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9. 15:27

자유의 모험 안전의 성채

<말과 활> 창간호에 실렸던 글. 키워드 하나씩을 택해 연재하려던 글이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첫회를 끝으로 중단하게 되었다. 잡지 목차에는 "안전의 성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성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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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사전_01_자기계발

 

자유의 모험, 안전의 성채

 

박권일 칼럼니스트· <소수의견><88만원세대> 저자

 

 

자기계발이라는 말에서 사람들은 적극성, 진취성, 능동성을 감지한다. 이 단어에는 미지근한 나태를 깨부수는 청량함과, 어설픈 냉소를 연소시키는 뜨거움이 혼재한다. 자기계발은 영혼을 좀먹는 불안을 이겨내는 가장 강력한 백신이며, 타인이 강탈할 수 없는 역능의 독점적 소유권이다. 자기계발하지 않는 자는 현실도피자이거나 낙오한 자이다. 불확실한 미래라는 절대적인 괴물 앞에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계발이라는 담론의 그물에 갇혀 있다. 자기계발은 거대한 산업인 동시에 문화이고 무엇보다 우리의 생활 그 자체가 되었다.


동시에 자기계발은 끊임없이 의미와 뉘앙스가 변화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최소한 한국사회에서 1990년대 이전의 자기계발’, 1990년대부터 2000년대의 자기계발은 동일한 사회적 함의를 지닌 단어라고 할 수 없다. 단순히 수사적 유행의 변화 때문은 아니다. 단단한 돌멩이가 세찬 비바람에 오랜 시간 노출되면서 형상이 바뀌어가듯, 자기계발 담론 역시 시간의 풍화를 겪었다.


그렇다면 2008년 이후의 자기계발은 어떨까. 한국은 여전히 신자유주의 담론이 판치는 사회이지만 세계적인 규모로 벌어진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은 분명 한국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실물경제를 보더라도 부동산 버블이 꺼지면서 이른바 일본형 불황에 대한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여전히 자기계발 담론은 가장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는 주제의 하나이지만, 자기계발 담론에 대한 회의감과 피로감도 전보다 확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자기계발 담론은 정치·사회·경제적 변화-여기서의 변화는 거시적이고 제도적인 변화이다-에 대한 적응이자 수반효과이면서 동시에 자기변모의 재귀적 원인들 중 하나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완벽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이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전개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역으로, 자기계발 담론이 정치·사회·경제적 변화의 원인이라거나 유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증명하기 까다로운 문제다. 담론과 주체, 그리고 그 주체의 사회적 역할들 사이의 상호작용뿐만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맥락 하에서의 특정한 상호작용 모두에 대해 선행분석이 필요한 까닭이다.


이 글은 자기계발 담론의 변화가 거시적 사회변동에 대한 적응의 결과물이라는 관점에서, 먼저 자기계발 담론의 변화양상을 간단히 일별한 다음 이에 대한 주요한 비판 담론을 다시 살펴볼 것이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자기계발이라는 키워드가 동시대 한국사회의 다른 멘탈리티(mentality: 집단심리, 사고양식) 혹은 사회적 담론들과 마주치는 장면이다. 특정한 담론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담론들이 부딪히고 공명하는 우발적 시공간에서 주체의 다층성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저항과 전복의 가능성은 홀연히 나타나는 무류한 변혁의 주체로부터가 아니라 차라리 그 다층적 주체들의 분기에서 출현할 수 있다. 여러 키워드들을 꼽아보고 또 교직시켜보려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기계발 담론 변천사

 

한국사회에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자기계발서의 원조라 할 만한 책은 무엇일까. 관점에 따라 여러 답이 있을 수 있다. 혹자는 1973년 노먼 필의 <적극적 사고방식>을 베스트셀러 자기계발서의 시초-당시엔 성공학이란 말이 더 익숙했다-라 말한다. 이 책이 향후 자기계발 담론에 크게 영향을 준 기념비적 성공학 서적인 것은 맞지만, 눈을 좀 더 앞으로 돌리면 개화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교과서로 지정되기까지 했던 새뮤얼 스마일스의 <자조론>이 그것. 집단행동이나 저항 같은 것에 신경 쓰지 말고 근면하게 돈을 벌어 자수성가하라는 내용의 이 책은 1871년 일본에서 출간되어 수십만 부가 판매됐고, 20세기 초반 조선에 소개되어 역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18년 육당 최남선이 처음 완역했고, 2006년 유명 자기계발 강사인 공병호가 다시 번역해 출간한 바 있다.


<자조론>을 근대 처세서의 원조이자 자기계발의 시초로 볼 수 있는 이유는 이 책에서 말하는 모범적 인간이란 봉건적 질서 또는 이데올로기 따위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의 살림살이를 꾸리는 데만 전념하는 개인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노동윤리와 사회규범이 절실했던 당시 위정자의 입맛에 딱 들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자기계발서가 전제하는 인간형도 실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해방 이후 급격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성공하는 방법에 관한 보다 현대적인 지침서들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했다. <성공학의 역사>라는 책에서 정해윤 씨는 한국에 성공학이 도입되고 확산되어온 과정을 흥미롭게 그린다. 그에 따르면 자기계발이 오늘날 거대한 사업이 된 데에는 크게 세 가지 배경이 있다. ‘개신교(대형교회)’, ‘기업교육(사원연수)’, 그리고 다단계(네트워크 마케팅)’가 그것이다.


