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0. 23. 19:55

"니들은 정치 몰라도 돼!"에 숨겨진 몇 가지 전제들


청소년 정치참여 보장을 위한 토론회(2011.10.23. 건국대 법학관 403호) 발제문.

주최: 표현의 자유 연대, 권영길 의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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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은 정치 몰라도 돼!”에 숨겨진 몇 가지 전제들
청소년 정치참여의 의의


이른바 형식적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한 치도 진보하지 않은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청소년의 권리에 대한 사회의 감수성일 것이다. ‘고운(고등학교운동)세대’가 학벌 시스템을 재생산하는 대학입시를 거부하고 학교에서 잘린 전교조 선생님들과 눈물을 흘리며 연좌농성을 하던 때가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그런데 아직도 청소년들은 두발규제와 교사의 구타에 시달리고 있다, 아직도! 아직도 학벌 시스템에 항의하며 명문대를 그만두는 학생들이 나오고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입시 스트레스로 청소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청소년 정치참여에 대한 논의를 요청받았을 때 처음 느낀 감정은 그러므로 부끄러움일 수밖에 없다. 아직도 한국사회가 이 모양 이 꼴인 것에 대해 선배세대로서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는 것이다. 자그마치 20여 년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과연 선배세대는 치금 청소년인 후배들에게 촬영기능 달린 휴대전화 이상의 자기방어수단을 제공하였는가? 참기 어려운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에 대해 한 마디 거들 수 있는 것은 어쨌든 영광스러운 일이다. 결국 우리는 원칙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면서 한발 한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한국 청소년=1백 년 전의 미국 청소년”

지난 해 10월 12일, 『Detroit Free Press』온라인 판에 흥미로운 글이 실렸다.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작가 미치 앨봄이 쓴 칼럼이었다. 「Korea's kids just like ours, 100 years ago」라는 제목의 그 글은 “한국교육을 따라 배워야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글이었다. 2010년 당시에도 한국에 살며 직접 한국의 현실을 곁에서 지켜본 미치 앨봄은 “한국 아이들은 백 년 전 미국 아이들 같다”는 제목처럼 한국의 청소년들이 겪는 입시교육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를 조목조목 짚어준다.
잘 알려진 것처럼 오바마는 극성스런 부모, 치열한 대입경쟁, 압도적 학습량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한국식 교육’의 적극적인 지지자다. 실제로 현재 미국교육의 위기가 낮은 교육열과 적은 학습량에 있다는 주장이 여러 곳에서 제기되었기 때문에 오바마의 한국교육 찬양은 그만큼 화제를 불렀고, 미국 내에서도 동감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바마의 이야기와 유사한 주장들이 출판되거나 매체를 점령하면서 하나의 담론을 형성했다. 예를 들어 에이미 추아가 쓴 『타이거 마더』는 글자그대로 호랑이 같은 엄마가 자녀들을 스파르타식으로 조련해 명문대에 보내는 이야기다. 원래 미국에도 ‘하키맘’이니 ‘풋볼맘’과 같은 극성스런 치맛바람을 가리키는 단어들이 있긴 하다. 그러나 명문대에 보내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국, 중국 등 동북아시아 이민자 부모의 노력과 근성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 수준이다. 요컨대 광적인 교육열로 유명한 동아시아적 학력재생산 양식이 미국 주류사회에서 일종의 ‘대안적 교육철학’으로 떠오른 것이다.
미치 앨봄의 칼럼은 이런 흐름에 대해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단호하게 ‘노’를 외치고 있다. 그가 직접 목격한 한국 청소년들의 생활은 끔찍한 것이었다. 학교에 입학하기도 전부터 끝없는 경쟁에 노출되어 십 수 년 간 입시교육의 노예가 되거나 사회적 낙오자가 되는 한국사회의 모습이 그에게 정상으로 보였을 리 없다. 그는 낮이고 밤이고, 주말이고 주중이고 학교에 갇혀 지내는 걸 당연시하는 한국인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이것이 미국교육 시스템의 모델이 될 수 있느냐고 되묻고 있다. 그리고 “내 아이가 글로벌리더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고 제 자식들을 영어를 쓰는 미국인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한국인들의 이상한 정서를 꼬집는다. 앨봄이 보기에 이것은 20세기 초 미국 이민자 가정이 아이에게 낙오자(a loser)가 되고 싶지 않으면 대학에 가라고 닦달했던 풍경을 연상시킨다. 결론적으로 그는 한국식 교육이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한국교육을 배우는 것은 곧, “잘 웃고, 열심히 스포츠를 즐기고, 좀 더 자신을 스스럼없이 표현할 줄 아는” 청소년 대신에 늘 비교당하고 피 말리는 경쟁을 해야 하는 청소년을 양산하는 사회 시스템으로 퇴행하는 것이다.
미치 앨봄은 한국의 입시교육에 초점을 두어 이야기하였지만, 이건 단지 페다고지의 문제는 아니다. 결국 문제는 어떤 사회가 다음 세대를 바라보는 관점이고 실은 이것이야말로 핵심적 문제이다. 청소년을 미숙한 존재, 부모의 소유물로 보는 전근대적 사회에서 한국사회는 과연 얼마나 앞으로 나아간 것일까? 청소년의 정치참여라는 주제에서도 우리는 마찬가지의 의문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여전히 한국의 청소년들은 정치참여에서 제도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철저히 배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 먹고 어른 되면 가지는 금세 가지게 되는 권리인데 뭐가 문제냐’며 무신경하게 문제 자체를 외면하면서, 거의 반세기 동안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감수성은 한 뼘도 자라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유에는 어떤 이데올로기적 선입견, 사회에서 유통되는 담론에서 항상-이미 전제된 숨은 편견들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는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해 보자.


