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5. 30. 17:27

20대 왕따시켜 10대 찬양하는 '돌림병' 이 돈다 [시사IN 37호]

*청탁받아 갑자기 쓰게 된 글. 쓰는 시점이 이미 5월 22일이라 타이밍이 좀 늦은 감이 있었지만, 한 번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이긴 했다. 이건 풀 버전.
--------------------

돌연, 세대론의 홍수다. 이번엔 촛불을 들고 혜성처럼 등장한 10대가 주인공이다. 광장에 대한 추억이 각별한 386 아저씨와 아줌마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이들 ‘신인류’를 찬양·고무하고 있다. <한겨레>의 ‘2.0 세대’ 특집기획은 사랑스런 10대에게 바치는 개혁세력의 절절한 오마쥬(homage)였다. 감동으로 따지면 <시사IN> 35호 커버기획 ‘10대는 말한다’가 발군이다. 읽다가 코끝이 찡했다고 고백한 사람이 많다.
그런데 뒷맛이 고약하다. 10대를 칭찬하는 어른들은 “20대와는 달리”라는 말을 꼭 덧붙인다. ‘10대는 희망이 있지만 20대는 싹수가 노랗다’는 식이다. 이 글은 그런 ‘구별짓기’에 대한 반박이다. 명확히 밝혀두지만 이건 20대에 대한 변명이나 옹호가 아니다. 그들은 변명해야할 정도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다.
물론 지금처럼 전선이 명확히 양분된 시점에 괜히 딴죽 걸었다 본전도 못 찾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 촛불집회 이후 10대와 20대를 비교하는 담론이 부쩍 늘어나면서 점차 20대에 대한 무시와 ‘왕따’로 표출되고 있다.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최근 들어 어떤 정치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20대 혐오증’이 반복되어왔기 때문이다. 일종의 사회적 돌림병이라고밖에 달리 묘사할 말이 없다.

‘20대 투표율 낚시’ 사건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개혁세력 및 진보세력이 거둔 성적은 참패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거의 ‘분쇄’ 당했다. ‘수구꼴통 축출’만이 대한민국이 사는 길이라 굳게 믿던 사람들은 망연자실했다. 절망이 지나치면 자기혐오로 이어진다던가. “찍은 국민이 죄인”이라는 식의 담론이 급속히 유포되기 시작했다. 대선 출구조사자료 등이 공개되자 즉시 희생양이 정해졌다. 바로 20대였다.
SBS-TNS 출구조사에 따르면 20대의 이명박 후보 지지율은 42.5%, 이회창 후보는 15.7%였다. “나이 든 양반들이야 그렇다 치고, 젊은 것들이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비난이 쏟아졌다. 언론들도 ‘20대 보수화’에 대해 연일 입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총선이었다. 예상대로 한나라당의 압승. 그런데 선거가 끝나자마자 또다시 20대를 향한 공격이 시작됐다. ‘총선에서 20대 투표율이 19%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가면서 본격적인 ‘마녀사냥’이 벌어졌다. <경향신문>은 ‘20대 투표율 19%는 대의정치 심각한 위기’라는 제목의 대담기사를 싣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저도 20대지만 투표율 19%라니 정말 창피합니다”라는 고해성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처구니없는 사실이 밝혀진다. ‘19%’는 근거 없는 루머였던 것이다. 당연한 것이, 총선의 연령별 투표율은 당시까지 발표된 적이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글자 그대로 ‘낚여버린’ 셈이다. 왜 이런 블랙코미디가 벌어진 걸까. 그 사람들이 유달리 멍청해서? 그렇지 않다. 19%라는 수치를 보기 전에 이미 어떤 프레임, 다시 말해 20대 보수화라는 인식의 그물에 갇혀버린 까닭이다. 그러니 떡밥이 보이자마자 덥석 물 수밖에.
따지고 보면 대통령 선거 직후 불거진 20대 보수화 담론도 상당히 과장된 면이 있었다. 분명 20대는 보수후보에게 적지 않은 표를 줬다. 그러나 진보로 분류되는 문국현 후보와 권영길 후보에 대한 20대의 지지율은 전 연령대 중 최고였으며, 집권여당 정동영 후보에게는 가장 적은 표를 줘 엄청난 취업난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이것만 가지고서 보수라고 잘라 말하기도, 그렇다고 진보라 분류하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20대 혐오증’과 ‘10대 애호증’은 동전의 양면