한국 개신교, 특히 대형 교회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공격적인 전도 사업을 통한 불도저식 성장 모델이다. 개별 교회의 양적 성장(이른바 성전 사업, 즉 부동산의 확장과 재정의 확충을 가리킨다)을 추구하며, 철저한 현세중심주의적 가치관과 물질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기복신앙이란 점도 이들 대형교회들의 공통점이다.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유명한 노먼 필은 미국의 부흥목사이자 성공학 강사인데 이런 부류의 필자들이 쓴 책이 초기 선교 사업에서 주요한 교재로 채택이 되었다. 또한 기업교육 역시 자기계발 담론의 확산에 큰 축을 담당했다. 1977년 삼성의 사원연수원이 생긴 이래 수많은 기업들이 연수원을 지었고 조직 내부 성원들의 교육을 위해 자기계발 담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990년대 들어 본격화한 다단계(네트워크 마케팅) 붐은 생소한 마케팅 기법을 초창기에 진입한 멤버들에게 얼마나 잘 학습시켜 리더로 만드느냐가 관건이었다. 성공학과 처세술에 관련된 책들에서 추려낸 내용이 이들 교육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자기계발 담론은 신자유주의 시대와 함께 전성기를 맞는다. 한국에서 자기계발이란 단어가 대중화하고, 자기계발 서적들이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흥행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88만원 세대>가 촉발한 세대론의 유행을 타고 이른바 청춘 멘토링이 부상하기 시작한다. 신자유주의의 피로감이 슬슬 번져가니 닥치고 성공만 부르짖는 성공지상주의에서 슬쩍 비껴나 힐링 멘토들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최근 자기계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전례 없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하루아침에 이 산업의 해가 질 거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권력의 지배는 얼마나 성공적인가

 

한국의 자기계발 담론과 자기계발하는 주체에 관한 독보적인 작업이 2009년에 출간되었다. 서동진의 책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미셸 푸코의 선구적 개념들이 열어놓은 지평 위에 서 있다. 니콜라스 로즈 등 이른바 통치성 학파의 연구들과 노동현장의 변화를 추적한 최근 사회과학계의 경향을 박람하게 참조하면서, 서동진은 볼탄스키와 시아펠로가 68혁명 이후 등장한 프랑스의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을 분석한 것처럼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신자유주의와 함께 떠오른 새로운 정치적 합리성을 보여주고자 한다.

 

결국 권력은 지배받는 주체에게 직접 작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체성을 형성하고 그 주체가 자신의 삶에 작용하는 방식을 규정함으로써 주체를 멀리에서 지배한다. 신자유주의는 바로 그런 지배대상으로서의 주체를 빚어낸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기 삶을 대하는 주체에게 새로운 행위 가능성, 즉 개인적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면서 작용한다. 따라서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품고 있는 자유는 허위적인 기만도 아니고 한낱 허깨비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언제나 권력은 자유를 통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리고 지난 20년간 벌어진 한국사회의 변화 역시 이런 자유에의 의지 혹은 자기계발에의 의지와의 만남을 통해 가능했다. 그것은 반공훈육사회를 비판하며 시민이 스스로 자기 꿈과 참여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를 꿈꾸었던 자유주의자들과의 행복한 만남을 통해, 신세대 혁명에 기대어 모두 똑같은 생각을 주입하는 학교사회를 비판했던 자유주의자들과의 즐거운 조우를 통해, 튀는 인재를 기죽이고 진취적인 기업가정신을 질식시켰던 대기업병 중증 환자로 경제체제를 비판하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전문가와 기업가, 경영자들의 축복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체제는 국가의 기획이자 자본의 전략이었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주체성을 만들어냈던, 1980년대 이후 한국사회를 잠식했던 그리고 이제는 지배적인 자기의 윤리가 되어버린 자유의 꿈, 자기계발에의 의지가 만들어낸 산물이기도 했다.“

                 

                      -서동진,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2009)>, 돌베개, 367~368

 

 

