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ais-Roubaix 2010을 생중계로 보다가 팬이 되어버렸다. 거의 한 시간 동안 압도적인 독주로 우승해버린 Fabian Cancelara. 1981년생. 스위스 국적의 이 선수는 TT(time trial) 경기의 최강자로 군림해온 선수로 워낙 유명한데, 올해 분위기가 심상찮다. 투르 드 프랑스보다 유서 깊은 자전거 경기, 원데이 클래식 중의 클래식이라 할 Prais-Roubaix에서 우승했을 뿐 아니라 바로 전에 열린 Tour of Flanders까지 먹었다.
랜스 암스트롱의 경우 암투병 경력에다 투르 드 프랑스 7연패를 했어도 나에겐 별 감흥이 없는 선수(아마 10연패를 했어도 마찬가지일 듯). 하지만 故 마르코 판타니, 알레산드로 발란(2008년 세계선수권에서의 전설적인 브레이크 어웨이), 그리고 이 파비앵 칸첼라라의 경우 단 한경기만으로도 빨려들어가듯 매료된다. 어느 분야나 객관적인 성적을 능가하는 '매력', '심장의 떨림' 뭐 이런 감흥을 주는 선수들이 실재한다. 롯데 자이언츠 경기를 보면서 "병신같지만 왠지 멋있어"라고 하던 어느 후배녀석이 떠오른다.ㅎㅎ 물론 칸첼라라는 롯데와 전혀 달리 우승을 밥 먹듯 함..
수첩의 메모를 옮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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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사태는 새로운 사건이 아니다. 2000년대 이후 국가는 자신의 무능을 다양한 형태로 드러냈는데, 한미FTA 논란, 황우석 사태, 광우병 논란, 미네르바 신드롬, 용산참사에 이르는 일련의 흐름들(정확히는 그 사건들에 대한 대응)은 국가라는 거대하고 강력한 공적기구가 전능하기는커녕 최소한의 위기관리능력조차 결여된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만 불러일으켰다. 이는 진보의 불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관점은 전혀 다르지만, 극우냉전세력이 '국가의 역할'에 가지는 불만, 이를테면 사회각계각층에서 암약하는 빨갱이와 불순분자들을 숙청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국가권력에 대한 불만은 오히려 진보개혁세력보다 더욱 격렬한 양상으로 표현됐다. 음모론은 일종의 관행이 됐고, 각각 좌파 버전과 우파 버전으로 만들어져 유통되었다.
이러한 국가에 대한 신뢰의 위기는 형식민주주의 이전의 정부에서 발생한 대국민 사기극-수많은 북풍공작들과 '평화의 댐' 해프닝 같은 사건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 당시에도 정부의 정보은폐와 여론호도, 극우언론의 선동이 판을 쳤지만, 의도적으로 기획되어 군관언의 합동작전 속에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국가의 '무능'이라기보다 오히려 국가의 '유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불거지기 시작한 국가에 대한 신뢰의 위기에서는 냉전이데올로기가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대신 그 자리를 애국주의가 차지하게 된다. 그 애국주의는 악랄한 북괴와 싸워이기기 위해 뭉쳐야한다는 식의 선악논리가 아니라, 세계시장경쟁에서 이겨야한다는 식의 국가경쟁력 담론이다.
국가의 무능이 반복적으로 부각되면 사회담론의 측면에서는 정부 통제 '바깥'의 능력있는 집단(기업, 전문가집단)이나 국가(미국), 혹은 "우리편 전문가"(미네르바)를 호출하는 목소리가 강해지고, 전경련과 경총같은 단체의 선전구호인 '기업은 1류인데 정부는 3류'와 같은 민영화만능주의가 더욱 설득력을 지니는 토양을 조성하게 된다. 개인의 전략이라는 측면에서는 환멸을 느끼고 탈주(이민 등)하거나 영화 <괴물>에서와 같이 직계가족 외엔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식의 가족주의의 형태로 약육강식의 세계에 적응하려는 태도를 더욱 내면화시키게 된다.
