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28. 11:00

국가가 침몰한 곳에서 인양된 낯선 아이러니[자음과모음R]

'다음 세대를 위한 인문교양지' <자음과 모음 R> 창간호에 실린 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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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침몰한 곳에서 인양된 낯선 아이러니


천안함 사태는 ‘뉴스의 블랙홀’이라 불렸다. 몇 달 동안 거의 모든 사건사고들이 천안함이라는 대형이슈에 빨려 들어가 버렸다. 평소 같으면 전국이 발칵 뒤집힐만한 대형사건들도 반짝 관심 받다 익명의 뉴스들 속으로 사라져갔다. 천안함 사태가 이 정도로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건 단지 희생자들이 많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건의 발생과 대처과정이 발달한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공유되었으며 이 모든 과정이 하나의 거대한 모자이크를 이루며 수많은 이야기들을 생산해냈다. 한국의 시민들은 한 나라의 정부와 군대가 젊은 청년들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어느 정도까지 무능할 수 있는지를 그야말로 실시간(real time)으로 목격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탄식했다. “도대체 이게 국가인가!”

침몰 후 약 두 달이 지나서 정부와 군은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천안함이 침몰한 원인이 북한 잠수정의 어뢰공격이라 발표했다. 며칠 뒤 이명박 대통령은 담화문을 발표해 “북한은 자신의 행위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면서 “남북교역과 교류를 중단하고 이 사안을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해 북한의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다. 남북관계는 극도로 얼어붙었고, 사실상의 준 전시상황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정부와 군의 유례없이 강경하고 단호한 태도는 “북한의 소행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증거는 침몰 해역 인근에서 인양한, ‘1번’이라는 펜글씨가 선명히 적혀있는 어뢰의 잔해였다. 무시무시한 진실이, 천인공노할 악행을 저지른 범인이 드디어 밝혀진 셈이다.

20년 전이었다면 슈퍼마켓의 라면과 생필품이 사람들의 사재기로 모조리 동이 나고, 전국의 학교에 일제히 휴교령이 내려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그런데 2010년 5월 말 현재,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선거 시기 특유의 어수선함을 제외한다면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비교적 평온한 일상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정부발표에 대해 전적인 신뢰를 보내는 데 주저하고 있었다. 심지어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폰 뒷면에 파란색 펜으로 “1번”이라 쓴 사진을 인터넷에 올려 “이게 바로 북한산 아이폰”이라며 정부발표를 조롱하기까지 했다. 관련한 풍자와 패러디가 봇물을 이루자 경찰과 검찰은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며 강경한 태도로 단속에 나섰고 이런 ‘과잉대응’에 대해 국내외 인권단체들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반면 대다수 외국 언론들은 한반도의 긴장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고 앞 다투어 보도했지만 그 초점이 ‘북한의 비겁한 공격’이라든가 ‘1번 어뢰’ 따위가 아니었다. 대부분 한반도의 긴장이 유럽과 미국 증시에까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으며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는 것은 세계경제에 더욱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경고였다.

분명, 뭔가 좀 이상한 구석이 있다. 같은 사건을 두고 국내와 국외, 그리고 남한정부와 남한시민들 사이의 반응이 너무나 차이가 난다. 인식과 판단의 온도차가 이토록 심한 데엔 분명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왜 세계 언론들은 ‘1번 어뢰’, 즉 한국과 미국의 첨단 감시망에 전혀 포착되지 않고 1200톤급 초계함을 단 한방에 두 동강 낸 북한의 군사무기에 대해 이토록 관심이 부족한 것일까.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왜 한국의 많은 시민들은 모여서 북한을 규탄하기보다 이명박 정부와 군 지휘부를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사람들의 이 뿌리 깊은 불신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국가라는 이름의 ‘양치기소년’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라는 경우는 손으로 꼽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데, 그 중에서도 열이면 열,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게 바로 ‘위험에 대한 감각’이다. 술에 잔뜩 취한 채로 아찔하게 깎아지른 북한산 바위벽을 슬리퍼를 신고 뒷짐을 진 채 태연히 오르내리는 한국노인들을 본 어느 일본인은 “내 평생 이렇게 무서운 광경은 처음 본다”고 혀를 내둘렀다. 카 레이싱을 방불케 하는 한국인의 운전습관을 보고서도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무엇보다 그들을 경악하게 하는 건 북한의 도발에 대한 남한 사람들의 태도다. 일본인들 눈에는 당장 전쟁이라도 날 것처럼 분위기가 흘러가는데 한국 사람들은 너무나 태연자약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일본인들의 경우, 일상에서 보이는 한국인들의 이런 면을 북한의 도발에 대한 대응에도 똑같이 적용해 “남한 사람들은 전쟁위험에 대한 감각도 마비되었다”는 식으로 판단해버리기도 한다. 한국인 중에서도, 특히 ‘안보’를 강조해온 세력일수록 이런 식의 설명에 찬성하는 경향이 강하다. 과연 그럴까? 일단 북한의 군사력을 매우 과장하면서 김정일 정권을 지속적으로 ‘악마화’해왔던 일본 미디어가 일본인들의 인식에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휴전국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전쟁위험을 느끼는 정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이 크다. 이건 한국인들이 지속적인 북한의 도발을 경험한 탓에 전쟁위험을 느끼는 감각이 상대적으로 무뎌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식의 피상적인 설명으로는 이 현상을 제대로 설명해낼 수 없다. 그보다는 전쟁위험을 느끼는 감각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좀 더 ‘세밀하다’고 표현해야 더 타당할 것이다. 무슨 의미일까.