반공훈육사회, 획일적 군사주의 문화와 가부장주의에 대한 문화적 반란이 이리저리 분출하던 1990년대의 서동진은 퀴어 담론의 한 가운데서 억압과 문화지체에 격렬히 저항하던 작가-투사(writer-combatant)였다. 한편 2000년대의 그는 자유저항90년대가 어떻게 신자유주의에 조응하는 자기계발하는 주체를 만들어냈는지를 폭로하는-과장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일종의 내부고발자가 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러한 변화에 대해 그가 개인적으로 해명할 까닭은 전혀 없다. 하지만 그의 설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1990년대적 멘탈리티가 신자유주의 체제와 합체하게 되는 과정이, 또한 신자유주의가 지배대상으로서의 주체를 빚어내는공정이 지나치게 매끄럽게 묘사되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지배가 자유를 통해 작동한다는 말은 옳다. 그런데 저항 역시 자유를 통해 작동한다. 그리고 편재하는 권력에 대한 설명에 방점을 찍다보면 직접적이고 야만적인 폭력, 제도적 강제와 억압, 무엇보다 주체의 저항과 적응이라는 상호작용과 역동성에 상대적으로 소홀해질 수 있다. 서동진 역시 이를 잘 알고 있기에 에필로그에서 자유의 이중적 성격에 대해 말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자유를 지지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에 관한 새로운 물음, 새로운 자유의 정치학을 통해 자유를 유지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자유를 동원함으로써 사회적 삶을 관리하고 조절하며, 나아가 개인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주체화해야할 것인가를 강제하는 것이 자유의 정치학이라면, 그런 자유의 동원을 다시 문제화함으로써 자유가 지닌 위험을 알리고 비판하는 것도 역시 자유의 정치학이어야 한다.”(같은 책 377)

신자유주의가 지배대상으로서의 주체를 빚어내며 그 지배 권력은 자유를 통해 작동한다는 것, 또한 훈육과 억압에 대한 반발이 자유에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로 이어졌다는 서동진의 분석은 분명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런 접근방식이 어쩔 수 없이 결여하는 지점 또한 있는 게 아닐까. 요컨대 폭압이 아니라 자유를 통해 작동하는 그 권력의 지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성공적이냐는 것이다. 자기계발하는 주체에 대한 분석을 동시대 권력의 배치와 분포를 그리는 리얼타임 맵에 비유할 수 있다면, 좌표는 제시되었는데 등고선과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기압이 빠져있는 격이다. 이는 자기계발 담론이 자기계발하는 주체를 형성하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이 괄호 쳐져 있기 때문에-이런 종류의 분석에서 추상수준을 낮추는 일은 너무나 어려워 보인다- 거의 필연적으로 예정된 귀결이다.

 

자유의 의지, 안전의 의지

 

개혁정권 10년 동안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자기계발에 열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질이 끝없이 하락하는 걸 경험했다. 열심히 자기계발만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88만원 세대는 차츰 그 성공의 사다리가 처음부터 끊어져 있었다는 진실을 깨닫고 경악했다. 자기계발에 실패한 주체에 대한 분석도 나오기 시작했다(곽중현, 자기계발로부터의 도피?, 한국사회학회 2009 전기 사회학대회). 이를 자기계발하는 주체에 대한 단순한 반작용이라 규정할 수는 없다. 순전히 자기계발만 하다가 어느 순간 자기계발을 전부 내팽개치는, 그런 식의 변화는 아닌 것이다.


훈육과 억압에 발랄한 문화적 자유로 저항하던 시기에도, 그리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절정이던 시기에도 모종의 이질적인 열망이 대중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이를 정상근대(正常近代) 열망이라고 부른다. 오랜 피식민 경험과 처참한 내전, 압축적 근대화 과정은 비극적 민족서사와 한()이라는 단어로 극화된 개인서사들을 만들어냈다. 파괴되거나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복원하고 정상화시키려는 시도와 요구는 그래서, 한국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사고방식이자 공동체의 보편서사이기도 하다. 민족국가의 구성에 대한 대중의 강렬한 정서적 회한(“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오욕의 역사” “민족정기가 훼손되고 허리가 끊긴 한반도”)도 이런 사고방식의 연장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인이 보는 한국사회는 언제나 선진국과의 강박적 비교를 통해 설명된다. 한국이 정상적으로 근대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공정한 규칙이 아직도 제대로 확립되지 못한 사회라는 식이다. 정상근대에 대한 열망은 자유의 의지’, 혹은 지대추구행위와 기득권 세력의 구태를 일소하는 도구로서의 신자유주의적 열망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공히 현실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이념에 가깝다. 그러나 정상근대 열망은 그런 종류의 변화를 추동하는 정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탈구된 현실을 안정화시키려는 정념에 더 닿아있다.

 

한국어로는 미번역된 1997년 작 <탈근대성과 그 불만(Postmodernity and its Discontents)> 서문에서 바우만은 이에 대한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준다. 이 책 제목이 차용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주저 <문명 속의 불만>(김석희 옮김, 열린책들 펴냄)에서 '문명'이란 근대적 문명이나 문화를 가리킨다. 근대 사회에서 개인들은 현실원칙으로 고정된 위생이나 질서 등의 가치들과 "사회적 지위의 하락에 대한 공포"로부터의 '안전'(security)을 얻었지만, 동시에 개인들이 쾌락과 즐거움을 누릴 자유가 억업당해야만 했고, 이 교환과정에서 일어난 상실이 곧 불만으로 표출된다고 해석한다. "억압된 것은 귀환하기" 때문이다.

