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6. 5. 03:41

쾌락과 글쓰기


인디포럼에서 처음 만난 윤성호 감독이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블로그에 가끔 가서 글을 읽곤 하는데요, 글과 인상이 좀 다르네요. 제 경우엔 기분이 우울하거나 답답할 때 거길 찾게되는 것 같아요."  그 말에 나는, "글과 실제 캐릭터가 다르다는 얘길 많이 듣는데 제가 우울한 캐릭터는 절대 아니예요"하고 웃으며 넘어갔는데 사실 알쏭달쏭한 이야기다. 우울하고 답답할 때 찾는 글이라는 건 글 자체가 우울하고 답답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반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드라이하게 쓰는 편이고 그러다보니 단정적이고 공격적인 말투 등등의 일종의 '후까시'가 상당히 들어가게 된다. 솔직히 인정한다. 내면이, 혹은 내공이 약한 글쟁이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 일종의 방어기제인 셈이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까지의 글들은 안그랬다. 유희성이 강했기 때문에 쓰는 나도 읽는 사람들도 꽤나 즐거워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나이가 한살한살 들어갈수록 변해왔다. 20대 중반 이후 글쓰기 환경이 급격히 변한 탓도 있는 것 같다. 자기검열도 강해졌다. 내가 과거에 썼던 글을 잘 모르는 후배들은 무섭다고까지 한다. 그런 얘길 들으면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반성하게 된다. 권위가 없는 사람이 권위주의적인 글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이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다.

평소의 나는, 어른들 말씀에 따르면 "집안 말아먹을 한량" 스타일이다. 그런데 나의 쾌락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정확히 얘기하면 지적 쾌락은 말초적 쾌락을 억압하고 말초적 쾌락은 지적 쾌락을 유예시키는 형태다. 그래서 '이중 전도'가 일어난다. 말초적 쾌락은 억압된 쾌락이어서 더 강한 쾌락이 된다. 반면 지적 쾌락은 유예된 쾌락이어서 더 강한 쾌락이 된다. 전자는 해방감을 주는 대신 죄의식을, 후자는 우월감을 주는 대신 정당화를 요구한다. 양자는 샴쌍둥이처럼 붙어있다. 동시적으로 드러나야 하지만 동일하게 드러나선 안된다. 내가 특별히 변태적이어서는 아니고, 따지고보면 단순하고 일반적인 이야기다. 20대 초반에 나는 그것을 '균형잡힌 자아'라고 명명한 적이 있다. 내가 변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지적 쾌락과 말초적 쾌락을 완벽히 동일시하는, 다시 말해 모든 지적 쾌락을 말초적 쾌락화하는 사람이다. 내가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적 쾌락과 말초적 쾌락을 명확히 구분하고 분류한 뒤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어느 한쪽만 추구하는 사람이다(실은 이쪽이 진정한 변태). 내가 가엾게 여기는 사람은 말초적 쾌락을 지적 쾌락으로 착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특정인을 글쓰기의 롤모델로 삼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글쓰기가 자신의 쾌락 메커니즘을 제대로 반영하는 게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글이 나의 쾌락과 점점 괴리되는 것 같아서 요즘 좀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