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0. 10:15

투쟁하는 주체?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1218194250&section=04


풍문만 무성하던 이 책, 서점에 깔리자마자 사서 읽었다. 내 관심사 중 하나와 정확히 닿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안읽혔다(실은 아직도 다 읽지 못하고 있다). 분명 흥미로운 주제이고, 중요하며 적실한 이야기인데, 책을 읽다보면 갑갑해질 뿐이다. 결국 내 방의 책더미 속으로 사라졌다. 오늘 프레시안에 실린 인터뷰를 읽어보니 왜 그랬는지 좀더 명확히 알겠다. "우리의 민주화가 자유화였다" "자유가 평등의 가치 안으로 복속될 때 약자의 것이 될 수 있다" "투쟁하는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것은 (지배당하는 사람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라는 서동진 선생의 언급에 결코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가? 자본이 '민주주의'와 '자유'의 이름으로(이것은 결코 '허울'이나 '껍데기'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실질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자유를 의미한다) 급진적 저항과 잠재력마저도 포획한다는 명제는 굳이 볼탄스키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좌파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랑시에르와 버틀러가 '그 이후'의 진도를 빼기 시작한지도 까마득한데 말이다. 그리고 서동진 선생 자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1990년대의 그 '소란들'이 지금에 와서 사르트르와 맑스를 다시 읽으며 그저 조용히 반성해야 하는 그런 추문일 뿐이던가? (솔직히 나는 "1980년대는 뜨거웠지만 1990년대는 환멸의 시대였다"고 단칼에 정리해 버리는 386 지식인 치고 제대로 사유하는 인간을 별로 본 적이 없다). 투쟁하는 주체의 문제는 정말 지배당하는 주체의 문제와는 다른 것일까? 혹시 여기서 말하는 '투쟁'이라는 건 이제까지의 관성만으로 규정된 무엇은 아닌가?

나에게 '자기계발하는 주체'는 '투쟁하는 주체'와 다른 게 아니다. 그것을 무자르듯 구분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순수하게 추상화한 '영속적 주체'를 가정하는 것이 되며, 구좌파가 직면한 패러독스에 곧장 빠지게된다. 따라서 내 생각은 이렇다. 자기계발하는 주체와 투쟁하는 주체의 동일성을 증명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