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27. 12:40

'캠퍼스 컴뱃 가이드'

"무일푼 하류인생의 통쾌한 반란"이라는 카피가 붙어있는 <가난뱅이의 역습>을 읽다가 맨처음 든 생각. '뭐야 이놈들, 젊은 주제에 한국의 40대 언니오빠들보다도 온건하잖아!' 저자는 대학 다닐 때 '찌개투쟁' '갈고등어투쟁' '술투쟁'같은 기발한 투쟁방식을 선보였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이런 게 큰 소동이 됐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술판, 먹자판 벌이는 건 내가 학교에 다니던 2000년대 초반 무렵까지 그냥 생활이었단 말이다!

그러고보니 며칠 전 대학후배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최근 학생회관에서 선후배들끼리 고기 구워먹고 술을 마셨는데 이후 학교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과방이 '폐쇄조치'당했다고 한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여친님 불같이 화를 낸다. "아니, 그런 짓을 당하고도 가만 내버려뒀어? 학교를 확 뒤집어 엎어야지!" 그러게. 여친보다 훨씬 온건한 나같은 사람이 봐도 말이 안된다. 등록금 문제도 있어서 학생들의 불만은 높아져 있지만, 실질적인 저항이나 반발은 없다고 한다. '짜증나긴 하지만 아무도 안나서니 난 취업공부나 열심히 하자' 이런 생각인듯. 지금 대학생들이 학교측에 철저히 얕보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줄이야.

지나간 세월을 한탄해봐야 다 부질없다. 나같은 선배들의 업보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안하는 후배들이라 욕해봐야 제 얼굴에 침뱉기일 뿐. 사실 그들이 안하는게 아니라 못하는 것에 더 가깝다. 화는 나는데 싸우는 걸 본 게 없으니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운동권이라 욕먹을까봐 움츠러들고, 뭐 그런 거다. 이제 한국도 'CC를 위한 가이드' 같은 게 있어야 할 것 같다. 캠퍼스 커플 말고 '캠퍼스 컴뱃', 약칭 CCG...

학교측의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고 싸우는 노하우나 자세같은 것들은 선후배가 학교에서 같이 술 마시고 고기 뜯으면서 암묵지처럼 전수되기 마련인데, 선배라는 작자들은 가끔 술 사주면서 운동권 무용담을 늘어놓거나 자기 스펙 자랑이나 해대니... 세상이 변했다지만 예나 지금이나 투쟁의 구조와 본질은 똑같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대학의 분위기에서 대학생이 느닷없이 짱돌 모으고 꽃병 제조해서 싸울 수는 없다.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다. 하지만 구체적인 투쟁방식을 같이 고민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홈커밍데이 같은 날, 괜히 선배들한테 아부떨지 말고 '내 모교를 돌려줘'같은 구호로 'OBXNB 크로스!' 집회같은 걸 조직해보는 것도 괜찮지 싶다. 스타벅스같은 외식체인에 점령당한 캠퍼스에 회한을 가진 선배들, 참 많다. 그 과정에서 또 여러 고민과 아이디어들이 나올 수도 있다.  일단 학생들끼리 학내투쟁을 한다치고, 내가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어디까지나 '예'를 드는 거다. 리스크가 낮은 것부터 단계적으로 투쟁을 고양시키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그 구조에다 액션 아이디어들을 집어넣기만 하면 된다. 

만약 이슈가 등록금 문제라고 할 때 단식투쟁이나 삭발투쟁 같은 건 식상할 뿐 아니라 하는 사람만 괴롭고, 후유증도 심각하니 지양해야 한다. 기자회견하고 성명서 발표해봐야 기자들은 별 신경도 안쓴다. 먼저 '학생회관 동맹폭식의 날'을 지정해서 굶주린 배를 채우고 저항의 기운을 한껏 북돋는 게 최우선이다. 이른바 폭식투쟁이다. 그 다음, '선영아, 사랑해'같은 류의 티저광고지를 학교에 쫙 부착한다. 등록금 문제니까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같은 알듯모를듯한 짧은 문장이나 간단한 이미지로 하는 게 좋다. 그리고 한달 묵힌 양말 대량투척, 츄리닝에 스모키 화장하고 수업듣기 같은 비교적 쉬운 전술로 교내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 이후 수영복 입고 학생처 앞 복도 삼보일땡(세걸음 걷고 저질땐스), 총장실이나 학생탄압교수의 책상에 똥싸고 나오기 등과 같은 하이레벨 택틱까지 가는 거다. 국과수의 DNA 감정이 두려우면 근처 개똥을 주워와도 상관없다. '투입'부터 '배설'까지 서서히 고양되고 하나로 완결된 서사적 구조, 미학적 저항이라는 점이 포인트. 투쟁에는 어찌됐건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참여하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지적인 측면에선 10대, 20대, 30대 초반까지 포괄하는, 88만원 세대를 위한 '저항의 커리큘럼' 같은 걸 짜볼 수 있다. 사회에 대해 좀 더 알고싶어도 마땅한 커리가 없어서 삽질하는 친구들이 의외로 많으니까 이 방면의 선수들이 모여서 체계적인 학습과정을 제시해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선수'들이어야 하는 이유는, 체계적이되 쉽고 재미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줄요약까진 아니라도 제대로 다이제스트해주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심화학습으로 나아간다. "반이명박" 같은 하나마한 소리만 나불대는 선배 따윈 필요없다.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게 중요하다. 감나무에서 배 열리길 기다리지 말고, 배 먹고싶으면 배나무를 심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