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6. 14:29

'아Q84'의 사회 [시사인 118호]


 

장관이었다. 지하철 같은 칸에서 무려 다섯 사람이 동일한 책을 펼쳐들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면 누구든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다섯 명의 타인들, 네 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이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손에 틀어쥔 책은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1Q84>였다. 그렇게나 많이 팔렸다는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가 나왔을 때도, 김훈과 공지영의 신작소설들이 베스트셀러로 등극할 때조차도 이렇게 ‘달이 두 개 뜬’ 것처럼 비현실적인 풍경이 실현됐을 법하지는 않다.

한국어판 로열티 10억 원이라는 신기록을 세우며 화제를 뿌렸던 이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찍은 분량을 모조리 소진하는 기염을 토했다. 일본에서 이미 수백만 부가 팔렸고, 한국에서도 몇 달 째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중이다. 일본에서는 <1Q84>와 관련된 책만 벌써 7권 이상 출간되는 등 한일 양국의 독자들이 하루키 월드(Haruki World)의 새 판본에 보낸 지지와 성원은 그야말로 스펙터클할 지경이다. 반면 이른바 문학계의 반응은 기묘하리만치 조용하다. 본격적인 작품비평은 전무하다시피 한데, 단지 <1Q84> 한국판을 낸 출판사가 운영하는 문학계간지에 작품론과 작가론이 실렸을 뿐이다.


소비하되 해명하지 못하는 이유


대중들의 엄청난 지지를 얻는 작품에 대한 문단의 냉담함은 사실 하루키에 국한한 일은 아니다. 국내의 몇몇 작가의 밀리언셀러 소설들이 냉소와 조롱의 대상이 될지언정 비평과 토론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문학성이 부족해서일까? 비평하고 토론할 ‘꺼리’ 조차 없어서? 물론 그렇지 않다. 가열차게 비평되고 논의되는 작품들의 문학성이 밀리언셀러들보다 압도적으로, 차마 같이 언급하는 것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뛰어난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이가 과연 있을까. 답은 당신도 알고 나도 알고 있다. 그들은 대중의 지지와 자신의 판단을 정면 대결시키는 게 부담스러운 게다. 대중의 취향을 거스르는 글을 써서 욕을 먹고 분란에 휘말리느니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낫다는 얘기다. 개인 차원에서야 현명한 대응방식이랄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하루키의 소설 뿐 아니라 큰 규모로 대중들이 움직인 사회현상 또는 문화현상을 두고 응당 펼쳐져야 할 지적 담론이 이렇게 위축되는 일이 언젠가부터 일반화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땅에서 요즘처럼 활발히 토론이 일어났던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여러 매체에는 토론 프로그램이 넘쳐나고, 인터넷에도 비슷한 공간들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이런 채널의 다양성과 접근성 자체가 토론의 심화를 방해하는 질곡이기도 하다. 분 단위로 업데이트되는 주제들이 끝없이 이전 주제들을 뒤로 밀어낸다. 사건들은 사유되기는커녕 소비될 시간조차 부족하다. 한편으로 평균학력이 훌쩍 높아지고 인터넷 사용에 익숙해진 대중들은 스스로를 ‘잘 교육받고 계몽된 주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문가들의 비판이나 사유를 과거만큼 존중해주지 않는다. 의학, 금융경제 등과 같은 이슈일 경우 아직까지 대중들이 전문가에 대한 경외심을 보여주지만, 주제가 소설이나 영화, 혹은 사회적․정치적 이슈 등일 경우 훈련된 전문가의 견해가 자신의 개똥철학에 부합하면 옳은 것이고 아니면 ‘공허한 말장난’ 정도로 치부되어 버린다. 어쩌다가 전문가가 대중들의 취향을 비난하는 듯한 발언을 하면 대중은 그의 개인신상정보와 과거 실수들 하나까지 찾아내 ‘조리돌림’시켜 버린다.

이러다보니 이쪽 분야에서 전문가들은 아예 대중들과의 접촉 자체를 회피하면서 속으로는 경멸하고, 대중들은 체계 없고 부정확한 지식들을 가지고 각종 커뮤니티에서 평론가 행세를 한다. 둘 다 일종의 ‘정신승리법’이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우리사회는, 이를테면 <1Q84>라는 소설에 왜 이토록 열광하는지 스스로 해명하지도 못하는 아Q가 됐다.

*2009년 12월 9일 작성.
**제목은 매체의 것과 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