산 불평등)가 더 큰 문제라고 주장한다.1) “2010년 미국 가구 중 가장 부유한 10퍼센트가 총가계 순자산의 74.5퍼센트를 차지한 반면 하위 50퍼센트는 순자산의 1.1퍼센트를 갖고 있었다. 2007년 자료를 보면 순자산이 제로 혹은 마이너스인 가구가 24년 만의 최고치인 18.6퍼센트에 달했다. 이는 곧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 어떤 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거나 혹은 소유한 자산을 능가하는 수준의 빚을 지고 있다는 뜻이다.”(129쪽)
물질적 재산의 상속은 특권을 물려주는 절대적인 수단이다. 미국에서 세대 간 부의 이동을 살펴보면, 가장 부유한 집단과 가장 가난한 집단에서 사회적 이동은 발생하지 않는다. 중간 집단에서 작은 규모의 계층 상승과 하락이 발생할 뿐이다. 다수 미국인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자신의 출발점 혹은 출발점과 매우 가까운 곳에 계속 머무른다. 사회 시스템 상층부에서 엄청난 부가 세습되어왔으며 지금도 세습되고 있다. 그들의 부는 확고하며,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어지간해서는 그 안정성이 위협받는 일은 없다.
부의 세습이 자녀 세대에게 주는 특혜는 단지 많은 재산 이상이다. 먼저 유년기에 누리는 ‘물질적으로 윤택한 삶’부터가 특혜다. “특권층 자녀들은 신체적‧인지적‧감정적‧사회적 발달이 좀 더 빠르고 뛰어나며, 공부를 할 준비가 좀 더 잘되어 있고, 학업 성취도도 높다. 반대로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도중에 학교를 그만두고, 범죄와 폭력의 피해자가 되고, 좀 더 많은 신체적 및 정신적 건강 문제로 고통 받고, 많은 돈을 벌지 못하고, 가족 붕괴를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139쪽)
특권층 자녀들은 흔히 교양이라 부르는 문화적 자본과 인맥이라 부르는 사회적 자본도 함꼐 물려받는다. 그것은 물질적 재산처럼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과소평가되기 쉽지만 매우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며, 그런 비물질적 형태의 자본은 하위계층을 차단하고 배제하는 높은 허들로 작용한다. 부모가 사망하여 물려주는 재산만이 아니라, 부모가 살아생전에 자녀에게 증여하는 돈도 중요하다. 부모들은 중요한 삶의 변곡점, 이를테면 대학 진학, 결혼, 주택 구입, 출산 등의 이벤트 또는 실질, 이혼, 질병 등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자녀들에게 많은 돈을 직접 물려준다. 가족이니 당연한 게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사회 전체 불평등을 고려하면, 이런 일은 상속세 한 푼도 내지 않고 부모의 재산을 자녀에게 일치감치 상속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 하나 중대한 요소는 ‘운’, 행운이다. 경제학자 레스터 서로우는 부를 축적하기 위해 행운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은 복권에 당첨되거나 벼락에 맞는 것과 비슷한 확률로 벼락부자가 될 기회를 잡는다.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주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서로우는 이렇게 말한다.
빌 게이츠는 미국의 하위 40퍼센트에 속하는 가정이 보유한 것과 맞먹을 만큼 많은 부를 갖고 있지만 1,100만 명에 달하는 이들의 재능을 모두 더한 것과 똑같은 수준의 재능(IQ, 뛰어난 사업 감각, 위험을 감수하려는 의향 등)을 갖고 있지는 않다. 빌 게이츠만큼 똑똑하고 빌 게이츠만큼 훌륭한 사업가 기질을 갖고 있으며 빌 게이츠만큼 모든 것을 잘 해내지만, 빌 게이츠처럼 많은 부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엄청난 부를 얻는 것은 조건부 로또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적하다. 거기에는 반드시 행운이 필요하다. 능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187쪽)
타고난 재능과 근면성실
능력주의의 중요한 전제는 타고난 재능의 차이다. 능력주의의 신봉자들은 타고난 재능의 차이는 부정할 수 없으며 그 재능에 따라 자원이 분배되는 것은 효율적인 일이므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또 서로 비교할 수 있는가라고 물어보면, 적확히 대답하기 어렵다. 과연 타고난 재능이라는 것은 그렇게 명쾌하게 인지되고, 비교할 수 있는 것일까?
