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15. 14:34

당신과 나의 전쟁, 그리고 우리의 전쟁 [시사인 135호]


자고 일어나면 대형사고가 빵빵 터지는 대한민국에선 작년의 사건도 아득히 멀어 보인다. 태준식 감독의 다큐멘터리 <당신과 나의 전쟁>은 어느새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버린 쌍용자동차 사태를 다시금 우리 앞에 생생히 소환한다. 장밋빛 투자계획을 늘어놓으며 쌍용차를 인수한 중국자본은 2009년 초, 투자약속을 이행하기는커녕 자동차 제조기술만 빼간 뒤 일방적인 철수선언을 한다. 중국자본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정부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고, 이 모든 피해를 정리해고라는 형태로 노동자들이 뒤집어쓰게 되었다.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 그들은 결국 평택공장을 점거해 기나긴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이른바 ‘옥쇄파업’이라 불린 77일간의 처절한 싸움은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섬처럼 고립됐고, 결국 경찰과 용역의 불법적이고 무차별적인 폭력에 의해 진압되고 만다. 노동자의 생존권을 건 큰 싸움이, 노조 단일사건으로는 최대인 94명 구속, 34명 구속수감이라는 쓰디쓴 기록을 남긴 채 또다시 패배로 끝나버린 것이다.
쌍용차 노동자들의 파업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와 시기적으로 맞물려 있었다. 전국이 노란 애도의 물결로 뒤덮여 있는 상황에서 쌍용차 사태는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여론에서 증발해버렸다. 강상구 씨는 <당신과 나의 전쟁>의 논평자로 등장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이 돌아가셔서 애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생각 중 하나는 좋은 세상 만들자는 것이다. 그게 정말 올바른 것이었으면 그 물결이 쌍용자동차(공장) 앞에서 넘실거려야 하는 것이었다.”

한국인이 공공성을 사고하는 방식

유감스럽게도 먹고살기 힘든 평범한 서민들에게 ‘쌍용차의 전쟁’은 ‘당신의 전쟁’이지 ‘우리의 전쟁’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우리의 전쟁’은 노 전 대통령의 분향소를 이명박 정권이라는 ‘악(惡)’으로부터 지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분향소를 지키는 등의 애도행위는 ‘우리의 전쟁’은 될지언정 ‘나의 전쟁’은 아니다. 무슨 말일까. 요컨대 오늘날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당신의 전쟁’과  ‘우리의 전쟁’, ‘나의 전쟁’이라는 말은 각각 다른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우리의 전쟁’은 공적인 것이며 대의명분의 문제이거나 좀 더 나아가선 ‘숭고’의 영역에까지 이른다. 반면, ‘나의 전쟁’은 사적인 것이며 먹고사는 문제, 구질구질한 ‘세속’의 영역이다. ‘먹고사는 문제는 개인이 해결해야하는 것’이라는 신자유주의적 담론과 ‘공과 사의 철저한 구분’이라는 고전자유주의적 담론, 거기에 ‘먹고사는 얘기 하는 건 천박한 짓’이라는 식의 이상한 유교사상까지 기묘하게 뒤섞여있는, 그야말로 한국적인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나의 전쟁’은 곧장 ‘우리의 전쟁’이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 한국사회에서 개인의 계급적·실존적 삶이 공공의 문제로 곧장 ‘번역’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덕을 쌓거나 그게 아니라면 어떤 훌륭한 지도자가 내 전쟁의 정당성을 보증해주어야 나의 전쟁이 비로소 우리의 전쟁으로 승화될 수 있다. 내가 먹고사는 문제가 곧 사회적 문제이며 정치적 의제라는 사실을 체감하지 못할 때, 참여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 가장 피해를 본 서민과 빈곤층이 노무현 대통령을 그리워하고 심지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게 된다. 사회적 약자니까 지지하고 연대해야한다는 식의 태도는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오래 지속되기는 어렵다. 내가 먹고사는 문제야말로 가장 공적인 문제라는 인식, 그것이 ‘나의 전쟁’과 ‘당신의 전쟁’을 ‘우리의 전쟁’으로 만들고 함께 싸워 이길 힘을 줄 수 있다.


*제목, 소제목은 매체에 실린 것과 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