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9. 15:27

자유의 모험 안전의 성채

<말과 활> 창간호에 실렸던 글. 키워드 하나씩을 택해 연재하려던 글이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첫회를 끝으로 중단하게 되었다. 잡지 목차에는 "안전의 성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성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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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사전_01_자기계발

 

자유의 모험, 안전의 성채

 

박권일 칼럼니스트· <소수의견><88만원세대> 저자

 

 

자기계발이라는 말에서 사람들은 적극성, 진취성, 능동성을 감지한다. 이 단어에는 미지근한 나태를 깨부수는 청량함과, 어설픈 냉소를 연소시키는 뜨거움이 혼재한다. 자기계발은 영혼을 좀먹는 불안을 이겨내는 가장 강력한 백신이며, 타인이 강탈할 수 없는 역능의 독점적 소유권이다. 자기계발하지 않는 자는 현실도피자이거나 낙오한 자이다. 불확실한 미래라는 절대적인 괴물 앞에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계발이라는 담론의 그물에 갇혀 있다. 자기계발은 거대한 산업인 동시에 문화이고 무엇보다 우리의 생활 그 자체가 되었다.


동시에 자기계발은 끊임없이 의미와 뉘앙스가 변화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최소한 한국사회에서 1990년대 이전의 자기계발’, 1990년대부터 2000년대의 자기계발은 동일한 사회적 함의를 지닌 단어라고 할 수 없다. 단순히 수사적 유행의 변화 때문은 아니다. 단단한 돌멩이가 세찬 비바람에 오랜 시간 노출되면서 형상이 바뀌어가듯, 자기계발 담론 역시 시간의 풍화를 겪었다.


그렇다면 2008년 이후의 자기계발은 어떨까. 한국은 여전히 신자유주의 담론이 판치는 사회이지만 세계적인 규모로 벌어진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은 분명 한국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실물경제를 보더라도 부동산 버블이 꺼지면서 이른바 일본형 불황에 대한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여전히 자기계발 담론은 가장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는 주제의 하나이지만, 자기계발 담론에 대한 회의감과 피로감도 전보다 확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자기계발 담론은 정치·사회·경제적 변화-여기서의 변화는 거시적이고 제도적인 변화이다-에 대한 적응이자 수반효과이면서 동시에 자기변모의 재귀적 원인들 중 하나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완벽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이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전개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역으로, 자기계발 담론이 정치·사회·경제적 변화의 원인이라거나 유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증명하기 까다로운 문제다. 담론과 주체, 그리고 그 주체의 사회적 역할들 사이의 상호작용뿐만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맥락 하에서의 특정한 상호작용 모두에 대해 선행분석이 필요한 까닭이다.


이 글은 자기계발 담론의 변화가 거시적 사회변동에 대한 적응의 결과물이라는 관점에서, 먼저 자기계발 담론의 변화양상을 간단히 일별한 다음 이에 대한 주요한 비판 담론을 다시 살펴볼 것이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자기계발이라는 키워드가 동시대 한국사회의 다른 멘탈리티(mentality: 집단심리, 사고양식) 혹은 사회적 담론들과 마주치는 장면이다. 특정한 담론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담론들이 부딪히고 공명하는 우발적 시공간에서 주체의 다층성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저항과 전복의 가능성은 홀연히 나타나는 무류한 변혁의 주체로부터가 아니라 차라리 그 다층적 주체들의 분기에서 출현할 수 있다. 여러 키워드들을 꼽아보고 또 교직시켜보려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기계발 담론 변천사

 

한국사회에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자기계발서의 원조라 할 만한 책은 무엇일까. 관점에 따라 여러 답이 있을 수 있다. 혹자는 1973년 노먼 필의 <적극적 사고방식>을 베스트셀러 자기계발서의 시초-당시엔 성공학이란 말이 더 익숙했다-라 말한다. 이 책이 향후 자기계발 담론에 크게 영향을 준 기념비적 성공학 서적인 것은 맞지만, 눈을 좀 더 앞으로 돌리면 개화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교과서로 지정되기까지 했던 새뮤얼 스마일스의 <자조론>이 그것. 집단행동이나 저항 같은 것에 신경 쓰지 말고 근면하게 돈을 벌어 자수성가하라는 내용의 이 책은 1871년 일본에서 출간되어 수십만 부가 판매됐고, 20세기 초반 조선에 소개되어 역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18년 육당 최남선이 처음 완역했고, 2006년 유명 자기계발 강사인 공병호가 다시 번역해 출간한 바 있다.


