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6. 14:27

자기소개서에 관한 짧은 명상 [시사인 114호]

 

세상에는 여러 형태의 글들이 존재하지만 그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쓰기 까다로운 놈이 하나 있다. 바로 자기소개서다.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취직을 위해 자기소개서를 쓴 적이 많은데 그때마다 진땀을 뺐다. 문제는 그렇게 힘들여 썼음에도 초등학생의 작문만도 못한 글이 되기 일쑤였다는 점이다. “나는 19xx년 부산에서 단란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운운 하는 전형적인 서류전형 탈락자의 자기소개서에서부터, 자기소개서의 아방가르드라 할 만큼 파격적인 형식실험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버전의 자기소개서를 써봤지만 내용은 대동소이 허접스러웠던 것이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동네 백일장을 휩쓸며 어디 가서 글 못쓴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던 나로서는 참기 힘든 굴욕이었다. 왜 그럴까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다가 떠오른 이유는 “내 인생이 서사화하기엔 지나치게 굴곡 없이 평탄하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한 마디로 내 인생에는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의 아슬아슬한, 절체절명의 고비나 갈등 따위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너무 따분해서 하품이 나오는 인생이다. 잘 먹이고 잘 입히며 고생 없이 키워주신 부모님이 갑자기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몇 해 뒤 우연히 어떤 주제에 대해 자전적인 에세이를 한편 쓰게 됐을 때,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기소개서와 달리 그럭저럭 읽을 만한 물건이 나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자기소개서가 늘 그 모양 그 꼴인 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거다.


‘상품이 아닌 서사’를 위해


그것은 자기소개서라는 독특한 형식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오직 취업을 목적으로 타인에게 자신의 과거를 전시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어떠한 여백이나 외부가 없다. 그 어떤 공감도, 신비도 없다. 발가벗겨진 상품 하나가 뎅그러니 놓여있을 뿐이다. 이런 형식과 맥락 속에서 한 개인의 서사가 개별의 가치와 생기를 지니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자기소개서가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나에게 괴로운 일이었던 것은, 그것이 오직 하나의 목적에만 봉사하도록 틀 지워진 글이기 때문이며, 어떤 쾌락의 여지도 주지 않은 채 내가 나의 삶을 타자화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소개서가 늘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라 조바심을, 성찰이 아니라 상찬을, 사유가 아니라 소외를 끊임없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은 그렇게 믿지 않는 것 같지만, 인간은 과거에도 지금도 ‘효용을 계산하는 기계’보다는 ‘수다 떨기 좋아하는 동물’에 더 가까운 존재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기쁨을 느끼고 보다 풍성해지는 존재인 거다. 세계적인 석학 리처드 세넷은 글로벌라이제이션으로 삶의 불안정성이 극대화되면서 “사람들 삶의 서사가 끊어지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올바로 지적한다. 하지만 그것은 반쪽짜리 분석이다. 왜냐하면 엄청난 환경적 재앙을 야기하며 구가된 과거 서구자본주의의 황금기에 존재했던 ‘삶의 서사들’이 과연 바람직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성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소개서라는 기묘한 형식의 글을 보면서 고민해야 하는 것은, 따라서 단순히 “삶의 서사를 회복하자”는 것이어선 안된다. ‘상품이 아닌 서사’를 상상하는 것, 자본주의의 외부 혹은 비상구를 꿈꾸는 그러한 전복적 상상력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아닐까.

*2009년 11월 11일 작성
**제목은 매체의 것과 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