또한, 자신이 믿는 가치의 '정당성을 보증해줄 기구'를 제도 바깥에서 소환하려는 반근대주의적 경향도 짙어진다. 예컨대 촛불집회 막판에 촛불시민들이 다른 시민단체나 운동단체가 아니라 정의구현사제단의 위로에 눈물을 흘리고 전적인 신뢰를 보여준 것, 김용철씨가 삼성비리를 폭로하는 과정에서 의지할 단체로 정의구현사제단을 선택한 것 등은 종교인이 상대적으로 세속적 싸움에서 불편부당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는 '사회제도 바깥의 어떤 초월성'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보증받으려는 태도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사회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징후이기도 하다.
반복되는 국가의 무능은 단순히 어느 정권의 인력풀이 유능하냐 아니냐의 문제를 넘어서, 공식적 권력, 다시 말해 선출된 권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구조적 요인이 있는게 아니냐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 요인을 제거하지 못하는 한, '천안함'은 영원히, 끊임없이 침몰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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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사태는 새로운 사건이 아니다. 2000년대 이후 국가는 자신의 무능을 다양한 형태로 드러냈는데, 한미FTA 논란, 황우석 사태, 광우병 논란, 미네르바 신드롬, 용산참사에 이르는 일련의 흐름들(정확히는 그 사건들에 대한 대응)은 국가라는 거대하고 강력한 공적기구가 전능하기는커녕 최소한의 위기관리능력조차 결여된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만 불러일으켰다. 이는 진보의 불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관점은 전혀 다르지만, 극우냉전세력이 '국가의 역할'에 가지는 불만, 이를테면 사회각계각층에서 암약하는 빨갱이와 불순분자들을 숙청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국가권력에 대한 불만은 오히려 진보개혁세력보다 더욱 격렬한 양상으로 표현됐다. 음모론은 일종의 관행이 됐고, 각각 좌파 버전과 우파 버전으로 만들어져 유통되었다.
이러한 국가에 대한 신뢰의 위기는 형식민주주의 이전의 정부에서 발생한 대국민 사기극-수많은 북풍공작들과 '평화의 댐' 해프닝 같은 사건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 당시에도 정부의 정보은폐와 여론호도, 극우언론의 선동이 판을 쳤지만, 의도적으로 기획되어 군관언의 합동작전 속에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국가의 '무능'이라기보다 오히려 국가의 '유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불거지기 시작한 국가에 대한 신뢰의 위기에서는 냉전이데올로기가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대신 그 자리를 애국주의가 차지하게 된다. 그 애국주의는 악랄한 북괴와 싸워이기기 위해 뭉쳐야한다는 식의 선악논리가 아니라, 세계시장경쟁에서 이겨야한다는 식의 국가경쟁력 담론이다.
국가의 무능이 반복적으로 부각되면 사회담론의 측면에서는 정부 통제 '바깥'의 능력있는 집단(기업, 전문가집단)이나 국가(미국), 혹은 "우리편 전문가"(미네르바)를 호출하는 목소리가 강해지고, 전경련과 경총같은 단체의 선전구호인 '기업은 1류인데 정부는 3류'와 같은 민영화만능주의가 더욱 설득력을 지니는 토양을 조성하게 된다. 개인의 전략이라는 측면에서는 환멸을 느끼고 탈주(이민 등)하거나 영화 <괴물>에서와 같이 직계가족 외엔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식의 가족주의의 형태로 약육강식의 세계에 적응하려는 태도를 더욱 내면화시키게 된다.
또한, 자신이 믿는 가치의 '정당성을 보증해줄 기구'를 제도 바깥에서 소환하려는 반근대주의적 경향도 짙어진다. 예컨대 촛불집회 막판에 촛불시민들이 다른 시민단체나 운동단체가 아니라 정의구현사제단의 위로에 눈물을 흘리고 전적인 신뢰를 보여준 것, 김용철씨가 삼성비리를 폭로하는 과정에서 의지할 단체로 정의구현사제단을 선택한 것 등은 종교인이 상대적으로 세속적 싸움에서 불편부당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는 '사회제도 바깥의 어떤 초월성'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보증받으려는 태도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사회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징후이기도 하다.
반복되는 국가의 무능은 단순히 어느 정권의 인력풀이 유능하냐 아니냐의 문제를 넘어서, 공식적 권력, 다시 말해 선출된 권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구조적 요인이 있는게 아니냐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 요인을 제거하지 못하는 한, '천안함'은 영원히, 끊임없이 침몰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