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1. 17:57

다시, 자기계발하는 주체

한윤형님이 아래 내 짧은 메모에 상당히 긴 트랙백을 걸었다. 왜 그러셨쎄여..흑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로 다시 끄적..-_-;;


"80년대 투쟁의 결과물이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이었다"라는 명제와, "80년대 투쟁의 주체가 자기계발하는 주체와 다르지 않다"는 명제를 구별해야할 것 같다. 요컨대 전자는 인과성의 문제이고 후자는 동일성의 문제다. '80년대 투쟁의 결과'라는 것은 단지 주체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정치적 구조와 경제의 발전단계,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우발성까지 포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보기와 달리 투쟁하는 주체와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관계를 나타내거나 80년대에 대한 반성을 암시하는 의미심장한 주장이 아니다. 큰 의미없이 시대의 흐름을 정당하게 기술하는 것일 따름이다.

90년대 서동진이라는 아이콘은 두말할 나위없이 80년대의 전형적인 투쟁하는 주체-그러나 이들 또한 어떤 부분에선 그들의 적 못지않게 억압적이던 주체-에 대한 안티테제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 마치 현상학자처럼 자기계발하는 주체에 대해 면밀히 기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90년대를 쓰디쓰게 반성하고 한편으론 투쟁하는 주체에 관한 것은 다른 문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그는 다른 자리에서 2008년 촛불시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을 취합하면,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않든 사실상 한개의 입장으로 압축되어버린다. 80년대적 주체로의 '복귀' 말이다. 물론 형식논리적으로는 다른 가능성이 존재한다. "나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투쟁하는 주체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면, 꽤 멋있는 말로 들릴 뿐 아니라 논리적 일관성을 해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설득력 없는 대답이다. 그 순간 미륵신앙과 구별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까놓고 말해서 내가 서동진 선생의 이번 책을 읽다 답답해진 건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훅, 더 나갈 수도 있는데 너무 안전한 지점에서 멈춰섰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해방되어야할 주체들이 해방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오히려 스스로를 규율하고 계발하며 자발적으로 자본에 봉사하는 모습을 보일 때, 좌파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고 기술하는 것은 오직 이 난처한 질문에 대한 답을 치열하게 모색할 때에만 의미있는 것이 된다. 예컨대 제국으로 간 식민지 주체들의 내면에서 자기계발의 욕망과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심(혹은 모국의 근대화에 대한 갈망)을 분리추출하는 것은 가능한가. 촛불시위에 새벽까지 참석하고도 '깜박이영어'를 들으며 출근하는 그/녀들은 투쟁하는 주체인가 자기계발하는 주체인가. 아니, 애시당초 그 두 가지 주체는 다른 것인가.

어쨌든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서툴고 조악할지라도' 나름의 답을 제시해야 반발짝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주체의 양태를 묘사하고 규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주체가 단속적이며 모순적이고 또한 동시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더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논리정합성과 일관성이라는 방패를 상당부분 포기하고 약점을 스스로 노출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꽤 위험천만한 일이다. 푸코가 '주체의 해석학'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것이 '모순'을 다루는 작업임을 감지하였기 때문일 게다. 그에 더해 나는 주체가 변화무쌍하게 변화했지만 실은 굉장히 반복적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문제를 조금 더 역사화하고 또한 서사화해야 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