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16. 05:43

김예슬과 꼰대들


1명을 칭찬하기 위해 나머지 99명을 싸잡아 욕하는 것, 그리고 99명을 욕하기 위해 1명만을 칭찬하는 것, 이 두 가지는 이념과 연령을 막론한 꼰대들의 특징이다. 진보 쪽에 한정하자면, 평소 20대를 욕하던 진보인사일수록 그 반작용으로 10대들 혹은 김예슬 씨같은 20대에 대한 찬사가 과도해진다. 적절한 임상사례로 시사평론가 김용민 씨가 있다. 그는 "20대 너희에겐 희망이 없다"며 소위 20대 포기론을 떠들고 다니면서도 한국의 10대를 마치 외계에서 떨어진 존재인 양 20대와 구분지어 과도하게 칭찬한다. 이런 행태들은 대개가, 20대를 이념적으로 비난함으로써 (한때 급진적이라 스스로 믿었던) 자신의 보수성 혹은 반동성에 대한 알리바이를  획득하려는 시도이다.

꼰대들의 심리야 어쨌든간에 그들에게 칭찬받던 자와 욕만 먹던 자는, 실제로 비슷한 이념과 감성을 갖고 있더라도, 같이 연대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양쪽 모두 서로를 보며 "난 저 녀석과 너무나 달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공통체험이 점점 희박해지는 세대에게 이건 생각보다 더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꼰대들은 으레 그렇게 '어린 놈들'을 분리통치해왔는데, 꼭 나이 많은 꼰대만 그런 건 아니다. 그런 꼰대들의 담론을 별다른 비판의식 없이 내면화한 젊은 세대 역시 자신들을 그런 식으로 타자화시킨다. '어린 꼰대'가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적절한 임상사례들은 널려 있다. "자기계발 담론은 현실에 대한 절대적 긍정" "루저 담론은 현실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라는 조악한 분법을 통해 "20대에 비판적 사유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어느 문화연구자는, 오직 김예슬을 상찬하기 위해 모든 20대를 싸잡아 "괴물" 또는 "경쟁의 노예"로 규정하고 있다. 그 연구자가 기성세대보다는 젊은 세대에 가깝다는 점에서, 또한 주체화 공정에 대한 역동적 분석은 고사하고 개인의 돌출적 각성 외에 20대 주체화 가능성에 대한 어떤 전망조차 내놓지 않는(못한)다는 점에서, "경쟁의 노예 혹은 괴물로서의 20대" 론은 비판이라기보다 그저 신경질적인 자기혐오-동종혐오에 불과하다. 또한 그것은 김예슬과 다른 20대간의 '차이'를 재확인하고 더욱 강화할 수는 있어도 김예슬과 다른 20대를 이어줄 수 있는 어떤 연결망도 생산하지 못하는 '불임의 담론'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자들에 맞서 김예슬을 '특이성'도 '징후'도 아닌 보편성으로 읽어내야 한다. 과거에도 김예슬은 존재해왔고('학출'의 모습으로 혹은 다른 모습으로), 지금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생겨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예슬선언은 '신화화'가 아니라 '역사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아무나 가진 역량'을 래디컬하게 실현하고 있는 그/녀들을 공평하게 지지하자. 좀 더 공평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좀 덜 '오버'하고, 좀 더 예민해질 필요가 있다. '역량'이 실현되는 형태가 김예슬 선언처럼 조금 소란스러울 수 있고, 여전히 존재하는 익명의 학출노동자처럼 무척 조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징후'니 뭐니 법석떨 일은 아니다. 정말 '징후'적인 건 '자기 입맛에 맞는 김예슬들'에게만 지루하고 두루뭉술한 찬사를 끝없이 쏟아부어 박제화하려는 사람들, '좌파' 혹은 '진보'라 불리는 그 늙거나 어린 꼰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