예를 들어, 전쟁위협을 실제로 겪을 일이 없는 외국인들에게 전쟁이라는 것은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는, 둘 중 하나의 가능성밖에 없는 사태다. 물론 한국인들에게도 남북한 간의 전쟁이라는 건 어쨌든 결코 일어나선 안 되는 공포스런 사건이다. 하지만 동시에 긴장이 차츰 고조되고 다시금 완화되는 여러 단계를 역사적으로, 그리고 몸으로 체험해왔기 때문에, 상황판단이 ‘전쟁 아니면 평화’라는 식으로 단순화되어 있지는 않은 것이다. 바꾸어 말해본다면, 남북간의 어떤 충돌이 하나의 사건으로 명백히 드러났을 때조차도 그 사건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를 본능적으로 고려한다는 의미다. 실제로 그런지는 차치하고, 남한사람들은 전쟁이 벌어질지 벌어지지 않을지에 대한 징후나 신호를 감지할 수 있다고 스스로 믿는 경향이 있다. 요컨대 남북간의 갈등에 대해 한국사회에는 사회적으로 축적되고 학습된 독특한 감각, ‘남북갈등의 맥락을 고려하는 감각’이 존재한다. 이런 감각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수십 년간 거짓말을 일삼아온 정권들이었다.

남한에서는 선거 시기에 간첩사건 등을 조작·발표해 선거결과에 영향을 끼치려는 시도, 소위 ‘북풍공작’이 끈질기게 존재해왔고 그 시도들이 대개는 그것을 시도한 측이 만족할만한 결과로 귀결되어왔다. 그것은 군사정권, 그리고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보수세력의 특기였다. 수많은 사례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유별나게 황당했던 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1986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벌어진 평화의 댐 사기극이다. 당시 이규호 건설부 장관은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 금강산댐(임남댐)의 저수용량이 200억 톤이며 이를 한 번에 방류할 경우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고 발표했다. 국회의사당은 지붕만 남고 63빌딩의 3분의 2가 잠긴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모형실험까지 동원되어 방송됐고, 남한사회 전체가 글자그대로 ‘발칵’ 뒤집혔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언론에 출연해 초당 230만 톤의 물이 12~16시간 내에 서울을 덮칠 것이라며 거듭 경고했고, 당연하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끔찍한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88서울올림픽을 망치기 위한 북한의 수공작전”이라는 설이 설득력 있는 이유로 꼽혔고, 전국에서 수많은 반공집회가 조직되었다. 당시 KBS와 MBC,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충실한 스피커’로 기능했다. 이들 언론들은 연일 북한을 규탄하고 금강산댐 위협을 기정사실화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월간 <말>과 같은 진보매체와 소수의 운동권들 외에 누구도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류언론들은 곧장 ‘대응댐’ 논리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우리 쪽에서도 댐을 만들어 북한의 수공을 막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탄생한 게 바로 평화의 댐이었다. 정부와 언론들은 1986년 12월부터 평화의 댐 건설을 위한 국민모금을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초등학생은 물론이고 해외동포, 심지어 교도소 제소자까지 성금을 냈다. 달동네 어린이가 자기 생활비를 털어 평화의 댐 모금을 했다는 기사가 뭉클한 ‘미담’으로 소개되어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그렇게 ‘코 묻은 돈’까지 긁어모아 만든 금액이 약 639억 원. 그러나 금강산댐 사기극을 통해 남북대결구도를 극단적으로 강화하고 집권을 연장하려던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결국 권좌에서 물러났다. 국가가 주도한 이 기막힌 사기극은 몇 해 지나지 않아 거짓임이 밝혀지게 된다. 이 황당한 소동에 대해 <워싱턴 포스트>는 1988년 8월1일자 기사에서 “평화의 댐은 불신과 낭비의 사상최대의 기념비적 공사”라 비꼬았다. 1993년에는 감사원 조사를 통해 금강산댐의 저수량은 최대로 잡아도 약 50억 톤 정도이며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평화의 댐 사기극처럼 남한정부가 북한을 이용해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거나 집권기간을 연장하려 했던 시도들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다. 남한사회는 그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곳이었다. 북한의 무력도발이 사실인 경우도 물론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정권이 모종의 의도를 갖고 체계적인 조작으로 ‘북풍’을 만들어낸 경우는 그 이상으로 많았다. 그래서 일단 ‘북풍’이 불면 사람들은 조심스러워진다. 시기와 의도와 맥락을 신중하고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속고 또 속아온 사람들이기에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지난 30년 동안의 학습의 결과이므로.