올림픽 수영 챔피언들을 오랫동안 추적하며 연구한 사회학자 대니얼 F. 챔블리스2)에 따르면, 타고난 재능이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아무런 소용이 없다. 실제로 성공하기 전까지는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재능을 근거로 성공과 실패를 예측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수영선수로 성공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기초신체능력, 즉 근력과 심폐지구력의 한계치는 매우 낮으며 선수 간 차이가 그렇게 엄청나지 않다. 반면 수영선수로 성공하는 데에는 그런 차이 외에 기후가 온난한 곳에서 훈련받을 수 있는가 여부, 부모로부터 충분한 뒷바라지를 받는가 여부, 전문가로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는가 여부가 더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일반적으로 운동의 유형과 해당 종목에서 활약하는 프로 선수들의 인종과 출신 계층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운동 실력 뿐 아니라 차별적인 기회가 재능을 펼치는 데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다. 저자는 거듭해서 강조한다.
타고난 재능만으로는 절대 아무 것도 안된다.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재능은 반드시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어야 하고, 체계적으로 ‘계발’되어야 하고, 한 단계 더 ‘발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재능이 발견되지 않으면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갈 수 있다. 이는 결국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기반으로 사회적 이동성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끝나게 된다는 뜻이다.(199쪽)
재능 외에 능력주의의 또 다른 요건은 노력, 근면성실함이다. 작가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일 년 동안 웨이트리스 등 저임금 직종에 종사하며 미국 하층 노동자의 삶을 직접 경험하며 관찰한 결과를 토대를 책을 썼다. 그의 결론 중 하나는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가장 적은 급여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었다. 잡역부, 웨이트리스, 청소부들은 매일매일 몸이 부스러질 것처럼 힘들게 일하지만 이런 힘든 노동을 추가로 더 한다고 해서 부자가 되거나 상위 계층으로 올라설 수 없다. 반면, 어떤 직업들은 이들보다 훨씬 덜 일하고 있음에도 많은 돈을 받는다. 진짜 부자들은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막대한 재산이 그 자체로 돈을 벌어들인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일을 하든 근면성실함 그 자체는 노력에 대한 대가로 가장 많은 보상을 받기 위한 그 어떤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될 수 없다. 근면성실함은 중요하긴 하지만, 보상의 측면에서 보면 ‘무엇을 하는가’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논의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사회에 엄존하는 각종 차별(인종차별, 성차별, 외모차별 등)이 부당한 특혜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이런 차별을 철폐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부와 기회의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누진세를 강화하고, 차별을 없애고,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강화하고, 노조가입과 노동운동을 활성화할 것을 제안하며 책을 끝맺는다.
능력주의라는 ‘이상’은 과연 좋은 것인가
과연 그 정도 변화로 이 극심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지만, 이 책에서 정작 아쉬운 점은 다른 데 있다. 능력주의 신화를 비판한다는 애초 취지와 달리, 상속과 세습을 비판하는 데 내용의 대부분이 할애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을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능력주의 사회가 아니라 사실 상속주의 사회야!”
저자는 이 문장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사례와 통계를 동원했고 그 논의들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것은 상속사회‧세습사회에 대한 문제제기이지 능력주의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라 할 수 없다. 능력주의를 총체적으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먼저 능력주의가 현실에서 어떤 모습으로 구현(왜곡)되고 있는지를 비판해야 하며, 나아가 ‘진정한 능력주의’ 즉 능력주의의 이상적인 형태까지 비판해야 한다.
