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5. 29. 15:06

애도를 시작하기 위하여


어떤 진보인사가 "우리들 중에 노빠 아니었던 사람이 있는가"라고 말했다. 아마 맞는 말일 게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노빠였던 적이 없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 내가 첫 직장에서 처음 쓴 기사가 고 배달호씨의 죽음에 대한 것이었고, 그 후로도 노무현 시대의 많은 죽음들을 현장에서 기록해왔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 높은 곳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꿈을 꾸곤 한다. 폐소공포와 고소공포가 동시에, 온몸의 땀구멍을 열어젖히며 노도처럼 밀려들어온다. 그곳은 낯익은 공간이다. 한진중공업의 노동자 김주익 씨가 절망과 고독에 지쳐 목을 맨 바로 그 크레인. 부산에 취재하러 갔을 때, 실제로 그 곳에 올라가서 사시나무처럼 떨었던 적이 있다.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저녁놀에 핏빛으로 물든 그 작고 높은 밀실을.

한 마디로 나에게 노무현은 그 시대의 죽음들과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다. 어떤 좌파들은 20년 전의 '진보' 노무현을 애도하자고 말하지만, 나는 그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대체 20년 전의 노무현만을 애도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럼 20년 후의 노무현은 애도의 대상이 아닌가. 관념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은 또다른 박제화다. 이런 식의 관점은 "더이상 노무현만큼 훌륭한 대통령은 나올 수 없다"고 말하며 노무현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대치로 한계짓는 사람들과 동일한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우리를 대신해줄 훌륭한 지도자 없이는, 우린 안될거야 아마."  

그러므로 나는 애도한다. 노무현을 통해서만 세계를 인식하던 우리를, 그리고 나 자신을. 우리는 스스로를 애도함으로써 노무현을 떠나보내야 한다. 민주주의가 단지 '독재자의 자리에 선량한 호민관을 앉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민주주의는 언제나 그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시리도록 깨달으며 노무현을 떠나보내야 한다. 그를 '순교자'로 혹은 '최선의 대통령'으로 규정하는 짓은 그래서 값싼 감상주의이며 패배주의다. 결국 우리 중 누구도 노무현의 과오를 넘어설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넘어가려는 순간 우리는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인을 존중하는 것이기는커녕 욕보이는 짓이다.

애도는 오늘의 영결식 이후에 시작되어야 한다. 충격과 오열과 분노와 탈진이 신화로 귀결되는 그런 애도가 아닌 글자 그대로의 애도, 애도의 주체와 애도의 대상을 아프게 분리하는 의례 말이다. 그 애도의 완결은 이명박보다 좀 나은 대통령을 뽑는 것 따위로 달성될 수 없다. 한명의 대통령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정의를 증명할 때, 비로소 애도는 완결될 것이다. 아마, 생각보다 오랜 세월이 걸릴지 모르겠다. 노무현 대통령, 잘가시라. 당신을 끝내 사랑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당신이 넘어설 수 없었던 벽을 우리가 부술 것이다. '순교자의 사도'로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필요와 의지로. 그리하여 정말로 우리의 애도가 끝나는 날, 웃으며 당신께 편지 한장 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