‘빅 브라더’에서 ‘무능한 가장’으로

군사독재시기에는 정권이 아무리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 시민들을 속여도 잘 먹혀들었다. ‘평등’ ‘자유’ ‘평화’ ‘민주’ 같은 가치가 아니라 ‘반공’이 국시(國是)이던 시절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어쨌든 그 시절 국가는 능수능란한데다 잔혹하고 힘이 센 ‘양치기 소년’이었다. 혹여 자신의 거짓말을 폭로하는 자가 나타나면 잡아다 고문하거나 불구로 만들거나 아예 죽여 버렸다. 만약 기업이 정부의 부당한 요구를 듣지 않으면 사장을 불러다 고문했고, 정 말을 듣지 않는다 싶으면 온갖 수단을 동원해 회사를 망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힘을 합쳐 국가의 부당함에 저항하면 광주에서처럼 군대를 동원해 무참히 학살했다. 국가는 무소불위였고, 전지전능한 것처럼 보였다. 이를테면 그 시절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나오는 ‘빅브라더(Big Brother)’였다.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미국뿐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던 미국은, 한국의 군사정권이라는 양치기 소년의 ‘신원보증인’ 역할을 해주었다. 물론 이건 ‘절대적 복종의 대가’였다. 이 신원보증인의 적극적인 비호와 방조 속에서, 양치기 소년은 1980년 광주에서처럼 많은 시민들을 학살해놓고도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미국의 후광이건 어쨌건 과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자국 영토 내에서 벌어지는 일에 전지전능한 존재에 가까웠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결정적 국면을 지나게 되고, 오랜 군사독재가 막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이른바 ‘시민사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시민사회의 힘이 강력해질수록 과거 군사정권 시기의 지나치게 편중되고 강력했던 국가권력은 점차 민간으로 옮겨지고 분산되어갔다. 달리 표현하면 그 과정은 비정상적인 국가가 ‘정상적인 국가’가 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정상국가화’를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역사를 참조하고 우리의 현실을 고려해서 국가의 올바른 역할이 과연 무엇인지, 국가의 힘은 어디까지 제한되어야 하고 어디까지 발휘되어야하는지에 대한 공동체 전체의 합의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차분히 합의에 이르기도 전에 한국사회는 엄청난 사회적 격변에 직면하게 된다. 1997년 가을의 IMF 외환위기가 닥친 것이다.

동아시아 금융위기의 일단이기도 한 이 사건은, “한국전쟁 이후 가장 강력한 트라우마”라고 표현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정도로 우리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우리의 인식체계와 사고방식이 전면적이라 할 정도로 변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IMF 외환위기였다. 대통령이 돈을 꾸기 위해 다른 나라에 가서 굴욕적인 태도로 머리를 숙이고, 사람 좋던 이웃집 아저씨는 하루아침에 사업이 망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멀쩡히 잘 먹고 잘 살던 삼촌이 카드빚에 시달리다 노숙자가 되고, 백화점 문화센터와 헬스클럽을 오가는 게 유일한 일과이던 큰 고모가 감자탕 집에 주방일을 나가게 됐다. 국가가 부도나는 이 초유의 사태 앞에서 국가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국가가 휘두르는 폭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지켜보았던 사람들은 이제 ‘국가라는 총체적 권력’이 ‘화폐라는 경제적 권력’ 앞에 철저히, 혹은 처절히 무릎 꿇는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것은 회사에 간다고 말하고선 산으로 향하는 아버지의 지치고 굽은 등을 바라보는 것처럼 서글픈 광경이었다.