<자조론>을 근대 처세서의 원조이자 자기계발의 시초로 볼 수 있는 이유는 이 책에서 말하는 모범적 인간이란 봉건적 질서 또는 이데올로기 따위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의 살림살이를 꾸리는 데만 전념하는 개인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노동윤리와 사회규범이 절실했던 당시 위정자의 입맛에 딱 들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자기계발서가 전제하는 인간형도 실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해방 이후 급격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성공하는 방법에 관한 보다 현대적인 지침서들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했다. <성공학의 역사>라는 책에서 정해윤 씨는 한국에 성공학이 도입되고 확산되어온 과정을 흥미롭게 그린다. 그에 따르면 자기계발이 오늘날 거대한 사업이 된 데에는 크게 세 가지 배경이 있다. ‘개신교(대형교회)’, ‘기업교육(사원연수)’, 그리고 다단계(네트워크 마케팅)’가 그것이다.


한국 개신교, 특히 대형 교회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공격적인 전도 사업을 통한 불도저식 성장 모델이다. 개별 교회의 양적 성장(이른바 성전 사업, 즉 부동산의 확장과 재정의 확충을 가리킨다)을 추구하며, 철저한 현세중심주의적 가치관과 물질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기복신앙이란 점도 이들 대형교회들의 공통점이다.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유명한 노먼 필은 미국의 부흥목사이자 성공학 강사인데 이런 부류의 필자들이 쓴 책이 초기 선교 사업에서 주요한 교재로 채택이 되었다. 또한 기업교육 역시 자기계발 담론의 확산에 큰 축을 담당했다. 1977년 삼성의 사원연수원이 생긴 이래 수많은 기업들이 연수원을 지었고 조직 내부 성원들의 교육을 위해 자기계발 담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990년대 들어 본격화한 다단계(네트워크 마케팅) 붐은 생소한 마케팅 기법을 초창기에 진입한 멤버들에게 얼마나 잘 학습시켜 리더로 만드느냐가 관건이었다. 성공학과 처세술에 관련된 책들에서 추려낸 내용이 이들 교육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자기계발 담론은 신자유주의 시대와 함께 전성기를 맞는다. 한국에서 자기계발이란 단어가 대중화하고, 자기계발 서적들이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흥행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88만원 세대>가 촉발한 세대론의 유행을 타고 이른바 청춘 멘토링이 부상하기 시작한다. 신자유주의의 피로감이 슬슬 번져가니 닥치고 성공만 부르짖는 성공지상주의에서 슬쩍 비껴나 힐링 멘토들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최근 자기계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전례 없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하루아침에 이 산업의 해가 질 거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권력의 지배는 얼마나 성공적인가

 

한국의 자기계발 담론과 자기계발하는 주체에 관한 독보적인 작업이 2009년에 출간되었다. 서동진의 책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미셸 푸코의 선구적 개념들이 열어놓은 지평 위에 서 있다. 니콜라스 로즈 등 이른바 통치성 학파의 연구들과 노동현장의 변화를 추적한 최근 사회과학계의 경향을 박람하게 참조하면서, 서동진은 볼탄스키와 시아펠로가 68혁명 이후 등장한 프랑스의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을 분석한 것처럼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신자유주의와 함께 떠오른 새로운 정치적 합리성을 보여주고자 한다.

 

결국 권력은 지배받는 주체에게 직접 작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체성을 형성하고 그 주체가 자신의 삶에 작용하는 방식을 규정함으로써 주체를 멀리에서 지배한다. 신자유주의는 바로 그런 지배대상으로서의 주체를 빚어낸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기 삶을 대하는 주체에게 새로운 행위 가능성, 즉 개인적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면서 작용한다. 따라서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품고 있는 자유는 허위적인 기만도 아니고 한낱 허깨비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언제나 권력은 자유를 통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리고 지난 20년간 벌어진 한국사회의 변화 역시 이런 자유에의 의지 혹은 자기계발에의 의지와의 만남을 통해 가능했다. 그것은 반공훈육사회를 비판하며 시민이 스스로 자기 꿈과 참여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를 꿈꾸었던 자유주의자들과의 행복한 만남을 통해, 신세대 혁명에 기대어 모두 똑같은 생각을 주입하는 학교사회를 비판했던 자유주의자들과의 즐거운 조우를 통해, 튀는 인재를 기죽이고 진취적인 기업가정신을 질식시켰던 대기업병 중증 환자로 경제체제를 비판하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전문가와 기업가, 경영자들의 축복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체제는 국가의 기획이자 자본의 전략이었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주체성을 만들어냈던, 1980년대 이후 한국사회를 잠식했던 그리고 이제는 지배적인 자기의 윤리가 되어버린 자유의 꿈, 자기계발에의 의지가 만들어낸 산물이기도 했다.“