능력주의를 다루는 대다수 담론들은 상속과 세습의 악덕을 비판하며 능력주의의 미덕을 옹호하는 데 머무르고 만다. 저자는 이 책에서 능력주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지는 않지만, ‘진정한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데까지 이르지도 못한다. 저자는 어떤 부분에서 ‘진정한 능력주의’라는 것이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서술하다가 또 어떤 부분에서는 ‘진정한 능력주의’가 실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초반부와 후반부의 서술이 달라진다. 이를테면 다음 대목을 보라. “학력 자격증은 개인이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려주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능력주의가 위협을 받는다.”(79쪽) “진정한 기회평등을 이뤄내고 오직 능력만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 듯하다”(333쪽)
저자가 능력주의라는 이상 자체가 문제일 수 있음을 아예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 모두 잘 인정하려 들지 않는 한 가지 진실은, 진정한 기회평등이나 오직 능력만을 성공의 요인으로 인정하는 방식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공정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333쪽) 단언컨대 저 대목이야말로 능력주의 담론의 핵심 중 핵심이다. 유감스럽게도 그 핵심은 에필로그에서 살짝 언급될 뿐,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했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도 언급하다시피 그 문제의식은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말을 처음으로 널리 알린 마이클 영의 미래소설 『능력주의의 출현』에 이미 담겨있었다. 영이 그려낸 ‘능력주의 유토피아’는 처음엔 매우 공평하고 공정한 시스템처럼 보였지만, 점차 잔혹한 디스토피아로 변해간다. 능력 피라미드 상층부의 인간은 저능력자들을 노골적으로 경멸하고, 피라미드 아래의 사람들은 경멸당하고 착취당하면서도 저항할 능력조차 상실한 채 고통 받는다. 그렇다면 왜 이런 문제의식, 즉, 능력주의 자체가 문제라는 인식은 활발히 논의되지 못했을까?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째, 여전히 전근대적 형태의 세습과 상속이 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있어서다. 이런 행태에 맞서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가장 쉽게 동원할 수 있는 것이 능력주의이다. 둘째, 능력주의를 대체할만한 대안이 합의되지 않아서다. 성과를 어떻게 보상하고 생산된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라는 첨예한 문제에 있어서, 여전히 우리는 능력주의가 아닌 다른 대안을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했다. 또한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사회주의적 대안이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힘을 잃었기 때문에 능력주의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능력주의는 민주주의를 침식한다
이 서평에서 능력주의의 개념적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하기는 어렵다.3) 다만 분명한 것은, 오늘날 불평등은 세습이나 상속에만 기인한 것이 아니며, 능력에 따른 차별적 처우, 즉 능력주의에 상당 부분 기인한다는 것이다. 능력주의는 일견 정의로워 보이는 원칙이다. 그러나 그 내적 논리를 따져보면 그것은 고대 서구 정치철학의 자의적 정의론과 오류로 판명된 경제학 이론 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차별적 분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이다.4)
“사회의 경제적 혜택은 행위자의 능력 또는 생산에 대한 기여도에 비례해서 분배되어야 한다”는 응분론은 과거에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었지만, 오늘날 더 이상 그렇지 않다. 클라크의 한계생산력설이 틀렸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솔로가 개척한 지식유산 이론5)에 따르면, 개인의 특수한 재능들은 사회경제적 번영을 창출하는 데 있어서 극히 작은 역할밖에 수행하지 못한다. 반면 역사적으로 축적된 사회 전체의 지식과 문화는 번영을 창출하는 데 압도적으로 큰 기여를 한다. 쉽게 말해서, 능력주의 원칙에 의해 보상하는 것은 공동체 전체의 자산을 극소수가 독식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상속이나 세습은 신분에 따른 차별이며 불공정‧부정의라고 생각하는 반면 능력에 따른 차별은 공정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틀렸다. 둘 다 불공정이고 부정의이다. 더구나 능력주의는 정의를 가장하기 때문에 노골적 부정의인 상속주의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크리스 헤이즈는 “능력주의 사회는 빈부격차에 가장 둔감한 사회일 수 있다”며 ‘능력주의의 철의 법칙(The Iron Law of Meritocracy)’을 제기한 바 있다. “부자는 자기 능력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고 하고 빈자는 자기 능력의 한계로 빈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정당화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여러 소수자‧약자 혐오 담론에는 또렷한 특징이 하나 나타난다. 바로 능력주의다. 혐오대상이 되는 집단은 ‘능력과 자격이 되지 않는데 과분한 몫을 요구하는 자들’이다. 이주노동자, 장애인, 여성, 전라도 사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틈만 나면 소환되어 끔찍할 정도의 모멸을 뒤집어 써야 했다. 지역균등 제도로 대학을 가면 ‘지균충’, 월수입 200만 원 이하면 ‘이백충’으로 불리기도 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능력주의의 일종이다. 부정의를 개선하고 교정하는 대신 능력자가 되어 ‘초월’하라는 명령인 까닭이다. 능력은 이제 물신이 되고, 더 밀어붙이면 민주주의(democracy)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인민(demos)의 자리는 이제 능력/공로(meritum)가 차지한다.
