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1. 16:08

잡감 0701


1. 인디스페이스 월례비행에서 김응수 감독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를 보았다. 1986년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분신자살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러나 사건 자체에 대한 촘촘한 역사적 재구성은 없다. 그 사건의 정치사회적 의미 같은 건 철저히 배제된다. 영화는 그날 날씨가 어땠는지, 어떤 버스를 탔는지, 사건 직전에 주변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등과 같은 세부적 사실들에 의도적으로 집중한다. 당시 같이 활동하던 사람들(그러나 사건의 주동자라고 할 수는 없는)의 인터뷰를 반복해서 보여줄 뿐이다. 영화 속 인터뷰어는 마치 공안검사처럼 건조하고 집요하게, 전혀 중요해보이지 않는 세부사항들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인터뷰이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힘겹게 답변을 이어간다. 이제까지 보기힘들었던 새로운 형식의 '386 후일담'이다. 인터뷰의 형식은 단조로웠지만 지루한 영화는 아니다. 동석한 유운성 평론가의 말처럼, '뒷통수를 확 쌔려주는' 맛이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인터뷰이들은 결계에 걸린 것처럼 뭔가에 억눌려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의견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저널리스트의 관점에서 보면, 인터뷰에서 저런 식으로 답변하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위화감이 밀려왔다. 설사 경찰이나 검찰이 질문해도 그렇게 하기 어렵다. 저것은 감독이 인터뷰 이전에 모종의 강력한 '사전처리'를 해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즉, 내 위화감의 이유는 소격효과와 같은 미학장치에 의해 감정몰입을 방해받아서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가 너무 노출되어서였다. 영화가 끝나고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서 김응수 감독 자신이 내 짐작이 맞았음을 밝혀주었다. 의도적으로 인터뷰이의 답변방식을 제한했다는 것이다. 그는 과거를 신화화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역사적 사건을 다루면서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기승전결 구조의 기존 다큐멘터리들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그 사건의 주변인물이기도 한)자신이 대학생일 때 어떤 거창한 역사적 사명감으로 운동을 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물론 과거를 신화화하는 것에 나 역시 반대하고, 반대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런 윤리적 성찰을 이 영화처럼 인식론적 문제로 곧장 환원해 버리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특정 사건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보여주기 위해 인터뷰 대상을 포함한 환경을 멸균처리한 실험실처럼 만들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구부러진 막대를 펴는 게 아니라 아예 반대편으로 다시 구부리는 것이다. 악셀 호네트의 정식화를 빌리자면 인정은 인식에 선행한다. 행동을 결정하는 우선순위는 인식이 아니라 인정에 있다. 인식을 특권화해서 끝까지 밀고가다보면 회의주의 또는 불가지론으로 귀결되고 우리의 행동을 해명할 수 없게 된다. 인식론적 환원은 현실의 풍부한 맥락을 표백하고 시공간을 동결시켜버린다. 사건들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가, 과도한 인식론적 환원을  정당화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각자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리고 그래야지만 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 '팩트'란 그걸 전제한 무엇이지, 맥락도 배경도 없이 던져진 행위들의 총합이 아니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꼭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2. <트랜스포머2>에 대한 이야기들을 보면서, 그저 직관일 뿐이지만, CG영화가 어떤 물리적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다. 영화가 기술적 한계에 봉착하면 남은 건 무엇일까. 우리의 몸을 개조(일테면 몸에 칩을 심는다든가)하는 것 아닐까. 기존 기술이 한계에 다다르고 우리의 역치가 점점 그에 맞춰 커져왔다면, 영화만이 아닌 모든 감각적인 것을 새롭게 경험하기 위해서는 결국 인간 신체를 확장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