                 

                      -서동진,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2009)>, 돌베개, 367~368

 

 

반공훈육사회, 획일적 군사주의 문화와 가부장주의에 대한 문화적 반란이 이리저리 분출하던 1990년대의 서동진은 퀴어 담론의 한 가운데서 억압과 문화지체에 격렬히 저항하던 작가-투사(writer-combatant)였다. 한편 2000년대의 그는 자유저항90년대가 어떻게 신자유주의에 조응하는 자기계발하는 주체를 만들어냈는지를 폭로하는-과장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일종의 내부고발자가 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러한 변화에 대해 그가 개인적으로 해명할 까닭은 전혀 없다. 하지만 그의 설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1990년대적 멘탈리티가 신자유주의 체제와 합체하게 되는 과정이, 또한 신자유주의가 지배대상으로서의 주체를 빚어내는공정이 지나치게 매끄럽게 묘사되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지배가 자유를 통해 작동한다는 말은 옳다. 그런데 저항 역시 자유를 통해 작동한다. 그리고 편재하는 권력에 대한 설명에 방점을 찍다보면 직접적이고 야만적인 폭력, 제도적 강제와 억압, 무엇보다 주체의 저항과 적응이라는 상호작용과 역동성에 상대적으로 소홀해질 수 있다. 서동진 역시 이를 잘 알고 있기에 에필로그에서 자유의 이중적 성격에 대해 말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자유를 지지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에 관한 새로운 물음, 새로운 자유의 정치학을 통해 자유를 유지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자유를 동원함으로써 사회적 삶을 관리하고 조절하며, 나아가 개인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주체화해야할 것인가를 강제하는 것이 자유의 정치학이라면, 그런 자유의 동원을 다시 문제화함으로써 자유가 지닌 위험을 알리고 비판하는 것도 역시 자유의 정치학이어야 한다.”(같은 책 377)

신자유주의가 지배대상으로서의 주체를 빚어내며 그 지배 권력은 자유를 통해 작동한다는 것, 또한 훈육과 억압에 대한 반발이 자유에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로 이어졌다는 서동진의 분석은 분명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런 접근방식이 어쩔 수 없이 결여하는 지점 또한 있는 게 아닐까. 요컨대 폭압이 아니라 자유를 통해 작동하는 그 권력의 지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성공적이냐는 것이다. 자기계발하는 주체에 대한 분석을 동시대 권력의 배치와 분포를 그리는 리얼타임 맵에 비유할 수 있다면, 좌표는 제시되었는데 등고선과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기압이 빠져있는 격이다. 이는 자기계발 담론이 자기계발하는 주체를 형성하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이 괄호 쳐져 있기 때문에-이런 종류의 분석에서 추상수준을 낮추는 일은 너무나 어려워 보인다- 거의 필연적으로 예정된 귀결이다.

 

자유의 의지, 안전의 의지

 

개혁정권 10년 동안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자기계발에 열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질이 끝없이 하락하는 걸 경험했다. 열심히 자기계발만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88만원 세대는 차츰 그 성공의 사다리가 처음부터 끊어져 있었다는 진실을 깨닫고 경악했다. 자기계발에 실패한 주체에 대한 분석도 나오기 시작했다(곽중현, 자기계발로부터의 도피?, 한국사회학회 2009 전기 사회학대회). 이를 자기계발하는 주체에 대한 단순한 반작용이라 규정할 수는 없다. 순전히 자기계발만 하다가 어느 순간 자기계발을 전부 내팽개치는, 그런 식의 변화는 아닌 것이다.


