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24. 17:57

끔찍하다, 그 솔직함 [시사IN 45호]

‘솔까말’이란 은어가 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의 준말이다. 용례는 다음과 같다. “솔까말, 원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섹스 아니니?” “솔까말, 지잡대와 SKY는 하늘과 땅 차이지(*지잡대: 지방에 있는 대학교를 비하하는 속어).” 이 때 한껏 냉소적인 표정을 짓는 게 포인트다.
솔직함은 분명 미덕이다. 거짓과 위선을 폭로하는 통쾌함을 안겨준다. 겉으로는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면서도 속으로 딴 생각을 하는 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TV 버라이어티 쇼에서는 예전에 엄두도 못 낼 수위의 ‘솔직한’ 대화들이 오고간다. 권위주의 시대에 비한다면, 지난 10년 간 우리는 분명 솔직해졌다.
일본사람의 특성을 묘사할 때 흔히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표현을 쓴다. 혼네(本音)는 속마음, 다테마에(建前)는 표정이다. 본심은 따로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다르다는 의미다. 한국사람들은 이를 두고 “겉 다르고 속 다른 일본”이라며 그들의 속물성을 비난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예의와 체면 따지기 좋아하는 중국과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구사회 역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적으로 유사한 면이 있다. 이건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고유한 속성이다. 인간은 욕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욕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물은 타자(他者)가 있든 없든 먹고, 싸고, 잔다. 다시 말해서 욕구는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욕망은 타자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나의 욕망은 언제나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친 욕망이며 그 거울이 깨지는 순간 나는 그저 한 마리 동물이 된다. ‘다테마에’는 단순히 ‘혼네’를 감추는 가면이 아니라, 타자를 적극적으로 의식해서 욕망이 온전히 욕망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안전핀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동물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의 솔직함이 그녀를 죽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점점 ‘솔직’해지는 건, 이제 더 이상 ‘혼네’를 감출 필요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솔직함은 닳고 또 닳아버려서 자신의 노골성을 뻔뻔하게 드러내는 상투적 형식이 됐다. 달리 표현하면, ‘혼네’가 ‘다테마에’의 자리를 강탈했다. 서점에 넘쳐나는 이른바 실용처세서들을 보라. 온통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다. “가난한 아빠라니, 솔직히 쪽팔리지 않아? 부자아빠가 되라구!” “30대에 모은 돈이 고작 5천만 원? 까놓고 말해 당신, ‘루저’야!” 즉, 이 모든 ‘솔까말’ 뒤에 생략된 말은 ‘돈 밖에 없지, 안 그래?’다. 그렇게 ‘동물’들은 냉소주의자 흉내를 낸다.
지난 7월 5일 한 일간지에 여고생이 투신자살했다는 소식이 실렸다. 그녀의 부모는 청와대와 교육청에 진정서를 냈다. 진정서에 따르면 “담임교사가 기초생활수급자를 조사한다며 해당학생을 교실에서 일어나라고 했고 딸이 가만히 있자 공개적으로 명단을 불러 모욕감을 줬다”고 한다. 기사가 인용한 익명의 제보자가 말하길, 그 교사는 평소에도 그런 행동을 많이 했던 사람이었고 죽은 소녀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생활 내내 유무형의 멸시에 시달렸다. 1급 지체장애인인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노점상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오고 있었다.
진정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담임교사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과연 교사 개인의 소양 탓으로만 돌릴 일일까. 이 비극은 단지 예외적인 사건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1시간 더 공부하면 마누라 얼굴이 바뀐다’라는 급훈을 ‘명언’ 취급하는 한국사회야말로, 지금 이 시각 건물 옥상에 선 어느 가난한 소녀의 등을 떠밀고 있기 때문이다. 끔찍하다, ‘한국판 자본주의 정신’의 저 투명한 솔직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