이 교환 속 상실은 탈근대의 사회에서도 그 상실된 가치들의 자리만 뒤바뀐 채 고스란히 일어난다. 근대 사회와 달리 개인들이 각자의 행복을 맘껏 누릴 자유는 획득했지만, 대신에 안전 보장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만 한다. 이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열망은 공포를 유발하는 '위험한 개인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상태, '안전'(safety)을 향하게 된다. 내 자유의 장애물은 바로 옆의 이름 없는 불특정 타인들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사회국가'(social state)에서 '개인 안전 국가'(personal safety state).

근대 사회와 탈근대 사회를 매끄럽게 나눌 수 있는가의 문제는 차치하고, 이 해석은 지난 대선을 앞두고 출몰한 '안철수 현상'에 그대로 적용가능하다. 예컨대 박권일은 이 현상을 "압축적 근대화로 인한 피로감에 지친 개인들의 정상근대에 대한 열망"으로 읽어낸 적이 있다.“


-문순표, ‘'진격의 엘리트'인가, 게토에 갇힌 넷난민인가? 지그문트 바우만의 <리퀴드 러브>’, <프레시안> 201367

 

정상근대 열망을 다른 어떤 말로 부르든 간에 이는 잃어버린 것들의 회복이며 기본적으로 보수적 가치들과 친화적이다. 근대에 대한 열망이라고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대안을 강력히 추진한다기보다는 스테레오 타입화된 (서구식) 근대의 형상에 대한 상상적 회고에 불과하다. 부동산 불패신화의 종말과 장기불황의 스산한 기운 속에서 안철수 현상이 일어났고 또 다시 보수정권이 출범했다. 노무현 정부의 행정자치부는 이명박 정부에서는 행정안전부가 됐고 다시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안전행정부로 바뀌었다. 표현의 자유가 끝없이 위축되고 있지만 시민들의 저항은 그리 거세지 않다. 법원의 형량이 확연히 강화되고 있으며 싱가포르 같은 엄벌주의적 발상이 시민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간첩단 사건 따위보다 연쇄성폭행 사건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치안의 논리가 사회의 다른 가치를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이주노동자 등에 대한 혐오발언들도 갈수록 수위가 높아진다. ‘우리의 몫,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내부의 타자를 배제하거나 최소한 바깥에 분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자유보다 안전을 더 중요시하게 되었다고 단언하긴 어렵다. 하지만 자유의 모험에서 안전의 성채, 사람들의 시선이 옮겨온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과거 군부독재 시기로 회귀하자는 식의 반동적 정서는 아니다. 자기계발을 마음 편히 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국가가 안전과 치안을 더 강화해야한다는 느낌에 더 가깝다. ‘자기계발하는 주체싱가포르적 주체의 만남, 그리고 자유의 의지안전의 의지의 공존은 어찌 보면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기묘한 결탁이라 할 수 있다. 혹은, 이런 멘탈리티가 노골화되는 체제를 신자유주의 2.0’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2014. 2. 10. 08:32

'자아성형산업: 강신주 현상의 경우' 그리고 약간의 보론


자아성형산업: 강신주 현상의 경우




철학자 강신주 씨(이하 강신주)는 문화권력이다. 그의 강연은 늘 사람들도 북적이고, 그의 신간은 매체 지면의 목 좋은 곳을 오르내린다. 그는 얼마전 SBS 힐링캠프에서 공개강연을 진행해 화제가 됐다. 인문학적 깊이를 갖춘 강연자이자 상담자로서의 진면목이 드러났다는 칭찬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강신주의 글을 좋아했고 2000년대 중반 무렵엔 여기저기 읽어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강연에 매진하던 무렵부터는 이런 저런 이유에서 그의 글과 멀어졌다. 하루에 평균 2회 이상의 강연을 수년간이나 꾸준히 해왔다니, 일단 그의 체력에 먼저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이 글은 강신주 개인을 비판하는 글이라기보다는 '강신주 현상'을 읽는 하나의 관점으로 읽혔으면 한다. 그를 두고 '인문학 팔아먹는 장사치'나 '사기꾼'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다. 하지만 최근의 행보들, 그리고 몇몇 글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강신주라는 아이콘을 통해 우리의 오늘을 한번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다. 

 

모든 나쁜 것으로서 '자본주의'

 

<유한계급론>('한가한 무리들'이라 번역되기도 한다)에서 베블런은 상류계급이 얼마나 쓸데없는 짓에 돈과 시간을 과시적으로 낭비하는지에 대해 거의 가학적인 집요함으로 해부한다.  이 책이 고전으로 이름 날리고 있는 이유는 단지 부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기행을 까발렸기 때문이 아니다. 부자가 부자인 이유는 그들이 금욕적이고 절제할 줄 알기 때문이며 가난한 자가 가난한 이유는 눈앞의 쾌락 앞에서 절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당시의 지배적인 학설을 산산조각냈기 때문이다. 

 

베블런이 20세기 후반까지 살아있었다면 19세기 부르주아 계급만큼이나 여가를 확보한 지난 세기 중산층, 중간계급의 소비문화도 그의 수술대에 올랐을지 모른다. 베블런은 20세기 초에 죽었지만 그의 후예들은 좀 엉뚱한 분야에서 튀어나왔다. 미국 중산층을 대형 쇼핑몰에 무리지어 몰려다니는 영혼 없는 좀비로 탁월하게 형상화한 예술가들, 그들이 바로 '베블런의 적자'였다. 