어느 연구6)를 보면, 한국 청소년 다수가 능력주의를 깊숙이 내면화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장학금을 줄 때 가정 형편보다 성적을 고려해야 한다’ 같은 문항에서 이들은 높은 수준의 능력주의 태도를 보였다. 이 성향은 계층이나 학업 성적과 크게 관계없이 고르게 나타났다. 각자의 출발선이 아무리 달라도 객관적 지표나 성적에 따라 대우받아야 한다는 이런 생각은 실질적 공정성보다 형식적 공정성에 대한 집착을 보여준다. 이는 최근 한국사회에서 전면화되고 있는 약자‧소수자에 대한 적극적 배려 정책(affirmative action)에 대한 집단적 적대감의 원천일 수 있을 것이다.
능력주의의 위험을 말하면 많은 이들이 납득하기 어려워한다. “한국사회에선 세습과 상속 같은 전근대성 탓에 능력주의가 제대로 관철되지 못하는 게 더 문제 아닌가?” 물론 그렇다. 그런 전근대성은 여전히 잔존해 있고, 그것은 그것대로 직시해야할 문제다. 그러나 전근대의 문제가 일소되지 못한 것이 곧 근대의 문제를 방치해야할 이유는 될 수 없다. 근대의 계몽주의자들은 전근대성, 즉 상속주의를 해소하기 위해 능력주의를 도입했다. 그 결과 ‘신분에 따른 차별’ 원칙은 ‘능력에 따른 차별’ 원칙이 되었다. 그들은 평등을 표방했지만, 실은 차별을 반대하기 위해 또 다른 형태의 차별을 도입했을 뿐이다. 즉, 능력주의는 차별주의이다. 이 차별주의는 형식적 공정성을 추구할 뿐, 실질적 공정성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필연적으로 민주주의라는 평등주의를 침식할 수밖에 없다. 능력주의를 철저히 검토해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
1) 『21세기 자본』에서 토마 피케티는 초장기 시계열 분석을 통해 자산 불평등의 심각성을 논한 바 있다. 그런데 소득 불평등과 자산 불평등 중 어느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인지에 관해서는 이론이 있을 수 있다. 나라마다 불평등의 양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은 일반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자산 불평등이 심각한 사회로 알려져 있다. 한국 역시 자산 불평등도가 상승하는 추세지만, 미국 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사회가 소득 불평등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2) 본문 199쪽에 윌리엄 챔블리스라고 표기되어 있고, 원서도 마찬가지다. 명백한 착오다. 윌리엄 챔블리스는 실존인물이며 저명한 범죄학자지만, 올림픽 수영선수를 연구한 적은 없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인물은 대니얼 F. 챔블리스로 1980년대에 올림픽 수영 챔피언들을 연구한 논문과 저서를 발표했다.
3)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글 「한국 능력주의의 형성과 그 비판 -『고시계』 텍스트 분석을 중심으로」(2017, 성균관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제4장 및 제5장을 참고하라.
4) ‘고대 서구 정치철학의 자의적 정의론’은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비례적 정의(“동등함에도 동등하지 않은 몫을, 혹은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이 동등한 몫을 분배받아 갖게 되는” 것은 부정의하다는 주장)와 플라톤의 ‘아르케(arkhe) 논리(출생, 부(富), 능력에 따라 위계적으로 몫을 배분해야 한다는 논리)’를 가리킨다. 자크 랑시에르는 공동체에 고유한 몫을 설정하는 아르케 논리, 곧 불평등의 논리가 서양 정치철학의 기원에 내재하고 있음을 보이면서, 평등과 해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 아르케 논리와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오류로 판명된 경제학 이론’은 클라크의 한계생산력설로서 “모든 행위자에게 각자가 창출한 양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베블런, 로빈슨 등 여러 경제학자들에게 체계적인 비판을 받고 논파되었다. 결정적인 문제점은, 그 이론이 총생산물에서 어떤 생산요소가 얼마만큼의 비중으로 기여했는지를 전혀 밝혀내지 못하면서 마치 밝혀낸 듯이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존 롤즈는 『정의론』에서 능력주의 원칙이 왜 정의에 부합하지 못하는지를 서술하면서 한계생산력설의 오류를 주요 근거로 제시한다.
5) 이 연구영역의 출발은 1957년 발표한 솔로의 논문이었다; Robert M. Solow, 「Technical Change and the Aggregate Production Function」, 『The Review of Economics and Statistics』, Vol. 39, No. 3, 1957
6) 김경근, 「중․고등학생의 능력주의 태도 영향 요인에 대한 구조방정식 모형 분석」, 『교육사회학 연구』 제26권 제2호, 2016
이 겨울에 두 사람이 굴뚝에 올라가 있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뭐라도 해보자고 만든 굴뚝일보.
짧은 글귀 하나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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