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언론이, 그리고 몇몇 유명 지식인들이 지식소매상 노릇을 할 때 종종 노출하는 고질적인 병폐가 있다. '청산주의' 경향이 그것이다. 혹은 '지적 종말론'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현실이 워낙 답답하니 심정적으로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광야에서 백마를 타고 나타난 지적 초인'을 기다리는 소박한 바람이 일부 언론과 지식인의 과장과 결합해서 어떻게 환멸의 무한루프로 이어지는지를 우리는 지난 20년간 끊임없이 목격해왔다. 이제는 좀 바뀔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서구의 지성을 소개함으로써 대중의 교양주의를 만족시키는 일도 중요하며 그 속에서 영감을 끌어내는 것은 더욱 그렇다. 이런 작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우리가 발딛고 선 현실과 정밀하게 결합되어야 의미가 있다. 그 사상이 우리 현실의 어떤 지점에 결합될 수 있고 어떤 지점에서 결코 결합될 수 없는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는 XXX의 시대!"류의 발언이 태연히 튀어나오는 것이다. 시대적 전환기라고 사람들이 떠들어댈수록 매체와 지식인은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발언해야 한다. 언론이니까 그 정도 과장은 허용되어도 괜찮다는 허술한 사고는 이제 쓰레기통으로 던져넣어야 한다. 지금 매체일반에 걸쳐 신뢰의 위기가 닥친 걸 보면서도 그런 얘길 하는 것은 단지 나태한 딜레탕티즘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아카데미가 이닌 저널의 관점에서 봐도 그렇다. 과장된, 혹은 도발적인 레토릭이 허용되는 건 구체적 근거가 확보되었을 때나 실천적 의미가 명백한 때로 엄밀히 한정되어야 한다. 솔직히 말해서 저런 식의 지식유통이 공중화장실 벽면에서 매월 업데이트되는 '좋은생각'과 구조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앞으로는 XXX의 시대"라는 단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앞으로는 OOO의 시대"로 대체될 뿐이다. 정작 XXX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로 말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그러나 힘들고 폼도 안나는 일에 우리는 여전히 눈감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 우리가 서있는 바로 이곳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끝없이 던지는 것. 그리고 그 질문에 소박하되 전복적인 대답과 도발적이되 구체적인 전략을 하나씩 하나씩 보태어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