 

19세기의 부르주아들, 20세기 후반의 미국 중산층은 탁월한 학자나 예술가에 의해 설명되어야하는 대상으로 존재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깨닫지 못하는 체제의 향유자들이었고, 그래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은 어떨까. 월스트리트를 점거하고, 광장에서 촛불을 드는 중산층들은 과시적 소비자나 영혼 없는 좀비와는 좀 달라 보인다.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에 몸서리치고, 지구온난화를 진심으로 우려하며, 유기농 농산물을 공동구매하거나 아예 도시를 떠나 귀농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강신주 현상을 만들어낸 건 바로 그런 사람들의 일부다. 강신주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행복한 공동체를 원하는가? 재래시장을 살리고 싶은가? 생태문제를 해결하고 싶은가? 가족들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안전하고 싱싱한 식품을 원하는가? 그럼 냉장고를 없애라! 당장 냉장고가 없다고 해보자. 우리 삶은 급격하게 변할 수밖에 없다. 직접 재래시장에 들러서 싱싱한 식품을 사야 한다. 첨가제도 없고, 진공포장 용기에 담겨 있지 않다. 식품을 사가지고 오자마자, 우리는 가급적 빨리 요리를 해야 한다.(중략)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 그것은 이제 상식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절망한다. 자본주의는 너무나 거대한 체제이기에, 우리가 길들이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변명 아닐까.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일은 사실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냉장고를 없애라! 한 번에 없앨 자신이 없다면, 냉장고의 용량이라도 줄여라! 가족 건강 문제, 생태 문제, 이웃 공동체 문제, 재래시장 문제가 그만큼 해결될 테니까 말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 “여자가 여자에게 추천하는 속이 넓은 냉장고”의 유혹, “살고 먹고 사랑하는 데 필수적인 냉장고”라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냉장고의 폐기, 혹은 냉장고 용량 축소! 여기가 바로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내릴 수 있는가!"


강신주,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 <경향신문> 2013.7.21

 

냉동기술의 발명이 얼마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기아와 질병에서 구해냈는지에 대한 인식은 강신주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냉장고 없이 신선하고 질 좋은 식자재를 그때그때 구해 먹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노동인지, 혹은 특권인지에 대한 고려도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얼마나 남들과 다른 방식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느냐이다. 강신주는 글이나 강연에서 자본주의의 폭력이 얼마나 인간성을 황폐하게 하는지를 늘 강조한다. 거의 부흥회를 연상시키는 열광적인 분위기의 어느 강연에서는 지폐를 공중에 뿌리는 퍼포먼스도 나왔다고 한다. 

 

강신주에게 자본주의는 역사적 산물이자 사회적 관계로서 생산과 축적 양식, 착취와 억압의 메커니즘이 아니다. 그에게 자본주의란 인간을 소외시키는 지폐, 공동체를 파괴하는 냉장고, 서울역 앞의 노숙자 등의 '물화'된 사물이다. 그리고 때로 자본주의는 '기술문명'이 되기도 하고, '신자유주의'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물질만능주의'나 '관료주의'가 되기도 한다. 요컨대 강신주가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의 그 자본주의란 우리를 둘러싼 '일상적이고 총체적인 악/고통'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그의 '반자본주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 모색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자기소외적인 현대사회의 상투성으로부터의 개인적 해방'이란 의미에 더 가깝다. 자본주의에 대한 이런 불분명하고 미분화된 인식은 구조적 모순에 대한 집단적 해결이 아니라 개인적 적응전략 또는 자족적 저항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강신주가 상담자에게 내놓는 답변 하나하나가 그 증거다. 

 

자본주의 vs. 강한 자아

 

2012년에 강신주는 수치와 치욕에 대해 쓴 글에서 서울역 앞 노숙자를 "한 마디로 자신이나 세상에 대해 마비되어 있는 존재"라고 규정한다. "자존심을 느낀다면 어떻게 노숙자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니 ‘마비’가 편한 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노숙자를 하나의 인격자로 깨울 수 있을까? 아니, 어느 순간 노숙자는 자존심을 가진 인간으로 부활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 칼럼을 비판했다. 노숙자가 왜 발생하는지에 대한 인식 없이 노숙자들을 수치도 모르는 인간으로 비하하고 있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이런 비난을 받은 근본적인 이유는 글을 못 썼기 때문이다. 논점이 제대로 살아있지 못하고 중언부언하는 글이어서 노숙자를 비난하는 글로 읽힌 측면이 있다. 그러나 강신주의 진의는 그런 게 아니었을 게다. 그 정도 지식인이 노숙자 문제를 순전히 개인 책임으로 인식할 리가 있을까? 날마다 자본주의의 병폐를 이야기하는 그가? 사실 그는 노숙자 문제에 대해 여러 강연과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혹시 노숙자를 본 적이 있나요? 이 분들이 왜 거리에 나앉은 걸까요? 길거리가 좋아서? 그럴 리는 없겠죠. 이분들은 대부분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노숙자를 양산하는 체계입니다"


