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8. 22. 18:11

치유로서의 인터뷰 [시사IN 49호]

요즘 가장 즐겨보는 TV프로그램은 ‘인터뷰게임’이다. 흔히 인터뷰라고 하면, 기자가 유명인을 만나서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는 걸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의 인터뷰는 다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건네주고 그들의 주변 사람들을 인터뷰하게 만든다. 어색한 멘트와 어정쩡한 자세가 절로 웃음을 자아내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진지하다. 남들이 보기에 참으로 시시콜콜한 개인사적 사건들이 인터뷰의 주제다.

내가 이 프로그램을 처음 봤을 때 등장한 사람은 “아내가 자신도 모르게 큰 빚을 졌는데 그에 대해 속 시원히 답해주지 않아서 이혼을 신청했다”는 아저씨였다. 아내는 이불을 빨아 장에 넣고 집안정리를 말끔히 한 다음, 냉장고 반찬통에 일일이 메모까지 써놓고 집을 나갔다.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았던 남편은 아내를 잘 아는 주변인물을 인터뷰하기 시작한다. 먼저 자신의 친누나를 찾아갔다. 하지만 아내를 극구 두둔하는 누나. 괜히 자기만 욕을 먹고 본전도 못 찾는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인터뷰해가는 동안 ‘사건의 전모’가 서서히 드러난다. 빚을 지게 된 이유는 자녀의 교육비였다. 의심이 유달리 많았던 남편은 교육비로 돈이 필요하다는 아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설득에 지친 아내는 오랜 기간 남편 몰래 돈을 융통해왔고 어느새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버린 것이다.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남편은 아내를 어렵게 만나 재결합을 요청하지만,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거절한다. “내가 노력할 때 당신 마음이 닫혀있었고, 이제 내 마음도 닫혀버렸어.”

프로그램이 회를 더하면서 너무 자극적인 소재만 등장한다는 비판이 많았다. 분명 소재선정이나 편집에서 선정적인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인터뷰게임’의 핵심은 소재가 아니라 형식에 있다.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자기라는 존재의 퍼즐을 맞추는 그 형식이, 새로운 감동과 재미를 낳는다. 그걸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나의 재발견’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무리 일기장에다 자신의 속내를 가감 없이 털어놓는다 해도, 그것이 나의 객관적인 모습일 수는 없다. 인간은 본래 ‘합리화하는 동물’이며, 그 에너지의 99%는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다. 그렇다면 ‘객관적인 나의 모습’은 어디 있는가. 바로 타인에게 있다. 나란 인간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결국 내 주변 사람들이다. 엠티나 야유회에서 흔히 하는 ‘롤링페이퍼 놀이’가 여전히 인기 있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묘사한 몇 마디 말이 의외로 ‘발견의 쾌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롤링페이퍼가 일방적으로 나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인터뷰는 인터랙티브, 즉 쌍방향이라서 그때그때 자신이 개입할 수 있다. 게다가 인터뷰는 본래 저널리즘에서 탄생한 것인 만큼 ‘공식성’을 띤다. 흔히 사람들은 사적인 자리에서 솔직하고, 공적인 자리에서 가식적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의외로 사람들은 공식석상에서 깜짝 놀랄 정도로 정직한 반면 일상생활에서는 그저 습관적인 반응만 보이기 쉽다. 마이크와 녹음기를 들이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사래를 치다가도 계속 부탁하면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인터뷰에 응해준다. 그리고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파란 것을 파르스름하다 정도로 순화해서 말할지언정 빨갛다고 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건 글자그대로 우리 주변의 ‘보통 사람들’ 얘기다. 정치인들처럼 고도로 단련된 인간은 인터뷰에서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새빨간 거짓말을 쏟아낸다.)

TV 앞에서 ‘인터뷰게임’을 멍하니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의 가족들과 저렇게 이야기해본 게 언제더라? 가족이란, 정말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아는 사이인 걸까? 그럴 리 없다. 그저 가족이란 핑계로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주고, 한 인간으로서의 서로에게 무관심했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마이크와 디지털 카메라를 준비하자. 없다면 ‘숟가락 마이크’도 좋다. TV에 나올 리 없으니 부담도 없다. 나는 지금 하나의 놀이를 제안하고 있다. 치유로서의 인터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