국가는 국민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자기 자신조차 구제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마침내 폭로되고 말았다. 냉혹한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개인이 알아서 발버둥치는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초반 김영삼 정권 시기에 관료와 경제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IMF 외환위기를 통해 비로소 사람들의 생활에 실제로 큰 영향을 끼치는 생존원칙으로 변형되어 내면화되기 시작했다. 승자독식과 약육강식의 원리가 새로운 시대의 국민교육헌장이 되었다. 자기계발서와 처세서가 베스트셀러를 독점하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였다. 이렇게 국가는 ‘빅 브라더’에서 ‘무능한 가장’이 되었다. 국가가 공동체 구성원의 삶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 따위는 이미 일고의 가치도 없는 케케묵은 사안이 됐다. 그 대신 국가가 시장과 재벌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하지 말아야하는지’에 대해서 수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고 대부분 그대로 실행되었다. 이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정당성을 판단해주는 ‘정당성의 보증기관’은 법도, 상식도, 윤리도 아닌 ‘시장’이 되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금융기관과 무디스나 스탠더드 앤 푸어스 같은 신용평가기관이었다. 분명 국가의 위상은 평가절하 되었다. 하지만 이를 조금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국가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이 좀 더 객관화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는 이 또한 하나의 ‘진보’라고 할 수 있었다.

적대 vs. 경쟁: 새로운 애국주의의 탄생

국가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가 대중문화적 차원에서 처음 드러난 것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이었다. 광장에 모여 “대한민국”을 외치는 거대한 군중의 출현은 단순히 국가주의라거나 민족주의의 표출이라 보기엔 지나치게 이질적인 현상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문화비평가 이택광은 그 현상을 ‘월드컵 주체의 탄생’이라 명명하기도 하는데, 그는 월드컵 주체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유학시절의 흥미로운 경험을 소개한다. “유학시절 나는 한국에서 온 어린 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386주체한테서 흔하게 발견되는, 선진국에 한수 배우러 온 분위기를 전혀 풍기지 않았다. 당시 이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던 나를 비롯한 여러 386주체에게 이것은 분명 놀라운 징후였다.”

여기서 이택광이 묘사하고 있는 건 바로 ‘콤플렉스가 없는 세대’에 대한 경이로움이다. 예를 들어, 일제 식민지 세대에게 일본은 평생 극복하기 어려운 굴욕감과 열등감을 안겨주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1945년 무렵~1960년대 말 사이에 태어난 세대들,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던 세대에게 콤플렉스를 안겨준 나라는 미국이었다. 이들은 일본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고 반면에 미국에 대해서는 반감과 두려움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가졌다. 소위 ‘386 세대’의 격렬한 반미주의의 반대편에는 그에 못지않게 격렬한 선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세대들의 일본과 미국에 대한 콤플렉스는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서구 선진국에 대한 공통적인 열등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후 세대들에게 미국이라는 나라는, 세계최강대국이며 남한과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콤플렉스를 안겨줄 정도로 심각하고 무거운 존재는 아니다. 다른 선진 국가들에 대한 시각도 대체로 이런 수준에 머무른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다른 나라나 다른 사람, 다시 말해 외부를 바라보는 프레임(frame)부터가 다르기 때문이다(여기서 말하는 프레임이란 쉽게 말해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을 특정하게 틀 지우는, 일종의 ‘생각의 거푸집’이다). 그것을 ‘적대의 프레임’과 ‘경쟁의 프레임’으로 도식화시켜볼 수 있다.