강신주 외, 나에게 돈이란 무엇일까, 철수와 영희, 2012, 165쪽

 

강신주는 자본주의가 "노숙자를 양산하는 체계"라고 말한다. '노숙자 발언'으로 그를 비난했던 이들 대부분이 아마 이 명제에 동의할 것이다. 그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노숙자를 만들어낸 사회구조니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택광은 강신주의 노숙자 발언이 뒤늦게 화제가 되자 트위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제의 본질은 "강신주가 노숙자를 수치스러운 존재라고 말했다"가 아니다. 그의 진의가 "노숙자는 수치스럽다"였을 리가 있겠는가. '완전한 자기의 완성'을 추구하려면 본받지 말아야할 존재로 노숙자를 제시한 것.(2014.1.18)" "완전한 자기의 완성"은 좀 어색한 표현이지만 어쨌든 논란 당시 나온 이야기 중 칼럼의 진의에 가장 가까운 말이다. 나는 '강한 자아'라고 고쳐 부르고 싶은데, 어쨌든 이런 멘탈리티는 강신주의 최근 글과 강연을 모두 관통하는 핵심사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강한 자아'는 물론 초인을 의미하는 게 아니며, 자본주의 사회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지배계급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강한 자아는 악의와 소외로 가득찬 자본주의 세계에서 인간성을 지킬 수 있는 자아를 의미한다. 거대한 악에 저항하는 작은 개인의 숭고성! 바로 이런 이유에서 강한 자아는 필연적으로 멜랑콜리한 주체가 된다. 강신주는 "성공할 거라 믿고 열심히 노력하면 이미 너는 행복해 있다!" 주장하는 자기계발 강사들과 다르다. 그는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는 서바이벌 전문가처럼 말하길 좋아한다. 

 

제가 늘 강의를 하면서 하는 말이지만,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게 급류 같은 데 던져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자본주의라는 급류에 떨어진 거죠. 원하지 않지만 휩쓸리게 되어 있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버티는 거, 저는 이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배우고 공부합니다. 

                                      

강신주 외, 나에게 돈이란 무엇일까, 철수와 영희, 2012, 206쪽

 

물론 살아남는 자아는 강한 자아이다. 하지만 단지 생존만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것이 강신주의 매력이다. 어떻게 살아남는가? 다시 말해서 어떻게 인간의 존엄(dignity)을 지키며 살아남느냐가 관건이다. 강신주의 인문학이란 내가 보기엔 바로 이 하나의 소실점으로 전부 수렴된다. 이른바 "돌직구"라 불리는 그의 멘토링 스타일이 나오는 것은 이 대목이다. 얼마 전 방영된 힐링캠프에서 어느 시청자가 '은퇴해 병들고 늙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집착하는데 너무 힘들다'고 상담을 청하자 강신주는 대뜸 "아버지를 걱정하는 게 아니고 아버지를 제거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되묻는다. 욕망에 가면을 뒤집어씌우지 말고 그것을 직시하라는 이야기다. 강신주의 인문학에서 이 '돌직구를 맞는' 단계는 필수적이다. 화폐로 매개된 관계, 속물적 욕망으로 더러워진 내면을 객관화시키지 않으면 윤리적 주체, 자본주의라는 급류에 견딜 수 있는 강한 자아는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라는 급류에 견딜 수 있는 강한 자아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 강신주에 따르면 이건 '의지'에서 나온다. 어떤 청소년이 강연에서 이렇게 물었다. "돈이 인간관계를 매개하지만 단절시키는 측면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러한 단절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강신주는 이렇게 답했다.


"이걸 스스로 의식하고 극복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만약 친구와 나 사이에 돈이라는 매개가 끼어든다, 이것 때문에 사이가 불편해진다 싶으면 의도적으로 돈을 배제하는 겁니다. 돈 때문에 만난 친구라면 돈 말고 다른 즐거움을 찾는다거나, 돈을 매개로 한 만남 대신 인간적인 만남을 찾는다거나 하는 것도 방법이겠죠. 그 과정에서 좀 더 성숙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겁니다."(같은 책 173쪽)

   

자아성형산업의 미래

 

강신주는 '나는 사람들에게 힐링을 하는 게 아니며 멘토도 아니'라고 말해왔다. "나를 멘토로 생각하고 강의를 들으러오면 나한테 욕 듣는다. 내가 해주는 건 네 고민은 별거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뭔가 고민이 있으면 억지로 어렵게 만들고 그걸 고민하는 척 한다."(<더 뮤지컬 2013년 5월호) 문제는 멘토 스스로가 자신이 멘토가 아니라고 부인해도 사람들이 그를 계속 멘토라고 생각하고, 그의 효용이 떨어지면 또 다른 멘토를 찾아 떠날 것이라는 점이다. 강신주가 멘토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끝없이 멘토를 욕망하는 사회야말로 숙고의 대상이며 그런 욕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게 바로 인문정신이다. 강신주 스스로가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뭔가 '다른 것'으로 포장하고 구별짓는 일은 마케팅 전략 차원에서는 비난할 일이 아니겠다. 그러나 철학자라면 그런 자신의 '구별하고자 하는 욕망'에게도 정직한, 혹은 풍자적인 돌직구를 날려야 하지 않을까. 

