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21. 16:02

롤플레잉 동물원


요즘 Mnet의 '2NE1 TV'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케이블 치고는 시청률이 놀랄 정도로 높다고 한다. 이제 우리들은, 무명의 소녀(혹은 소년)들이 어떻게 살벌한 자기수련과 찌질한 연습생 시절을 거쳐 동아시아 쇼비즈니스의 거물로 성장해가는지를 낱낱이 보고 듣게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들의 시련에 가슴아파하고, 그들의 성공에 기뻐하고, 그들에게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수많은 익명의 팬-페이트런들은 인터넷을 통해 이합집산한다. 단순한 수용이나 일방적 소비가 아니라 롤플레잉 게임에서 캐릭터를 키우듯, 팬들은 실시간으로 그들의 스타-다마고치를 키우고 있다. 키워지는 쪽 역시 실시간으로 팬-페이트런의 반응을 체크하고 있다. 그 성장의 과정은 양쪽 모두에게 쾌락적이다. 프로야구에서도, 스타리그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정치 쪽도 예외가 아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 첫번째 케이스였다. 촛불집회에서 칼라TV팀과 함께 종횡무진했던 진중권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자신이 롤플레잉 캐릭터였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해명했던 첫번째 캐릭터다. 이 모든 현상들은 동물원과 트루먼쇼 사이에, 아니 그 너머에 있는 것이다. 보는 존재와 보여지는 존재 사이에 존재하는 건 쇠우리가 아니라 디지털 미디어다. 이제 조련사와 구경꾼의 구별은 한없이 희미해진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위계, 권력담론은 낡은 것으로 치부된다. 보여지는 존재에게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나 억압적 상황에 대한 분노는 없다. 이들은 스스로의 의지와 재능과 노력으로 트루먼 혹은 동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일한 관건은, 성공을 향해 무한질주할 수 있는가다. 이를 위해 필요한 건 경쟁의 압력을 정신적으로 견뎌내고 몸을 망가뜨리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자기에 대한 배려'다. 푸코가 말한 '실존의 미학'은 이렇게 기이한 형태로 출몰한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이 행복한 수행적(performative) 공간 속에 비평적 공간은 없다. 따라서 비평이 의미를 획득하려면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자-보여주는 자를 드러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