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1. 18. 08:19

일본의 편집자와 만나다

어제는, 아니 어제도 낮부터 술을 때려마셨다. <88만원 세대>의 일본어판 출판 건으로 서울에 온 아카시쇼텐(明石書店)의 편집자 효도 케이지 씨와 함께였다. <레디앙>의 이재영 선배와 출판 기획팀장님도 합석했다. 효도 씨는 나보다 한 살이 많고, 2년간 한국어학당에서 공부한 덕에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부스스한 머리결에, 항상 멍을 때리는 듯한 표정의 이 사나이는 알탕과 하이트 맥주를 좋아한다고 했다. 아니 그 맛있는 일본 맥주들보다 하이트가 좋단 말이예요? 우리가 농을 걸었지만, 그저 머리만 긁적인다. 그러나 하이트를 좋아한다는 말은, 그나마 한국맥주 중에서 그게 좀 낫다는 얘기를 돌려말한 것일테다. 동의한다. 카스보단 하이트가 아주아주 야악간 낫긴 하다. 그러나 나에게 한국맥주는 '소맥폭탄용 베이스' 또는 '안주가 목에 메이지 않게 하는 보습제'일 뿐, 맥주가 아니다.

온갖 잡다한 주제로 수다를 떨었는데, 두 가지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부라쿠민(部落民) 차별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카시 쇼텐의 대표이사가 예전에 부라쿠민 운동을 하던 사람이라고 한다. 부라쿠민은 잘 알려졌다시피 전근대 일본의 신분제도상 최하층 천민으로 과거 한국에서의 '백정'과 같은 직업을 생각하면 된다. 일본 특유의 서발턴(subaltern)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호모 사케르라고 할까.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는데 좀 놀랐던 건 아직도, 즉 2008년이라는 시점에서도 부라쿠민 차별이 여전하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특히 취업과 혼인에서 심각한 장벽이 존재한다고 한다. 과장이 섞여있겠지만, 야쿠자가 되거나 공무원시험에 패스하거나, 둘 중 하나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근대화를 빨리 수행한 사회에 아직도 신분제도의 악습이 뿌리깊게 남아있는 걸 보면, 한국사회가 미칠듯한 격변의 시기를 거치며 공고했던 신분제가 어쩔 수 없이 무너졌던 사실을 축복이라도 해야 할까.

두번째는 아소 다로 총리 이야기. 원래는 출판기획팀장님께서 <마징가>의 나가이 고와 <은하철도>의 린 타로 얘길 꺼냈는데, 효도 씨는 만화에 별로 관심이 없는 건지, 아니면 일본의 그 세대에게 너무 오래된 만화인건지 두 작가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 아소 다로 얘길 한다. 일본에서 아소 다로를 비웃는 말 중 하나가 "만화책만 읽는 총리"라는 거다. 총리가 되기 전부터 '무식한 발언을 일삼는 만화광'으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일본사람들은 그게 만화책만 읽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는 얘기다. 하긴, 만화를 좋아하는 것과, 만화만 줄창 읽어대는 것은 정말 백만 광년 떨어진 게다. 그러고보니 나도 아소 다로의 소문에 대해 얼핏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인에게 추천할만한 책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고르고13>이라 했다던가...OTL (아소 다로 총리의 '등 뒤'에 섰다간 쥐도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얼마 전 방한했던 '건담의 아버지' 토미노 요시유키 씨의 명언도 떠오른다. "명심해. 애니메이션만 보는 인간은 절대 좋은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없어."

<88만원 세대> 일본판은 1월 말 경 출간될 예정이다. 아카시 쇼텐이란 출판사의 성향을 보아하니 베스트셀러 따위와는 아주 거리가 먼 곳이다. 여기서 출간하는 월간지가 하나 있는데, 이름이 무려 <빈곤연구>다. 효도 씨에게 한권 선물받았는데, 표지만 봐도 두통이 밀려왔다. 베스트셀러 따윈 바라지도 않으니 아무쪼록 3쇄만 넘겨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