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3. 20. 19:15

소셜 맥거핀(Social Macguffins)[시사인 183호]



두 사람이 스코틀랜드행 열차를 타고 가다가 한 사람이 선반에서 짐을 발견한다. “저게 뭐요?”“아, 그거 맥거핀입니다.”“맥거핀이 뭐죠?”“스코틀랜드 고지대에 사는 사자를 잡기 위한 도구죠.”“스코틀랜드 고지대엔 사자가 없는데요?”“음, 그렇다면 맥거핀은 아무 것도 아니군요.”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의 가장 유명한 발명품 중 하나인 맥거핀에 관한 일화다. 워낙 유명해서 영화에 관심 있는 이들은 한번쯤 들어봤을 용어다. 맥거핀은 영화의 줄거리에서 별다른 의미가 없지만 관객의 눈을 잡아끌며 긴장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관객들만 알고 있는, 탁자 밑의 폭탄 같은 것들이다. 여기서 하려는 얘기는 영화 속 맥거핀은 아니고, ‘소셜 맥거핀(Social Macguffins)’에 대해서다. 물론 내가 방금 지어낸 말이다(줄여 부르기도 좋지 않은가, “소맥”!). 글자 그대로 “사회의 맥거핀” 또는 “사회적 맥거핀”인데,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사이비 적대(pseudo hostilities)’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계급, 젠더, 인종 등 수많은 적대들이 중첩되거나 교차하면서 사회적 적대관계의 모자이크를 이루고 있다. 소셜 맥거핀은 이런 첨예한 적대들과 달리 실체가 없거나 매우 사소한 적대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사회적 갈등인양 부풀려진 것들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소셜 맥거핀이 범람할수록 용산참사나 쌍용차 해고사태와 같은 우리가 주목하고 귀 기울여야 할 ‘진짜 적대’들은 은폐되거나 왜곡되기 쉽다.


진심이 만들어낸 가짜

사이비 적대, 가짜 적대의 가장 극적인 판본들이 박정희 정권과 노무현 정권 시기에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베트남파병이 본격화하기 직전인 1965년,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차지철이 느닷없이 파병 반대에 나섰다. 대미교섭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박정희가 측근인 차지철에게 ‘쇼’를 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내부갈등을 연출하는 것은 박정희의 특기였는데, 1963년 3월의 소위 ‘군 일부 쿠데타 음모사건’이 그 시초였다. 박정희가 민간인 정치해금을 추진하려하자 군 일부가 반발해 박정희를 죽이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것은 박정희가 이른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 위한 명분 쌓기 용도였다. 박정희가 실제로 살해될 뻔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에 비견되는 노무현 정권 시기의 소셜 맥거핀 역시 파병 건이었다. 당시 국회의원 유시민의 행보는 차지철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어떤 때는 대통령의 대미협상 부담을 덜기위해 국민들이 파병에 반대해줘야 한다고 말했다가, 그 후에는 “네오콘의 보복” 운운하며 파병에 찬성하기도 했다. 유시민의 소셜 맥거핀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반대여론의 국면에 따라 이라크 파병 반대와 찬성을 지속적으로 오락가락하면서 가짜 전선을 만들어냈고, 우리 군인의 생명과 김선일 씨의 죽음을 놓고 반전평화 세력이 그은 전선을 집요하게 교란시켰다. 또 하나의 사례로는 황우석 사태 당시 <중앙일보> 의학전문기자 홍혜걸의 “국론통일” 주장이 있다. 이를테면 ‘선진국이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을 질투해서 황우석 흠집내기에 나선다’는 식의 논리였다. 황우석을 둘러싼 한국과 선진국 사이의 가짜 적대를 설정해 사람들을 호도한다는 점에서 이 또한 전형적인 소셜 맥거핀이었다.

소셜 맥거핀은 이처럼 대부분 국익이나 공익을 빙자해 출현한다. 주의해야할 점은, 대부분의 소셜 맥거핀은 숭고한 내적 동기로부터 탄생한다는 점이다. 툭하면 있지도 않은 내부갈등을 조작했던 박정희조차, 그런 거짓말을 한 목적이 뭐냐고 물으면 ‘조국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서’라고 망설임 없이 답할 것이다. 확신하건대 1백 퍼센트 그의 진심일 것이다. 소셜 맥거핀은 ‘그럴듯한 가짜’일 뿐 아니라 ‘진심이 만들어낸 가짜’다. ‘진정성’ 같은 심정윤리를 통해 사회문제를 판단하길 좋아하는 한국사회야말로, 소셜 맥거핀이 자라날 최적의 토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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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 편집 이전 원본이다.
**조만간 YES24에서 사회비평 연재를 하나 시작한다(늦어도 다다음주부터).  사실 "소셜 맥거핀"이란 말은 그 연재를 위해 고안됐다. 일간지나 주간지 칼럼보다는 긴 호흡의 글이 될 테고, 이변이 없는 한 주1회 업데이트될 것이다.