숨은 편견 1: “청소년은 판단능력이 부족하다”

선거연령을 높여 잡아 청소년들의 정치참여를 제도적으로 배제하는 근거로 흔히 가장 많이 드는 것이 바로 ‘미성숙’‘판단능력 부족’이다. 청소년들은 아직 정치적 선택을 합리적으로 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참정권을 행사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의외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이유에 납득을 해버리고 만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이것이 굉장히 이상한 논리라는 걸 금세 깨달을 수 있다.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판단력이 부족하지 않은 상태’를 전제한다. 그럼 판단력이 부족하지 않은 사람, 즉 정상적 판단이 가능한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인가. 자국어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정규 공교육을 이수한 사람인가? 그것은 모호할 수밖에 없다. 판단력이란 게, 성인들 사이에서도 천차만별이니 말이다. 어떤 사회의 ‘표준적 판단능력’을 누군가가 결정해 놓았다면 모를까, 정상적 판단력이라는 범주 자체를 명확히 정의할 방법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법 논리로는 정해놓았다. 금치산자, 한정치산자, 미성년자가 이른바 민법상 3대 무능력자이고, 선거권에 제한을 받게 된다. 그러나 법적 기준이 명백히 실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윤리적 정당성과 논리적 정당성이라는 층위에서 말해본다면, 공동체 구성원에게 사회적 권리와 자격을 부여함에 있어서 어떤 ‘능력’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그야말로 눈을 감고 낭떠러지를 걷는 것보다 더 위험한 태도이다. ‘탐욕스럽고 불결하며 공동체의 미덕을 파괴하는 유태인’에 대한 집단적 배제(나아가 삶으로부터의 영원한 배제)를 가능케 한 인종주의적 감수성과 그야말로 백지 한 장 차이이기 때문이다.
‘느슨한 경험칙’으로 재단했을 때, 일반적 청소년은 일반적 성인에 비해 여러 사회적 제도나 정책, 사건들을 판단할 때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고려를 하지 못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청소년의 정치적 판단능력이란 것이 금치산자나 한정치산자 정도의 판단력 부족상태인가라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쉽지 않다. 만약 법적 금치산자 또는 한정치산자 한 명과 평범한 청소년 한명에게 사회의 운명을 결정하는 급박한 기로의 선택을 맡겨야 한다면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청소년에게 나와 사회의 운명을 걸겠다. 농반진반으로 하는 이야기이지만, ‘판단력을 충분히 갖춘’ 대한민국 성인들이 투표해서 뽑은 대통령이 이명박이라면, 그 판단력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숨은 편견 2: “책임(의무)이 없으니 권리도 없다”

