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14. 13:02

'김예슬 선언'이라는 텅빈 기표 [시사인 139호]


2010년 3월 ‘김예슬 선언’을 보자마자 나는 “온 마음으로 지지한다”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이 글을 적는 순간에도 지지하는 마음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후 출간된 그녀의 책과 매체 인터뷰 등을 읽는 건 꽤나 불편한 경험이었다. “래디컬”한 그녀의 사상이나 신념을 보고 나 자신을 성찰하게 되어 그랬던 건 아니다. 나의 불편함에는 몇 가지 다른 이유들이 있다.

첫째, 그녀의 말과 글들이 주는 모종의 거부감 때문이다. 대개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자의식을 지나치게 날 것 그대로 노출시키는 텍스트였고, 분절된 짧은 호흡의 사유들이 권위적이고 딱딱한 어휘에 실려 쉼 없이 내뱉어지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말과 글에 담긴 사상이나 감성들은 “래디컬”한 게 아니라 낭만적이라 해야 옳다. 급진주의와 낭만주의는 어떻게 다를까? 내 식대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급진주의가 ‘예외 없는 집단적 변혁을 위한 근본적이고 비타협적인 태도’라면, 낭만주의는 ‘예외적 개인들의 의지와 결단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태도’이다. 그래서 급진주의자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의 정합성을 중요시하지만, 낭만주의자는 추구하는 가치의 진정성을 중요시한다. 역사적으로 낭만적 자의식은 뛰어난 예술을 낳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사회의 변혁을 만들어낸 경우는 거의 없다.

수많은 곳에서 인용되는 김예슬의 다음과 같은 글을 보자. “우리 사회의 진보는 충분히 래디컬하지 않다. 충분히 래디컬하지 못하기 때문에 쓸데없이 과격하고, 위험하게 실용주의적이고, 민망하게 투박하고, 어이없이 분열적이고, 놀랍도록 실적경쟁에 매달린다.” 이 주장에 반박할 수 있는 진보인사가 있을까? 없다. 반박할 수 없는 이유는 저 문장이 타당해서가 아니라 저 말에 별 의미값이 없기 때문이다. 반박할 구체적 사실이 있어야 반박할 게 아닌가. 그저 ‘옳은 얘기구나’ 고개를 끄덕일 밖에. 화려한 레토릭으로 비판을 대체하는, 전형적인 케이스다.

내 불편함의 두 번째 이유는 ‘명문대생’ 김예슬을 향한 일각의 냉소에 대한 그녀의 태도에 있었다. “김예슬이 떠난 그 학교에 저는 가고 싶습니다” “저도 김예슬씨처럼 포기할 학벌이나 있었으면 좋겠네요”“삼류대생이 저런 선언했으면 과연 어땠을지…” 등과 같은 반응이 인터넷에서, 특히 20대를 중심으로 매우 격렬하게 분출됐다. 이러한 냉소적 반응들은 그 자체로 한국사회의 학벌주의와 대학서열화라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지경인지를 드러내줌과 동시에, 김예슬 선언의 ‘어떤 이면’을 환기하는 효과를 가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냉소적 시선이 ‘김예슬 선언’의 실존적 울림과 사회적 중요성에 대한 유의미한 문제제기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쨌든 김예슬은 자신이 갖고 있는 거의 유일한 기득권을 포기했다. 그 기득권이 어떤 이에게는 학력일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외모일 수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돈이나 부동산, 또는 인맥 같은 사회자본일 수 있겠지만 그것을 포기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인 것이다. ‘김예슬 선언’의 유물론적 보편성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

그런데 김예슬은 명문대생 운운하는 반응에 대해 참으로 생뚱맞게도 “대학에 가지 못한 분께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전한다”고 말한다.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이었다. 이게 왜 그녀가 사죄해야하는 일인 걸까. 명문대생이라서? 솔직히 말해 나는 김예슬의 이 사죄가 사회운동가적 태도가 아니라 종교인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중생의 죄를 대속하고, 타인의 죄도 내 탓이라 머리를 숙이는 종교인. 그렇다면 ‘투쟁’과 ‘연대’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건 ‘희생’과 ‘나눔’이 될 터이다.

결국 우리들 중 누구도 ‘김예슬 선언’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그녀의 말과 글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치열하게 토론했어야 했다. 하지만 진보진영의 ‘선생님’들은 감탄과 찬사를 쏟아내기에 바빴고 또래들은 외계인이라도 본 양 신기해하거나 차갑게 냉소했다. 김예슬은 자신이 사죄하지 않아도 될 일을 사죄하고, 정작 성찰해야할 지점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김예슬 선언’은 누구나 언급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텅빈 기표가 되었다. 


*매체 편집 이전의 원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