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3. 01:40

싸움의 방식

목수정씨가 <레디앙>에 올린 문제의 글을 읽은 순간 열이 뻗쳤는데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정명훈이 쏟아낸 발언들 때문이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꼭지가 돌아서 냉정하게 대처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목수정씨는 너무 기가 막혀서 제대로 쏴붙이지도 못했다고 분통을 터뜨렸지만, 그 정도면 현장에서 침착하게 잘 참고 대응했다고 본다. 나였다면 쌍욕이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두번째는 목수정 씨의 글 때문이다. 현장에서 발휘한 놀라운 인내심을 일거에 무화시킬만한 '자해행위'였다. 읽다보니 한숨만 나왔다. 어째서 이런 글을, 글에 쓸어담은 감정표현만으로도 수십배의 역풍이 몰아칠게 뻔한데! 나중에서야 밝혔지만 애초에 내부회람용의 글이었다고 한다. 도대체 이 물건을 '날것'으로 언론에 공개한 것 부터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늘 훑어보니, 블로그에서 늘 '간지'를 강조하는 어느 청년좌파 선생님께서는 "닥치고 약자 편"을 외치시며 강자와 약자를 명확히 구분하라며 훈장질을 하고 계신다. 그 지당한 말씀에 짜증이 솟구치는 건, 정명훈의 '이념적 커밍아웃'에 가려 정작 예술노동자에 대한 문제의식이 증발하고 있는 지금의 구도를 우려하는 사람들까지 졸지에, 그의 단순명쾌한 이분법 속에서는 '정명훈 연대세력'이 되고 만다는 점 때문이다. 대체 지금 예술노동자에 대한 문제의식을 휘발시키는 쪽은 누구인가? 목수정을 비난하는 사람들? 틀렸다. 정명훈과 목수정의 발언을 열심히 비난하거나 열심히 옹호하는 사람들 전부다. 약자와 연대해야 한다는 글 하나로 피아가 일거에 구분되고 상황이 단박에 정리되는 줄 아는걸까. 그러나 현실은, 늘 그렇지만 그리 간지나게 흘러가지 않는 법. 단언하건대 그런 방식으로 정명훈과의 전선에 집중하면 이 싸움은 필패다.

이제와서 새삼 목수정씨의 실수를 다시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물통은 이미 엎어졌다. 피해를 최소화하는 일만 남았다는 얘기다. 그래도 이것 하나만큼은 지적해두고 싶다. 싸움을 시작하려거든 우리편 상황을 먼저 살펴야한다는 거다. 합창단 노조는 금속노조가 아니다. 노조라고는 하지만 노동자의식이 명확한 사람들도 아니다. 비유하자면 인큐베이터 속의 아기나 마찬가지다. 노조를 처음 세우려는 사람들이 극도로 조심하고 신중하게 움직이는 이유는 내부에 결속력이 생기고 역량이 어느 정도 자라나기 전의 일정 기간이 가장 위험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에 싸움을 섣불리 키우면 내부구성원들이 크게 동요하면서 조직이 순식간에 박살난다. 노조는 파업과 투쟁 속에 단련된다지만, 단련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초체력이 있어야 한다. 갓난 아기 무림고수 만든다며 철사장시키면 손가락이 없어진다는 얘기다. 이번 건의 경우, 정명훈과의 싸움으로 비화시킨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정명훈과의 싸움이 아직 결속이 약한 내부에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를 최우선으로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이 치명적인 문제다. 실제로 합창단 노조가 몸을 극도로 사리고있다는 우려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그렇다고 이 싸움이 완벽한 실패로 끝난 것은 아니다. 내가 보기엔 극도로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절망하기엔 이르다. 객관적으로, 지금은 전선이 이원화된 상태다. 합창단 노조와 사용자와의 '육상전', 그리고 문화권력자 정명훈 및 그의 지지세력과의 '공중전'. 전선이 이원화된 만큼 대응도 이원화해야 한다. 어설프게 전선을 합치다가는 같이 피박을 쓰는 수가 있다. '육상전'에는 이 방면의 선수들이 가능한 빨리, 다수가 결합해서 내부성원들의 불안을 다독이고 조금이라도 힘을 줄 수 있는 이벤트 등을 기획하면 좋겠다. 현장투쟁이나 법리적 문제들 역시 일사불란하게 정리하고 쉬운 언어로 널리 홍보할 필요가 있다. 공중전, 다시말해 음악계의 문화권력자 정명훈과의 싸움은 물론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긴 하지만 새로운 팩트가 나오지 않는 이상 오래 가기 어렵다. 목수정씨의 글에 불만이 있는 좌파들도 상당수 있는 걸로 아는데 나올 얘기들은 대충 나왔으니 논란을 더 키우기보다 이쯤에서 자제하는 게 좋을 성싶다. 정명훈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싸움을 걸어오면 단호한 입장(목수정 씨와 대체로 동일한 입장)을 피력하되 먼저 나서서 판을 키우지는 않는 게 좋다. 정명훈은 다시 깔 기회가 올테지만, 합창단 노조는 한번 붕괴되어버리면 그걸로 끝이다. 투쟁도 좋고 연대도 좋은데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고 움직였으면 좋겠다.