과거 세대는 타자를 바라볼 때 ‘친구’와 ‘적’의 이분법을 적용한다. 그래서 친구의 친구는 나의 친구이고, 적의 적 또한 나의 친구다. 이 ‘친구/적’의 구분은 독일의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가 ‘정치적인 것’을 논할 때 언급했던 유명한 이분법을 연상시킨다. 반면 그 이후 세대들은 ‘친구/적’의 이분법보다 ‘협력자/경쟁자’의 이분법에 더 익숙하다. 이 두 가지 사고는 얼핏 비슷할 것 같지만 실은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이다. ‘친구/적’의 이분법은 기본적으로 ‘적대의 정치’이며 자기가 속한 집단이 지향하는 정의를 관철시키려는 투쟁이다. 이 싸움은 가치를 둘러싼 전면전이며 그것은 ‘싸움의 룰을 만드는 것’까지도 포함하는 싸움이다. 그러므로 이 투쟁에서 ‘룰’을 준수하느냐 아니냐는 부차적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누가 룰을 만드냐이고,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의 고유한 차원이 열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적대의 정치가 극단으로 흐를 경우, 그것은 상대를 절멸시키는 잔혹성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한편, ‘협력자/경쟁자’의 이분법은 달리 표현하자면 ‘경쟁의 경제’이고, 이 프레임이 전제하고 있는 주체는 원자화되고 파편화된 개인이지 집단이 아니다. 개별적인 사람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협력하거나 치열하게 경쟁하는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룰(rule)’이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할 권리는 신성불가침의 권리이기 때문에 그것이 서로 충돌했을 때 판단을 내려줄 심판의 존재가 필수적으로 요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프레임이 바라보는 ‘사회’라는 것은, 월드컵 축구경기와 같이 명백한 규칙이 있는 스포츠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래서 이런 프레임으로는 집단끼리의 정치적 갈등이라는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기 어렵고, 룰 자체를 바꾸는 싸움을 벌이거나 정당화하기도 어렵다.

양쪽 프레임 중 어느 것이 우월하고 열등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세대가 다르다고 해서 어느 한쪽 프레임에 일방적으로 치우쳐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핵심은,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기존의 애국주의 혹은 국가주의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관이 현실에 출몰했다는 점이다. 그 새로운 국가관은 2002년 월드컵 때와는 다소 다른 모습으로 2005년 황우석 사태, 2007년 인터넷을 달군 심형래 감독의 ‘디워’ 논란 등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것은 과거처럼 공동체의 생존이나 명예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엄숙하고 낡은 애국주의’가 아니었다. 악랄한 북괴와 싸워 이겨야 한다는 반공주의적 애국주의도 아니다. 새로운 애국주의는 앞서 말한 경쟁의 프레임에 기반한, ‘국가경쟁력 담론’으로서의 애국주의다. 그렇다고 이 애국주의가 단순히 자기 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경쟁력이 강하다는 자부심의 표현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내가 나라를 사랑하는 데에는 명백하고 구체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태도에 가깝다. 요컨대 공동체 그 자체나 공동체의 어떤 숭고한 가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국가경쟁력이 개인과 기업의 경쟁력과 이윤축적에 도움을 줄 거라는 믿음을 근거로 삼는 애국주의인 것이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국익주의’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새로운 애국주의의 출현에는 명백한 물적 배경이 존재한다. 세계경제와 동아시아 대중문화시장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지위의 상승이다. 국내적으로 한창 경제성장에 매진하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이란 국가는 세계시장에서 존재감조차 없었다. 1987년 3,364달러였던 1인당 GDP는 2002년 11,485달러에 이르렀고, 2000년대 들어 한국의 경제규모는 계속 세계 10위권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또한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은 아시아 대중문화 시장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어서 ‘한류 문화제국주의’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불과 20년 전인 1990년의 한국 상황과 비교해보아도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다. 한편으로 이것은 남북한 간의 엄청난 경제적 격차로 인해 ‘체제경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실상 무의미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젊은 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 대다수의 남한 사람들은 과거와 달리 북한의 ‘체제의 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반드시 통일해서 같이 살아야할 한민족으로 북한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보다는 통일과정에서 치러야할 천문학적 비용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런 이들에게 북한은 굶어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내 집에 데려올 생각은 없는, ‘찢어지게 가난한 먼 친척’일 뿐이다.

‘국익은 믿고 국가는 믿지 못하는’ 아이러니

2005년 ‘황우석 사태’가 한창이던 당시 일간지에 실린 글 하나가 많은 시민들의, 특히 황우석 교수에게 우호적이던 사람들의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중앙일보>의 의학전문기자 홍혜걸이 쓴,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제목의 칼럼이었다. “지난 해 기자는 영국 학술잡지 <네이처>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중략) 의도는 명확했다. 그들은 황우석 교수의 업적보다 난자의 출처가 궁금했던 것이다. 겉으론 생명윤리를 내세우지만 속으론 연구진에 대한 흠집내기 의도가 역력해 보였다.(중략) 우리가 뿌린 씨앗인데 남들에게 열매를 빼앗길 수 없다. 먼저 분열된 국론을 통일해야 한다.”