 

몰락해가는 불안한 중산층에게 비교적 싼 비용으로 최대한의 지적 쾌락과 위안을 제공해주는 것이 바로 '인문 멘토링'이다. 그 사회적 순기능은 분명히 적지 않다. 단언컨대 여기엔 어떤 비아냥도 없다. 카리스마적 스타강사들이 강연을 열면 그야말로 구름처럼 청중이 몰려든다. 말 잘하는 멘토들은 청중들로부터 거의 집단 엑스터시에 가까운 반응을 끌어낸다고 한다. 삶의 고통과 불안에 시달리던 어떤 이에게 강신주의 글 한줄, 말 한 마디가 구원일 수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절절한 '간증'을 보라.

 

"저는 여자로 태어나 여자로서의 소양으로 엄마와 아내와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살아야하는 역할을 할 때  행복한줄 알고 살다가 문득 견딜 수 없게 불행하게 느껴져서 죄책감과 더 이상은 살아낼 수 없다고 울음이 나올 때 만난 게 강신주의 인문학이죠“


"더 이상 실체를 알 수 없는 죄책감으로 해방됐고 역할이 아닌 그냥 나로서 살려고 쌈질하면서 살고 있죠. 강신주 박사의 인문학은 그냥 인간입니다."


https://twitter.com/wj2151112/status/424359348010115072

https://twitter.com/wj2151112/status/424360369167945728

 

위의 고백에서 "강신주의 인문학" 대신 어떤 종교나 다단계 마케팅을 집어넣어도 별 위화감 없이 들린다(물론 나는 다단계나 사이비 종교보다 강신주의 인문학이 한 사람의 개인에게 훨씬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진부하고 모호한 휴머니즘이지만, 세상에 해악을 끼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내가 고통 받을 때 위무해줄 무언가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굳이 인문학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연애상담, '픽업아티스트'의 헌팅요령 강의, 자기계발 멘토링이 대중적 콘텐츠가 된지도 오래 되었다. 구글의 광고처럼, 각 개인에 적합한 상담을 자신의 취향에 맞는 컨설턴트로부터 구입하는 사회가 도래했다. 이 모든 것들은 약한 자아에 관념적 보형물을 집어넣는 수술이라는 점에서 자아성형산업(ego-plastic surgery industry)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며 남들과의 끝없는 비교에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지는 사람들은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데 모든 이가 프로작을 처방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자아성형산업의 미래는 무척 밝다.

 

자아성형산업의 미래가 밝은 또 하나의 이유는 한국 사회의 문제해결방법이 탈사회적이고 탈정치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제도적 해결방식에 대한 극단적 불신("다 똑같은 놈들")과 각개약진의 해법("억울하면 출세해라")이 일반화되어 있다. 기업, 종교단체가 아닌 다른 형태의 사회적 조직을 별로 경험해보지 못한 한국인들은 문제가 생기면 주변 사람들을 조직하고 작당(作黨)하는 것보다는 어떤 '큰 타자'를 호명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개인은 '현자'에게 고통을 위로받고, 집단이 되면 왕(대통령)과 직접 대면하려 한다. 그러나 거기에 사회적인 것, 그리고 정치적인 것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남은 건 축제와 탈진의 반복이며 영원한 각개약진의 개미지옥이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9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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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강형준님의 강신주 관련 글에 대해 코멘트하는 형식으로 보론을 덧붙여 보았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23145.html

https://www.facebook.com/hyongjun.moon/posts/3840746952848



"나는 오히려 대중 인문학 강사들의 강의태도야 말로 대중을 비하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왜 대중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왜 대중은 무조건 쉬운 말로 농담을 섞어가며 재밌게 해야, 무조건 인생이야기를 해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대중이 무지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무지한 존재로 대하는 것이다."


"찰스 디킨스와 토마스 하디는 대학교를 나오지 못했지만 영문학 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을 남겼다. 마가렛 대처의 전기에 보면, 그녀의 아버지는 13살 이후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잡화상 주인이었지만 그 박식함으로 온 동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고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 어떤 대통령보다 똑똑하고 지혜로웠다. 대학 학위증이 없는 소설가 장정일의 그 놀라운 독서와 지식, 통찰은 어떤가. 이런 위대한 독학자가 이젠 없다."


"텔레비전이나 팟케스트의 진행자가 ‘당신이 세상의 주인이다!’라고 말하면 감동해서 우는 낯뜨거운 짓 말고, 스스로 공부하면서 그걸 느껴야 하는 것이다. 그랬을 때, 오직 그랬을 때, 노예는 비로소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강신주를 비판한 것도, 힐링을 비판한 것도 아니다. 그런 것들에 나는 별 관심이 없다. 내가 비판한 것은 오늘날 ‘대중’의 이런 노예적 상태다."