20대에 대한 ‘전사회적 왕따’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반복되는 것 같다.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가 점화된 초기, 중고생들이 대거 청계천 광장으로 몰려나왔다. 교복 입은 여중생, 여고생이 촛불을 들고 “너나 먹어 미친 소!”라고 외쳤다. ‘전직’ 기자로서 단언하는데, 이렇게 ‘섹시’한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그건 기자도 아니다. 당연히 취재가 집중될 수밖에 없다.
기사를 접한 수많은 ‘386’들, 충격과 감동에 몸을 부르르 떤다. 20년 전 자기 모습이 생각나 주책 맞게 눈물부터 나온다. 나폴레옹이 진군하는 모습에 감동 먹은 헤겔의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저기 교복 입은 절대정신이 촛불을 켰다!” 나이를 따져보니 내 아들과 딸 또래다. 때맞춰 <한겨레>의 시의적절한 제목 뽑기, 벅찬 감동에 불을 댕긴다. ‘‘2.0 세대’ 386부모 ‘뜨거운 피’ 물려받았다!’ 시대정신이 자식사랑과 화학적으로 결합하는 행복한 순간이다. 기자들은 다시 아이템 개발에 분주해진다. 그러고 보니 10대가 저렇게 나서는데 20대는 안 보이는 것 같네? 역시 20대들은 몸을 사리는구만. 그래서 ‘그 많던 20대는 어디로 갔나’ 류의 기사들이 다시 쏟아져 나온다.
물론 내용적으로 20대에 대해 균형 있는 접근을 보여준 기사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건 10대와 20대를 비교하는 구도 자체다. 이미 20대의 보수화가 하나의 완고한 프레임으로 자리 잡은 이상, 20대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리 잘 써봐야 10대를 칭찬하는 도구로 이용될 뿐이다. ‘20대 보수화’라는 기존 프레임에 ‘10대와 20대의 비교’가 더해지면서 잠복했던 20대 혐오증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을 보라.
10대에 대한 지나친 감정이입과 20대에 대한 지나친 혐오는 사실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개혁정권 10년에 대한 지지세력의 환멸과 피로감이 원인이다. 정치문화적 개혁에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사회경제적 개혁에 실패하면서 사람들은 ‘적을 두 번이나 이겼는데 내 삶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공허감에 사로잡힌 것이다. 최근 치러진 두 번의 선거에서 아노미 상태에 빠진 개혁세력은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이 된 건 우리 탓이 아니”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은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세상이 이렇게 된 진정한 이유가 그런 사고방식 때문이라는 어떤 진실을 폭로할 뿐이다. 20대 혐오증은 타자에게 환멸을 전가하는 일종의 심리적 보상행위이며 10대에 대한 지나친 기대도 본질은 마찬가지다.

그들 모두가 88만원 세대

10대와 20대에 대한 이런 식의 구별짓기를 단호하게 차단하지 않으면 20대는 앞으로 계속해서 잉여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개혁세력과 진보세력에게 장기적으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20대가 정치적 냉담자로 남아있는 한, 개혁세력이 그렇게도 몸서리치는 수구기득권 세력의 토양만 비옥해질 뿐이니까. 2002년 심미선·신효순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10대가 지금의 20대라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지금의 10대도 머지않아 20대처럼 보수화되리라는 것? 부정적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본다면 지금의 20대가 계기만 찾는다면 언제든 광장에 나설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10대와 20대는 모두 88만원 세대다. 그들 앞에 놓여있는 현실은 공히 참혹하다. 그들을 굳이 구분할 이유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 기성세대가 할 일은 20대를 10대와 비교하고 평가하는 게 아니다. 그들이 광장에 나섰을 때, 자신의 삶을 정말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1987년에 만든 다리를 우리는 지난 10년간 힘겹게 건너왔다. 이제 다음세대 모두에게 새로운 다리 하나를 놓아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