홍혜걸의 글은 얼핏 낡은 애국주의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많은 돈을 벌어다줄 신기술의 개발과 이에 대한 선진국의 ‘질투’를 자의적으로 설정한 뒤에 세계시장의 이 치열한 경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한다는 ‘1등 강박증’을 자극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설명한 새로운 애국주의, 즉 국익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아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런 논리들은 반복적으로 재생산되었는데, 2007년 심형래 감독의 SF영화인 ‘디워’ 개봉 당시 이 영화의 완성도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공격하던 네티즌들의 논리 역시 정확히 홍혜걸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앞서 젊은 세대의 특징으로 들었던 선진국에 대한 콤플렉스가 옅어지는 현상과, 황우석 사태 등에서 보이는 국익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현상은 얼핏 서로 상충하는 현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실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두 가지 현상은 모두 국가라는 ‘초월적 권력’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사람들의 태도변화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천안함 사건이 보여준 우리 사회의 여러 단면들 중에서 그나마 건강하고 긍정적이라 평가할 수 있는 점은 바로 이 점이다. 이제 사람들은 정부와 군의 공식조사발표조차도 덮어놓고 믿기 보다는 이상한 점을 캐묻고, 맥락을 따지고, 국가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추궁한다. 국가를 물신화하거나 신비화시키지 않고 언제든 잘못을 저지르고 시민들을 기만할 수 있는 하나의 행위주체로 평가한다는 면에서, 분명 이러한 태도는 진일보한 것임이 틀림없다. 절대주의 시대나 군사독재시기처럼 국가의 명령에 의문조차 제기하지 못하던 시절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러한 태도가 내장하고 있는 위험성은 더욱 커진다. 그것은 이것이 은폐하고 있는 어떤 진실 때문이다. ‘시장권력이 국가권력보다 위에 있다’는 진실.

이에 대해 세상을 떠난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노 전 대통령을 포함해서, 소위 ‘민주화세력’이 이해한 민주주의는 이랬다. 시민들을 고문하고 죽이고 억압했던 국가권력이라는 괴물을 해체하고, 그 괴물의 힘을 시민에게 돌려주는 것. 그들은 이 목표를 위해 국가라는 괴물과 치열하게 싸우다 죽거나, 다치거나, 멀리 도망쳤다.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크고 작은 희생에 경의를 표해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국가권력을 시민에게 돌려주는 것과 국가권력을 시장으로 넘겨주는 것을 동일시했다는 점이었다. 민주화세력 분만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 또한 그것이 민주주의라 생각했다. 민주화 10년은 곧 ‘민영화 10년’이었다. 그 결과는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비극적이다. 국가와 재벌의 살림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는데 정작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점점 더 빈곤해졌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빈곤을 벗어날 수 없는 워킹푸어(working poor)의 나라, 불안정노동이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나라가 됐다. “국가는 못 믿겠지만, 국익은 지켜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가장 서글픈 코미디가 된다. 국부(國富)가 개인에게 제대로 분배되지 못하는 사회에서 ‘국익’이란 건 결국, 실질적 내용이 없는 하나의 물신(fetish)에 불과한 까닭이다. 새로이 출현한 ‘국익주의’는 그래서 낡은 애국주의만큼이나 공허할 수밖에 없다. 이런 태도는 천안함 사건을 바라볼 때도 예외가 아니다.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최고로 고조되는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 전쟁에 반대했다. “전쟁만은 안된다!” “한반도의 평화가 최우선이다!” 옳고 당연하다. 전쟁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반대하는 이유로 꼽은 내용이 의미심장하다. 경제가 파탄나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얼마든지 다음과 같이 바뀔 수 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해야.’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활력을 잃어가던 경제를 살린 전쟁은 얼마나 많았던가.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계몽된 시민의 모습으로 ‘국가권력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할 때, 국가권력에 대한 불신이 은밀히 의지하고 있는 건 시장권력에 대한 확신이다. 한편, 시장권력에 대한 믿음이 근거하고 있는 건 국가권력의 악덕 또는 무능이다. 무한히 빙글빙글 도는 일종의 순환논리인 셈이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국가에 대한 불신이라는 현상을 “깨어있는 시민들의 이성”이라 일방적으로 미화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