청소년의 권리를 제한하는 근거로 자주 드는 것 중 또 하나는 “책임이 없으니 권리도 없다”는 논리다. 이는 청소년을 권리의 주체로 보는 게 아니라 사회적 보호대상으로 보는 관점의 거울상이라 할 수 있다. 때때로 청소년들이 최소한의 인권과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면 어김없이 냉소적 반응이 튀어나온다. “니들이 세금을 내지 않고 죄 지어도 청소년이란 이유로 처벌을 제대로 받지 않잖아. 그만큼 사회가 보호해주니까 권리도 적은 게 당연한 거야.” 이런 논리는 일종의 호혜적  원칙처럼 들리기 때문에 겉보기에 꽤 공정해 보인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가 않다.
사회적 권리와 의무는 지금 보면 마치 일대응 대응관계 혹은 호혜성의 관철처럼 보이겠지만 권리와 의무가 형성된 역사를 들여다보면 권리와 의무와 호혜적으로 발생한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권리와 의무는 항상 비대칭적으로 발생하거나 소멸했으며 양자의 관계는 사후적으로 정당화되곤 했지 선험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이런 의무를 지니니까 당연히 저런 권리가 생긴다’는 식으로 사회적 제도가 생겨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청소년에게 사회적 책임이 상당 부분 면제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청소년이 결정한 것은 아니다. 사회가 일방적으로 청소년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지 청소년이 보호를 요청하고 사회가 그것을 받아들인 게 아니라는 의미다. 요컨대 이것은 어떤 종류의 사회적 계약이 아니다. “책임이 없으니 권리도 없다”는 말이 최소한의 정당성을 가지려면 먼저 청소년에게 책임과 권리의 평형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책임이 없으니 권리도 없다”는 말은 사회계약이 아닌 것을 마치 사회계약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공정성을 내세우며 공정성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어떤 기원 내지 원초적 상황을 은폐하고 있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권리와 의무가 반드시 어떤 필연성을 가지고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게 발생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일은 논리적․윤리적 필연 때문이 아니라 대개 현실적 필요 때문이었다. 청소년에게 책임과 의무가 없기 때문에 권리도 없다는 말은 “때문에”라는 말 덕분에 마치 논리필연적인 주장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다. 의무가 생긴 뒤 권리가 생길 수 있고, 반대로 권리를 확보한 뒤 의무가 부과될 수도 있다. 청소년에게 권리가 먼저 주어지고 나중에 의무가 부과된다고 해서 세상이 뒤집히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청소년은 (예컨대 17세 참정권처럼) 의무보다 조금 먼저 주어진 권리를 먼저 누리면서 사회적 의무와 책임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숨은 편견 3: “정치적 권리는 절박한 사안이 아니다”

정치적 권리를 많은 사람들은 일종의 2차적 권리라고 생각한다. 생존권 또는 먹고사는 문제보다 훨씬 덜 중요한 권리로 이해한다는 뜻이다. 여전히 사람들에게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같은 것들은 ‘배부르고 등 따신’ 연후에나 고려할만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여전히 박정희의 망령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이유이며, 아직도 일각에서 그가 주창한 소위 ‘한국형 민주주의’를 무슨 대단한 업적인양 숭앙할 수 있는 근거다.
정치의 역사를 크게 ‘두 번의 분리’로 일별해 본다면, 첫 번째 분리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일 것이다. 그럼 두 번째는? 자본주의의 출현 이후 ‘정치와 경제의 분리’다. 시장원리가 사회의 금과옥조가 되면 될수록 정경분리 이데올로기는 더욱더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기업과 시장의 일에 국가와 정치는 끼어들어선 안 된다는 주장은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에 가장 득세한 이데올로기였다. 오늘날 박정희 신화는 두 번째 분리와 관련되지만 아이러니한 점은 정작 박정희의 경제개발이 거의 완벽한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였다는 점이겠다.
어쨌든 정치적 권리를 소유권 같은 경제적 권리보다 하찮게 생각하는 인식은 바로 ‘정치와 경제의 분리’라는 현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런데 정말로 정치적 권리는 경제적 권리보다 하위의 권리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정치적 권리를 배부른 소리라 치부하는 것은 현실을 오도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정치적 권리의 장에서 시민들은 한 사람 당 한 표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 쉽게 말해 ‘n분의 1의 주체’이다.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완전히 평등하다는 걸 전제한다. 그러나 경제적 권리의 장에서 시민들은 ‘1원당 1표’ 씩이다. 돈이 많으면 그만큼의 권리를, 돈이 없으면 그만큼 권리가 줄어든다.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주장하는 세력은 경제적 권리의 장에서 이미 강자의 지위를 획득한 자들이다. 그들은 부자든 빈자든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통해 그들이 궁극적으로 획득하려는 것은 현재의 권력을 영속화하는 것이다. 그들이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은 정치와 경제의 분리가 결코 아니다. 정치를 경제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권리를 절박한 사안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그들은 부와 권력을 절대 놓지 않으려는 부자이거나 아니면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멍청이다. 사회적 절대적 빈곤이 어느 정도 해결된 지금, 그러나 부의 집중이 갈수록 심화되는 지금, 정치는 만연한 불공정과 불평등을 시정할 수 있는 절박한 투쟁의 장이 되었다. 사회진입을 앞둔 청소년들에게는 두 말할 나위 없이, 그야말로 목숨만큼 소중한 권리다.