문강형준의 글에는 바람직한 이야기도 있다. '대중인문학 강사들이야말로 대중을 비하하고 무지한 존재로 대하고 있다'는 지적은 나 역시 평소 하던 주장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문제를 지나치게 축소해서 자신의 틀 속에 욱여넣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첫째는 '영역'의 문제다. 미디어스 글에서 밝혔듯 강신주 현상에서 궁극적으로 바라보아야할 문제는 단지 '대중인문학'의 어떤 병폐만은 아니다. 오늘날 자아성형산업은 인문학 뿐 아니라 심리학, 경영학, 자서전 등등 수많은 포맷으로 가공되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사실 '대중인문학'의 병폐는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다. 문강형준이 찬사를 보내는 그 '독학자의 시대'에는 그런 게 없었을까? 있었다. 그때는 지금 강신주의 인문학보다 훨씬 조야한 형태의 담론들도 많았다. 문제를 대중인문학의 차원에 한정하는 것은 지식교양으로 유통되는 상당수가 자기계발과 힐링의 형식이라는 점을 놓치게 되고, 문제의 현재성을 흐려놓기 쉽다. 

둘째는 낡은 계몽주의다('낡은'이라는 말을 붙인 것은 계몽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문강형준이 오늘의 처참한 대중인문학의 상태를 강조하기 위해 독학자의 예를 든 의도야 알겠지만, 과거와 현재의 대비를 통해 과거가 신비화/미화되고 '그 때는 이랬는데 요즘 애들은 왜 그러냐'는 훈계로 읽히기 쉽다. 그는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위대한 독학자가 된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례를 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나온 목포상고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나온 부산상고는 지역의 가난한 수재들이 많이 가던 명문학교였다. 학벌이 없음에도 높은 지성을 갖출 수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드는 사례가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긴 한데, 현재의 학벌서열에 근거한 무신경한 비교에 문화연구자가 한몫 거들어서야 되겠는가. 냉소적으로 말한다면 '위대한 독학자'의 사례로 선택될 수 있으려면 유명한 정치인, 변호사, 작가,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든가 하다못해 수상의 아버지여야 한다. 인문학 공부에 대한 규범적 태도가 엘리트주의의 함정에서 자유롭기란 그만큼 어렵다. 

'깊이 공부하고 스스로의 머리로 사유하는 대중'이 우리가 지향해야할 하나의 이상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옳다. 대중은 무지하지 않으며 복잡하고 깊은 지식을 얼마든지 흡수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대중의 노예적 상태"에 대한 비판이 '인문학을 스스로 공부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말하는 것은 이상한 동어반복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순전히 혹세무민하는 대중인문학 강사들의 책임인가? 물론 그들에게도 책임은 있다. 그래서 강신주 현상의 비판에는 강신주의 인문학에 대한 비판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머무르는 순간, 비판은 결국 낡은 계몽주의가 되어버린다. '너희들이 열심히 안배워서 노예'란 말과 다름없다.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인문학을 깊이 배우고 안배우고의 문제는 핵심이 아니다. 

독학자는 지금도 있다.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극소수다. 모두가 인문학을 '위대한 독학자'처럼 열정적으로 배울 수는 없고 꼭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진정한 배움'을 갈망하는 대중의 욕망과 실제로 배우는 내용이 끊임없이 괴리한다는 것이다. '진짜 인문학적 가르침'을 실천하는 이들이 한국사회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문강형준은 독학자가 사라졌다 말하지만 나는 느리고 힘들어도 스스로 사유하는 법을 익히는 독학자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왜 대다수 사람들은 그 길을 가지 않는가? "쉽고 편하고 위험하지 않"은 인문학만 유행하는 것은 권력이 원하기 때문인가 대중이 원하기 때문인가 둘 다인가? 사람들은 정말로 '독학자의 시대'보다 우매해졌을까? 의지가 나약해서? 미디어 때문에? 

지식인이란 이런 문제에 어떻게든 답을 하려 애쓰는 사람이지, '열심히 안해서 그렇다'고 호통치는 사람이 아니다. 반복하건대 이건 인문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불안과 우울을 힐링받고자 하는 대중의 갈망을 해소하려면 '진정한 인문학'만으론 부족하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해소되려면 사회의 문제해결방법이 변해야 하고 그러기위해서는 삶의 조건을 변화시켜야 한다. 이를테면 '저녁이 있는 삶'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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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문학 '공부'라는 '규범적' 차원에 강신주 현상을 국한시켜 본 걸까.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엘리트주의 대 포퓰리즘'이라는 대립쌍에 이어지고. 결국 문제는 '계몽이 곧 해방'이라는 금언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현실. 가령 계몽된 시민(Enlightened Citizen)이 '깨시민'으로 불리는 현실." 


https://twitter.com/leereel/status/432428882344431616

 

문강형준의 접근이 가진 문제점을 위의 내 글보다 더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는 에오님(‏@leereel) 의 코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