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11. 12:01

위키리크스가 알려준 진짜 '비밀'[시사인 173호]


새해기념 블로그 포스팅. 그러고보니 시사인 칼럼의 블로그 업뎃도 오랜만이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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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리크스가 알려준 진짜 '비밀'

시사주간지 <타임>의 2010년 ‘올해의 인물’에 소셜네트워크 사이트 ‘페이스북’의 설립자 마크 주커버그가 선정됐다. <타임>의 ‘올해의 인물’은 세계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진 의제를 폭넓게 살펴보는 척 하다가 최종적으론 자기들 입맛에 딱 맞는 인물만을 낙점하는 편협성으로 악명이 자자한데,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주커버그라니! 2010년 올해의 인물은 누가 보더라도 단연코, 지구 전체를 충격과 경악으로 몰아넣은 위키리크스(Wikileaks)의 설립자 줄리언 어샌지였다(여기서 잠깐 우리는 <타임>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투표에서 어샌지가 엄청난 표차로  ‘올해의 인물’ 1위를 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해커이자 저널리스트인 줄리언 어샌지가 설립한 위키리크스는 미군의 바그다드 공습영상 등 충격적인 극비자료를 공개하기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하나의 ‘거대한 전선(戰線)’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대권력에 대한 “집단지성의 통렬한 역습”에 열광하고 환호했다. 기밀공개에 의해 치부가 노출된 사람들, 조직들, 국가들은 기를 쓰고 위키리크스를, 그리고 상징적 존재이자 실질적 운영자인 어샌지의 신변을 확실한 통제 아래에 두기 위해 그물을 치고, 함정을 파고,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중계되다시피 한 이 추격전은 현실의 외피를 쓰고 있었을 뿐, 본질적으로 슈퍼 히어로와 안티 히어로의 대결이었다. 노엄 촘스키 같은 양심적 지성이나 마이클 무어 같은 영리한 자유주의자들이 탄압받는 슈퍼히어로의 편에 섰다. 안티히어로 진영은 악당 특유의 음험한 침묵과 이면의 집요한 행동력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한 마디로 슈퍼히어로와 안티히어로의 캐릭터성과 대결양상 등의 형식미적 측면은 완벽에 가까웠다. 문제는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기밀의 내용이었다.


폭로한 건 체제의 기만성이라기보다 허약성

위키리크스에 유출된 절대다수의 기밀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의 질서가 실은 ‘빅 브라더’나 ‘매트릭스’ 같은 전능하고 억압적인 시스템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많은 권력들의 비이성과 우발성에 의해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거기엔 냉정한 판단력과 철의 규율을 갖추고 주도면밀하게 세계질서를 뒤에서 조종하는 프리메이슨이나 성당기사단 같은 엘리트 집단 대신에, 맨날 이웃 나라 외교관 ‘뒷담화’나 까는 한심한 관료들이 있을 뿐이었다. 국가를 운영하는 지배계급들은 논리는커녕 최소한의 일관성도 없는데다가 거듭되는 현실에서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열정에 이끌려 정책적 실패를 반복하기 일쑤였다. 위키리크스가 보여준 건 세상이 굴러가도록 만드는 어떤 심오한 비밀이라기보다는 ‘그런 비밀 같은 건 없다’는 허탈한 진실이었다. 어샌지는 권력자들의 거짓과 기만을 폭로하겠다는 단순한 열정으로 이 일을 시작했지만 그 단순한 열정이 드러낸 것은 복잡한 현실 속 역학이었고, 체제의 기만성이라기보다 차라리 허약성이었다. 드러난 그 허약성은 역으로, 그간 약해진 인민들의 자기지배에 대한 자신감을 강화시킬 수도 있다.
어떤 좌파들은 위키리크스가 자본주의 체제의 위협이 아니라 좀 덜 나쁜 자본주의, 보다 합리화된 자본주의를 위한 운동에 불과하다고 한계를 지적한다. 실제로 줄리언 어샌지는 지난 11월 29일 <포브스> 인터넷 판에 실린 인터뷰에서 “당신은 자유로운 시장의 지지자인가?”라는 질문에 “전적으로 그렇다(Absolutely)”라고 답한 바 있다. 그는 또 “위키리크스는 보다 자유롭고 윤리적인 자본주의를 만들기 위해 설계되었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정상화하기 위한 자본주의자들의 영웅적 노력이 그 의도와 다르게 자본주의를 파국으로 이끌 거라 상상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당신이 만약 좌파라면, 팔짱을 낀 채 이죽대기보다 이 ‘순진한 자본주의자들’과 어깨를 겯고 함께 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