숨은 편견 4: “정치는 더러운 것이다”

‘내 자식에겐 아름다운 것만 보여주고 싶다’는 부모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제 자식들을 박물관, 미술관, 전시회, 클래식 공연에 하루가 멀다 하고 데려간다. 하지만 신문의 뉴스를 보라고 하지는 않는다. 특히 정치면은 눈길도 주지 말라고 한다. “정치는 더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의 자식들은 자라서 미시마 유키오가 될 가능성이 높다. 누구보다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했던, 도쿄대 법대 출신의 파시스트 소설가 말이다.
청소년들이 정치 이야기를 하면 어른들이 당장 하는 소리가 “발랑 까졌다”“되바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니깟 게 정치에 대해 뭘 안다고 나서냐’고 역정을 낸다. 심지어 고등학교 학생회에서 학교의 잘못에 작은 문제제기만 해도 ‘어린놈이 정치꾼 되려고 그러느냐’는 소릴 듣는다. 경제적 욕망을 드러내면 ‘경제관념 있다’고 칭찬을 받지만, 정치적 욕망을 드러내면 욕을 먹는다. 이런 경험을 몇 번 겪으면 어지간히 ‘나대는’ 청소년도 쉽사리 정치 얘길 꺼내지 못한다. 그리고 은연중 ‘정치는 더러운 것’이라는 인식이 몸에 배어든다.
물론 정치는 때로 더러운 일이 된다. 때로 모양새가 좋지 않은 일도 벌어진다. 정치의 세계에는 수학공식처럼 똑 떨어지는 결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고 개인 잘못은 아니지만 책임을 뒤집어쓰는 일도 생긴다. 왜 유독 정치가 더러운 것이 됐을까. 그것은 이미 더러운 짓을 일삼던 사람들이 나이를 먹고 정치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정치의 기예와 미덕을 어렸을 때 훈련받지 못하고 이미 뇌와 심장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다음, 돈 걱정 없는 노후의 소일삼아 정치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정치 자체가 더러운 게 아니다. 더러운 짓 하던 이들이 정치로 몰려드는 시스템이 더러운 것이다. 그렇게 정치를 더러운 게토로 만들면 누구에게 가장 이익이고 누구에게 가장 손해일까. 답은 명백하다. 모든 피해는 사회적 약자가 보게 된다. “정치는 더러운 것”이란 논리는 청소년들에게 좀 더 가치 있는 다른 일에 매진할 것을 권하는 비교적 ‘선량한 어른들’에게서 종종 나타나는 주장이다. 그러나 본질은 명확하다. 청소년을 정치에서 배제하는 방식의 탈정치 버전일 뿐이라는 것.


시민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길러진다

청소년들의 정치참여가 선거권 내지 선거연령의 문제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어차피 선거연령이란 건 특정 나이로 제한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선거연령을 더 낮추려는 쪽과 덜 낮추려는 쪽의 지루한 공방이 될 운명이다. 물론 그런 제도적 진전이 가지는 실제 효과와 상징성은 너무나 크다. 하지만 청소년들의 정치참여가 단지 한 두 살 어린 유권자가 늘어나는 것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청소년들이 생활에서 접하는 정치적 활동들, 예컨대 정당 활동이나 학생자치 등의 차원이다. 이런 활동들을 활발히 하며 청소년들이 정치적 감수성을 체화하고 자신의 권리를 민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선거권 확대의 진정한 내용적 측면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중고등학생들이 보는 사회경제 교과서에는 노동조합이 어떻게 구성되며 노동자의 권리를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지가 마치 노동운동 조직의 파업 매뉴얼처럼 설명되어 있다. 그런 교과서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분위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프랑스의 청소년들은 우파정부가 시행하려던 비정규직 악법에 맞서 거리로 나왔고 끝내 막아낼 수 있었다. 한 사회의 진보는 진보적인 대통령 한명 뽑는다고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런 진보라는 것이 얼마나 모래성 같은 것인지를, 얼마나 쉽게 후퇴할 수 있는 것인지를 우리는 현 정권을 포함한 세 번의 정권을 거치며 충분히 경험했다. 사회진보의 가장 튼튼한 기반은 불평등과 부조리에 예민한 시민들의 비판정신과 연대의식이다. 다음 세대를 배제하지 않고 어떻게든 참여시키려는 정치, 청소년들의 생활에 뿌리내리는 정치적 권리의식이야말로 그런 진보적 시민의 출현을 비로소 가능케 한다. 시민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길러지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