2011. 3. 8. 04:34

베짱이의 노동[시사인 179호]

서른두 살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가 홀로 빈곤과 병마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이웃집 문에 붙여놓은 마지막 메시지는 ‘창피하지만 남은 밥과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였다. 많은 이들이 가난한 예술가의 비극에 놀라고 슬퍼했다. 그녀의 동료들은 이 죽음을 사회적 타살로 규정했다. 영화 스태프들의 열악한 처우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금 이슈가 되었다. 복지 체계의 미비함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게 다 MB 때문”이라는, 지하철 안내방송만큼 감흥 없는 이야기도 반복되었다.

그런데 정작 내 주의를 끈 것은 최씨의 부고 기사 아래에 붙은 인터넷 댓글들이었다. 명복을 비는 댓글 사이사이로, 고인을 질책하고 훈계하는 댓글이 끝없이 매달렸다. 몸이 그 지경이 될 동안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글만 쓰고 있었는가, 재능이 없다 싶으면 포기해야지 왜 맨땅에 헤딩을 하는가, 이웃에 밥 달라는 쪽지 쓸 힘이 있으면 어디 가서 아르바이트라도 했어야지….

당사자를 원색적으로 욕하는 전형적인 인터넷 악플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 댓글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최고은씨를 ‘세상물정 모르고 꿈만 좇는 철부지’로 치부한다는 점이었다. 이는 곧, 노동을 바라보는 우리 시선이 어디에서 균열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뭔가 창조적인 일, 본인이 원해서 하는 일은 노동이 아니라는 통념 말이다.

     
 ‘예술하는 베짱이’ 비웃는 ‘노동하는 개미’

“너는 하고 싶은 일 하는 거잖아.” 영화노조를 하는 이에게 비정규 투쟁하는 이가 했다는 말이다. 그 뒤에 생략된 말은 아마 이것이겠다. “그러니 너보다 내가 더 고통 받는 노동자야.” 그래도 비정규 투쟁하는 이는 낫다. 영화 만드는 일 역시 ‘노동’이라고는 생각하니 말이다. 많은 평범한 사람에게 음악이나 영화 같은 문화산업 종사자들은 대체로 둘 중 하나로 인식된다. 경천동지할 작품으로 세상을 감동시키는 예술가이거나, 아니면 제 앞가림도 못하는 백수건달이거나. 물론 대부분 후자 쪽이다.

저 수많은 백수건달을 조롱하고 비웃을 수 있는 근거는 이른바 ‘등가교환’의 노동 윤리다. 내가 지금 겪는 고통만큼 나중에 쾌락을 얻을 수 있다는 보상심리이며, ‘공짜 점심은 없다’는 자기 확신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노동하는 개미’의 편에 서서 ‘예술하는 베짱이’를 의기양양하게 단죄한다. “하고 싶은 일,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이면 돈 좀 적게 받아도 되는 거 아냐?” 하지만 사실 내가 지금 유예한 쾌락이 나중에도 남아 있을 거란 보증은 전혀 없다. 또한 내가 지금 겪는 고통이 보상받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힘들게 한 노동이 더 가치 있는 노동인 것도 아니다. 힘들게 하든 즐겁게 하든, 그 결과물은 사회적으로 가치가 매겨질 뿐이다. 오히려 즐겁게, 자발적으로 한 작업의 부가가치가 더 큰 경우가 많다. 바로 그래서 신자유주의는 노동자가 노동자에 머물지 말고 스스로 경영자가 되어야 한다고, 더 나아가서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고은씨에게 ‘꿈만 좇는 철부지’라 말하는 건 턱도 없는 소리다. 그녀는 자본주의의 승자 독식 논리가 가장 살벌하고 첨예하게 관철되는 문화산업의 장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악전고투해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수병들에게 산소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먼저 알리고 죽는 잠수함의 토끼처럼, 최고은씨와 달빛요정 같은 예술가들은 우리 앞에 펼쳐질 지옥도를 이렇듯 온 힘을 다해 경고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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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제목은 원래의 제목으로, 매체에 실린 것과 다르다.

**위 본문에 인용된 최고은 씨의 쪽지내용은 최초보도한 <한겨레> 기자가 윤색한 버전이다. 이 원고가 내 손을 떠난 며칠 후, <민중의 소리>에 의해 실제 쪽지 내용이 최초보도와 다르다는 게 밝혀졌다.

***그녀가 이렇게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은 최소한의 생존조건도 보장해주지 못하는 악랄한 시스템 때문이지 개인의 처신 때문이 아니다. <한겨레>처럼 노동자의 죽음까지도 위계 서열화하는 조악한 시선(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65882.html) 이 여전히 지속되는 한 제2, 제3의 최고은이 쓸쓸히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불행을 경쟁하는 것만큼 인간을 황폐하게 만드는 짓은 없다. 노동자의 죽음을 비교하는 짓 또한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사회의 혹독함에 치여 숨진 그/그녀의 죽음을 똑똑히, 하나하나 기억하자. 단, 비교하진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