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6. 3. 01:56

'축제와 탈진'을 넘어

광우병 정국이 초반을 넘어서자 사람들이 국민소송이란 걸 준비하는 모양이다. 과연 현명한 짓인지는 둘째지고 이건 그 자체로 흥미로운 사회문화적 현상이다. '거리의 정치'는 본래 법을 뛰어넘기 위한, 일종의 '목숨 건 도약'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껏 쌓아올린 바리케이드를 버리고 다시 법에 호소하고 있다. 집회방식은 창조적이지만, 사고방식은 구태의연하다.

부르주아지에게 '법'이 있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단결'이 있다면, 중간계급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상식'이다. 이 불투명하기 짝이 없는 단어는 중간계급이 강력해질 수 있는 이유이면서 동시에 '아킬레우스의 발목'이기도 하다. 대체 상식이란 무엇인가. 최고로 지당하고 최고로 모순적인 것.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모르는 것. 눈에는 보이지만 손에 틀어쥘 수 없는 안개같은 것. 사회경제적 지위 변화에 가장 민감하기 때문에 가장 불안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중간계급이, 자기확신의 준거로서 '상식'에 집착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다.

상식은, 법이라는 보편성을 전유한 부르주아지에게 대항하는 또 다른 보편성의 언어가 된다. 그리고 자신이 보편계급이라 주장하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대항하는 보편성의 언어가 되기도 한다. 보편성을 둘러싸고 세 개의 계급이 경합하고 있는 셈이다. 법이나 계급의 언어가 외관상 논리체계의 형상을 갖추고 있는 반면, 상식의 언어는 논리체계라기보다 감수성의 체계에 가깝다. 특정 국면에서 중간계급은 자신의 상식의 근거로 법을 내세우다가가도 어느 순간부터는 법의 근거가 상식이어야 함을 역설한다.

중간계급의 감수성은 순간적으로 다른 편에 할당되었다가 또 어느 순간 그것을 취소한다. 이명박을 찍은 사람이 이명박 탄핵을 외치는 촛불집회는 상식을 전유한 중간계급의 싸움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법'에 의지해서 이명박을 공격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을 느끼지 못하는 것, 비폭력이라는 자기규율에 집착하는 것(실제로는 그렇지 못함에도) 또한 중간계급 특유의 행동양식이다. 한국 현실정치의 스펙트럼에서 진보냐 보수냐의 구분은 여기에서 그리 쓸모가 없다. 다만 그 구분은 10년간의 양극화를 경험하며 끝없이 추락해온 중간계급이 왜 노무현 정부 때가 아니라 이명박 정부 시기에 봉기했는지를 설명하는 데는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지난 5년간 한계에 몰릴 때까지 유지된 이들의 인내는, '건국 이후 가장 때리기 좋게 생긴 샌드백'이 때마침 등장하면서 싱겁게 마감됐다. 불과 100일만에 '상식 대 몰상식'이라는, 중간계급의 아드레날린이 최대치를 찍는 구도가 완성되어 버린 거다. 온라인 상에서 이 구도를 주도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과거 참여정부의 열성적 지지 계층으로 보인다. 실제로 다음 아고라에서 엄청난 추천수를 기록한 베스트 게시물 중 상당수가 "그분이 그립습니다" 류의 감성적 토로다. 물론 '그분'은 노무현이다. 참여정부 5년은 많은 전문가들이 공히 지적하듯 기록적으로 양극화가 확대된 시기다. 자신이 급속히 몰락한 시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기이한 행태는 '정치의식'이 계급적 이해관계를 압도한 정치적 스톡홀름 신드롬의 사례로서 연구해볼만한 주제다.

계기야 어쨌든 프롤레타리아트와 중간계급이 연대할 수 있는 기회가 참으로 오랜만에, 그리고 극적으로 찾아온 것만은 분명하다. '좌파'들은, 다소 당혹스럽긴 하겠지만,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이 기회를 목숨 걸고 붙잡아야 한다. 이것이 중간계급이 주도하는 거리정치라는 사실을 제외하고, 분명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떤 방식으로 마무리될지 섣불리 예측할 수도 없다. 이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진보신당의 제안은 지금까지 현실정치세력이 내놓은 대안 중 가장 상식적이지는 않지만, 가장 탁월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소송으로 해결하자는 '아메리칸 스타일'보다는 훨씬 낫다. 광장에서 그렇게 민주주의를 요구했다면, 시민들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일관적이고 올바르다. 만약 그것이 실현된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비로소 한 단계 도약했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정권을 압박하는데만 정신이 팔려서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2000년대 이후 거의 모든 대규모 촛불집회는 '축제와 탈진의 반복'이었다. 자기 삶이 구체적으로 변하지 않는 축제, 그것은 냉소와 탈정치만 낳을 뿐이다. 이제 의미있는 결실을 만들 때도 됐다. 중간계급이 상식의 굴레를 깨트린다면, 어제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