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6. 14:25

신자유주의, 지구온난화, 그리고 MB [시사인 110호]


 

카페 구석진 소파에 앉아 멍을 때리다 보면, 사람들이 무섭게 똑똑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옆 테이블의 대화를 들어봐도, 그 옆 테이블의 대화를 들어봐도 그렇다. 다들 외국어도 곧잘 하고 상식과 문화적 소양도 풍부하다. 셔츠에 김칫국물을 묻힌 어떤 아저씨가 며칠 전 폴 크루그먼의 블로그에 올라온 농담을 인용하며 MB정부를 슬쩍 비꼴 때, 특히 그런 생각이 든다. 젊은 세대는 말할 나위도 없다. 체 게바라에서부터 5세대 아이팟 나노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모르는 게 없다. 오죽하면 소설에 이런 대목이 등장할까. “우리는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첨단 전자제품도 레고블록 만지듯 다루는 세대야.”(김영하, <퀴즈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이제 더 윤리적이기까지 한 것처럼 보인다. 스타벅스같은 다국적 커피체인에서 커피를 마시기보다 공정무역커피를 마시는 ‘착한 소비자들’이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다고, 뉴스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떠들어댄다. 그 뿐인가. 이제는 기업이 돈만 벌겠다고 덤벼서는 망하기 딱 좋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착한 기업만이 생존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요즘 잘나간다는 경영학자들이 입을 모은다.

더욱 놀라운 점은 지난 10여 년 동안 불안정노동을 폭발적으로 양산시키고 거리에 나선 비정규노동자를 폭력진압하고 한미 FTA를 밀어붙였던 정권들에게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거나 심지어 그 정권들을 열심히 옹호했던 사람들조차, 정권이 바뀌자마자 “우리가 겪는 고통의 원흉은 바로 신자유주의와 MB정권”이라고 핏대 세워 호소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필요한 건 선명성이 아니라 구체성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빵빵한 지식과 윤리의식까지 갖춘 시민들이 이렇게나 늘어났는데 어째서 세상이 이 모양인 걸까. 어째서 촛불은 꺼지고 MB의 지지율은 고공행진을 계속하는 걸까. 뉴스 보다가 열불이 터지는 건 MB 때문이며, 경제위기의 근본적 원인은 신자유주의라는 사실은 요즘의 기묘한 날씨가 다 지구온난화 때문인 것만큼이나 명백한 일이다. MB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간단한 상식을 정말로 모른단 말인가!

생각해보면 신자유주의, 지구온난화, MB, 이렇게 세 가지만 있으면 우리가 처한 사회적 문제들 거의 대부분이 설명된다. 참 선명하고 편리하다. 하지만 그 설명은 사실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너무 추상수준이 높아서 정보값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념과 성향이 다른 사람에게 그런 식의 설명은 “날씨가 참 좋네요” 보다도 무의미한 말이다. 더구나 신자유주의에 대해, 지구온난화에 대해, 그리고 MB에 대해 우리가 자명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정보들 중에서 엄밀히 검증된 것은 놀라울 정도로 적다. 사회의 모순을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는 태도는 과학적이지도 않거니와 대개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지도 못한다. 그런 태도는 초월적 지성을 가진 집단이나 개인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식의 음모론으로 귀결되거나 신자유주의가 사라지면, MB만 없으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물구나무 선 미륵신앙이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건 현란한 개념어나 최신정보의 습득 따위가 아니다. 이를테면 과연 우리가 옆집 아주머니에게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를 발설하지 않고 신자유주의를 설명할 수 있는가다.


*2009년 10월 13일 작성.
**제목은 매체의 것과 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