훈육과 억압에 발랄한 문화적 자유로 저항하던 시기에도, 그리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절정이던 시기에도 모종의 이질적인 열망이 대중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이를 정상근대(正常近代) 열망이라고 부른다. 오랜 피식민 경험과 처참한 내전, 압축적 근대화 과정은 비극적 민족서사와 한()이라는 단어로 극화된 개인서사들을 만들어냈다. 파괴되거나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복원하고 정상화시키려는 시도와 요구는 그래서, 한국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사고방식이자 공동체의 보편서사이기도 하다. 민족국가의 구성에 대한 대중의 강렬한 정서적 회한(“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오욕의 역사” “민족정기가 훼손되고 허리가 끊긴 한반도”)도 이런 사고방식의 연장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인이 보는 한국사회는 언제나 선진국과의 강박적 비교를 통해 설명된다. 한국이 정상적으로 근대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공정한 규칙이 아직도 제대로 확립되지 못한 사회라는 식이다. 정상근대에 대한 열망은 자유의 의지’, 혹은 지대추구행위와 기득권 세력의 구태를 일소하는 도구로서의 신자유주의적 열망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공히 현실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이념에 가깝다. 그러나 정상근대 열망은 그런 종류의 변화를 추동하는 정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탈구된 현실을 안정화시키려는 정념에 더 닿아있다.

 

한국어로는 미번역된 1997년 작 <탈근대성과 그 불만(Postmodernity and its Discontents)> 서문에서 바우만은 이에 대한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준다. 이 책 제목이 차용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주저 <문명 속의 불만>(김석희 옮김, 열린책들 펴냄)에서 '문명'이란 근대적 문명이나 문화를 가리킨다. 근대 사회에서 개인들은 현실원칙으로 고정된 위생이나 질서 등의 가치들과 "사회적 지위의 하락에 대한 공포"로부터의 '안전'(security)을 얻었지만, 동시에 개인들이 쾌락과 즐거움을 누릴 자유가 억업당해야만 했고, 이 교환과정에서 일어난 상실이 곧 불만으로 표출된다고 해석한다. "억압된 것은 귀환하기" 때문이다.

이 교환 속 상실은 탈근대의 사회에서도 그 상실된 가치들의 자리만 뒤바뀐 채 고스란히 일어난다. 근대 사회와 달리 개인들이 각자의 행복을 맘껏 누릴 자유는 획득했지만, 대신에 안전 보장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만 한다. 이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열망은 공포를 유발하는 '위험한 개인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상태, '안전'(safety)을 향하게 된다. 내 자유의 장애물은 바로 옆의 이름 없는 불특정 타인들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사회국가'(social state)에서 '개인 안전 국가'(personal safety state).

근대 사회와 탈근대 사회를 매끄럽게 나눌 수 있는가의 문제는 차치하고, 이 해석은 지난 대선을 앞두고 출몰한 '안철수 현상'에 그대로 적용가능하다. 예컨대 박권일은 이 현상을 "압축적 근대화로 인한 피로감에 지친 개인들의 정상근대에 대한 열망"으로 읽어낸 적이 있다.“


-문순표, ‘'진격의 엘리트'인가, 게토에 갇힌 넷난민인가? 지그문트 바우만의 <리퀴드 러브>’, <프레시안> 201367

 

정상근대 열망을 다른 어떤 말로 부르든 간에 이는 잃어버린 것들의 회복이며 기본적으로 보수적 가치들과 친화적이다. 근대에 대한 열망이라고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대안을 강력히 추진한다기보다는 스테레오 타입화된 (서구식) 근대의 형상에 대한 상상적 회고에 불과하다. 부동산 불패신화의 종말과 장기불황의 스산한 기운 속에서 안철수 현상이 일어났고 또 다시 보수정권이 출범했다. 노무현 정부의 행정자치부는 이명박 정부에서는 행정안전부가 됐고 다시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안전행정부로 바뀌었다. 표현의 자유가 끝없이 위축되고 있지만 시민들의 저항은 그리 거세지 않다. 법원의 형량이 확연히 강화되고 있으며 싱가포르 같은 엄벌주의적 발상이 시민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간첩단 사건 따위보다 연쇄성폭행 사건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치안의 논리가 사회의 다른 가치를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이주노동자 등에 대한 혐오발언들도 갈수록 수위가 높아진다. ‘우리의 몫,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내부의 타자를 배제하거나 최소한 바깥에 분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자유보다 안전을 더 중요시하게 되었다고 단언하긴 어렵다. 하지만 자유의 모험에서 안전의 성채, 사람들의 시선이 옮겨온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과거 군부독재 시기로 회귀하자는 식의 반동적 정서는 아니다. 자기계발을 마음 편히 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국가가 안전과 치안을 더 강화해야한다는 느낌에 더 가깝다. ‘자기계발하는 주체싱가포르적 주체의 만남, 그리고 자유의 의지안전의 의지의 공존은 어찌 보면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기묘한 결탁이라 할 수 있다. 혹은, 이런 멘탈리티가 노골화되는 체제를 신자유주의 2.0’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